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의 자세 / 문성해 시인論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의 독자들이 문성해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이유를 간단히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성이 있어서’일 것이다. ‘진정성’이라는 용어가 언제부턴가 방송 매체를 타면서 흔한 말이 되고 나서는 ‘진정성’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많이 희석된 것 같기도 하지만, 문성해 시인의 시가 진정성이 있다는 말은 진정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진정성’이라는 말에는 함께 내재되어 있는 문성해 시인 시만의 몇 가지 특징이 있다고 보인다. 그것도 간단히 말하라면 아마도 ‘순수’, ‘담백’, ‘체험성’ 등등일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즉, 그의 시가 단순한 시적 표상을 통한 체험적 세계의 具象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숭고’의 층위까지 아우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특유의 섬세하고 넉넉한 詩品이 아니고서는 이루기 어려운 독창적 지경인 것이다.
누구에게 꺾어 줄 수도
머리에 꽂을 수도 없는 꽃
하늘 향해 종주먹질하는 꽃
경주 황남동 냇가 옆 공터 올해도 파꽃은 무더기무더기 피어났어라 사람들은 이끼 낀 기와 지붕 아래 깊숙한 묘혈을 파고 앉아 동자승을 모시거나 기도문을 외우거나 밖에선 안을 볼 수 없는 문을 통해 골똘히 내다보네 시푸른 파밭 사이 낮게 비행하는 잠자리들과 종일 흘레붙던 개들을
동그란 마이크를 매단 파꽃
성게처럼 촉수를 뻗친 파꽃
파꽃은 굵고 튼실하네
파꽃은 쿨럭쿨럭 허공을 굴러가네
파밭 속에서 몇 시간째 시시덕거리던 미친 여자를 내쫓으려고 동굴 속에서 해골 같은 노인 하나 지게막대기를 끌고 나오네
파꽃이 희번덕거리며 도망치네
파꽃이 까르르까르르 허공을 굴러가네
- 문성해, 「파꽃」 전문
위 시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이동 카메라 같은 시선을 통한 경로는 우선 파꽃이 핀 파밭을 배경으로 시작하여 ‘공터’에 있는 암자인 듯한 ‘이끼 낀 기와 지붕 아래’ ‘묘혈’ 안쪽으로 옮겨간다. 거기서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문 밖 ‘파밭’과 ‘잠자리들’과 ‘개들’을 비춰준다. 그리고 몽타주처럼 다시 파꽃들을 보여주다가 이번엔 ‘미친 여자’와 ‘노인’의 희화화된 장면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시의 끝에 가서 ‘미친 여자’와 동일시되어 나타난 ‘파꽃’! 시인이 포착한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이 단편 영화에 참으로 많은 이미지와 인습적 풍경이 압축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 압축된 것들이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파꽃’은 다른 꽃처럼 누구에게 꺾어 선물로 줄 수도, 예쁘라고 머리에 꽂고 다니기도 힘든 꽃이다. 다만 하늘을 향해 ‘종주먹질’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종주먹질’이란 나와 반대의 입장에 선 이에게 내지르는 항변, 욕, 증오의 표시, 적대감의 표시, 모멸의 표시 등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파꽃’은 지금 한마디로 말해 무언가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중이다. 2연에서는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집단적인 행위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무심한 듯하면서도 무기력하게 한나절을 보내고 있는 서민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3연은 그런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파꽃’의 목소리, 날카로움, 힘을 보여주고 있다. 4연에서는 우리가 어렸을 적 많이 본 듯한 풍경, 아니 실제로 본 풍경이 담겨 있는데, 여기에는 ‘미친 여자’와 ‘노인’의 대비를 통해 미신과 우매와 오해와 욕망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미친 여자와 하나가 된 파꽃을 보여주는 4연은 1연의 파꽃이 그러한 것처럼 파꽃이 어떤 불만족스런 세상을 향해 ‘까르르까르르’ 웃어젖히며 ‘허공’을 굴러가는 무상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보면 ‘파꽃’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노인 등등의 일상을 비웃으며 자유롭고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초월자, 초탈자이다. 이 길지 않은 시로 시인은 우리네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다양한 풍경을 한꺼번에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문성해 시인 특유의 시각과 감성이 시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지점은 일상성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일상의 초월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데 있다. 즉, 초월적 세계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 그 자체라는 것을 발견과 현전의 작업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초월’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뛰어넘다’라는 본연의 의미를 포함하는 현실 이상의 것,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그 너머의 가치를 의미하며 이는 곧 미학에서 말하는 ‘숭고’이다. 문성해 시인의 시는 일상이 곧 이상적 가치를 지닌 세계라는 점을 잔잔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보여주고 있다.
할인점에서 고르고 고른
새 냄비를 하나 사서 안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때마침 폭설 내려
이사온 지 얼마 안된 불안한 길마저 다 지워지고
한순간 허공에 걸린 아파트만을 보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품속의 냄비에게서
희한하게도 위안을 얻는 것이었다
깊고 우묵한 이 냄비 속에서 그 동안
내가 끓여낼 밥이 저 폭설만큼 많아서일까
내가 삶아낼 나물이 저 산의 나무들만큼 첩첩이어서일까
천지간 일이 다 냄비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고
불과 열을 이겨낼 냄비의 세월에 비하면
그깟 길 하나 못 찾는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품속의 냄비에게서
희한하게도 밥 익는 김처럼
한 줄의 말씀이 길게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 문성해, 「냄비」 전문
시인이 ‘냄비’를 품에 안고 느낀 것은 ‘천지간 일이 다 냄비와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는 것이었다. 폭설로 지워진 길,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하고,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듯도 하여 불안한 화자에게 유일한 위안은 이 ‘냄비’인데 ‘냄비’는 무한한 ‘천지간’ 우주를 연결시켜 주는 탯줄처럼 시인의 품속에서 ‘밥 익는 김’의 온기를 전해주고 있다. 어느 미래에 ‘냄비’ 속에는 폭설만큼 많은 밥이 담길 것이고, 산의 모든 나무만큼 나물이 담길 것이다. ‘냄비’는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보물 항아리처럼, 쌀 한 톨을 넣으면 한 동이 가득 차고, 동전 한 잎 넣으면 수북이 차오르는 그런 항아리처럼 시인의 품속에서 시인과 우주를 이어주며 삼위일체의 동일성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그깟 길 하나 못 찾는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줄의 말씀’을 들려주는 ‘냄비’는 어떤 경전보다도, 어떤 예언서보다도 위대한 삶의 用器이다. ‘냄비’가 주는 위안으로, 그 힘으로 시인은 지금 ‘불과 열을 이겨낼 냄비’ 모양 더 뜨겁게 벅차오른다.
시에서 보이는 ‘냄비의 힘’은 어쩌면 폭설을 만난 시인이 잠시잠깐 느꼈을 구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매순간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 있고 매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러니 잠시잠깐의 구원 이후에 원 상태로 돌아갈 삶이 여전히 힘겨울 것이라고 해서, 그 삶에 필요한 더 큰 구원이 필요하다는 욕심은 저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 잠시잠깐 현존했던 구원의 존재를 우리의 모든 삶을 관장하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충만한 상태에서 시인이 느꼈던 것처럼 온 우주를 담아내는 신성한 ‘냄비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 시는 눈 내리는 날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 시가 아니다. 시인은 대신 우주와 하나가 되어 구도자와도 같이 폭설 속의 길을 걸어가며 ‘냄비’를 노래하고 있다. 이 일상성은 곧바로 우리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초월적 정신의 현전을 유도한다. 숭고한 시인의 의식이 어떤 시보다도 크고 높게 느껴진다.
눈사람이 홀로 밤을 맞고 있다
저런 눈사람으로 골목에 나앉아 있어 본 적 있는가
세상의 집이란 집은
모두 제 가족을 끌어안고
도무지 모르는 빛으로 동그랗게 불 밝히고
내겐 더 이상 젖은 몸을 누일 집이 없고
더운 숨을 섞을 가족이 없고
이 골목과
이 밤과
이 둥그스름한 슬픔만 남아
골똘히 들여다 본적 있는가
봐도봐도 희디흰 몸속 같은 세상
흰 생쥐들이 한 마리 두 마리
몸속에서 기어 나와
나머지 몸들에게 말을 거는
이 순간을
이 슬픔을
미천이라고 해야 하나
고결이라고 해야 하나
눈발 하나하나가
더운 살로 덮이는
이 순간을
성숙이라고 해야 하나
장엄이라고 해야 하나
- 문성해, 「눈사람의 시」 전문
문성해 시인을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세상에 대한 한결같이 따스한 시선에 있다. 이미 「능소화」 같은 시에서 異物合一의 유기적 세계관을 보여주었던 시인은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하는 따스한 시선으로 세상의 명암을 고루 어루만져 주는 시적 고유성을 획득하고 있다. 위 시 「눈사람의 시」 역시 이러한 시인의 고유한 특징을 보여준다.
위 시에서 눈여겨볼 장면은 ‘눈사람’과 화자인 ‘나’가 동일한 것으로 치환되는 부분이다. ‘세상의 집이란 집은/모두 제 가족을 끌어안고/…(중략)…/내겐 더 이상 젖은 몸을 누일 집이 없고’라는 부분에서 시인은 ‘눈사람’의 처지를 확장하여 자신의 처지를 얘기하고 있다. 이제 눈사람은 곧 시인이다. 시인은 겉이나 속이나 다 똑같이 눈이다. 표리부동의 육체는, 순수한 순백의 현실은, 소유하지 않고 바라는 것 없어 다만 외로움과 슬픔만이 재산일 뿐이다. 이것은 집이 있고 가족이 있고 환하고 따뜻한 불이 있는 저들에게는 없는 것들이다. ‘흰 생쥐’들이 말을 걸 뿐이고 차가운 ‘눈발 하나하나가 더운 살로 덮일’ 뿐이다. 시인은 ‘이 순간을/이 슬픔을’ ‘미천’과 ‘고결’과 ‘성숙’과 ‘장엄’으로 바꾸어 놓는다. 어쩌면, 그것은 사실 시인의 바람이거나 역설적인 비꼼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고결’, ‘잠엄’, 성숙‘은 자기 위안일 뿐이라는 씁쓸한 냉소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눈사람의 처지를, 아니 시인의 처지를 그렇게 바라보며 치장하며 그 존재성에 연민의 손을 내밀고 위로하며 사유하는 자세에서 우리는 한 숭고한 존재의 위엄을 보게 된다. 시인 - 눈사람은 숭고의 자세로 세상의 온 눈을 맞으며 스스로의 존재성을 승화시킨다. 시인 - 눈사람은 고귀한 비천이다.
문성해 시인의 담담한 화법과 따스한 시선, 그리고 일상의 가치를 끌어내는 시성은 곧 순백한 ‘눈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자세이다. 거기에는 시인의 ‘숭고’한 정신과 ‘숭고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우리 시대의 시인들이 한번 쯤 숙고해 보아야 할 ‘숭고의 자세’인 것이다. 우리는 결국 크고 높지 않은가.
편집위원 윤의섭(시인, 대전대학교 교수)
1968년 경기도 시흥에서 출생. 아주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同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199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와 1994년 《문학과 사회》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문학과지성사, 1996), 『천국의 난민』(문학동네, 2000),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문학과지성사, 2005), 『마계』(민음사, 2010)가 있음. 애지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 中. 대전대학교 교수.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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