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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크랩]공과 일심/ 한자경 (동학 105호)

맑은물56 2012. 3. 19.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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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과 일심 (동학 105 호)



http://www.donghaksa.or.kr/new/donghakji/paper/105/14.htm



    찰나마다 흔들리고 마는 가상의 경계일지라도 우리는 일단 그 각자의 경계 안에서 의식을 갖고 살아간다. 경계 안의 것을 나로 느끼고 경계 밖의 것을 나 아닌 타자 또는 세계로 느끼며 산다. 이 개체의 경계를 무화시켜 무한과 공으로 복귀한다는 것,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개체의 경계가 흩어지고 사라져 일체 존재가 그 안으로 복귀할 무한, 그러나 그것이 전체이기에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무한, 그 공空은 과연 무엇인가?



(1.) 무한과 공: 물질인가, 마음인가?



     1) 프로이트에 따르면 개별 유기체는 자기 경계를 유지함으로써만 생명체로서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는 자기 경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것이 ‘삶의 본능’이다. 그런데 자기 경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경계에서 발생하는 끊임없는 자극으로 인해 지속적인 긴장이고 고통일 수밖에 없다. 고통은 삶에의 집착 때문에 비로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삶 자체가 고통이다.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긴장과 고통 또한 피하고 싶어 한다. 즉 경계에서의 자극과 긴장이 멈추기를 바란다. 경계에서의 자극과 긴장이 없는 상태, 고통의 의식이 없는 상태, 무기물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이를 ‘죽음의 본능’이라고 한다.



     이처럼 경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삶의 본능으로부터 자극과 긴장과 고통이 생겨나며, 이는 곧 그 고통을 소멸하고자 하는 죽음의 본능으로 이어진다. 고통을 발생시키는 삶의 본능과 그 고통의 소멸을 지향하는 죽음의 본능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한다. 삶으로 인한 고통은 죽음으로 인해 소멸된다. 그리고 개체의 경계가 사라진 그 자리에 남겨지는 공은 결국 의식이 없는 무기물 상태, 자기 자각성이 없는 순수한 어둠, 순수 물질이다.



     그러면서 프로이트는 이 죽음의 본능을 불교적 개념을 따라 ‘열반원리’라고 불렀다. 고통이 지멸된 불교적 열반을 모든 고통의 의식이 소멸한 무기물 상태로 간주한 것이다. 이것이 흔히 서양인이 불교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개체가 자기 경계를 넘어 되돌아갈 개체의 근원을 무無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무로부터의 창조’가 그것이다. 신이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하였으므로, 무로부터 나온 것은 무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무로부터의 구원을 기독교는 개체 바깥의 신에게서 구한다. 개체의 근원인 무(순수 물질)와 그것 너머의 신(순수 정신)을 이원화하는 것이다. 개체가 되돌아갈 무한을 물질로 생각하는 것은 현대의 진화론도 마찬가지이다. 일체 개체가 형성되기 이전의 무한이나 공은 현대과학에서는 순수 물질 또는 물리적 에너지일 뿐이지, 자기자각성이나 의식성을 갖는 마음이 아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와 현대과학은 상통한다.



      2) 그러나 불교에 있어 개체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드러나는 무한과 공은 의식성이나 자기자각성이 배제된 순수 물질이 아니라, 바로 마음, 무한의 마음, 공의 마음이다. 공의 깨달음은 곧 개체의식의 생성 이전 또는 소멸 이후 그 자리에 드러나는 무한과 공이 물질이나 무가 아니라 자기자각성의 마음이라는 사실의 깨달음이다. 마음이 스스로 공이 되어 자신의 본성을 공으로 자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공이 되어 공의 마음이 되면, 일체 유정의 마음 또한 각각의 경계 너머에서 바로 그 공의 마음과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 무한한 공의 마음을 한마음,  일심一心이라고 한다.  불교는 우리 누구나  공을 깨달아  그  근본자리인 일심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2.) 한마음에 이르는 길



     연기를 통해 개체의식의 경계가 무한히 확산된다는 것은 결국 경계 바깥의 것이 경계 안을 들어오고, 안의 것이 밖으로 나가 그 경계가 사라진다는 말이다. 경계의 소멸은 경계 안의 의식을 극소로 무화시킴으로써도 얻을 수 있고(무한=물질), 반대로 경계 안의 의식을 극대로 확산시킴으로써도 얻을 수도 있다(무한=마음, 한마음).



    1) 의식이 소멸하고 남겨지는 무한은 의식성이 없는 물질일 뿐이다. 이처럼 의식의 소멸을 통해 무한이 성립된다고 여기는 것은 유한과 무한, 의식(인식)과 존재를 영원한 대립으로 놓는 것이다. 이 경우 무한은 결코 자각될 수 없다. 자각할 의식이 남아 있는 한, 경계가 남아 있는 것이고 따라서 경계 없는 무한은 도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한 자체가 의식성 내지 자각성을 갖지 않는 한, 즉 물질인 한, 의식이 무한과 공을 의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무한을 물질로 생각하는 의식은 자기 자신이 의식할 수 없는 무한을 논한다는 점에서 자기부정과 자기모순의 의식이다(유물론의 한계!).



   2) 반면 의식을 확장함으로써 무한에 도달한다는 것은 개체의 경계를 없애면서도 의식이 깨어 있는 것이다. 개체적 자기의식의 경계를 넘어 무한의 의식, 공의 마음, 한마음이 되는 것이다. 확산의 궁극지점에서 ‘무한의 공’과 ‘무한을 의식하는 마음’은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무분별지!). 무한의 공이 그 자체 자기 자각성을 가지는 마음인 것이다. 그 무한의 마음, 공의 마음이 바로 ‘한마음’, ‘일심’이다.   그러나 여기서 의식의 확장이 개체적 자기의식의 확장일 수는 없다. 개체적 자기의식은 경계를 통해 성립하는 의식으로 언제나 주객 대립 속에 있으므로 그로써 경계 없는 무한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주객 대립 속에서 밝혀지는 무한은 단지 의식에 의해 대상으로 사유된 무한일 뿐이며, 무경계의 무한이 아니다.



    따라서 의식의 확장은 주객대립을 이루는 의식 내용을 따라서가 아니라, 의식을 철저하게 비움으로써만 가능하다(무심법!). 의식내용을 비우고 마음의 산란함을 없애 적적寂寂한 빈 마음으로 나아가되, 그 의식이 잠들지 않고 깨어있어 성성惺惺함을 유지한다면(적성등지법!), 그 빈 마음은 자기 경계를 넘어 점점 더 넓은 범위로 확장되어 갈 것이다. 그 비움이 무한에 이른다면, 그 마음은 비어 있는 공이되 깨어 있는 마음, 무한의 마음, 한마음일 것이다. 그렇게 무한과 공에 이르러 한마음이 되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다.



(3.) 공의 자기자각성: 공적영지와 일심



     불교는 언제나 일체 존재를 품고 있는 무한과 공이 자기자각성 없는 어둠 또는 물질이 아니라, 자기자각성을 갖는 빛이고 밝음이며 한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 신령스러운 앎이 어둡지 않으므로, 무정한 것과는 달리 성이 스스로 신령스럽게 안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비고 고요하며 신령스럽게 아는 청정한 마음의 본체이다. 이러한 청정한 공적의 마음이 곧 삼세 제불의 수승하게 밝고 맑은 마음이며, 중생이 본원에서 깨닫는 성이다. 그것을 깨달아 지키면 앉아서 진여가 되어 움직이지 않고도 해탈하며, 그것을 미오하여 등지면 육도를 왕래하며 윤회할 것이다. (지눌의 『수심결』)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은 모든 개별적 사물이나 개체 의식의 경계가 사라진 곳을 뜻한다. 모든 개체의 경계를 넘어선 무한과 공이 그것이다. 불교는 이 공이 추상적인 빈 공간 또는 무정의 무기물이나 순수 질료와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신령한 앎인 영지靈知가 빛나고 있다는 것, 그 점에서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공은 영지의 마음이다. 이처럼 무한의 공이 ‘스스로를 신령스럽게 아는 것’을 원효는 ‘성자신해性自神解’라고 하고, 지눌은 ‘비고 고요하며 신령스럽게 아는 것’,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불교는 이 공적영지의 마음이 특정한 부처님만의 마음이 아니라, 유정 각각의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개체의 경계가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그 경계가 무한히 확산되어 도달해야 할 한마음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지눌은 공적영지를 “바로 그대의 청정한 마음의 본체”라고 말한다. 모든 유정의 마음은 공적영지를 갖고 있다. 마음 자체가 무한이고 공이며 따라서 공적영지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 안의 이 청정한 공적의 마음을 깨달아 알면 진여가 되고,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육도윤회하게 된다고 설한다.



     이 성자신해, 공적영지의 마음을 원효는 중생 누구나에게 갖추어진 보편의 마음, 일심一心이라고 칭한다. 개체 안에 있는 무한은 진망 일체를 포괄하는 것이기에 일一이며, 그 일 내지 무한이 스스로를 자각하기에 심心이다.



     무엇을 일심이라고 하는가? 염정의 모든 법은 그 본성이 둘이 없어 진망의 이문이 다름이 없기에 일이라고 이름하며, 이 둘이 없는 곳이 모든 법 중의 실질로서 허공과 달리 그 본성이 스스로를 신비스럽게 알기에 심이라고 이름한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이처럼 불교는 개체의 경계를 벗어 도달한 무한을 무정물로 보지 않고, 그 무한에서 발산되는 영지를 따라 각 개체 안에 깃든 한마음으로 이해한다. 개체의 경계를 벗은 마음이기에 그것은 각자의 마음이면서 또 동시에 보편적인 하나의 마음, 일심이다.



(4.) 일심과 신神



    나는 불교의 핵심은 이 한마음에 놓여 있다고 본다. 우주 삼라만상 모든 개체의 경계를 넘어서는 전체, 포괄자, 공, 일자 내지 무한을 유정 마음 바깥의 객관적 실재, 예를 들어 순수 물질이나 신이나 이데아적 관념 등으로 설정하지 않고, 바로 각각의 유정의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각각의 개체는 현상적으로 보면 인연화합에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화합이 다하면 사라지게 되는 무상한 존재이지만(무아의 의미1), 그 무상한 현상 자체를 창출해내는 무한의 힘은 그 유정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각각 개체 내면에 개체성을 벗은 하나의 마음으로, 일심으로, 진여로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무아의 의미2). 자신 안의 이 본성, 한마음, 불성을 깨달아 아는 것이 곧 부처가 되는 성불의 길이고, 이에 미혹하면 생사윤회를 반복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한의 일심은 모든 유한한 현상적인 것들의 존재와 생성의 근거이다. 일심은 우주 존재를 일으키는 공이고 무한이다. 그 무한과 공의 근본자리를 부처님이 깨치셨기에, 부처님의 지혜가 인생과 우주전반, 존재와 생성에 관한 일체지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깨친 그 한마음이 모든 유정에게 공통적인 하나의 마음이기에, 부처님이 그 마음을 자각함으로써, 결국 우리 모든 유정이 다 자각가능성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처성불시 산천초목 동시성불’이라고 말한다. 비록 우리 중생은 표층의 경계에 따라 제한된 마음에 매어 있어 그 일심의 깊이를 여실하게 알지 못하지만, 모든 경계가 해체된 무한의 깊이에서 한마음으로 존재하는 부처님 마음은 우주 만물 모든 유정의 아픔을 직접 느끼고 직접 위로하실 것이다.



    나는 이러한 한마음의 진리, 무한의 지혜가 불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의 궁극 깨달음이라고 생각한다. 일자적 근원을 갈구하는 마음에 주어지는 “그게 바로 너 이니라!”(우파니샤드)의 깨달음, 무한과 영원의 빛에 직면한 영혼에게 들려온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최제우)의 목소리, 이 모든 종교적 깨달음은 결국 다 하나로 통한다고 본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결국 무한의 깊이에서 한마음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모든 종교가 서로 대화하고 화합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불교는 분명히 우주의 근본자리를 한마음으로 본다. 한마음, 그것도 모든 유정 안에 있는 그 한마음이 심리적 의식현상뿐 아니라 물리적 자연세계도 만들어내는 존재의 근원인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며 진공묘유다. 그렇다면 유정의 마음으로부터 과연 어떻게 객관세계가 형성될 수 있는가? 이에 답하는 것이 바로 ‘유식무경’이고 ‘일체유심조’이다.

 

출처 : 태극선법 현동선원
글쓴이 : 태백에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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