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선이야기34-입중오사(入衆五事)
올 봄에 지나는 길에 곡성 태안사를 들릴 기회가 있었다. 20년 전 모습 그대로 절로 올라가는 계곡을 낀 숲길은 여전히 울창하고 고즈넉했다. 차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옛 추억을 되살려 능파각을 지나 오솔길로 법당을 향해 가는데 길옆에 다 부서져 널브러져가는 오래된 표지판 하나를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열반하신 은사 스님께서 태안사에서 지내실 때 손수 페인트로 쓰신 게시판이었다. “삼가 청정대중에게 알립니다. 삶과 죽음이 가장 큰 일인데 덧없는 세월은 빨리 가버리니 짧은 시간도 한껏 아끼며 방심하고 게으르지 말라”는 문구를 한문으로 써 놓은 것이었다. 은사 스님을 뵌 듯 반갑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세월의 무상(無常)함이 느껴져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은사 스님께서는 태안사에 주석하시면서 선방을 운영하셨는데 결제철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소참법문(小參法門)을 하셨다. 특히 대중간의 관계에서 불편한 마음이 느껴질 적엔 어김없이 소참법문을 통해 분위기를 바꾸어 놓으시곤 하셨는데 그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입중오사(入衆五事)이다. 입중오법(入衆五法)은 오분율(五分律)에 나오는 대중에서 지낼 적에 명심해야 할 다섯 가지 덕목에 대한 법문이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는 하의(下意)로 ‘마음을 겸손하게 가지고 스스로 낮추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자심(慈心)으로 ‘대중을 대할 때 늘 자비심을 가지고 사나운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셋째로는 공경(恭敬)으로 ‘선배 스님을 극진히 공경해야 한다.’ 넷째는 지차제(知次第)로 ‘순서를 잘 알아서 지켜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섯째는 불설여사(不說餘事)로 ‘수행에 관한 것 외에 일체 불필요한 말을 하지 말라.’이다.
여러 대중이 모여 살다보면 각기 살아온 환경이나 개성이 다르다 보니 갈등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수행(修行)을 위해 선방에 모인 것인 만큼 서로 하심(下心)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중을 대하고, 선배 스님을 잘 공경하며 모든 일에 순서를 어기지 않으며, 수행에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면 하지 않는다는 이 대중처소에서의 다섯 가지 원칙을 충실히 지키면 대중 간에 큰 불협화음이 없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다는 내용의 법문이다.
은사 스님은 젊은 시절 대중선방에서 몇 철 지내신 뒤엔 줄곧 토굴에서만 수행하셨다. 그런 스님께서도 토굴은 아무나 가서는 안 되고 대중처소가 자신의 공부에 방해가 될 정도의 사람만 토굴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대중생활은 하루의 일정이 일정한 시간표에 따라 운영되기에 밥을 먹기 싫어도 때가 되면 먹어야 하고, 더 정진하고 싶어도 대중을 배려해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지 못하게 되므로 초심자(初心者)는 대중생활을 통해 수행에 필요한 자량(資糧)을 기르고, 깊은 삼매에 들기 위해선 홀로 토굴에서 오로지 정진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곤 하셨다.
염불선이야기35-선지식(善知識)
마냥 어린 나이에 어른 스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살다가 세월이 지나 어른 스님이 열반하시고, 어느덧 내 자신이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처지에 놓이고 보니 어른 노릇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하게 된다.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에 들어선 후 부딪히게 되는 어려움 중 하나가 ‘어떤 분을 스승으로 모셔야 하는가.’라는 문제이다. 율장(律藏)에서는 대승(大乘)에서 ‘스승의 조건’을 세 가지 덕목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세 가지 중 첫째는 ‘계율(戒律)에 의지해 자기 마음을 조복(調伏)시킨 사람’이고, 둘째는 ‘선정(禪定)으로 산란한 마음을 다스린 사람’이며, 셋째는 ‘지혜(智慧)로서 아상(我相)을 없앤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인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실천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또 천태지의(天台智懿)스님은 <마하지관(摩詞止觀)>에서 세 가지 형태의 선지식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교수선지식(敎授善知識)’이다. 우리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이끄는 분으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선지식의 의미이다. 둘째는 ‘동행선지식(同行善知識)’으로 우리와 함께 수행하는 도반(道伴)을 말한다. 셋째는 ‘외호선지식(外護善知識)’으로 우리가 공부할 수 있도록 주변에서 물질적 정신적으로 후원하는 선지식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선지식이란 ‘불법(佛法)을 사무치게 깨달아 후학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깨달음이 행동과 일치해 다른 이의 모범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더불어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교수선지식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수행하는 도반도, 우리의 주변에서 물질적 정신적으로 후원하는 외호대중도 우리의 수행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열반하신 은사 스님의 연세가 마흔 무렵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스님께서 광주 추강사란 절에 머무실 때 한 제자가 말썽을 피우자 스님께서는 호된 꾸지람과 함께 그 제자를 절에서 쫓아내셨다고 한다. 그 제자가 절에서 나가면서 은사 스님께 편지를 남기고 떠났는데 그 편지의 내용이 “은사 스님은 저희에게는 바다와 같은 존재이신데 도랑물이나 시냇물 같은 저희를 깨끗하지 못하다고 거부하고 받아주시지 않으면 저희는 어디로 흘러가야 합니까?”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 편지를 읽으신 은사 스님께서는 부끄러운 마음에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훗날 나에게 이야기해주셨다. 그 이후로 연세가 드신 후에는 스님께서는 항상 제자들을 대할 때 엄격하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주셨다.
오늘, 서산스님의 게송이 유난히도 마음에 와 닿는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이리저리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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