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7 인도성지순례 11일째 탄센, 삐쁘라하와
▲ 탄센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11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른 새벽 2시 30분, 룸비니 대성 석가사의 정원에는 하늘의 별과 옅은 안개가 탄센으로 떠나는 순례객들을 배웅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품과도 같았던 룸비니 대성 석가사에서 짐을 버스로 옮기며 좌석에 앉으니 수신기에서는 스님의 익숙하고도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와 출발을 독려했습니다.
▲ 새벽 2시 30분, 룸비니 대성석가사를 출발하며
오늘 일정은 히말라야 설산인 안나푸르나와 다울라기리를 볼 수 있는 탄센의 언덕까지 오르는 산행으로 시작합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버스 안에서 천일결사 기도가 시작됩니다. 버스 좌석에 앉아 다리와 양손을 모으고 새벽 예불이 시작됩니다. 낮으면서도 또렷한 음성으로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를 마쳤습니다.
천일결사기도가 끝나자, 버스 불이 꺼지고 순례객들은 앉은 채로 잠이 들었습니다. 버스가 절벽과도 같은 위험한 길을 따라 해발 2000미터를 오르는 동안에도 순례객들은 잠에 빠져 있다가, 탄센 도착을 알리는 스님의 음성에 따라 옷을 주섬거려 입고, 무지 추울 것이라 예상하고 겹겹이 껴입고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500여명의 순례단 선두에 서신 스님께서는 대중들에게 누차에 걸쳐 천천히 오라며 당부하셨습니다. 선두가 너무 빨리 가면 후미가 힘들다 하시며, 올라가는 길의 왼쪽으로 붙어서 오라고 당부하셨지만, 대중들은 조금이라도 스님 곁에 서서 오르려고 줄이 두터워지는 모양새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여기는 옛 탄센 왕국의 땅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교도이며 몽골리안인데 아무리 지형이 험해도 물만 있으면 어디든 사람들은 살 수 있다” 고 하시면서 이곳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산 곳곳에 물을 뜰 수 있는 샘터가 보였습니다. 이 산에는 나무가 많아서 이렇게 물이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거리는 깨끗하고, 길가 나무들은 꽃들이 노랗게 빨갛게 피어있기도 했습니다. 탄센 마을 사람들은 순례단을 신기해하면서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습니다.
꼬불꼬불 언덕길로 1km 정도를 가다보니 계단이 나왔습니다. 계단 길 옆으로는 벌써 복사꽃이 피어있기도 했습니다. 한 계단씩 올라가자, 여기가 고지대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발 아래 산들 사이로 안개 바다가 펼쳐졌습니다. 안개바다 위로 붉은 해가 솟아오르며, 청명한 하늘이 열렸습니다.
햇살을 받으며 아름다운 여인의 머릿결 같은 솔잎이 반짝였습니다. 키가 커다란 소나무 숲속으로 들어가자, 폭신한 흙길과 소나무 내음에 그간 먼지와 긴 이동거리에 피곤했던 순례객들의 심신이 치유되는 듯했습니다.
스님께서는 길을 걸으시면서도 설산의 위치를 짚어주시며 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카필라성에서 설산을 보시면서 성장하셨을 것라고 일러주시기도 했습니다.
▲ 저 멀리 안나푸르나가 보입니다.
언덕 위에 전망대가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가 돌아 나오면서 달맞이꽃 같은 노란꽃 무리를 만나고, 길을 안내해주려는 것인양 스님 뒤를 따라 다니는 동네 개들도 보았습니다.
햇살 따뜻한 넓은 터가 있는 곳에 다다라 조금 쉬기로 했습니다. 휴식 후 스님께서 노래 잘 하는 사람들 나오라 하셔서 몇 분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수신기로 구성진 노래 가락을 들려오자 몇몇 분들은 추임새를 넣고 순례단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핍니다.
순식간에 흥이 오르고 너도 나도 서로 노래를 부르려는 사람들이 손을 듭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아쉽게도 “이제 그만해요. 오늘 갈 길이 바빠요.” 하셔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산을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길은 가벼웠습니다. 목표를 향해 올라갈 때보다 여유가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 사는 모습이 눈에 정겹게 들어왔습니다. 버스 주차한 곳으로 가서 조별로 모여 도란도란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하는데 상쾌하고 쾌적한 산행 이후의 밥맛이 꿀맛입니다.
이어서 스님께서는 대성 석가사의 총무 스님을 소개해주셨고 총무 스님은 산행 동행 이후 남은 순례 일정 동안 건강하시라는 인사 말씀도 덧붙여 주셨습니다.
식사 후 화장실을 다녀온 후 다시 먼 길을 출발입니다. 인도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국경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미리 도착하여 출입국 수속 준비를 해주신 실무자 스텝분들 덕분으로, 순례객들은 편안하게 빠른 수속을 모두 마칠 수 있었습니다.
국경을 통과해서 쉬라바스티로 가는 길에 카필라성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을 친견하러 출발합니다. 차창 너머로 수평선까지 펼쳐진 연두빛 밀밭과 노란 유채밭이 보입니다. 간혹 차창을 통해 만나는 아이들은 활짝 웃으며 손을 힘껏 흔들어줍니다. 울퉁불퉁 비포장 시골길을 한참 동안 달려야 했는데 마치 롤러코스트를 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순례객들은 피곤하여 모두다 잠을 청하느라 조용했습니다,
덜컹 거리며 달린 끝에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터에 도착했습니다. 오는 도중에 2호차는 차에 문제가 생겨서 수리를 하러 가야 해서 2호차 순례객들은 모두 다른 차로 나뉘어서 탑승했고, 13호차가 도중에 접촉사고가 나서 수습을 하고 오느라 조금 늦게 도착했습니다. 약간의 사고가 있었지만 먼길을 무사히 도착해서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
도착하자마자 공양물 준비팀은 제기와 제상, 과일과 과자, 사탕을 가지고 공양올릴 준비를 합니다. 스님과 대중들은 향에 불을 켜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면서 탑을 세 바퀴 돌았습니다.
향받이에 향을 모으고 500 대중 각자의 자리를 잡고 예불 준비를 합니다. 자리가 정돈되자 무변심 법사님의 목탁에 맞추어 일제히 예불을 올립니다. 합장하고 몸을 숙여 절을 올립니다.
그리고 스님께서 발원문을 낭독해 주셨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카필라바스투 샤끼야족이 세운 진신사리탑을 친견하오니 이같은 공덕은 참으로 희유하고도 희유한 공덕이라, 다생겁래로 지어온 한량없는 공덕이 있기에 오늘 이렇게 진신사립탑 세 군데를 마지막으로 친견하오니 이와 같이 진신사리탑 친견 인연공덕으로 대중 일동은 다생겁래로 지은 업장 모두 소멸하고 이 공덕을 고통받는 이들에게 회향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이러한 발원 공덕을 먼저 돌아가신 조상 영가님들께 회향하오니, 조상 영가님들 또한 유주무주 모든 고혼들 극락왕생 하옵소서.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예불과 발원문이 끝나자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터에 대한 스님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스님께서는 아주 재미난 옛날이야기를 해주시듯이 말씀해주십니다.
“먼 길을 돌아 잘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이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입니다. 우리가 세가지 진신사리탑을 친견했는데 그 첫째가 바이샬리 진신사리탑, 둘째가 랑그람 진신사리탑, 셋째는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입니다.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은 카필라바스투의 석가족이 부처님의 진신사리 8분의1을 가져가서 세운 탑입니다. 이 지역 이름을 따서 유적지의 이름은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입니다. 너무 많이 봐서 뭐가 뭔지 분간이 잘 안갈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게 그거인 것 같고, 사진을 봐도 구분이 안될 거예요. (웃음)
카필라성도 네팔에 있고, 부처님을 영접한 쿠단 유적지도 네팔에 있고, 룸비니도 네팔에 있고, 랑그람 스투파도 네팔에 있는데, 왜 석가족이 세운 진신사리탑은 인도에 있을까요? 여기서 3km만 가면 국경입니다. 국경을 통과하여 돌아오다보니까 5시간 걸렸지만 사실은 바로 곁에 있습니다. 카필라성과 룸비니의 중간쯤 되는 곳의 약간 아래 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카필라국의 영토 안에 있었고요.
이 사리탑은 1800년대 후반에 영국 사람이 이 탑을 발굴 했습니다. 사리 용기에서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나왔는데 델리 박물관에 지금 보관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인도가 독립한 후 이 사리탑을 재발굴 했는데 사리탑의 더 아래쪽에 다시 사리용기가 발견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탑이 덧붙여 쌓다 보니 그렇습니다. 이 진신사리탑은 아쇼카 왕 이전에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바로 세워진 탑입니다. 이 사리탑에서는 유골 일부와 명문도 발굴되었기 때문에 이곳은 확정적인 곳입니다.
코살라국의 프리세나짓 왕이 부처님께 귀의한 후 부처님을 너무 좋아하다보니 석가족의 공주를 자신의 후비로 받아들이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이 석가족들이 자존심이 세니까 그렇게 하기는 싫은데 안할 수는 없으니까 하녀를 공주로 분장을 시켜서 시집을 보냈어요. 그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서 이 여인은 왕후는 아니지만 아주 대우받는 후비였어요. 그런데 다른 비의 아들들은 어머니의 고향에 다녀오는데, 이 비의 아들은 어머니가 친정에 가지를 않는 거예요. 그런데 아이가 커서 계속 조르니까 할 수 없이 카필라바스투를 방문한 겁니다. 카필라바스투에서는 코살라국의 왕자가 오니까 잘 대우를 해서 보냈어요. 그런데 이 왕자가 돌아가다가 무엇을 방에 두고와서 그것을 가지러 다시 방에 들어가니까 자신이 잤던 방을 하인들이 청소를 하다가 “에이, 더러워” 하면서 소금을 막 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하녀 출신의 아들이 궁중으로 들어가 좋은 방을 차지했으니까 부정 탔다는 겁니다. 그러니 비밀을 아는 사람이 볼 때는 저 아들이 왕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하녀의 아들이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어머니한테 따지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사정을 이야기 한 겁니다. 그래서 이 아들이 석가족에 대해서 굉장히 적개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연이 있는데, 프리세나짓 왕의 아들들이 수십명이여서 왕위를 갖고 쟁탈전을 했는데 결국 이 석가족 하녀의 아들이 형제들을 다 죽이고 왕이 됩니다. 권력을 잡고 나서 제일 먼저 복수하려고 한 대상이 석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서 석가족을 멸해라고 명령합니다. 엄청난 군대가 공격 명령을 받고 카필라성으로 향하는데 그 소식을 듣고 부처님은 군대가 지나가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 뙤약볕에서 명상을 딱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군이 말에서 내려 인사를 하면서 “부처님, 왜 뙤약볕에 앉아 계십니까? 저기 나무 그늘도 있는데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무리 나무 그늘이 좋다 해도 친족의 그늘보다는 못하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장군이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다시 명을 받고 왔는데 또 부처님께서 같은 자리에 앉아 계신 거예요. 똑같은 문답이 오고 갑니다. 이제 세 번째는 ‘부처님이 계시더라도 그냥 갈 수 밖에 없다’ 하고 각오를 하고 나오니 부처님께서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가보니 부처님께서 이번에는 안 나오셨어요.
결국 성이 함락되고 왕도 잡힌 겁니다. 그런데 왕이 부처님의 사촌동생이였어요. 명령이 석가족을 멸종시켜라는 것이니까 아이든 어른이든 남자란 남자는 다 죽인 겁니다. 그런에 이 왕이 사정을 했어요. 내가 이 연못에 들어가서 나올 동안까지만 이 사람들을 도망가게 놓아 주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1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 안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물을 파내니 왕이 물 속에 들어가서 그 머리를 풀어서 나무 뿌리에 묶어 놓고 죽은 겁니다. 그동안에 석가족의 일부가 도망을 갈 수 있었습니다. 도망간 석가족은 왕족이 아니라 수드라의 신분으로 전락해서 신분을 숨기고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석가족도 크샤트리아 계급이 아니고 수드라에 속해 있습니다. 대부분 농사 짓고 살고 있고 자녀들은 공무원을 하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석가족은 자신의 뿌리가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어요. 인도에 불교가 없어지고 700년이 흘렀으니까요. 다 힌두교 신자가 되었죠. 그러다가 근대 교육이 시작되면서 자신이 부처님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많은 석가족들이 불교 개종 운동을 지금 하고 있어요. 상카시아 지역에 가면 사키아라는 카스트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데 지금 힌두교에서 불교로 한 20% 정도 개종을 했습니다. 인구로 따지만 20만명 정도 될 겁니다. 그래서 저희 정토회에서도 그들을 위해서 상카시아에 석가족들을 위한 절을 지어주려고 불사를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러니 참 묘하죠. 부처님도 왕위를 버렸고, 아들도 출가를 했고, 부인도 출가를 했는데, 이 출가한 사람들은 다 살았어요. 부귀를 누리던 사람은 역사적인 변화 속에서 살해를 당하거나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불멸 후에 이 탑이 쌓아진 것을 보면, 출가한 스님들 중에 석가족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이곳에 탑을 쌓았을 수 있고요. 또 이런 역사와 관계 없이 카필라성이 복속되었지만 이 도시가 없어질 수는 없으니까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탑을 쌓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 이런 큰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지만 이것은 인연의 이치가 그랬기 때문에 부처님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였어요. 그러나 부처님은 법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셨어요. 이런 성스러운 곳에 지금 우리가 와 있습니다.”
이어서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을 친견히고 공양을 올리고 108배를 올리면서 순례객들은 스님께서 누차에 걸쳐 말씀하긴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더 느꼈습니다.
진신사리탑터를 나와서 스님께서는 구걸하는 아이들을 일렬로 앉혀서 한명 한명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탕을 똑같이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 사탕 먹고 다음 생애에는 스님이 되겠습니다” 라고 따라하라고 하십니다. 아이들은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른채 무작정 따라하면서 사탕을 받고선 마냥 좋아합니다.
버스에 올라타서는 쉬라바스티 천축선원에 도착할 때까지 8대 성지와 3군데의 진신사리탑을 친견하면서 그동안 느꼈던 나누기와 장기자랑 시간을 가지면서 하루의 회포를 풀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 거리를 달려 저녁 9시가 되어서야 오늘 숙소인 쉬라바스티의 천축선원에 도착했습니다. 별을 보고 시작한 이른 하루를 밤이 깊어 별을 보면서 길고 뿌듯한 하루 일과를 마칩니다. 숙소에 짐을 풀자 일정을 정리하는 잔잔하고 세심한 스님의 안내 음성이 수신기를 통해 들려왔습니다.
스님께서는 순례단이 모두 숙소로 들어간 후, 천축선원 주지 대인 스님을 비롯해 이곳에서 불사를 하고 계신 스님 분들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같이 차담을 나누셨습니다. 천축선원에서는 정토회 순례단을 위해 오늘과 내일 국과 밥, 반찬 등을 정성껏 지어 주신다고 하셔서 스님들께서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새책 <지금여기 깨어있기>와 수건, 양말, 다이어리, 치약, 비누, 볼펜, 커피, 샴푸, 런닝 등 생필품 한 박스를 선물했습니다.
내일은 기원정사가 있는 이곳 쉬라바스티에서 새벽 정진으로 하루를 시작해 천불화현탑과 기원정사, 앙굴리말라탑, 수자타장자탑을 참배할 예정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가장 오래 머무셨다는 이곳 쉬라바스트에서 하루 종일 부처님의 숨결을 느끼며 머물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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