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넓다/인도성지순례

2015.1.15 인도성지순례 9일째 쿠시나가라

맑은물56 2015. 1. 26. 10:09

2015.1.15 인도성지순례 9일째 쿠시나가라

선선덕 글 | 2015.01.17 20:53:59 올림 | 6,063 읽음

 ▲ 쿠시나가라 열반당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9일째 되는 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를 출발해서 오시다가 춘다의 공양을 받으시고 그 음식을 드시고 큰 병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카쿠타 강에서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시고 이곳 쿠시나가라 사라나무 숲에 이르러서 그날 밤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오늘은 그 여정을 따라 어제 왔던 길을 17km 정도 다시 돌아가서 춘다의 공양터를 참배하고, 또 부처님께서 마지막 목욕을 하셨다는 카쿠타 강을 참배한 후 쿠시나가라로 다시 와서 열반당을 참배하는 일정입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국경을 통과하여 네팔로 넘어갑니다. 

 

새벽 5시, 성지순례단은 쿠시나가라의 곳곳에 흩어진 숙소에서 각 숙소별로 송수신기로 새벽 예불을 올리면서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 

 


▲ 쿠시나가라 숙소에서 새벽 예불과 천일결사 정진

 

예불을 마치자마자 각자의 짐을 버스에 싣고, 어제 쿠시나가라에 늦게 도착하여 가보지 못한 ‘춘다의 공양터’로 출발했습니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열반 전 마지막으로 공양을 드신 곳입니다. 밖은 안개가 자욱하여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공기는 축축하였으나, 1월이라 많이 추울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인도의 1월은 얼어죽을 정도는 아니구나' 하며 버스에 올랐습니다. 

 

‘춘다의 공양터’로 가는 길에 스님께서는, 이번 성지순례 참가자 중에 가을 불대생이 많은 관계로 부처님의 일생 중 열반 부분은 공부하지 못한 이가 다수 있음을 아시고, 버스 안에서 특별히 자세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아난다 존자가 시냇가에 가보지도 않고 물이 흐려 부처님이 드실 수 없다고 만류한 대목을 이야기 해주시면서,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면 부처님 말씀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법문해 주셨습니다. 

 

모두들 이른 새벽 일정이 계속 되다보니 잠에 들었는지 조용하자 스님께서는 “누가 스님 법문은 시작하면 졸린다고 수면제라고 하던데, 내 법문이 얼마나 하찮으면 수면제로 써요”라고 농담을 하셔서 모두들 웃으며 덜 깬 잠을 깨고,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스님의 법문을 계속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를 출발해서 이곳 쿠시나가라로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이 왜 이곳으로 오셨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부처님도 돌아가실 때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겠느냐며, 카필라바스투로 돌아가기 위해 이 길로 지나가시다가 열반에 드셨다고 설명하는 분도 있는데 아무튼 이곳 쿠시나가라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바야샬리의 사람들을 충분히 위로해드리고 간타키 강을 건너서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부처님이 아난다 존자에게 하신 법문을 옛날 이야기를 해주시듯 술술 풀어 주시며 춘다의 공양이 갖는 의미를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춘다의 공양을 드시고 몸이 몹시 아프셨는데, 아마도 사람들이 춘다가 올린 공양 때문에 부처님이 병이 나신 것이라고 생각하여, 가난하면 차라리 공양을 올리지 말 것이지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다 춘다 때문이라고 힐책할 것과, 춘다가 자책하고 있을 것을 염려하셔서 부처님께서 춘다에게 해준 이야기를, 스님께서 들려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춘다가 걱정하고 있으니까 ”네가 올린 공양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공양이다“ 라고 위로를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춘다의 공양은 기독교의 유다처럼 나쁘게 비칠 수도 있었는데, 부처님의 법문을 통해서 여래에게 올린 마지막 공양이 되어서, 춘다의 공양은 불교사에 길이 길이 칭송받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춘다의 공양터까지 참배를 하러 가는 겁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위대함입니다. 

 

어떤 사람은 음식에 독성이 든 줄 미리 알고 안 먹는 사람도 있고, 독성 있는 음식을 먹고도 끄떡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독성이 든 음식을 먹고 토해버리고 괜찮은 사람도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그 음식을 먹고 죽으면서 그 음식을 제공한 자를 위로하고 칭찬한 자는 역사 상에서 없었습니다. 그만큼 춘다의 공양은 부처님을 위대하게 하셨습니다. 육신에 집착하지 않고 공양 올린 자의 마음을 살피시는 부처의 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은 기독교에서 예수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라고 한 예수님의 사랑과 비견되는 서로 다른 모습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도 공양 올린 자의 아픔을 살피셔서 위로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이어서 카쿳타강에서 목욕을 하신 부처님의 행적을 이야기하시면서 “절반이 졸고 있네! 안 잔다고 하더니” 하시며, 9일째로 접어들면서 마음과는 달리 지친 육신으로 피곤해하는 순례객들에게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밤에는 누워 자고 낮에는 앉아서 자고. 한국 가서 새벽 3시에 일어났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라고 하셔서, 저희는 스님은 어떻게 이렇게 잘 아시는지 겸연쩍어 하면서도 덕분에 한참을 웃었습니다.

 


 

500여명의 순례객이 참여한 이번 성지순례에는 1호차부터 13호차까지 모든 이가 스님의 타신 6호차에 맞춰 수신기를 조정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서, 법륜스님은 이어폰을 타고 오신다는 유수스님의 말씀대로 한쪽 귀를 종긋 세우고 법문을 들으며, 웃기도 하고 감복하기도 하며 부지런히 스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스님 법문을 들으며 도착한 춘다의 공양터에는 안개가 자욱하였고, 500여명의 발소리와 목탁소리에 맞춰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는 낯선 광경에 주변 새들과 벌레들, 동네 개들이 일제히 잠을 깨었는지 유난히 크게 울어대는 것 같았습니다. 

 


▲ 춘다의 공양터에 세워진 탑

 

예불이 끝나자 스님께서는 대중을 향해 뒤로 돌아앉으셔서, 안개가 자욱한 춘다의 공양터에서 새벽 예불을 잘 마쳤다고 말씀하시면서 춘다의 공양과 관련한 경전 독송을 함께 하자고 하셨습니다. 

 


 

경전 독송을 마치고 그 당시를 떠올리며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명상까지 마치고 이를 지켜보던 힌두의 바라문에게도 보시와 공양물로 올렸던 사탕을 선물로 나누어 주셨습니다. 아침부터 찾아온 순례객들의 방문에 처음에는 상당히 까칠하게 굴던 힌두의 바라문도, 스님의 마음 쓰심에 기분이 누그러졌는지 다 마치고 돌아갈 때에는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이곳 파바마을 아이들이 무척 사납고 거친데, 우리가 사탕을 나눠주면 통제가 안 되어서 이곳 힌두 바라문에게 사탕을 공평하게 나눠주라고 부탁했어요” 라며, 아이들에게 사탕을 최대한 공평하게 나눠주려고 세심히 살피셨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한 곳은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신 카쿳타강이었습니다. 강물이 공기보다 따뜻한지 물 위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강가로 내려가 손을 씻으시며 순례객들에게 “아픈 사람이 이 강물을 마시면 낫는다”고 하시자 어떤 거사님께서 한 움큼 물을 떠 마시는 것을 보시고 “강물 마시고 설사해서 열반당 가서 열반하세요. 부처님도 강물 드시고 나서 열반하셨어요” 하시면서 “복잡한 세상 오래 살아서 뭐하노, 이런데서 죽으면 바로 그슬러서 강물에 뿌려주고 좋지”하고 농담을 하시면서 순례객들을 즐겁게 해주셨습니다. 또 스님께서도 “나도 요즘 몸이 아파서 이 물을 좀 먹어야 겠어요” 하면서 물을 한모금 축이셨습니다. 

 


▲ 카쿳타 강

 

카쿳타 강에 손을 담가보니 물이 그리 차지 않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마지막 목욕을 하신 부처님을 생각하며 강을 향해 반야심경을 함께 외우고 돌아서서 가려는데 스님께서 한 말씀하셨습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를 그렇게 느리게 힘없이 하면 안 돼요.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건너가세, 저 언덕에 도달하여 깨달음을 이루세’란 뜻인데, 저 언덕으로 가기 싫다는 거예요?” 스님 말씀에 새롭게 안 이들과 다시 한번 깨우친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뜻을 모르니 어떻게 잘 하겠느냐” 라고 하셔서 모두들 스님 말씀에 웃고 말았습니다. 

 


▲ 카쿳타 강을 바라보며 반야심경 독송을 해보았습니다. 

 

스님 건강을 걱정하는 순례객들과는 달리, 스님께서 지친 순례객들을 웃음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강행군의 피로를 덜어주시니 한결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동그란 아침해가 오히려 둥근 보름달처럼 보일 정도로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500여명은 열반당으로 가기 위해 다시 버스를 탔습니다. 10시를 조금 지나 열반당에 도착한 순례객은 예불 준비 후 자리에 앉아, 스님께서 해주시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들으며 부처님의 전 생애에 대해 반추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열반당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이 쿠시나가라 열반당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600 여년전 저 히말라야 산기슭 카필라바스투의 룸비니에서 태어나셔서, 카필라성에서 29년의 생활을 하시다가 29살에 출가하셔서 쿠시나가라를 지나서 바이샬리를 지나서 왕사성 라자그라하에서, 두 분의 스승 아라라카라마와 웃타카 라마 푸트라를 모시고 수행정진을 하셨습니다. 스승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것이 완전한 해탈의 경지가 아님을 아시고, 스승의 곁을 떠나 다섯 도반들과 함께 가야 근교의 전정각산 아래에서 6년간 용맹 정진을 하셨습니다. 6년 간의 고행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자신의 수행생활을 되돌아보니 세속에 있을 때는 욕망을 따라 쾌락을 쫓았고, 출가해서는 욕망을 억압하는 고행을 행했습니다. 둘은 정반대이지만 사실은 욕구에 따른 작용 반작용일 뿐임을 아시고, 그 둘을 버리고 욕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중도를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전정각산을 내려와서 니련선하에서 목욕을 하시고 수자타의 공양을 받으시고,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목동이 준 길상초를 깔고 앉으셔서 대결정심을 일으켜서 마지막 정진에 들어가셨습니다. 

 


 

49일 간의 용맹정진 끝에 12월8일 마침내 동녘 샛별이 뜨는 것을 보는 순간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49일 동안 깨달음의 법열을 만끽하시다가 이 좋은 법을 나눠가질 사람을 생각했는데, 이미 두 스승은 돌아가셨고 자신의 다섯 도반을 생각하면서 바라나시 근교의 사르나트로 가셔서 처음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최초로 다섯 비구가 제자가 되고 야사 등 55인을 교화하시고  60인을 앞에 두고 전법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루벨라촌으로 돌아오셔서 가섭 삼형제 일천인을 교화하셔서 가야산에서 탐진치 삼독의 불을 끄라는 설법을 하시고 천명의 대중을 이끌고 왕사성에 이르렀습니다. 

 

왕사성 밖 제띠안에서 빔비사라왕을 만나 교화하고 빔비사라왕의 기증으로 최초의 절 죽림정사를 창건하셨습니다. 그곳에 계실 때 산자야의 제자였던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가 부처님께 귀의를 했고, 마하가섭 존자도 부처님께 귀의를 했습니다. 성도 3년 째 수닷타장자의 초청으로 코살라국의 수도인 사위성으로 가셔서 기원정사를 창건하시고 그곳에서 많은 교화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 후 6년째 되는 해에 정반왕의 초청을 받아 카필라성으로 가셔서 자신의 친족들을 교화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민중들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서 교화 설법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45년을 행한 후에 세속 나이로 팔십, 성도 후 45년째 되는 해에 부처님께서는 왕사성 영축산에서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일곱가지 법을 설하시고, 죽림정사에서 상가가 멸하지 않는 일곱가지 법을 설하시고, 암라파티카 동산에서 계정혜 삼학을 설하시고, 나란다에서 머무시고 파탈리푸트라에서 미래에 이곳은 큰 도시가 될 것이니 그 때 세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물의 재앙, 불의 재앙 , 사람의 재앙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강가강을 건너서 바이샬리로 오셨고 암나팔리의 공양을 받으시고 암나팔리의 망고원을 기증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에서 안거를 보냈습니다. 마지막 안거를 했던 마을이 밸루바나라고 하는 죽림촌이었습니다. 그해 흉년이 심해서 걸식을 할 수가 없어서 대중 오백명을 다 흩어서 한 마을에 한명씩 머무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과 아난존자는 밸루바나에 머무셨습니다. 얼마나 그해 가뭄이 심했냐면 부처님이 걸식을 가셨는데 말먹이 밀기울을 받아서 드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 안거 기간동안 부처님은 많이 편찮으셔서 거의 돌아가실 정도였는데, 안거 기간이라 흩어져 있는 대중의 불편을 생각하셔서 유수행이라고 수명을 연장하는 수행을 하셔서 그 위기를 극복하셨습니다. 

 

안거가 끝나자 부처님은 바이샬리의 중각 강당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해서 앞으로 3개월 후에 열반에 들리라고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를 법문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정혜 삼학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바이샬리를 떠나셔서 간타키 강을 건너 파바 마을에 이르러 춘다의 공양을 받으시고 큰 병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나 카쿳타 강가에서 마지막 목욕을 하시고 춘다를 위로하는 좋은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마치 낡은 수레가 삐그덕 삐그덕 겨우 굴러가듯이 부처님의 육신은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부처님은 사자처럼 당당하게 대중의 앞에 서서 쿠시나가라로 오셨습니다. 이곳 사라나무 숲에 이르셔서 가사를 접어서 바닥에 깔고 그곳에 누우셨습니다.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머리는 북쪽으로 발은 남쪽으로 해서 서쪽을 향해서 누우셨습니다. 이것이 열반상입니다. 

 

그 때 아난다는 너무 슬퍼하면서 물었습니다. “왜 외로운 이곳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저 왕사성이라든지 사위성이라든지 코삼비라든지 바라나시라든지 바이샬리라든지 부처님의 제자도 많고 재가신자도 많은 그런 곳에서 열반에 드시지 왜 이렇게 외로운 곳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하니까 부처님께서 “아난다여, 그런 걱정을 하지 마라. 비록 이곳이 지금은 외로운 곳이지만 미래에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 되리라” 하셨어요. 아난다가 다시 “그렇다면 왕족들이 있는 성 안에서 열반에 드시지 왜 이 숲속에서 열반에 드십니까” 하니 “숲속에서 열반에 들어야 누구든지 여래를 친견하고 싶은 사람은 다 친견할 수 있다” 하셨어요. 만약에 궁중에서 열반에 드신다면 왕족이라든지 바라문만 친견할 수 있죠. 천민들은 들어올 수가 없잖아요. 아무런 울타리가 없는 이곳 숲속에서 열반에 드심으로 해서 누구든지 신분에 고하를 막론하고 심지어 짐승들이라 하더라도 여래를 친견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아난다는 위대한 스승 붓다께서 열반에 든다고 하니 많이 슬펐습니다. 그래서 슬픔을 이기지 못할 때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이렇게 위로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슬퍼하지 마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이다. 육신은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 있으리라” 하는 유명한 마지막 유언을 하셨습니다. 

 

그 때 아난다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를 생각하니까 여러 걱정이 되었어요. 우리는 늘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사는데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하니 부처님께서 “여래가 열반에 든 뒤에는 4성지를 생각하라” 하셨어요. 여기가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인데 태어나실 때의 정황은 이러하다, 여기가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곳인데 깨달음의 내용은 이러하다, 여기가 부처님이 처음 설법한 곳인데 설법의 내용은 이러하다, 여기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곳인데 열반의 모습은 이러하다, 이것을 잊지 않으면 우리는 바른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순례를 하는 것도 이 유훈에 따른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비록 흔적이 없고 부서진 벽돌과 소똥만 널려 있는 곳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순례하는 이곳들은 성스러운 곳입니다. 성스러움은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들 중에 의심이 있거든 나에게 물어라.” 하고 세 번씩이나 물었지만 아무도 질문이 없었어요. 그러자 아난 존자는 “여래의 법은 잘 설해져 있고 우리들은 이미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안온하게 열반에 드소서!” 라고 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나는 51년 전에 저 카필라성을 떠나서 하루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했다. 그러니 너희들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라고 하셨어요. 이것이 부처님의 맨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욕심이 많아서 수행도 바짝 해서 그게 안되면 나는 수행과 인연이 없나 보다 하면서 내팽겨쳐버리는 경우가 많잖아요. 다생겁래로 지은 업인데 그것을 어떻게 한순간에 없애려고 해요? 그래서 정진은 한발 한발 걸어가듯이 꾸준하게 해나가야 합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열반당에 들어가는데 오백명이 저 안에 한번 다 들어가보는 거예요. 아마 역사 기록일 거예요. 꽉 찬 상태에서 저 열반당 안에서 예불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을 찬탄하는 발원문을 함께 읽고 축원하고 마치겠습니다.” 

 

500 대중은 열반당 안에 빼곡히 들어가 예불공양과 ‘석가모니불’ 정근을 올렸고 열반당의 높은 돔천장 안은 목탁소리와 정근소리로 가득 차 울려퍼져 마치 부처님의 열반하신 날처럼 장엄하게 느껴졌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눈물을 훌쩍이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예불 공양을 마치고 스님께서는 “‘거룩하신 부처님께 한국에서 온 500여명이 두손 모아 합장하며 기도하옵니다” 하며 45년간을 쉼 없이 고통받는 중생과 함께 해오신 부처님의 행적을 상기시켜주시고, 이제 평온히 쉬시고 우리가 부처님 뜻을 이어받아 남은 일을 하겠다는 발원을 해주셨습니다. 

 


 

“거룩하신 부처님 저희들 한국에서 온 불자 대중 500여명은 이렇게 부처님의 열반상 앞에 서서 두손 모아 합장하오며 발원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 히말라야 산 기슭 카필라성의 룸비니에서 태어나셔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뭇 중생의 고통을 보시고 그 아픔을 함께 하시고 그 고통을 구제하시고자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셨습니다. 전정각산 아래에서 6년 간 고행하신 끝에 니련선하 강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르나트에서 처음 설법을 한 이래 45년 동안 하루도 쉼 없이 고통받는 중생이 있는 곳에 부처님께서는 늘 함께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깨우치고 가난한 자는 돌보고 고통받는 자는 위로하셨습니다.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마치 낡은 수레를 삐그덕 삐그덕 몰고 가듯이 그 육신을 이끌고 이곳 쿠시나가라에 이르러서 마침내 열반에 드셨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이제 안온히 쉬소서. 이제 남은 일들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고통 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가진 우리들이, 작은 부처가 되어 고통 받는 중생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 여래의 사도로써 전법의 역사를 쓰겠습니다. 

 

다시는 부처님께 무엇을 해달라 도와달라 빌지 않고, 부처님께서 하시고자 했던 일들을 우리가 대신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이시여! 이곳에 안온히 머무소서! 남은 일들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이렇게 오늘 간절히 발원을 하오니 제불보살님들께서는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께서는 옹호하여 주옵소서! 나무 석가모니불.”

 

500여명이 가득 들어섰던 열반당 안에서의 예불을 마치고, 스님의 지도하에 실타래를 풀 듯 안쪽부터 부처님을 뵙고 돌아나와서, 열반당을 배경으로 조별로 스님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이어서 순례객은 11시45분경에 라마바르총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쿠시나가라 왕족의 대관식을 하던 장소로 바쿠다 반다나 영지인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세상 풍속대로 장례를 치르라는 말씀대로, 왕족이신 부처님의 신분에 맞게 이루어 진 것이라 하시면서,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법문해 주셨습니다. 

 


▲ 라마바르총

 

“이곳은 원래 왕위를 계승할 때 대관식을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사라나무 숲 속에서 열반에 드시자 부처님이 최후로 물을 드셨다는 히란나바티 강가에서 다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왕위를 계승하는 대관식을 하는 성스러운 이곳에서 다비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마하가섭 존자가 부처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오백 대중을 이끌고 부처님의 뒤를 따라 왔는데 결국 부처님을 뵙지 못하고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습니다. 열반하시고 일주일 뒤에 마하가섭 존자가 도착했어요.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도 오백 대중이 있었어요. 여러분들이 오늘 열반당에 들어가서 그 때의 오백 대중처럼 똑같이 부처님의 열반상을 보고 눈물도 짓고 그러셨는데, 그 당시의 대중들도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자 부처님 주위에 둘러서서 우는 사람도 있고 그랬다고 해요. 그랬을 때 천안제일 아니룻다 존자가 '여러분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합시다' 하면서 사념처관을 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대중이 모두 몸이라는 것은 부정하고, 느낌이라는 것은 고일 뿐이고, 마음이라는 것은 무상하고, 법은 무아다 하는 것을 관하게 되니까 마음이 전부 고요해졌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지만 대중들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유골은 티끌이 없이 깨끗이 타서 아주 깔끔했어요. 그것을 다 수습을 했는데 마가다국의 아자타사투 왕도 부처님의 유골을 자기 나라에 모셔서 기념탑을 쌓겠다고 하고, 바이샬리의 리차비족도 그러고, 카필라바스투의 석가족도 그러고, 다 와서 각자 자기 나라에 모시겠다고 해서 전쟁까지 일어날만큼 험악했다고 해요. 그래서 도나 바라문이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다. 아무리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지만 부처님의 사리를 서로 가져가려고 전쟁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고 하면서 여덟 나라에게 여덟 몫으로 공평히 나눠주었다고 해요. 그리고 도나 바라문은 사리를 담았던 그 용기를 가지고 기념탑을 쌓았고, 한 종족은 늦게 와서 부처님을 화장한 재를 가져가서 탑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여덟 개의 진신사리탑과 한 개의 항아리탑, 한 개의 재탑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한 삶은 여기서 마감이 됩니다. 부처님을 여기서 화장을 하고, 그 자리에 이를 기념해서 후대에 크게 기념탑을 쌓았어요. 이것을 ‘라마바르총’ 이라고 해요. 자, 이 내용을 경전으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경전을 독송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다시 구체적으로 만나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경전독송과 명상까지 마치고 조별로 흩어져서 아침 겸 점심 식사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는 가운데 성지에서 먹는 밥맛이 정말 꿀맛입니다. 

 


 

오후에는 네팔국경을 넘어, 붓다 이전에 한 젊은이로서의 삶을 만나보기 위하여 룸비니로 향했습니다. 네팔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소감 나누기와 자기 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누기와 소감을 듣다 보니 다들 한분 한분 모두 참 소중한 인연으로 오신 분이구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500여명이 함께 움직여야 하고 시간에 쫓길 때도 많아서 한분 한분의 소중함을 잘 몰랐구나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 

 


 


 

순례단은 오후 6시경에야 국경에 도착하였고, 출입국심사를 위해 네팔국경에서 3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으나 해가 진 후라 주변이 어두워져 둘러 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습니다. 

 


▲ 네팔 국경

 

스님은 네팔에 오면 꼭 들린다는 식당에서 로티(난)와 달로 요기를 하셨고, 순례객들도 환전을 하거나 식당이나 가판대에서 각종 네팔 음식들을 맛보고 과일이나 야채,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버스에 올라타 네팔에 있는 한국절인 대성 석가사에 9시경에 도착해 절에서 준비해준 음식으로 늦은 공양을 하였습니다. 너무나 반가운 깍두기와 나물반찬을 맛있게 먹고 따뜻한 보리차를 마시며 조별 나누기를 한 뒤 취침에 들었습니다. 

 

오늘은 부처님의 마지막 가신 길을 함께 했는데요. 내일은 부처님 탄생 이야기를 따라 카필라성과 룸비니로 가는 날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가면서, 공간도 조금씩 북쪽으로 올라오니 저녁 기온이 한층 쌀쌀해집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