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입력2011.06.07. 22:37
미당 앞에선 옴짝달싹, 조연현에겐 악다구니
권력 좇는 문인들 악착같이 애먹이던 김관식
만취해 만난 조연현에게 "새앙쥐 같은 놈"
손윗동서 서정주와 조지훈에게만은 깍듯이

1950년대 그 무렵 이형기는 대학이라곤 문전에도 못 가본 채 문단에 갓 등단한 나나 박재삼이나 김관식과는 달리, 부산 피난시절일망정 동국대학을 다녔었고 '현대문학' 지가 아니라 그 앞의 '문예' 지를 통해 이미 시인으로 등단해 있었다. 그 때문에 그때부터 벌써 문단 패권 쪽으로 남달리 뜻을 품고 있던 조연현 같은 사람에게는 안성맞춤으로 눈에 들었을 것이다.

↑ 시인 김관식은 미당 서정주의 처제인 방옥례에게 3년간 끈질긴 구애를 한 끝에 1954년 1월 서울에서 최남선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더구나 조연현이 본시 경남 함안사람인데 비겨 이형기는 진주사람, 바로 코 닿는 곳이다. 박재삼도 비슷하게 코 닿는 삼천포라곤 하지만, 박재삼은 이형기에 비하면 나이는 비록 한 동갑이라 하더라도 조연현으로서는 이 두 사람을 놓고는 처음부터 조금 격차를 두지 않았을까. 그렇게 이형기를 서울신문의 정치부 기자로 들여보내지 않았을까. 그리고 박재삼은 자신이 주간으로 있는 '현대문학'의 기자로 그냥 묶어두고. 물론 박재삼은 그런 저런 눈치를 훤히 알면서도 제 분수를 차려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자족했을 것이고. 이 점으로라면 조연현은 여부없이 정확했다.

사람 사는 이런 쪽의 국면은 너, 나 할 것 없이 대강 훤히 꿰면서도 어영부영 그냥 그렇게 넘어가기 마련인데, 이런 것을 그대로 못 보고 못 참는 것이 이를테면 김관식이라는 사람이었다.

바로 이 점, 김관식은 타고난 시인이었으며 그다운 독특한 방식까지 지니고 있었다. 조연현의 그런 뒷속을 조목조목 따져서 까발리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상식 밖의 방법으로 악착같이 물고 늘어져 조연현을 곤혹스럽게 하고 애먹이게 했던 것이다.

김관식은 생긴 것부터 조금 괴팍했다. 중 키에, 얼굴은 지나치게 모로 퍼져 있어 마치 늘 눈깔사탕 두 알 정도를 양쪽 어금니로 물고 있는 듯이 두 볼이 불룩했고, 게다가 몸체는 비쩍 말라 걸음걸이도 모로 휘뚝거려 옆에서 보기에도 노상 위태위태해 보였다. 평소 때는 그지없이 얌전 하다가도, 상대 여하에 따라서는 아주아주 개차판이 되곤 했다.

가령 나나 박재삼이나 신경림 같은 동료들 사이에서는 늘 정중하고 조용조용하고 경우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았지만, 조연현 같은 사람에게는 안하무인으로 기고만장했고 반말지거리도 서슴지 않았다.

술이 만취해 '문예살롱' 안으로 들어 와서는 한 가운데 앉아 있는 조연현의 앞 자리에 금방 고꾸라지듯이 주저 앉으며 조연현이 금방 마시고 난 커피 잔을 한 팔로 쓰윽 걷어내 바닥에 떨어뜨려 깨고는,

"야, 조연현, 너 오늘 잘 만났다. 너, 나 하고 얘기 좀 하자. 요 새앙쥐 같은 놈. 우선 나한테 차 한잔부터 깎듯이 올리렸다, 이 놈아"

하곤 카운터 쪽을 향해 "야, 레이지야. 여기 나한테 조연현이 올리는 커피 한잔부터 어서 가져온"하고 소리소리 지르는 식이었다.

그러나 조연현도 조연현대로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어느 집 강아지가 와서 옹알거리느냐는 식이었다. 그렇게 다방 안은 온통 긴장에 휩싸이지만, 누구 하나 이 일에 간여하려 나서지는 않았다. 누가 말린다고 고분고분 들을 김관식이 애당초에 아닌 것이다. 끝내는 박재삼이가 나서서 끌어내곤 했지만, 못 이기는 척 끌려 나가면서도 관식의 악다구니는 그냥 그대로 이어지곤 했다.

하지만 이런 김관식도 자신의 시를 '현대문학'에 추천해 줬으며 처형의 낭군이기도 한 미당 서정주 앞에서만은 꼼짝 못했다. 미당의 기척이 저만큼 비치기만 해도 기겁을 하고 내빼곤 했다. 동리에게도 더러는 취중에 미친 척 하고 야료를 부리는 수도 없지는 않았지만, 박목월이나 조연현에게처럼 마구잡이로 행패를 부리지는 않고 선배를 대하는 일정한 예의는 지켰다.

다만, 조지훈에게만은 새해 세배를 갔을 정도로 깍듯했다. 어느 해인가, 눈이 소복하게 쌓인 속을 신경림과 같이 시발택시를 타고 성북동 조지훈 댁에 세배를 갔는데, 택시에서 내릴 때 문지방을 넘어 온돌방으로 들어서는 것으로 그만 착각, 구두를 택시 속에 벗어두고 내렸던 일은 그 뒤 얼마 동안 작단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강경상고를 나온 어릴 적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던 김관식은 당대의 한학 대가들인 정인보, 오세창, 최남선에게도 줄을 대어 20대 초반부터 안하무인이었다. 초기의 그의 시를 보더라도 그 점은 능히 그럴 만도 했겠다고 이해는 되지만, 타고 난 재승박덕이야 어쩔 것인가.

그 점은 그 본인부터가 이미 나름대로 일찍부터 체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주위에 득실거리는 문학인들 속의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고, 특히 권력지향 쪽 문학인들에게는 생득적인 혐오감을 가졌었다.

결국은 미당의 추천을 받기 위해 마포 공덕동 댁에 드나들던 그 어느 날, 미당의 처제를 그 댁에서 보곤 눈독을 들인다. 하지만 장본인은 기겁을 하며 그의 청혼을 거절, 김관식도 갖은 방법을 쓰다가 끝내는 음독 자살 소동까지 벌인다. 병원에 실려 가서도 결혼이 안 되면 자기는 이대로 죽어 버리겠다고 펄펄 뛰어, 끝내는 미당의 권고로 결혼까지 이르는 것이다.

4ㆍ19 혁명 뒤 기어이 그는 용산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만다. 청파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출마자 전원이 합동유세를 할 때에는 많은 젊은 문인들이 참관까지 하며 그 지역에서 같이 출마했던 당시의 거물 정치인 장면과 맞서기도 하는 정경을 직접 보며 성원하기도 했었다.

그 때 어린 애를 업고 있던 부인 되는 방(方) 여사의 안쓰럽던 모습이 지금도 떠오르며, 본디 김관식이라는 사람됨이 '영원한 아이' 반열에 드는 사람이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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