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스크랩] 노호 김기홍 1,2/ 윤효

맑은물56 2013. 6. 19. 17:01

 

 

 

 

노호 김기홍 1/ 윤효

 

전교생이 만세를 불렀다는 이유로 그들은 불을 질러 버렸지만 이제 우리가 다시 일으켜 세워야하지 않겠느냐고

 

스물세 살 청년이 찾아와 거금을 내놓았다.

 

할아버지 몰래 땅문서 맡기고 빌린 돈이었다.

 

1919년 오산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노호 김기홍 2/ 윤효

 

그의 이름 ‘기홍(起鴻)’을 한자로 새기면 ‘날아오르는 큰 기러기’인데 도무지 날아오를 수 없었다 한다.

 

어느 날 도산 안창호 선생으로부터 ‘노호(노호)’, 곧 ‘갈대 그윽이 우거진 호수’란 호를 받고서야 비로소 늪푸른 하늘까지 날아오를 수 있었다 한다.

 

- 시집 『햇살 방석』(시학,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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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강 이승훈 선생이 1907년에 설립한 오산학교는 수많은 민족인사와 인재를 배출한 명문 사학이다. 고당 조만식 선생이 오산학교 교장으로 있는 동안에 학교의 틀이 잡히고 기독교 학교로서 그 명성도 날렸다. 배출된 인재들 중에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 김홍일 장군, 함석헌 선생 같은 분들이 있다. 그리고 춘원 이광수가 약관 19세의 나이에 교사로 부임하여 민족주의 정신을 고취시키고 문학의 바람을 일으켜, 안서 김억, 소월 김정식, 백석으로 이어지는 오산 문인의 맥을 이루기도 하였다. 화가 이중섭도 오산 출신이다.

 

 오산학교는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는 오산이란 마을에 예전 서당으로 쓰던 집을 빌려 그대로 학교 건물로 사용하였으나, 학교의 건학 정신은 구한말의 썩고 병든 사회를 새롭게 하여 새 세상을 건설하고 민중혁명의 보금자리가 되자는 높은 뜻을 품고 시작한 학교였다. '네 손이 솔갑고 힘도 크구나. 불길도 만지고 돌도 주물러 새로운 누리를 짓고 말련다. 네가 참 다섯 뫼의 아이로구나.' 춘원이 작사한 오산학교의 교가 가운데 일부다. 오산학교 출신은 이렇듯 그저 평범한 졸업생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구국 인재의 양성을 통하여 국운개척을 열망하는 겨레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창립되었기에 조국의 근대사와 그 명운을 함께 하였으며, 그에 따른 핍박과 수난도 예상 못할 바는 아니었다. 남강선생은 105인 사건으로 투옥된 후 출옥하면서 새로운 교사를 짓고 교육에 전심하였으나, 1919년 3.1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또다시 투옥되고 학교 교사는 일본 헌병들이 석유를 뿌려 불살라 버렸다. 폐교의 운명에 놓인 학교를 살려낸 이가 바로 당시 23세의 이 학교 출신 김기홍이었는데, 할아버지 땅문서를 몰래 잡혀서 마련한 거금 7천원을 쾌척하여 폐허가 된 학교를 다시 일으켰다.

 

 그는 이후 오산학교의 교장과 이사장을 지내고 교정에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함석헌 선생, 주기용 선생과 함께 그의 흉상이 동상으로 세워졌다. ‘비로소 높푸른 하늘까지 날아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평북 정주에 있던 오산학교는 한국전쟁 때 제2 재건운동을 펼친 김기홍과 주기용 등에 의거 부산 동대신동에 재건됐다가 이후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를 거쳐 1956년부터 한강이 내려다뵈는 언덕배기 지금의 보광동에 자리를 잡았다.

 

 이 시를 쓴 윤효 시인(본명 윤창식)은 현재 이 학교의 교장으로 계신 분이다. 노호 김기홍도 이 시대 다시 그리워지는 오산인 가운데 한 분이다. 이곳 출신 인재들을 열거하자면 열 손가락으로는 어림 턱도 없다. 현직 교장으로서 학교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는 당연한 노릇이겠다. 얼마 전 만나 뵌 그의 눈빛이 참 선하면서도 예사롭지 않았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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