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넓다/인도성지순례

2015.1.14 인도성지순례 8일째 바이샬리

맑은물56 2015. 1. 26. 10:13

2015.1.14 인도성지순례 8일째 바이샬리

박미란 글 | 2015.01.16 03:37:45 올림 | 8,810 읽음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8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전 3시 20분, 새벽녘 일어나 짐싸고 움직이는 것이 어느새 익숙해졌습니다. 

 

라즈길에서 5시간을 달려 바이샬리를 들러 쿠시나가르까지 가는 일정이라 평소보다 조금 이른 오전 4시에 출발하였습니다. 버스가 13대가 되다보니 일부는 라즈길의 숙소에서 출발하고 일부는 나란다의 숙소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비가 오는 듯한 짙은 안개 속을 무심히 달려나가는 버스 속에서 아침 예불을 하며 부처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따릅니다. 

 


▲ 새벽 4시 버스 안에서 예불을 하며 오늘 순례를 시작합니다. 

 

오전 7시쯤, 스님께서는 수신기를 통해 버스 안에서 푹 자고 있던 순례단을 깨우시며 “지금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곳은 비하르주의 수도 파트나입니다. 비하르주는 인도에서 두 번째로 많은 8천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파트나는 야무나, 강가, 고그라, 간다키, 숀 등 다섯 개의 강이 모여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지금부터 다리가 시작되는데, 이 다리는 마하트마 간디 브릿지입니다. 다리 길이가 10km 정도 됩니다” 라며 지금 건너고 있는 다리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셨습니다. 또한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200년 뒤에 아쇼카 왕의 마우리안 왕조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작은 나루터였는데 당시 부처님께서 이곳에 큰 도시가 드러설 것이며 그 도시에는 물의 재앙, 불의 재앙, 사람의 재앙, 세 가지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이후에 큰 홍수와 큰 불과 내분으로 결국 나라가 망하였다고 합니다. 또 파탈리 푸트라는 왕궁 안의 사찰에서 일천 비구가 모여 제3결집이 이뤄진 곳입니다.” 라고 파탈리 푸트라에 관련된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바이샬리로 향하는 길에 4차선의 반듯한 도로가 새로 생긴 것에 스님께서도 놀라워하시며 평소에 걸리던 5시간 보다 시간을 줄일 수 있을 듯 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안개가 짙어서 차 속도는 많이 내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도로의 지대가 높아서 도로가를 화장실로 이용할 수가 없다며 볼일이 급하신 분들을 챙겨주셨는데 그러다 어느 순간에 “여기 망고나무 숲이 있는데, 급하니까 마음대로 누세요!” 라는 말씀에 500여명의 인파가 오른쪽, 왼쪽으로 나눠 급한 볼일을 보았습니다. 볼일을 다 보고 나니 근처에 동네가 있어서 실례를 한 격이라 동네 사람들이 황당했을까 싶어 좀 미안했습니다.

 

다시 버스가 움직이자 스님의 설명은 계속되었습니다. 공화정을 구성해 나라를 운영했던 민주적인 바이샬리를 부처님은 무척 좋아하셨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열반의 길을 떠나실 때, 코끼리처럼 고개를 천천히 돌려 바이샬리를 돌아보시며 “이 아름다운 도시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구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또한 “도리천의 사람들을 보고 싶다면 바이샬리의 리차비족을 보라”고 할 만큼 풍요롭고 자유로운 도시였으며 지금도 인도에서 국회가 개원할 때는 이곳 카라우나 포칼 연못의 물을 가져가 성수로 사용한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오전 8시 30분경 진신사리탑 앞에 도착한 순례단은 4줄로 서서 가사를 입고 향을 피워들고 석가모니 정근을 하며 탑을 돌아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 바이샬리 진신사리탑

 

쌀쌀한 아침 날씨에 두텁게 입은 옷 위에 가사를 입은 대중을 보시며 스님은 “꼭 절구통처럼 입고 있다” 하시며 웃음과 함께 바이샬리의 역사적인 성지 중 하나인 이곳 진신사리탑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셨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화장하고 남은 진신사리를 모신 탑입니다. 부처님의 육신에서 나온 진신사리는 여덟 몫으로 나뉘어져 모셔졌습니다. 여덟 몫 가운데 하나가 지금 우리가 도착한 이곳에 모셔졌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200년이 지나고 아쇼카 왕에 이르러 부처님의 행적이 있는 곳마다 다 탑을 쌓았어요. 탑은 일종의 무덤인데 그냥 흙무더기만 있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여덟 개의 사리탑에서 사리를 꺼내어서 그것을 탑마다 다 하나씩 넣었습니다. 무려 8만4천개의 탑을 쌓았다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8만4천이라는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탑을 쌓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리 중에 아주 일부가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중국으로 올 수는 있었겠죠. 그러나 많은 수가 오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스리랑카를 비롯한 전세계에 흩어진 부처님의 사리를 다 모으면 아마 열 트럭이 넘을 겁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사리가 귀하니까 부처님의 사리를 대신할 사리를 만들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꼭 나쁜 의미는 아니예요. 부처님의 사리가 너무나 귀하니까 보석처럼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시지 않았는가 생각할 수가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자장율사에 의해서 사리가 중국으로부터 왔거든요. 그래서 통도사에 일부 모시고 황룡사에도 모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온 것은 여러군데에 모셨다고 하는데 현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인정되는 곳을 5대 적멸보궁이라고 합니다.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오대산 상원사, 양산 통도사, 사자산 법흥사 이 다섯군데를 귀하게 여겨서 불자라면 보궁을 참배해야 한다고 하죠. 

 

그런데 이 다섯군데를 참배하는 것도 정말 귀하게 여기는데, 거기에 비하면 이 진신사리탑은 백배 천배 귀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리탑입니다. 전 세계에 8개가 있는데 딱 3개만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에 한 곳을 지금 여러분들이 참배를 하신 겁니다. 

 


 

물론 부처님은 형상을 중요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음악 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이 다 신기해했어요. 그래서 물으니 부처님께서 “저 하늘의 신들이 여래의 열반에 임해서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정진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 하셨어요.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는 이곳을 참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정진해서 자기가 해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부처님의 진신을 친견하고 예배하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바이샬리의 진신사리탑을 친견한 것은 신앙적으로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공덕이 있는 일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귀한 자리에 우리가 왔다 이것을 다시한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이샬리는 상업이 발달하고 진보적인 도시였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여성출가를 이곳에서 허용을 하셨어요. 석가족 출신의 여인들이 처음으로 부처님께 출가를 요청했거든요. 그 이유는 부처님의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부처님의 어머님 되시는 분이 혼자가 되었어요. 또 부처님의 부인이었던 분도 아들 라훌라마저 출가하면서 혼자가 되었어요. 부처님 당시에는 남자가 없으면 주인이 없는 존재가 되어서 아무나 데려가도 되었어요. 석가족 젊은이들이 많이 출가를 하다보니까 석가족 여인들에게 이런 문제가 생겼어요. 그래서 ‘마하파자파티’라는 부처님의 어머님이 되시는 분과 ‘야소다라’ 라고 하는 부처님의 아내 되셨던 분을 비롯한 석가족 여인 500명이 부처님의 법에 귀의해서 부처님께 출가를 요청했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승낙을 안하셨어요. 그러니 오백 여인이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이곳 바이샬리까지 부처님을 따라와 요청을 했어요. 남자 천민이 출가하는 것은 처음부터 쉽게 허용이 되었는데 여성 출가가 쉽게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 사회가 계급차별보다 성차별이 당시 사회에서는 더 심했다는 것을 말해요. 그러자 아난존자가 마하파자파티 부인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부처님께 “여성은 수행해서 해탈할 수 없습니까?” 묻자 부처님은 “여성도 해탈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왜 허용을 하지 않습니까?” 하면서 마하파자파티 부인이 어릴 때 부처님을 키울 때의 공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여성의 출가를 허용한다고 하셨고, 이렇게 해서 여성의 출가가 이뤄졌습니다. 

 


 

왜 부처님이 카필라성에서 허용을 안하고 이곳 바이샬리까지 왔을까요? 바이샬리는 진보적인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바이샬리에서는 그래도 용납이 되지만 다른 곳에서는 여성 출가가 사회적으로 용납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신체적으로 여성은 문제가 없지만, 오랫동안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의 삶의 가치관은 자기 스스로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의지심이 많습니다. 이 의지심이 극복되지 않고는 붓다는 될 수 없어요. 그런데 여성들이 스스로 이곳까지 맨발로 걸어왔다는 것은 그만큼 독립의 의지가 굳건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조건에서 능히 수행할 수 있겠다고 보시고 허용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바이샬리는 여성 출가의 성지입니다. 제가 볼 때는 이곳이야말로 여성해방의 효시가 되는 곳입니다. 카톨릭은 아직도 수녀가 미사를 집전할 권리가 없고, 여성이 신부가 될 수 없잖아요. 부처님은 2600년 전에 비구니를 허용했다는 것은 종교 역사에는 유래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마지막 여로를 기록한 열반경에 보면 이곳에서 암나팔리의 공양을 받고 그 해가 가뭄이 들어 굉장히 흉년이었어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한 마을에 한명씩 가라고 모두 흩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아난다와 함께 벨루바나라는 마을에 가서 우기 안거를 지냈는데, 부처님의 몸이 굉장히 편찮으셨어요. 아난다도 어쩔 줄 몰라했는데 부처님은 유수행이라고 해서 수명을 연장하는 수행을 하셨어요. 그리고 안거가 끝나자 나는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을 하십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대중들을 모아놓고 계정혜 삼학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곳을 떠나서 북쪽으로 가시는데 바이샬리 사람들이 부처님과 헤어지는 게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돌아가질 않아요. 계속 따라와서 간타키 강을 건너는 데까지 따라왔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 강을 건너시자 부처님이 가지고 있던 발우를 물에 띄워보내서 이별의 징표로 남겼습니다. 

 

그러니까 이곳은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서 처음 방문 하신 곳이고, 또 이곳은 여성이 처음 출가한 곳이고, 또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올린 곳이고, 또 부처님이 열반을 선언하신 곳이고, 암나팔리의 공양을 받은 곳이고, 또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을 세운 곳이기도 하고, 불멸 후 100년 후에 제2결집이 이뤄진 곳이기도 하고, 또 불멸 후 500년 경 대승불교가 일어날 때 유마경이 설해진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 지금 우리가 앉아 있습니다. 자, 경전 독송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스님께서 먼저 설명하신 내용의 경전을 순례단이 함께 독송하였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미리 듣고 경전을 읽으니 더 생생하며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대중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스님의 세심한 지도방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이샬리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을 마음에 새기며 고요히 명상에 들었습니다. 그 사이 싸늘했던 날씨는 어느새 밝은 햇살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차량별로 진신사리탑 앞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짝수 차와 홀수 차로 나뉘어서 짝수차는 스님과 함께 찍고, 홀수 차는 유수 스님과 함께 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다시 버스에 올라 원후봉밀터로 이동했습니다. 500여명의 대중은 석가모니 정근을 하며 탑돌이를 한 후 자리를 하고 스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 원후봉밀터

 

“이곳은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 올렸다고 하는 원후봉밀을 기념해서 세운 탑입니다. 부처님께서 바이샬리에 계실 때 주로 500 대중이 이동한 것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가 버스를 타고 500 대중이 이동해도 만만치 않은데 부처님과 500 대중이 이동할 때는 얼마나 어려웠을까 짐작해 봅니다. 기원정사나 죽림정사에 머물 때는 천이백 대중이 함께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500 대중과 함께 공양을 받으려고 발우를 주욱 펴 놓으니까 일단의 원숭이 무리가 오더니 그 500개의 발우 중에 딱 부처님의 발우에 꿀을 공양했어요. 그러니까 붓다를 원숭이와 같은 짐승도 알아봤다는 것이죠. 성난 코끼리도 부처님께 무릎을 꿇은 것처럼 원숭이도 부처님을 알아봤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원숭이들 수백마리가 흙을 파서 부처님이 목욕하실 연못을 만들었다고 해요. 

 

옛날에 제가 왔을 때는 이 탑이 저 중간쯤까지 묻혀 있어서 여기가 평평했어요. 아쇼카 필라도 묻혀 있어서 위에만 나와 있었어요. 

 

탑 오른쪽에 보면 방 자리가 있는 정사 터가 있어요. 저기는 비구니 승방이었다고 전해내려오고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한번 가서 보고 옛날 내가 살던 방이였는지 확인해 보세요. (웃음) 

 


 

부처님의 위대함은 우리 스스로 사물을 판단할 수 있도록 많은 지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등명 법등명입니다. 남에게 의지하지 마라. 너 자신에게 의지하라. 법을 등불로 삼아라. 법 아닌 것을 등불로 삼지 마라. 이 둘 사이에서 우리는 중도를 지켜야 합니다. 법에 의지한다고 할 때 그 법이 지나치게 형식화되면 진리에 어긋날 때가 있습니다. 반드시 자신의 경험과 체험으로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즉 법을 배운 것을 자기 체험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또 자신의 체험은 반드시 부처님의 법에 근거해서 확인해야 합니다. 형식적으로 공부만 하고 자기 경험을 하지 않는 사람도 많지만, 또 반대로 자기가 경험한 것을 부처님의 법인 것 마냥 행세하는 것도 사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를 우리가 명심해야 합니다. 

 

또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나면 불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부처님한테 이런 말을 들었다고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진실을 규명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누가 그런 주장을 할 때 무조건 받아들여도 안되고 무조건 배척해도 안된다고 하시면서 그 얘기를 잘 들어보고 이미 부처님이 설하신 계율과 경전에 잘 부합하는지 확인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성제, 연기법, 팔정도 이런 원칙에 안맞는 내용은 어떤 이름이 붙어 있어도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고, 반대로 그것이 예수님이 말했든 소크라테스가 말했든 공자님이 말했든 그 이치가 부처님의 말씀과 내용이 같다면 다른 종교 다른 사상이라고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큰 지침을 주셔서 우리가 어느 한 쪽에 매몰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흩어지지도 않고 원칙을 지키면서도 융통성 있고 포용성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부처님께서 길을 열어주셨는데,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부처님을 더 존경하는 원인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곳에 비구니 요사가 있다고 하니까 어쩌면 이곳이 비구니 스님들이 출가한 성스러운 곳인지 모릅니다. 남방 불교에는 비구니 제도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그걸 복원을 하려고 하니까 남방 불교 종단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이곳 바이샬리에서 여성들이 수계를 받으면 누구도 거부하기가 어렵지 않느냐 싶거든요.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직접 행하신 일이니까요. 그래서 이곳에다가 비구니 사찰을 하나 지어서 남방 불교의 비구니 제도 복원 운동이나 여성의 권리 향상 운동을 하면 좋겠다고 한국 비구니회에 여러번 건의를 했지만 아직 한국에는 그런 대찬 비구니가 없는 것 같아요. (웃음) 

 


 

스님이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제가 씨앗만 뿌려 놓았으니까 이제 여러분들이 출가를 해서 하든 자원봉사를 하든 앞으로 성지마다 부처님의 유훈이 실현될 수 있는 그런 사업들을 해나가면 좋겠어요. 특히 이곳 바이샬리에는 꼭 비구니 절이나 여학교 같은 것이 있어서 인도 여성 운동의 효시가 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예불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보다 부족함이 있으나 비구니 제도를 허용한 것은 대승불교의 자랑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곳이 여성운동의 주요 근거지가 되기를 발원하며 스님과 함께 예불 공양을 올리고 명상도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원숭이가 부처님께 공양 올리듯 고통 받는 중생에게 공양 올리기를, 또한 태어난 조건에 의한 차별을 거부하고 인권을 수호할 수 있기를, 진신사리를 친견한 우리 모두가 업장소멸하여 성불하기를 발원하셨습니다. 순례단 또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함께 발원하니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순례단은 오전 11시 30분경에야 아침 공양을 했습니다. 원후봉밀터 주변의 평평한 잔디 밭에 자리를 펴고 둘러 앉아 어제 숙소에서 해놓은 전기 밥솥의 따뜻한 밥을 나눠담고 식사를 했습니다. 허기까지 보태어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습니다. 그동안 성지에서 공양 올린 사탕을 인도의 아이들에게 나눠주시던 스님께서 이번에는 우리 순례단의 성불을 기원하며 공양 올린 사탕을 순례단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주셔서 달달하게 입가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스님과 함께 차량별로 단체 사진을 찍고 다음 성지로 이동합니다. 

 


 

어느덧 날씨는 여름 날씨로 변해 입었던 옷들을 차례차례 벗어도 땀이 흐르고 차 속 공기는 후텁지근했습니다. 2시간 정도를 달려 세계에서 가장 큰 탑인 케사리아 탑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신선하고 시원한 공기가 마치 부처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처럼 감사했습니다.

 


▲ 케이사르 탑

 

고개를 들고 탑을 바라보니 탑이라기보다 동산 같았습니다. 한쪽 켠은 여전히 나무가 자라고 풀숲이 우거져 있는 이 탑은 스님께서 20여년 전 인도에 계실 때 처음 발견된 소식을 접하였으나 이렇게 큰 탑인 줄 모르고 그 사이 지나치기도 했다고 하셨습니다. 경전 기록에 보면 쿠시나가라로 길을 떠나시는 부처님을 따라오던 바이샬리 사람들과 헤어진 곳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강을 건너신 부처님께서 이별의 징표로 발우를 강에 띄웠고 떠내려 온 발우를 기념하는 탑을 이곳에 세운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고 하셨습니다.  

 


 

순례단은 가사를 입고 줄을 서서 탑돌이를 했습니다. 스님의 제안에 탑을 빙 둘러 서서 인간 띠잇기를 하니 500명의 대중이 탑을 에둘러 쌀 수 있었습니다. 합장 삼배와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손에 손잡고 “부처님 만세”를 웃으며 힘차게 외쳤습니다.

 


▲ 케이사르 탑을 둘러싸고 인간띠 잇기를 해보았습니다. 

 

버스를 타고 다음 순례지를 찾아가는 길에 그 사이 분주했던 일정 속에 나누지 못했던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차를 2주간 함께 타고 다니는 인연 깊은 순례단은 각자의 모습과 이야기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가 부처님의 뜻을 따라 걷는 수행자라는 생각에 뭉클하기도 했습니다. 

 


▲ 버스 안에서의 자기 소개 시간과 마음 나누기

 

쉼 없이 달리는 버스라지만 지는 해는 거스르지 못해 이미 밖은 어둑어둑해졌습니다. 다음 순례지인 춘다의 공양터는 내일로 미루고 부처님의 열반 성지 쿠시나가라의 한국절인 대한사로 바로 향했습니다. 

 

대한사에서 미리 준비해주신 공양 자리에는 이미 어둠과 함께 이슬이 내려 앉았고 새벽부터 준비해주신 음식들을 보니 객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난듯 반갑고 힘이 났습니다. 대한사의 주지인 성관 스님께서는 제주도 관음사 출신으로 20여년 전 인도여행을 왔다 이곳에 한국절이 없음을 아시고 이곳에 불사를 발원하시고 지금까지도 절을 짓고 있으시다고 합니다. 

 


 

30명 밖에 머물 수 없는 숙소라 공양을 준비했으니 많이 드시고 순례를 잘 마치시기를 기원한다는 따뜻한 말씀을 해주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스님께서는 공양 후 대한사의 불사가 원만히 성취할 수 있기를 발원해 주셨고, 500여명의 순례단도 스님과 함께 반야심경 봉독과 정근을 하며 함께 발원해 주었습니다. 

 


 


▲ 쿠시나가르의 한국절 대한사

 

쿠시나가라의 곳곳에 흩어진 숙소로 버스는 멈췄고 순례단은 여독을 풀고 개인 정비 시간을 가졌습니다. 콘센트에는 전기 밥솥을 꽂고 내일 먹을 밥을 준비하고, 반찬도 락앤락 통에 담아 둡니다. 조장님들은 내일 네팔 국경을 넘을 때 필요한 서류를 챙기며 분주했던 하루를 마무리 합니다. 이제 슬슬 하루하루가 아까워지는 것을 보면 성지순례를 하고 있는 오늘 하루도 행복했나 봅니다.  

 

내일은 새벽부터 어제 가지 못한 춘다 공양터를 참배하고, 부처님께서 목욕하셨다는 카쿠타 강에 내려 강물에 손을 담궈보고,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열반당으로 갑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네팔 국경을 넘어갈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