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물의 이야기/자연을 찾아서

[스크랩] `서동요` 설화에 얽힌 `진실` 혹은 `거짓~`

맑은물56 2012. 1. 13. 14:40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동요의 내용대로라면 마를 캐어 장에 내다팔던 가난한 청년 서동. 그는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려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한다. 그리고 훗날 백제의 왕이 된다. 서동요에 나오는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이 서동요는 가난하고 힘없는 한 사람의 인생역전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의 환상이 힘든 순간을 견디게 하는 힘이라고 할지라도 그 이야기의 진정성 여부는 도외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공허한 사랑이야기가 아닌 진실한 사랑이야기가 더욱더 그리워지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 더 이상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이야기를 맹목적으로 믿을 수 많은 없다.

   

 

 

 

 

    백제와 신라를 넘나드는 러브 스토리로 주목받았던 서동요 설화가 전북 익산 미륵사 터 서탑 안에서 나온 사리 봉안 기록 판독 결과 허구로 드러났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 기록  <미륵사는 무왕의 왕비 선화 공주의 발원으로 용화산 아래 건립되었다>는 내용을 근거로 하여 기존 사학계에서는 서동요 설화의 주인공으로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 공주와의 결합을 역사적 사실로 지적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 된 사리 기록에서는 무왕의 왕비가 신라의 선화 공주가 아니라 백제 좌평(장관 벼슬) 의 딸 출신인 백제 왕비가 발원하여 AD 639년에 익산 미륵사가 지어 진 것으로 판명 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무왕을 제 29대 법왕의 아들로 기록했으나 중국의 북사와 수사에는 제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적고 있다.

 

  법왕은 정적들에 의해서 제거 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면 무왕을 추대한 세력은 법왕의 정적이었던 위덕왕의 아들 아좌 태자이거나 위덕왕의 측근세력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백제 제 30대 무왕의 혈통은 제 26대 성왕과 제 27대 위덕왕 계열로 이어지는데 이 AD 6C 중엽에는 백제와 신라 간의 영토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다.

 

  성왕은 아들 위덕태자를 구하러 관산성에 가던 중 생포되어 신라 장수에게 머리가 잘리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또 위덕왕도 왕위 시절 내내 선친 성왕에 대한 보복전쟁을 반복했기 때문에 신라와 원수 같은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위덕왕의 아들인 무왕이 신라와 갑자기 화친하여 선화 공주와 결혼했다는 상황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그러면 왜 서동요 설화가 우리 역사속에 끼어들게 된 것일까? 현대 역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삼국유사를 기록한 일연스님의 실수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렇다고 해도 역사 기록을 벗어나서 좀더 다른 측면의 해석도 가능해 지지 않을까?

 

  백제 패망 이후 백제 유민들 사이에서는 백제 부흥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힘으로 백제를 무너뜨리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백제 유민들의 마음까지 정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가 백제 유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무엇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혹 '서동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신라의 '선화공주'와 백제의 '무왕'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한다면 실제로 성난 백제 유민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에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지 않았을까? 이런식의 해석이 가능해지면 서동요를 만들어 유포한 발원지가 백제가 아니라 신라라는 유추가 가능해진다.

 

 

 

 

 

   또다른 설로는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편을 토대로 하여 서동요 주인공이 김유신의 부모 이야기라는 것이다.


   김유신의 아버지는 김서현이다. 김서현은 가야파를 대표하는 각간 김무력의 아들이다. 그 서현랑이 만명공주와 사랑에 빠졌다. 만명공주의 어머니 만호태후는 둘의 사랑을 극렬히 반대해서 만명공주가 궁밖에 출입하는 것을 전면 금지했다. 그러나 만명공주는 밤에 몰래 궁궐 담을 넘어 서현랑과 정을 통하곤했는데 그 소문이 세간에 퍼지면서 아이들의 입에서 노래로 불려질 정도였다.

 

  이 사실을 안 만호태후는 진평왕에게 대책을 논의했고  이에 진평왕은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서현랑을 변방 만노군의 태수로 발령내어 서라벌을 떠나게한다.

 

   한편 만호태후에 의해 반 연금 상태가 된 공주는 그 소식을 듣고 결단을 내린다. 그녀는 암암리에 궁중의 호위무사들을 매수하여 경계를 느슨하게 한 후 궁궐을 탈출하여 임지로 떠나는 서현을 뒤쫒는다.

 

  결국 두 사람은 마침내 두 집 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머나먼 변방에서 보금자리를 만든다. 만호태후는 진노하여 공주와 의절을 선언하지만 불과 몇년 후에 마음을 고쳐먹는데 그 계기를 만든 사람이 바로 김유신이었다.


   김유신은 태어나면서부터 기이한 조짐을 보였고 성장하면서는 범인과 차별되는 언행으로 주위를 놀라게했다.


  김유신에 대한 소문은 만노군을 넘어서 서라벌의 고집스러운 만호태후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그로인해 유신에 대해 호기심을 일으킨 태후에 의해 마침내 만명공주는 서라벌을 떠난지 수 년 만에 유신을 데리고 궁으로 돌아온다.


  유신을 본 태후는 그 출중한 기상과 빼어난 자태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마침내 고집을 꺾고 두 사람의 혼인을 인정하기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 김유신 부모의 이야기가 서동요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또 신라가 백제를 정복했던 만큼 김유신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화자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실제로 그 진위 여부는 알수 없는 일이지만 여하튼 우리는 학창시절부터 '서동요' 설화를 문학의 한 텍스트로 공부해 오지 않았던가?

  

  그 진위 여부에 대한 설이 분분해서 최근에 더욱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서동요 설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부여 궁남지다.

 

  궁남지는 최근 역사학자들 사이에 백제 역사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는 한편 백제역사재현에 대한 발빠른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단장되고 있다.

 

  특히 궁남지는 여름에  찾으면 아름다운 연꽃들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그렇다고 궁남지가 꼭 여름에만 아름답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봄에는 연못을 둘러쌓고 있는 버드나무들에서 새싹이 돋아나오기 때문에 생동하는 우주의 기운을 느끼기에는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또 연못속을 유영하는 금붕어를 감상하는 것도 분주한 마음에 여유를 불어넣어 주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가을엔 가을대로, 겨울엔 겨울대로 그 나름의 멋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궁남지. 서동요 설화의 진실여부를 떠나 이토록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남겨준 백제인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출처 : 충남도청
글쓴이 : 짝꿍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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