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괴짜 김관식 / 이향의 블러그에서

맑은물56 2015. 5. 18. 17:38
괴짜 시인 김관식 문학이야기

2013/09/16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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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신동으로 불리며 시 1천 수를 줄줄 외웠던 김관식은 한학에도 밝아 시의 세계가 깊고 그윽하다는 평을 들었다. 육당 최남선이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천재성을 인정받았던 김관식은 어려서부터 한학과 서예를 익히고 성리학과 동양학을 배웠다. 1968년에는 ‘사서삼경’ 중 가장 어렵다는 《서경》을 완역 출판했다. 한학자로서 뛰어난 한문 실력을 발휘했던 김관식은 문단에서는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 괴짜 시인으로 통했다.

김관식은 17세 때 《현대문학》 추천을 받기 위해 미당 서정주의 집에 드나들었다. 어느 날 미당의 처제 방옥례를 본 김관식은 첫눈에 반해 청혼한다. 은행원이었던 방옥례는 처음에 김관식의 청혼을 거절했으나 3년 동안의 끈질긴 구애와 ‘결혼해 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라는 협박에 못 이겨 결혼에 응한다. 1954년 1월 1일 최남선의 주례로 부부가 됐을 때 김관식은 스물, 방옥례는 스물넷이었다.

김관식은 스무 살 때부터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다른 과목은 모두 낙제점이던 학생에게 그가 가르치던 국어 점수만은 99점을 준 적이 있었다. 이를 알게 된 교장이 그를 불러 이유를 따지고 선생의 자율적 의사에 반하는 행위를 강요하자 그는 말없이 학교 앞 텃밭으로 가서 무를 몇 개 뽑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이윽고 크게 취한 김관식은 교장실로 주저 없이 걸어가 교장이 집무하는 탁자 위에다 구토물을 쏟아 놓았다. 그러고는 두 눈을 부라리며 외친다. “일찍이 내 양심에 벗어나는 일을 나는 한 적이 없소. 그런 나에게 이런 모욕을…….” 기가 질린 교장은 이후 김관식의 결정에 관해서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무를 안주 삼은 이유는 그걸 먹고 토하면 냄새가 아주 지독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란다.

김관식은 자신의 나이를 열 살이나 올려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사석이나 술자리에서만이 아니라 쓴 책의 약력 소개란에도 그는 1934년인 출생연도를 1924년이라 적었다. 그는 당시 문단에서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는 평론가 조연현과 백철 등에게 반말을 쓴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1960년대 초반 월탄 박종화가 참가한 문학상 시상식에서 월탄의 축사가 길어지자 “어이, 박 군 자네 이야기가 너무 길어. 나도 한마디 하겠으니 이제 그만 내려오지.”라고 큰 소리로 외쳐 시상식장을 일순간 긴장과 웃음이 교차하게 한 일은 전설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후배들에게 깍듯이 예의를 지키며 존칭을 썼고, 자신이 가난한데도 더 가난한 후배 시인들을 챙기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신경림 시인이 《못난 놈은 얼굴만 봐도 흥겹다》에서 밝힌 김관식의 일화도 흥미롭다.

“내가 김관식 시인을 따라다니다가 아주 난처한 꼴을 당한 일이 한 번 더 있다. 서울서 맞는 첫 설이었다. 역시 그날은 내가 그를 찾아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침 잘 왔다면서 함께 세배를 가자고 했다.

첫 행선지를 조지훈 시인 댁으로 정한 것도 그였다. ‘미당 선생은 내 형님이지만 첫 세배를 미당한테야 할 수 없지. 지훈 선생한테 먼저 가야지.’ 한학에 조예가 깊은 그는 본디 지조를 가장 높은 덕목으로 쳤던 터였다. 이렇게 해서 성북동의 지훈 시인 댁에 가서 밤늦도록 술을 마신 것까지는 좋았는데 다음이 문제였다. 마포의 서정주 시인 댁으로 옮겨 가기 위해서 나와 보니 눈이 발목을 덮을 만큼 쌓여 있었다. 택시를 탔는데 그는 양말 발이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오는 줄 알고 신을 벗었는데 아직도 택시 속이구먼.’ 택시를 타면서 신을 눈 위에 벗어 놓고 올라온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미당 댁에 세배를 드리고 술 한 잔을 하게 되었는데 김 시인이 양말이 젖은 이유를 설명하자 미당이 술 좀 작작하라고 타일렀던 것 같다. 이 말에 비위가 상한 그가 삐딱하게 나갔다. ‘첫 세배를 형님한테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행적으로 보아서도 말이지요. 그래서 지훈 선생한테 먼저 세배하고 오는 길입니다.’ 막걸리가 담긴 술 주전자가 날아와 그의 머리를 갈겼다. ‘이놈을 당장 개똥 떠다 버리듯 삽으로 떠다 버리거라.’ 미당은 노발대발했다. 그리고 내게도 충고를 잊지 않았다. ‘미친놈 따라다니다가는 똑같은 미친놈 되니까 저런 놈은 아예 상종을 말게.’ 그래도 미당이 그를 미워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해 여름 나는 그의 집에서 나와 시장 가까이에 사글셋방을 얻어 살고 있었는데, 동부인해서 닭이나 과일을 사 들고 병석에 누워 있는 김관식 시인을 찾아가는 미당을 두어 번 본 일이 있다.”

술로 병을 얻은 김관식은 1970년 8월 30일, 서른일곱의 나이에 요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