세계는 넓다/인도성지순례

2015.1.16 인도성지순례 10일째 룸비니

맑은물56 2015. 1. 26. 10:05

2015.1.16 인도성지순례 10일째 룸비니

권용혜 글 | 2015.01.18 20:43:11 올림 | 6,246 읽음

▲ 부처님이 태어나고 자란 카필라성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10일째 되는 날입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자라신 네팔 룸비니에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룸비니 대성 석가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 4시30분 대웅전에서 새벽 예불을 드렸습니다. 욕심과 성냄을 내려놓고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오백여 대중이 모여 법륜 스님과 대성 석가사 총무 보현 스님과 함께 부처님이 태어나신 이곳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예불을 드리니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 룸비니 대성 석가사에서의 새벽 예불

 

아직은 캄캄한 새벽, 부처님의 고향인 카필라 성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천일결사기도를 올리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편안해졌습니다. 

 


▲ 버스 안에서의 천일결사 기도

 

고요한 새벽 들길을 달리는 버스 안, 차가운 기온으로 뿌옇게 흐려진 창을 연신 닦아내는 버스 조수와 먼 순례 여정을 함께하는 운전기사님의 노고에 깊이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윽고 버스는 안개가 자욱한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성에 도착하였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캄캄한 어둠을 뚫고 모두들 헤드 랜턴을 비추며 발을 딛고 가사를 여법하게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카필라성의 서문으로 들어갔습니다. 경주의 반월성처럼 생긴 성터에 자리를 잡고 안아 순례단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기 전의 삶에 대하여 스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 카필라성 안의 태자 궁터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부처님의 고국인 카필라바스투라는 나라이고요. 또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성이기도 하고,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이 터는 태자 궁터입니다. 부처님의 집터이죠. 부처님의 고향에 오셔서 부처님이 자란 터에 지금 앉아 있습니다.  

 

정반왕은 40세가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그 기쁨이 너무 컸고 그래서 아들 이름을 싣다르타라고 지었습니다. 싣다르타는 ‘모든 것이 다 뜻대로 이루어지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히말라야 산에 사는 아시타 선인을 불러서 아이의 운명을 점치게 했습니다. 아시타 선인은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눈물을 흘립니다. 정반왕이 왜 그런가 하고 물었더니 “이 아이는 세속에 남아 있다면 왕들 중에 왕인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 수도를 하게 되면 부처를 이룰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가 혼란스럽다 보니 세상을 태평스럽게 하는 성왕이 출현하기를 기대하거나 전통 사상이 무너지고 사상이 혼란스러워지니까 모든 것을 깨달은 이 붓다의 출현을 기대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아시타 선인은 ”이 아이는 출가 사문이 되어 부처를 이룰 것입니다. 다만 내 나이가 너무 많아서 이 분의 가르침을 듣고 나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해서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납니다” 라고 말합니다. 

 


 

태자는 어느덧 자라서 12살이 되었고 왕이 되는 학습을 하기 위해 아버지를 따라 농경제에 참석했습니다. 농부가 밭갈이 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농부의 몰골이 너무 비참했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고통스러울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농부가 쟁기질을 하면서 소를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그 채찍을 맞은 소의 엉덩이에 피가 맺혔습니다. 왜 사람은 조금 편리하기 위해서 저렇게 소를 고통스럽게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쟁기가 땅을 갈자 땅 속에서 작은 벌레들이 기어 나왔습니다. 새들이 날아와서 그 벌레들을 쪼아 먹고 있었습니다. 그 때 태자는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는 죽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사는 길은 없을까?’ 이런 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농경제에 참석하지 않고 염부수 나무 아래에 앉아 소의 큰 눈망울에 고인 눈물을 생각하면서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정반왕은 농경제가 끝나고 아들을 찾았습니다. 아들이 나무 아래에서 명상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모습이 너무나 거룩해서 자기도 모르게 절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 이후로 싣다르타 태자는 즐거움은 잠시 뿐이고 늘 농경제에서 본 중생의 고통이 생각나고 그러면 즐거움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또 사색에 잠기는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반왕은 아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많은 별궁을 짓고 연회를 베풀고 했지만 아들의 얼굴은 쉽게 밝아지지 않았습니다. 

 

농경제 사건 이후 얼마 뒤에 세상에 나가서 민중들의 생활을 시찰했는데, 동쪽 문으로 나가서 늙은이를 만났고, 남쪽 문으로 나가서는 병든 이를 만났습니다. 서쪽 문으로 나가서 죽은 이를 만났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본질적인 문제를 말하기도 하지만 당시 계급 사회에서 민중의 고통을 가장 잘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싣다르타는 중생의 고통에 대해서 깊이 느끼게 되고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을 넘어서서 그 고통이 자신의 고통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출가가 인생이 뜻대로 안되어서 하는 것으로 많이들 생각하는데 경전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중생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출가를 했다는 그 원력이 경전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출가를 사회 도피처럼 생각하는 이 이미지를 우리가 바꿔야 합니다. 출가는 큰 원을 세워 세상을 뛰어넘는 행위입니다. 

 


 

북쪽 문으로 나갔을 때 수행자를 만났습니다. 거기에 한 수행자가 조용히 앉아 있는데 몰골은 늙고 병든 사람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습니다. 입고 입는 옷은 초라하고 몰골은 늙었지만 그의 품위는 너무나 당당했습니다. 그래서 싣다르타는 그 출가사문을 만나면서 모든 고뇌를 벗어날 새로운 길을 발견한 듯 했습니다. 즉 ‘껍데기의 모습은 거지와 똑같은데 인간이 어떻게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저렇게 품위있게 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출가를 결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반왕은 혹시 자기가 오래 왕을 해서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해 그런가 해서 한 지역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태자가 그 지역에 갔을 때 역시 노예 계급은 헐떡 거리며 일을 하고 있고 소도 숨을 헐떡거리며 쟁기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을 잘 다스린다는 것은 소에게도 고통이고 노예에게도 고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소의 고삐를 풀어서 자연으로 돌려보내라, 그리고 노예 계급을 해방시켜라” 이렇게 명령을 내립니다. 이건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인류사에서 주인이 하인을 해방시킨 첫 번째 시도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아무리 잘 통치한다고 해도 그것은 계급 사회를 유지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이것은 싣다르타가 더욱더 세상에서는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없다고 느낀 계기가 돕니다. 즉 세상의 평화와 행복이라는 것이 어떤 특정 계층의 평화와 행복이지 또 다른 계층에는 큰 고통이고 속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는 불행해야 하는 그런 모순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더 이상 진리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출가를 굳건히 결심하고 부모에게 “늙고 병들고 죽지 않는 길이 있다면 나에게 알려 주십시오. 그러나 누구도 저에게 그 길에 대해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그 길을 찾아가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어머니의 눈물도 싣다르타의 출가를 말릴 수 없었습니다. 

 

출가하는 그날 밤 새벽에 일어나서 아기가 마음에 걸려 문을 살짝 열어보니 부인이 아기를 품에 안고 자고 있었어요. 부인이 깰까 해서 그만두고 나와서 동쪽 문을 뛰어넘었다고 합니다. 왜 성을 뛰어넘었다고 말할까요? 우리 모두는 왕이 되는 것이 꿈이예요. 그런데 부처님은 왕의 지위가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왕궁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그래서 출가 수행자는 천하를 다 준다고 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 자세여야 합니다. 그 때 출가할 때 ‘내가 깨달아서 일체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할 수 있는 그 좋은 법을 얻기 전까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이런 대결정심을 내고 출가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이곳에서 사셨던 29년 동안의 삶입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가 우리와는 더 가깝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붓다는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지만 젊은 시절의 붓다는 우리와 똑같이 고뇌하고 헤매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청년 싣다르타의 고뇌를 느껴보는 것은 소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대중과 함께 경전독송을 하고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다시한번 순례단에게  “오늘을 사는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지는 못하더라도 좀 검소하게 살아보자”고 하셨습니다. “적게 먹고, 옷을 검소하게 입고, 큰 집으로 자꾸 이사 가려고 하지 말고 좀 검소하게 살아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인류가 함께 행복해지는 것을 추구하자”고 덧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슬이 내린 새벽 카필라성에 앉아 청아한 무변심 법사님의 선창에 따라서 ‘싣다르타의 출가’ 노래를 따라 부르니 한국으로 돌아가면 헐떡거림과 욕심을 좀 내려놓고 더불어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 무변심 법사님이 부르는 ‘싣다르타의 출가’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며

 

그리고 부처님이 유성출가를 하셨다는 동문으로 가 보았습니다. 원래는 이곳에서 ‘출가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데 이번에는 순례객이 너무 많아 그러지 못하고 잠시 둘러보기만 했습니다. 

 


▲ 부처님이 유성출가를 했다는 카필라성의 동문

 

순례단 전체는 부처님처럼 동문을 뛰어넘지는 못하고, 북문 쪽으로 난 작은 개구멍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소년 싣다르타가 걸었을 논밭이 보이는 시골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탑터가 나타났는데 정반왕과 마야부인을 기린 탑이거나 싣다르타가 북문에서 수행자를 만난 것을 기념한 탑일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탑돌이를 하고 다시 돌아나왔습니다. 

 


 

카필라성 주위 마을은 2600여년 전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곳 사람들은 헐벗어 있었고 지나가는 순례객들을 향해 구걸의 눈빛을 간절히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례지인 쿠단으로 향했습니다. 쿠단은 성도 후 6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부처님을 정반왕이 마중나온 곳으로 이를 기념한 탑이 있는 성지입니다. 스님께서는 성도 후 사위성에 부처님이 오셨다는 얘기를 들은 정반왕이 부처님께 사신을 보내 왕궁으로 초청하였지만 사신으로 간 사람들 모두 부처님을 친견 후 깨달음을 얻어 출가해 버려서 함흥차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 주셨습니다.

 


▲ 쿠단

 

그리고 석가족이 모두 깨달음을 얻었는데 유독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가 정반왕이었다고 합니다. 정반왕에게 부처님은 오직 아들로만 보였기 때문에 그 집착심으로 인해 가장 가까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정반왕의 얘기를 듣고 나니 아무리 부처님과 가까워도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면 깨달음의 기회도 놓치게 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쿠단에 세워진 탑에는 옛날 당시 문양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순례객들은 문양을 직접 보고 만져보며 옛 숨결을 그대로 느껴보았습니다. 

 


 

다시 대성 석가사로 돌아와서 점심 공양을 맛있게 먹고 룸비니로 걸어갔습니다. 울창한 숲길을 지나 긴 수로를 따라 1km 걸어가니 드디어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에 도착했습니다. 어여쁜 꽃이 피어있고, 아름드리 보리수가 있는 아름다운 이곳에서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고, 스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순례단을 위해 발원을 해주셨습니다. 

 


▲ 룸비니 

 

그리고 부처님의 전생담을 기록한 본생경과 부처님의 탄생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룸비니 동산입니다. 아까 전에 갔던 카필라성과는 28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아이를 낳기 위해 아침 일찍 카필라성을 출발하여 마야 부인의 고향인 데바다하로 가다가 카필라성과 데바다하의 중간 쯤인 이곳에서 산기를 느끼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는 태어날 때도 길에서, 도를 이룬 것도 길에서, 설법도 길에서, 돌아가시는 것도 길에서,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전 생애가 ‘도(道)’와 관계가 깊습니다. (웃음)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 즉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과거 수행 이야기가 담긴 자아카타, 한문으로는 본생담이라는 경전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무려 547편이 남아 있습니다. 내용 전체를 대강 보면 부처님이 처음 발원해서 보디사트바가 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보살로 살아간 이야기이고, 마지막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이 과거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옛날에 선혜라는 이름의 한 동자로 태어나셨습니다. 고귀한 바라문 집안에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20대 초반에 모든 재산을 물려 받았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부모님이 지금의 재산을 모으기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을 했는데 돌아가시면서 한푼도 못가져 가는 것을 보고 진정으로 자기 것이 아닌 재산과 명예와 지위에 한평생을 바친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를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 많은 재산을 왕에게 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숲속으로 가서 수행자가 됩니다. 

 


 

스승을 찾아 나섰다가 오백 바라문이 모여서 진리를 논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거기서 오백 바라문이 묻는 질문에는 선혜 동자가 다 대답을 하는데, 선혜 동자가 묻는 질문에는 오백 바라문이 아무도 대답을 못했어요. 그래서 오백 바라문 중에 한 사람이 “여기서 당신의 스승이 될 사람은 없소. 지금 이 세상에는 연등부처님이 출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이라면 당신의 스승이 될 수도 있소” 라고 말하자, 선혜 동자는 연등부처님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연등부처님 근방에는 사람들이 구름때처럼 모여서 곁에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친견을 못하고 교외로 나가니까 사람들이 길을 닦고 있었어요. 부처님이 이 길로 지나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선혜 동자도 길을 닦기로 했습니다. 신통력이 있었기 때문에 신통력으로 길을 닦을 수도 있었는데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몸으로 길을 닦았습니다. 그런데 연등부처님과 대중이 오는데 길을 다 못 닦았어요. 그래서 자기 옷을 벗어서 깔았어요. 그래도 모자라서 자기 몸을 뉘었어요. 그래도 모자라서 자기 머리를 풀어서 던졌어요. 그러면서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과 상가 대중이 저를 밟고 지나가십시오” 이렇게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신심이 깊구나. 이 인연 공덕으로 다음 생에 부처를 이루리라” 하셨어요. 

 

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보디사트바가 되어서 어떤 때는 원숭이로, 어떤 때는 코끼리로 태어나서 행하는 수많은 보살행이 나옵니다. 그 끝부분에 해당된다고 생각되어지는 얘기가 도솔천의 천주인 호명 보살이 된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어지러우니까 세상 사람들이 붓다의 출현을 갈구하는데 그 붓다가 되실 예정자가 호명보살이예요. 그래서 호명보살이 저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며 누구를 아버지와 어머니로 할 것인지 살펴서 마야부인을 어머니로 정반왕을 아버지로 선택하셔서 이 세상에 몸을 나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상아가 여섯인 흰 코끼리가 되어 마야 부인의 태중에 드는 모습이죠. 이런 전생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듣고, 또 마야부인의 몸에서 태어난 이야기, 태어나서 동서남북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고 첫 일성을 하신 이야기, 이것은 육도 윤회를 벗어나서 해탈하리란 것과 가장 존귀한 존재로서 중생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의미란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출현하신 이유를 들으니 참으로 부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부처님의 탄생의 과정이 쓰여져 있는 경전을 독송한 후 명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이 부처님의 탄생지라는 아쇼카 석주와 부처님의 발자국과 부처님 탄생 설화를 새겨놓은 건물 안 유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 

 

유적지를 둘러보는 동안, 조별로 스님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무려 52조나 되다 보니 사진 촬영을 하는 데만 1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스님과 함께 사진 한 장을 남길 수 있다며 모두들 기뻐하면서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편안하고 안온한 룸비니 동산을 뒤로하고 다음 순례지인 로히니 강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로히니 강은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와 마야부인의 고향인 꼴리족의 데바다하 사이를 흐르는 강입니다. 어느해 가뭄이 심해 석가족과 부처님의 외가족인 꼴리족이 서로 농사에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해 싸움이 시작되어 급기야는 로히니 강을 사이에 두고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갔다고 합니다. 이를 부처님께서 중재하셨던 일화가 있는 곳이여서 스님께서는 지나가는 길에 그 일화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 로히니 강

 

“로히니 강 분쟁 사건은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부처님이 이를 말린 사건입니다. 석가족과 꼴리족 양쪽 종족의 논밭이 가뭄이 들어서 타들어 갔어요. 이렇게 가다가는 농사를 다 망치게 되니까 한쪽만이라도 곡식을 살리자고 해서 서로 물을 가져가려고 입씨름을 하게 된 거예요. 입씨름을 하다가 결국 주먹 싸움이 되고 주먹 싸움이 서로 돌멩이를 집어 던지는 패싸움이 된 겁니다. 농민들의 분쟁이 결국 군대가 개입하면서 전쟁이 일어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의 살상을 막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분쟁의 현장에 오십니다. 

 

양쪽 지도자를 불러놓고 물어봅니다. “물이 귀합니까? 사람의 피가 귀합니까?” 그러자 양쪽 지도자가 “어떻게 귀한 피를 하찮은 물에 비유합니까” 대답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그 하찮은 물을 위해서 그 소중한 피를 흘리려고 하지 않소” 라고 얘기합니다. 그 때 그들은 감정에 휩싸여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격화된 감정이 누그러지고 양 종족은 협력을 해서 수로를 새로 개발해 가뭄의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로히니 강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경전을 읽으면서 강이 얼마나 좁으면 서로 돌멩이를 던지며 싸우나 했는데, 정말 돌멩이 갖고 싸울만한 거리죠?

 

이렇게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두 부족은 전쟁을 멈추고 오히려 수로를 확충하는 쪽으로 힘을 모음으로 해서 더 발전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미움 있는 곳에서 미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미워할 일 없는 곳에서 미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미워할만한 일이 있는 곳에서 우리가 미워하지 않을 때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겠죠. 우리 남북 간에도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불자들이라면 미워할 만한 상황에서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반도에서도 미워하는 증오의 감정을 종식시키는데 우리 불자들이 좀 더 앞장선다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가져오는데 더 기여를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로히니강에 관한 경전을 읽었습니다. 하루 빨리 남북 대결이 청산되어 통일이 이루어져 남북한 국민들의 고통이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 버스 안에서 로히니 강에 관련된 일화가 담긴 경전 독송

 

다음은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랑그람을 참배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자 진신사리는 8등분이 되어 각 나라에 모셔졌는데 그 중 부처님의 외가 쪽인 꼴리족이 사리를 가져와 세운 이 탑은 아쇼카 왕 때도 헐리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원형이 잘 보존된 귀한 진신사리탑인데, 스님께서는 “이 곳은 성지 순례객 만 명 중에 한 명이 겨우 왔다 가는 곳입니다. 이곳에 온 것에 대해서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하며 이곳에 참배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인연인지 알려주시며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이곳은 라마 마을의 꼴리족이 부처님의 사리 일부를 가져가서 탑을 쌓은 곳입니다. 이곳이 더 소중한 이유는 아쇼카 왕이 사리탑을 헐어서 사리를 꺼내었는데 이곳만은 헐지를 못했다고 해요. 그것은 여기를 지키는 용왕이 ”당신이 나 보다 사리를 더 잘 지킬 수 있으면 모셔가라“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여기 주위가 빙 돌아가면서 강입니다. 호수 속에 탑을 쌓아놓은 것처럼 섬과 같이 딱 형성되어 있어요. 묘합니다. 이 탑을 헐려고 할 때 큰 뱀이 나타나지 않았겠느냐 싶어요. 인도에서는 뱀을 용왕이라고 해서 성스럽게 생각하거든요. 

 


▲ 랑그람 진신사리탑

 

그 이후에도 동네 사람들의 얘기에 의하면 이 탑을 도굴하려고 하는 사람이 탑에 손을 대면 동네 사람들에 얘기에 의하면 천둥이 치거나 사람이 즉사하거나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해요. 그래서 여기는 손을 대면 안된다는 소문이 나서 이 탑은 도굴도 하지 못하고 심지어 발굴도 하지 못했다고 해요. 얼마 전에 발굴 했는데, 탑 자체에도 손을 안 대고 변두리만 파서 탑의 형이 어떻게 생겼는지만 확인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다른 탑은 다 발굴을 해서 사리를 꺼내었는데, 여기는 아직 발굴이 안되었으니 만약 발굴이 된다면 사리 용기에 부처님 몸의 유골 중에 8분의 1이 가득히 담겨 있겠죠. 그래서 8개의 사리탑 중에서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랑그람 진신사리탑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성지순례객들도 여기 와서 참배를 하고 가야 하는데, 이런 사리탑이 있는지도 모르는 분이 많아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여기 참배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한국 불교인들을 대표해서 왔다고 생각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불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순례단은 진신사리탑을 빙 둘러싸고 정성스럽게 마련한 공양을 올리고 예불을 드리고, 108배 정진을 하였습니다. 

 


 

이곳은 아이들이 거칠고 위험한 지역이여서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야 해서 108배 정진을 하는 동안 몇 분씩 자신이 정진하던 자리 앞으로 나와 탑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특히 랑그람 사리탑 앞에서는 이번 인도 성지순례 스탭들과 법사단도 스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 인도성지순례 스탭들과 함께

 


▲ 법사단과 함께

 


▲ 그룹별로 사진 촬영

 

오늘 마지막 순례 일정을 마치고 대성 석가사로 돌아왔습니다. 석가사에서 준비한 맛있는 공양을 도반들과 함께 나눠 먹으며 얼굴에 웃음꽃이 핍니다.  

 

저녁 식사 후에는 대웅전에 모여 기쁜 마음으로 저녁예불을 장엄하게 드렸습니다. 예불 후에는 바로 이어서 스님의 즉문즉설 시간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동안 성지순례를 하며 궁금한 점들이 많이 있었을텐데 스님께 직접 질문해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질문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하니 곳곳에서 쉴새 없이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다양한 질문에 대해 스님께서는 자상하게 대답해 주셨고, 또 성지순례를 하며 잠자리를 비롯해 여러 가지가 불편한데 처음 성지순례를 할 때의 경험담을 들려주시면서 순례단을 다시한번 격려해 주셨습닌다. 

 


▲ 대성 석가사 대웅전에서 즉문즉설

 

“한꺼번에 많이 오다 보니까 불편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조사를 해봅시다. 생각보다 고생이 심하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겁을 되게 주더니 생각보다는 낫네 이런 분 손들어 보세요. 오리엔테이션 한 수준 그대로다 이런 사람 손들어 보세요. 제가 입재식 할 때 입 나온다고 얘기했죠? 그래서 성지순례도 하지만 마음 공부도 좀 하라고 했죠? 그동안 입이 좀 나오신 분 손들어 보세요. 다시 들어갔어요? 아직도 입이 나와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아직도 입이 잘 안들어가는 사람은 저한테 알려주세요. 제가 가위로 잘라 드릴게요. (웃음) 

 


 

사실은 남자들도 군대 다녀온 이후로 이런 생활은 처음 해보셨죠? 군대 말고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런 생활을 할 기회가 없을 거예요. 지금 저희도 대대 병력이 아마 넘을 거예요. 그러니 남자 분들은 군대에 다시 온 기분일 것이고, 여자 분들은 이런 경험이 아마 처음일 거예요. 수학 여행을 가도 이렇게는 안하잖아요. (웃음) 

 

여러분들이 너무 편하게 살아서 이런 생활을 한번 해봐야 되는데... 제가 룸비니에 처음 왔을 때는 네팔 절에서 잤어요. 바닥이 시멘트였는데 주지 스님이 동네에 가서 멍석을 빌려와서 그것을 깔고 그 위에 잤어요. 처음에 1차, 2차, 3차 성지순례는 굉장했습니다. 바이샬리에서도 게스트하우스에서 자는데 침대 한개에 두명이 올라가서 자다가 침대가 무너졌어요. 내일 가는 기원정사에서도 그 때는 스리랑카 게스트하우스 하나 정도 있었거든요. 거기서는 바깥 처마 밑에서 잔 적도 있었어요. 자고 일어나니까 침낭 밖에는 물이 흥건하더라구요. 그래도 우리는 침낭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남방 불교 사람들은 담요 한 장 덮고 그냥 자요. 따뜻한 곳에 사니까 우리보다 더 추울텐데 말이죠. 

 

그래서 기준이 무엇이냐가 중요해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불편하다고 해도 저는 처음 순례왔을 때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이만하면 괜찮다’, ‘그래도 옛날보다는 낫다’ 이런 생각을 하고 다니는데, 여러분들은 많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숙소가 좀 불편하고, 둘째는 대중이 이렇게 많이 모여 다니는 것이 불편하고, 셋째 항상 화장실이 급하죠. 일정이 이렇게 빡빡한 이유는 제가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하다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일정을 다른 성지순례의 두 배인 17일이나 잡고 왔는데도 늘 시간에 쫓기는데, 사실은 다른 순례객들보다 하루에 3~4시간을 더 많이 써요. 대부분 아침 먹고 8시쯤 출발하는데 우리는 새벽3시에 출발 하잖아요. (웃음) 

 


 

저 같은 특수한 경우는 자주 오지만 여러분들은 두 번 올 일은 아니니까 한번 온 김에 최대한 많이 보여드리려고 해요. 언제 랑그람을 다시 가볼 것이며, 설산 이름만 들었지 쳐다보기라도 한번 해봐야 할 것 아니예요? 지금 프로그램이 조금 힘들기는 해도 앞에 다녀온 사람보다는 훨씬 수월한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은 다 시행착오를 거듭해서 개선한 결과이고, 초기에는 욕심만 내어서 시행착오를 많이 했거든요. 전기밥솥 들고 오는데까지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처음에는 가스 버너 들고 다녔거든요. 아무튼 여러분들이 힘든 것은 맞지만 그래도 상당히 개선된 것입니다. 그래도 생각보다 힘들다고 느끼신 분은 내년에 올려고 하는 사람들을 좀 말리세요. (웃음) 

 

아무튼 이곳에 오기가 정말 어렵기 때문에 조금 쫓기더라도 열심히 다녀야 돼요. 그래도 여러분들이 자발적으로 고생을 감수해 주시니까 밝은 얼굴로 다닐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스님의 격려를 듣고 나니 다시 기운이 났습니다. 스님의 자상한 배려 속에서 고생은 좀 하지만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는 시간임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즉문즉설까지 모두 마치고 나니 밤 10시가 다 되었습니다. 힘을 불어넣어 주신 스님께 감사한 마음을 느끼며 오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잠자리에 듭니다. 

 

내일은 새벽 2시20분에 기상해서 3시에 출발하는 일정입니다. 탄센으로 가서 해발 2천미터의 산 위에 올라 저 멀리 8천미터 높이의 히말라야 산 봉우리들과 일출 모습을 보고 내려올 예정입니다. 오후에는 다시 국경을 넘어 인도로 와서 삐쁘라와 진신사리탑을 참배하고 쉬라바스티로 갑니다. 한국에 있는 도반들도 성지순례의 감동을 함께 나누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