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물의 이야기/자연을 찾아서

'금오신화'를 쓴 김시습은 왜 마지막을 무량사에서 맞았을까?

맑은물56 2012. 1. 13. 14:45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에 있는 무량사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아는 사람은 꽤 많다.

왜냐하면 시험문제에 많이 출제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시험문제 정답을 찾기 위해 그렇게도

입속에 넣고 굴려야했던 '금오신화'를 쓴 매월당 김시습은

무량사와는 또 뗄레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우리 역사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될 인물중에 한 분인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생의 마지막을 맞은 곳이 바로 무량사다.

 

 

 

어린시절엔 무량사로 가는 소풍이 지겹도록 싫었다.

그냥 아무런 의미도 없이

선생님이 가라니까 터벅터벅 따라갔다가

도시락 까먹고 보물찾기만 끝나면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무량사

어른이 되고 나서도 무량사에 자주 들렀던 걸로 봐서는

지금쯤 무량사 전문가가 되어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무량사에 대해 별반 아는게 없다.

다만 바로 위에 오빠가 대학입시에 떨어지고

재수를 하기 위해 무진암에 머물면서 있었던 일화를

기억하는 정도다.

그래서 이참에 제대로 알기 위해 다시 무량사를 찾았다.

 

 

 

 

난!  이 시점에서  참 불경스럽게도 이런 생각이 든다.

왜! 부처님은 다 저렇게 딴딴한 살집의 비만 체질일까?

불교에서는 거의 소식을 하거나 채식 위주 식단을 중요시 하는데 말이지

우리 나라 사찰에 앉아계신 부처님의 형상이 어느 문화권의 영향아래

저렇게 완성되었는지 사뭇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꼭 찾아보기로 하고

일단 오늘은 무량사를 찾은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매월당 김시습 선생에게 초첨을 맞춰보기로 한다.

 

 

 

 

내가 사찰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단연 1위는'공양'을 먹을수 있다는 사실이다.

먹을것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사찰에서 먹는 '공양'은

세상의 온갖 조미료가 빠져 있어서 좋다.

그리고 기름진 욕망이나 욕심이 빠져 있어서 좋다.

맘껏 먹고서도 탈이 나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바로 사찰음식이다.

속세에 내려와서도 사찰음식 재료를 구해다가 사찰 조리법으로 조리해 먹는다면

현대인들의 최고 고민이라고 할 수 있는 비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련만

결코 쉽지 않은 문제다.

 

 

 

 

무량사 내 영산전과 원통전 옆에 있는 매월당 영각 안에 모셔져 있는

매월당 김시습 선생 초상화다.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이 초상화는 보물 14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초상화는 세상을 등진다는 의미를 엿볼 수 있도록

갓이 아닌 패랭이를 쓰고 염주를 턱 밑으로 늘어뜨린 모습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생전에 두 점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하는데,

무량사에 있는 이 작품은 그 두 작품 중에 하나로 해석된다.

평자들은 이 그림을 해석할때

외적인 회화기법보다는 내적인 메세지가 강하게 표현된 작품으로 평가한다

 

어쩜 이 초상화 한점이 이름 없는 작은 사찰 무량사에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것 같다.

 

그럼 매월당 김시습은 과연 누구인가?

생육신,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의 저자. '부벽루'를 남긴 시인

명리를 버리고 온 세상을 부유하며 살다간 자유인 등이

김시습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 이력이다.

 

김시습은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를 하던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임금의 자리를 양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불가에 귀의한다.

이때부터 매월당 김시습은 설잠(雪岑)이라는 승려로 다시 태어난다.

그는 이때부터 관서, 관동, 영남, 호남을 유람하며 자유인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중 관서지방을 여행하던 중에 오른 부벽루에서

'부벽루'라는 시를 쓰기도 한다.

 

 

 

무량사에서 조금 벗어나 무진암가는 길가에

매월당 김시습 선생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병이 들어 홍치 6년(1493) 홍산현 무량사에서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난다.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지 않고 절 옆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3년 후 장사를 지내려고 염을 하는데 안색이 산사람과 똑같았다. 이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놀라 경탄했다고 한다. 불교의 예에 따라 다비를 했다. 이것은 승가에서 불태워 장사지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유골을 모아 부도를 만들었다."

 

출처-율곡 이이가 쓴 김시습전에서

 

그런데 왜 매월당 김시습은 이름도 없는 작은 사찰에서 생을 마감했을까?

혹 '무량'이라는 말이 '무량하다'라는 뜻에서 온 '무량'이라도 되는 것일까?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매월당 김시습이 생을 마감하기 위한 장소로

무량사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험하고 외진 곳이기 때문에 백 년이 지나도 나를 귀찮게 할 관리 하나 없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매월당 김시습이 무량사에 남긴 흔적은

영정과 부도 뿐이다

하지만 정녕 그가 후대에 남기고자 한 것은 헛된 욕망을 버리고

영원한 자유를 갈구하라는 진언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왜 시점에서

나옹선사의 시 한편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 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