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 인도성지순례 15일째 델리
▲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델리 인도국립박물관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성지순례를 떠난지 마지막 날인 15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아그라에서 하룻밤을 자고 오늘은 오전 8시에 숙소를 출발합니다. 순례 기간 동안 매일 새벽3시, 4시에 출발했는데, 어제 일정 공지 시간에 스님께서 “비싼 호텔에 잤으니까 본전을 좀 뽑아야 되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8시에 출발한다” 고 하니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습니다. 7시부터 로비로 내려오는 순례객들의 얼굴을 보니 다들 샤워도 하고 머리도 감았는지 깔끔한 모습들입니다.
버스에 올라타 이제 마지막 여정인 델리로 향합니다. 버스가 델리를 향해 출발하자 스님께서는 송수신기로 “잘 주무셨어요?” 라고 인사를 하십니다. 순례단의 밝은 표정들을 보며 스님께서 “좀 씻으니까 좋아요? 뭐 씻으나 안 씻으나 달라진 게 없네” 농담을 하시니 모두들 크게 웃습니다. 그리고 또 “이제 오늘부터는 노상 방뇨의 자유가 사라졌어요. 노상 방뇨하던 버릇을 한국, 미국, 독일로 가져가면 안돼요” 말씀하시니 다들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노상 방뇨를 할 수도 있겠다’ 싶은 공감이 되었는지 깔깔깔 웃습니다.
아그라에서 델리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 성지순례를 다니며 보았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4차선 고속도로가 깨끗하게 펼쳐져 있고, 양 옆으로 아파트가 줄줄이 건축되고 있고, 사람들이 모두 신발을 신고 다녔습니다. 순례단이 다닌 비하르주에서 만난 맨발로 헐벗은 차림의 인도인들과 허름한 집들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풍경이었습니다.
▲ 인도에서 유일한 고속도로라고 하는 아그라와 델리 사이의 야무나 익스프레스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간에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가 버스 안에서 어젯밤 숙소에서 미리 싸둔 주먹밥을 꺼내 먹었습니다. 다들 우리 조가 싼 주먹밥이 더 맛있다며 자랑도 하면서 함께 나눠먹고, 마지막 여정의 아쉬움을 달래며 쉴새 없이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 버스 안에서 먹는 주먹밥
오전 12시20분경 무렵 델리 박물관에 도착한 순례단은 도착한 순서대로 세 그룹으로 나뉘어서 스님께서 해주시는 박물관 안내를 들었습니다. 검색대를 통과해야 해서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길었지만, 도반들과 정겹게 이야기도 나누느라 모두들 표정이 밝습니다. 특히 박물관 안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얘기를 듣고 다들 기대감을 안고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박물관에 안에 들어서자 입구에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까지 스님께서 차례대로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이곳은 델리 인도국립박물관입니다. 인도의 모든 문화유물을 전시하고 있어요. 첫 번째 전시실에는 고대 인도 문화인 인더스 문명에 대한 유물이 있습니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가 여기 그려져 있는데, 우리 입장에서 보면 황하 문명 보다도 천년 내지 2천년 앞선 요하 문명이 발견되었어요. 우리의 배달문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앞으로 세계적으로 인정이 되어서 밝혀지면 세계 4대 문명이 아니라 세계 5대 문명이 될 수 있죠.
▲ 국립인도박물관
인더스강 유역에 영국 사람들이 철도를 놓다가 노동자들이 자꾸 어디서 벽돌을 가져와서 “어디서 가져오느냐?” 물었더니 “땅에서 캔다”고 하는 겁니다. 벽돌을 땅에서 캔다는 것이 말이 안되잖아요. 그래서 가봤더니 진짜 땅 속에 벽돌이 가득한 거예요. 조사해 보니 고대에 아주 발달된 도시의 집터와 신전터인 5천년 된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초기에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지역에서 발견되면서 이 지역이 유명해졌는데, 여기 점 찍어 있는 지역에서 유적이 다량으로 발견되었어요. 구자라트, 하리아나 지역까지 포함한 이 전체를 인더스 문명이라고 부릅니다. 인더스 문명은 유물로 연대 측정을 했을 때 한 5천년에서 4천년 전의 문명입니다. 문자가 일부 발견되었는데 아직 해독이 안되고 있고, 이 문명이 왜 어느날 갑자기 망했는지는 현재로서는 아직 밝혀지지가 않았습니다. 현재 추산하기로는 원주민이였던 흑인 계열의 드라비다족의 문명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망하고 지금으로부터 3천5백년 전에 북쪽에 있는 아라안족이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지금의 파키스탄 지역으로 내려와서 동쪽으로 이동해 간 것이 동아리안, 서쪽으로 이동해 간 것이 서아리안입니다. 서아라인이 오늘날 유로피안이 되고, 동아리아인이 인도의 브라만 문명이 됩니다. 브라만 문명의 마지막 쇠퇴기에 붓다가 출현합니다. 붓다가 출현했을 당시에 문명의 중심은 힌두스탄 평원에 있었고, 고대 문명의 중심은 인더스강 유역에 있었습니다. 비옥한 토지가 다 갠지스강 유역에 있는데 왜 고대 문명은 인더스강 유역에 발달했을까요?
고대 문명은 모두 산림 지대가 아닌 건조 지대인 초원에 발달했어요. 그 이유는 당시에 사용하던 도구가 석기였는데 석기로는 풀은 벨 수 있지만 나무는 벨 수 없습니다. 그래서 초원 지대에 초기 문명이 발달했습니다. 그 다음에 제기로 청동기가 나오고, 결국 청동기로 무기도 만듭니다. 그리고 철기가 나오면서 도끼, 칼 같은 도구도 만들면서 산림 벌채가 가능해졌고, 그러면서 온대 산림 지역이 개간되기 시작한 겁니다. 중국도 첫 문명에 황하문명이었는데 나중에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 양자강 이남이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인도도 마찬가지로 인더스 문명은 초기 문명이고 3천5백년 전부터 철기가 나오면서 갠지스강 유역이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유적들은 5천년 전에서 4천 8백년 전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오래된 유물들이죠.
여기 보시면 장신구가 많이 있죠. 4천 5백년 전의 장신구인데 지금 목에 걸어도 괜찮을 정도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목걸이 귀걸이 다는 것은 역사가 오래된 겁니다.
여기는 마우리안 왕조 때 것인데 BC4~3세기 부처님 입멸 후 200년 뒤에 아쇼카왕이 탑을 쌓고 하면서 조각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조각이 굉장히 정교한데 당시의 문명 수준이 아주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여기에 돌 색깔이 흰색 비슷하게 나는 것을 ‘아무라바티’라고 합니다. 남인도에 가면 두 종류의 불교 유적이 있는데 하나가 ‘아무라바티’, 하나가 ‘나가르쥬나콘다’입니다. 나가르쥬나콘다 양식은 아주 활석 같은 맨들맨들한 돌에 새겨진 것이고, 아무라바티 양식은 약간 흰색이 나는데 거칠어요. 여기 문양은 다 부처님의 일생과 전생 이야기가 새겨져 있습니다.
▲ 아시타 선인에 관한 이야기가 새겨진 조각
이 문양은 어떤 이야기인지 금방 알 수 있는데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정반왕이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시타 선인이예요. 무릎 꿇고 무얼 하나 얹어 놓고 있지요. 그게 싣다르타 태자예요. 태자의 관상을 보는 것을 조각으로 표현한 겁니다.”
아시타 선인이 태자의 관상을 보고 예언하는 장면은 엊그제 카필라성에서 스님으로부터 자세히 설명을 들은 부분이여서 그런지 순례객들 모두 “오호!” 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 “바보도 티는 소리 나온다” 라고 농담을 하셔서 또 모두들 크게 웃었습니다. 다음은 쿠샨 왕조의 유물이 있는 칸으로 넘어왔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쿠산 왕조인데 AD 1세기에서 3세기 경의 유물입니다. 간다라 미술이 발달하고 마투라 조각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마투라 조각은 붉은 사암에 여성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고 있어요. 마투라 조각은 여성의 성기도 노출해 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뭘 그렇게 거기를 자세히 보려고 해요?” (웃음)
▲ 붉은 사암으로 만든 마투라 양식의 조각
마투라 양식의 여성 신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하는 순례객들을 스님께서 농담을 하자 또한번 모두들 크게 웃었습니다.
칸을 넘어가며 시대 순으로 다양한 불상들이 펼쳐졌습니다. 다만 5세기 굽타시대까지는 불상들이 많이 보이는데 그 이후에는 대부분 힌두교 신상들이 많아지면서 인도에서 불교가 세력이 약해져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여기 불상을 보시면 상호와 어깨를 보면 힘이 느껴지죠? 간다라 시대의 불상입니다.
▲ 간다라 시대의 불상
여기는 굽타 왕조인데 AD 5세기 경의 유물입니다. 굽타 왕조까지가 불교 국가의 모습입니다. 여기 보시면 부처님 허리에 끈을 맨 자국이 있고 얼굴이 동굴동굴하게 동안으로 되어있죠. 이것은 사르나트식 불상입니다.
▲ 사르나트식 불상
힌두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슈누의 8번째 화신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힌두교 안에서는 하나의 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기는 다 힌두교 신상입니다. 불상처럼 생겼는데 아랫도리가 노출되어 있는 이것은 자이나교의 마하비라상입니다.
▲ 자이나교의 마하비라상
나머지는 다 신상입니다. 이 신상은 사람들이 가슴을 하도 많이 만져서 반짝거리네요.” (웃음)
▲ 사람들이 많이 만진 부위가 반짝 거리는 힌두교 신상.
힌두교 신상의 가슴이 반짝 거리는 것을 보며 다들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연대 순에 관계 없이 여러 가지 불상들이 모셔져 있는 칸에 들어왔는데 스님께서 “바로 이곳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습니다” 라고 말씀하시자 모두들 “와!” 하면서 감탄사를 쏟아내었습니다. 눈이 동그래져서 진신사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순례객들에게 스님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 삐쁘라하와에서 발굴된 부처님의 진신 사리
“여기에 바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습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3군데에서 나왔다고 했죠. 바이샬리에서 나온 진신사리는 현재 파트나 박물관에 있고요. 랑그람 진신사리탑은 아직 발굴을 안했다고 했고요. 이것은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 진신사리를 여기로 옮겨온 것입니다. 1800년대 말에 영국 사람이 거기서 이 사리 용기를 발굴했어요. 그리고 1900년대 중반에 다시 발굴을 했는데 탑의 더 밑부분에서 또 사리 용기가 나왔어요. 저 유리관 속에 있는 것이 부처님의 진신사리입니다.
사리는 유골을 의미합니다. 유골이 그냥 방치되면 썩어 버리잖아요. 그런데 미라처럼 오랫동안 용기에 보관이 되면서 돌처럼 되었어요. 그러나 뼛조각의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번 한국 스님들이 와서 이것을 보고 “가짜다” 라고 말하는 모습을 봤어요.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사리라고 하면 아주 영롱한 보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세히 보시면 뼛조각 모양이 확실합니다.” (웃음)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은 엊그제 순례단이 직접 가서 참배하고 예불 공양을 올린 곳이어서 스님의 설명이 더 사실적으로 와닿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사리는 보석이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자 또한번 모두들 자신도 그러했다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30cm 앞에서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꼬집어 보고 싶을 정도로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2600여년 전 고통받는 중생들의 행복을 위해 평생을 길에서 살다가신 그 분의 흔적이구나’ 하며 찬탄 공경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스님께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향해 우슬착지로 찬탄 공경합시다” 하시자 모두들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진신사리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공경의 예를 포했습니다. 스님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오른쪽으로 빙 돌면서 더 가까이서 진신사리를 친견하는 시간을 가진 후, 스님께서는 박물관 안내를 모두 마치셨습니다.
시간 여유가 좀 생겨서 박물관 안쪽 정원에서 짜이와 음료를 나눠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오후 2시가 되어서 ‘라즈가트’로 이동했습니다. 라즈가트는 인도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마하트마 간디를 화장한 곳이라고 합니다. 무너진 벽돌 더미에 황량하기만 했던 부처님의 성지와는 달리 라즈가트는 넓은 공간에 잔디밭으로 깔끔하게 둘러싸여 공원처럼 잘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간디를 화장했다는 그곳으로 걸어가면서 스님께서는 간디의 삶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해주셨습니다.
▲ 간디를 화장한 곳인 라즈가트
“이곳 라즈가트는 마하트마 간디를 화장한 곳인데 인도 사람들이 굉장히 성스럽게 여기는 곳입니다. 간디는 인도 독립의 아버지이며 국부라고 말할 수 있죠. 비폭력 운동을 해서 인도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대항하려 할 때 오히려 단식을 해서 폭력을 하지 못하도록 했죠. 간디를 화장한 후에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고 해서 계속 불꽃이 타오르도록 해놓고 있습니다.
인도가 원래 면화 생산이 많고 면직물이 발달해서 그것을 주변 나라에도 수출하면서 부를 축적했는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면직물 생산이 기계화되고 인도는 오히려 원료 공급처가 되고 모든 면직물들이 소비시장으로 전락했어요. 거기에 반대해서 간디가 운동을 한 것이 물레 운동입니다. 자기가 직접 실을 뽑아서 베를 짜서 옷을 입으면서 영국에 저항을 했습니다. 또 영국 사람들이 소금에다가 세금을 많이 부과한다고 해서 그것을 안 사먹고 바닷가에 가서 직접 소금을 생산하는 저항 운동도 했습니다.
인도 사람들이 많이 지지한 것도 있지만, 사실은 영국 사람들이 감동을 해서 오히려 독립의 길이 열렸다고 볼 수도 있어요. 식민지 지배를 했던 총독의 딸이 간디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같이 따라다니고 했다고 해요.
간디는 근대에 출현한 성인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인도 사람들에게는 부처님과 같은 반열에 오를 만큼 존경을 받는 분이죠. 인도인에게는 거의 신이 된 분이예요. 부처님처럼 비폭력 운동 등 인류에게 많은 희망을 준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할 즈음에 힌두와 무슬림과의 갈등이 심해집니다. 힌두와 무슬림 사이의 갈등으로 파키스탄이 인도로부터 분리독립을 하게 되었는데, 간디는 이 분리독립을 막으려고 “정권을 무슬림에게 넘겨주더라도 우리는 분리하면 안된다” 이렇게 주장을 했어요. 그래서 힌두의 극단적인 청년한테 결국 암살을 당했습니다. 1947년 1월 26일날 인도가 독립을 했거든요. 독립된 인도에서 1년 밖에 못 살았어요. 1948년 1월 30일날 암살을 당했으니까요. 독립을 위해서 50년을 싸웠는데 독립된 나라에서는 1년 밖에 못 살고 돌아가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이렇게 설명을 마치고 “모두 라즈가트를 향해 서서 삼배를 드리고 해탈주 일편을 독송하자”고 하셨습니다. 순례단은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준 간디의 삶을 떠올리며 정성껏 삼배를 하고, 화장터를 향해 해탈주를 독송했습니다.
화장터 자리에는 지금도 꺼지지 않는 불꽃이 계속 활활 타오르며 간디의 넋을 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원 한켠에 “My life is my massage” 라고 적힌 간디의 명언이 잔잔한 여운을 남겨주기도 했습니다.
라즈가트를 나와 길을 건너니 간디 박물관이 나왔습니다. 간디의 전 생애가 다양한 사진들로 전시가 되어 있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주마간산 식으로 쭈욱 훑어보고만 나왔습니다. 간디가 얼마나 인도 민중들의 행복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는지 사진으로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 간디 박물관
오후4시에 다시 버스에 올라타 공항 근처에 있는 만찬장으로 향했습니다. 만찬장에 도착한 순례객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곧 있으면 한국으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기분에 살짝 들떠있는 것 같았습니다.
▲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 만찬장
만찬을 시작하면서 스님께서 가장 먼저 인도인 한분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수쿨라지’ 라는 분인데 1991년 스님께서 처음 인도성지순례를 하러 오셨을 때, 영축산이 있는 라즈길에서 처음 만나 그곳 성지를 이분이 안내해 주셨다고 합니다. 수쿨라지는 스님께 환영의 의미로 작은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 스님의 첫 인도성지순례 때부터 인연이 된 수쿨라지
성지순례의 시작과 함께한 인연이라고 하니 순례객 모두 뜨거운 박수갈채로 수쿨라지를 반갑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인도 델리 불자회에서 두 분이 오셔서 스님께 꽃다발을 선물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내일 인도 델리 불자회 분들을 위해 법회를 해주실 예정입니다.
▲ 스님을 꽃다발을 전달하는 인도 델리 불자회 분들
이어서 13대의 차량을 각각 담당해준 차장님들이 앞으로 나와서 그동안의 소감을 이야기하고 인솔에 잘 따라준 순례객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 차량별로 노래를 잘하는 분들이 나오셔서 즐겁게 노래하며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수고가 많으셨던 법사님들도 앞으로 나와서 인사하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이번 성지순례 운영을 전체 총괄한 선주 법사님은 “부처님 당시를 재현한 듯한 오백 대중 중에 한명이어서 너무나 영광이었다”고 하면서 “언젠가는 천이백오십명이 함께 순례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고 말씀하셔서 순례객들도 큰 박수로 호응을 해주었습니다.
차량별로 비행기 출발시간이 모두 달라서 만찬 도중에 공항으로 먼저 출발하는 차량들도 있었습니다. 먼저 저녁7시에는 유수스님과 함께 11호, 13호 차량이 공항으로 출발했고, 7시20분에는 묘덕 법사님과 함께 3호, 7호 차량이 출발했습니다. 7시50분에는 선주법사님, 보수법사님, 묘당법사님과 함께 1호, 2호, 8호 차량이 출발했습니다. 선주법사님과 함께 가는 이 차량들은 오늘 델리에 하루 더 숙박한 후 내일 델리 인도국립박물관을 관람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일찍 떠나야 하는 차량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나머지 분들은 더 남아서 서로 소감을 나누고 어울리는 시간을 더 가졌습니다. 스님께서는 만찬을 마무리하시면서 “순례 기간 동안 한국 돈 339만원, 인도 돈 33만 루피, 달러 11,000$, 영국 돈 250 파운드가 보시 들어왔다”고 전해주시고, “이 돈은 수자타아카데미에 기증해서 아이들을 위해 잘 사용하겠다”며 순례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셨습니다. 8시20분 무렵 모든 일정을 마치고, 스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공항으로 출발하는 6호차를 향해 작별의 손을 흔들어 주셨습니다. 버스 안에서도 스님께 작별의 손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공항으로 출발한 6호차를 향해 손을 흔드시는 스님
스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전화 통화를 하시며, 순례단이 모두 공항에 잘 도착했는지 출국 수속을 무사히 잘 밟았는지 확인하시며 순례단을 애정있게 챙기셨습니다.
이상으로 지난 15박 16일 동안의 제26차 인도성지순례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그동안 성지순례를 함께 하는 마음으로 스님의 하루를 열심히 읽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 말씀 드립니다.
오늘밤 델리 불자회에서 운영하는 법당에서 하룻밤 주무시는 스님께서는, 내일 오전8시부터 델리 정토불교대학 졸업생들을 위한 수계식을 비롯하여, 1,2,8호차의 인도국립박물관 관람 안내, 델리 교민들을 위한 강연, 인도인들을 위한 통역 강연까지 쉴틈 없는 일정을 하루 종일 가지실 예정입니다. 그리고 방콕에 들러 방콕 정토불교대학 졸업 및 수계식을 하고, 정토회 제4차 백일기도 입재식 참가를 위해 모레 한국으로 귀국하실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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