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다시 읽는 시 [내 시를 말한다.] 까맣다/ 김선아

맑은물56 2013. 7. 11. 09:38

다시 읽는 시 [내 시를 말한다.]

 

'착한시인'이기를

 

김선아(시인)

 

 

TV 시청에 별 취미 없던 저에게 정다운 프로그램이 하나 생겼습니다.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을 찾아가 다각도의 검증 절차를 밟은 후 '착한식당'으로 선정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안심 먹거리, 손맛의 진수를 탐색해가는 과정이 제법 흥미롭습니다. 친환경 재료만 사용하는 김밥집, 직접 밀을 재배하여 쓰는 칼국수집, 직접 잡은 자연산 전복으로 만드는 전복죽집……. 이 '착한식당'들은 한결같이 규모는 작지만, 자긍심을 주재료로, 정직을 양념으로 쓰기를 고집하는 '정성꾼'의 작품이었습니다. 고객이 기대하는 식감과 미감을 제공하고, 고객들은 ‘제대로 사람대접을 받는 맛이야.’ 감동하며 귀소본능처럼 다시 그 집을 찾곤 한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느 식당이 인공조미료를 사용하다 그만 착한식당에서 탈락되었습니다. 시청자들과 검증단 모두 안타까워 '준착한식당'이라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내더군요. 마침 그 장면을 시청하던 중 저는, 졸시 ‘까맣다‘가 〈다시 읽는 시〉에 선정되었다는 고마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시에도 ‘착한시’와 ‘준착한시’, 착하지 않은 시가 존재할까요? 잠시 말도 되지 않는 상념에 젖어 보았습니다. 타인의 입맛만 의식하여 조미료 같은 잔기교에 집착하지 않았을까, 한 끼니의 입질거리도 못 되면서 허울만 번지르르한 시, 자신조차 기만하는 시를 써 놓고 자만하지 않았을까, 스스로를 검증해 보면서 저는 ‘까맣다‘를 다시 꺼내어 그 시의 한 귀퉁이에 적어 두었던 시작메모를 읽어보았습니다.

 

버림받은 자보다, 떠나간 자가 느낄 슬픔의 빛깔.

 

꽃 진 자리 / 남겨진 사랑 / 별세하신 아버지 / 이루지 못한 정의 / 가져오지 못한 설산 / 돌아앉아 우시는 부처님

 

적막이다. 까맣다. …………………………〈 ‘까맣다‘의 시작메모〉

 

시작메모엔 시의 발상 단계, 즉 초발심이 담기게 마련이지요. '까맣다'는 슬픔의 자리에 수천만 근의 무게로 내려앉은 적막의 빛깔을 응시하면서, 어스름빛, 약사발빛 고독이 주는 누군가와도 공유할 수 없는 그 빛깔을 단숨에 써 내려갔던 작품입니다. 오늘은, ‘나에게 시란 무엇일까?’라는 원론적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시를 독대하는 경외감과 순정이 내 숨통에 얼마나 고여 있는가를 확인하는 자기 검열의 뜻이지요. 그동안 시에게 속삭였던 다짐, 내밀한 고백을 떠올려 봅니다.

 

당신,

 

어느 글에서 보았습니다. 우리 몸속 핏줄의 길이는 지구 두 바퀴 반이라더군요.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의 영혼을 향하여 매 순간순간, 삼보일배하며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때때로 터무니없이 몰아치는, 회오리 같은 외로움, 서러움, 그리움, 두려움을 다 독여주고 얼굴 쓸어주는 이가 바로 당신이었기에 지구 두 바퀴 반이라는 당신 핏 줄 속, 그 순례길을 내일도 또 내일도 나는 어김없이 삼보일배할 것임을 고백합니 다.

내 영혼과 내 육신이 자취 없어질 때까지 사랑의 진면목과 마주설 수 있도록 스스로를 간절히 보듬어 나가겠습니다. 당신과의 치열한, 아름다운 사랑을 눈부시게 완성해내고 싶습니다. 당신 핏줄 끝에 피어 있을 한 송이 꽃과의 해후, 내 생애는 얼마나 황홀하겠습니까.

 

당신을 사랑합니다.

 

다시 받고 싶은 밥상이 있듯 다시 읽고 싶은 시가 있지요. 그저 삼보일배의 심정으로 시를 섬겨야겠지요. 누군가에게 진심을 다해 영혼을 건네주고, 순결한 손길로 건네받으며, 삶의 실상이 눈물이고, 파괴이고, 외로움이고, 절벽이더라도 칠흑 속에서 반짝이는 별빛의 황홀을 찾아 서정성 넘치는 시, 격조 있는 시로서의 위의를 지켜내야겠지요. 적막의 세상, 적막의 속내를 암중모색하는 시인이 되어야겠지요.

영혼이 담긴 손맛으로 고객을 감동시키는 '착한식당'처럼, 인간성의 고귀함에 대한 귀소본능을 자극할 수 있는 글맛 나는 시를 쓰겠습니다. 제 스스로 '착한시인'이기를 독려하여 기꺼이 시라는 밥상 위에 조촐한 사랑과 그윽한 감동을 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