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본각과 시각 (동학 107 호)
http://www.donghaksa.or.kr/new/donghakji/paper/107/08.htm
1.) 문제제기
유근신과 기세간을 만드는 것이 한마음이고 그 한마음의 작용인 공적영지가 이미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나는 왜 그것을 알지 못하는가? 왜 그것을 스스로 자각하여 알지 못하고, 그러한 한마음의 작용을 나의 개인적인 의意의 작용으로 간주하여 아집을 일으키는가? 왜 무명 속에 있으며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가? 왜 무명과 아집으로 인해 집착의 업을 짓고 그 업력에 따라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반복하게 된단 말인가?
지눌은 “그것(청정한 마음의 본체/한마음)을 깨달아 지키면 앉아서 진여가 되어 움직이지 않고도 해탈하며, 그것을 미오하여 등지면 육도를 왕래하여 윤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차라리 내 안에 없다면 열심히 찾아서 발견하여 깨달으리라는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을 텐데, 이미 내 안에 있는데 단지 내가 모를 뿐이라고 말하면, 그건 더 절망적이지 않은가? 그 무명을 도대체 어떻게 걷어낼 수 있는가? 무명의 정체가 무엇인가?
2.) 눈의 비유
마음의 본성, 그 근본자리인 한마음을 깨달아야 진여가 되어 윤회를 벗어난다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다음과 같이 묻고 싶을 것이다.
문: 어떤 방편을 써야 한 생각에 기틀을 돌려 문득 제 성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이 물음에 지눌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답: 다만 그대 자신의 마음인데, 다시 무슨 방편을 쓰겠는가? 만일 방편을 써서 다시 알기를 구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제 눈을 보지 못하므로 눈이 없다 하여 다시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제 눈인데 왜 다시 보려 하는가? 만일 잃지 않았음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보려는 마음이 없는데 어찌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자기의 신령한 앎도 그와 같아 이미 제 마음인데 어찌 다시 알려 하는가? 만일 알려고 하면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되리니, 다만 알 수 없는 것임을 알면, 그것이 곧 성을 보는 것이다.(지눌, 『수심결』)
깨닫고자 하는 본성인 한마음을 세계를 보는 눈에 비유한 것이다. 우리가 이미 한마음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데, 그 보는 눈을 다시 보려고 하는 것이 적절하겠는가? 보는 눈을 다시 본다는 것은 결국 한마음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 한마음에 의해 보여진 어떤 것, 세계 내 사물과 마찬가지의 것으로 다시 대상화해서 파악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무한과 공의 마음은 그 자체 보여질 수 없고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보여질 수 없기에 ‘본래무일물’이라고 하고, 말로 표현될 수 없기에 ‘언어도단’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대답도 여전히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지는 않는다. 그것을 여실히 알지 못하기에, 그 무명 때문에 진여가 못되고 윤회한다고 하면서, 그걸 알고자 물으면, “알려고 하지마라.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성을 보는 것이다”라고 답한다면, 이는 곧 무명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우리는 영원히 진여가 될 수 없고 끝없이 윤회할 수밖에 없다는 말 아닌가?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알지 못할 뿐이라면,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것이 왜 무명이란 말인가? 벗어날 수 있는 것이기에 무명이라고 하는 거라면, 그럼 어째서 부처님 홀로 그 무명을 벗어 깨달음에 이르고, 우리 중생은 그 무명 속에 버려둔단 말인가? 이런 절망감에서 다시 묻고 다시 답한다.
문: 내 근기에 맞게 설명하자면, 어떤 것이 공적영지의 마음인가?
답: 그대가 지금 내게 묻고 있는 바로 그것이 곧 그대의 공적영지의 마음인데, 왜 돌이켜 보지 않고 아직도 밖에서 찾는가?(지눌, 『수심결』)
공적영지의 마음이 우리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 공적영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다는 말인가?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는 것이기에 다시 더 알 바가 없다는 것인가?
이처럼 일심은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이기도 하고, 모르는 것이기도 하다. 일심이 우리 자신의 마음이기에 이미 안다는 것을 본각本覺이라고 하고, 그러면서도 또한 무명에 싸여 여실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시각始覺의 부재라고 말한다. 우리는 한마음에 대해 본각을 갖지만 시각을 갖지 못한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뭘 알고 뭘 모른다는 것인가?
3.) 물고기의 비유
물 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는 결코 물 밖을 경험한 적이 없으며, 따라서 자신이 물 속에 살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물고기는 물을 의식하지 못한다. 물이 그 자신에게 전체이기 때문이다.
경계가 없으면, 그래서 경계 밖으로 나가보지 못하면, 그 밖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안도 알지 못한다. 강물과 바닷물을 왔다 갔다 하면, 그 있음과 없음이 구분되는 물 속의 소금 맛은 의식하게 되지만, 언제나 있기에 그 있음과 없음이 구분되지 않는 물맛은 느낄 수가 없다.
이것이 우리가 전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전체가 있어도, 그 있음이 전체이기에 그것의 없음과 구분되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한 의식을 갖기 힘든 것이다.
이것이 왜 우리가 무한한 공의 마음, 한마음을 있는 것으로 의식하기 힘든가를 보여준다. 우리 각각이 바로 그 마음이기에, 언제나 그 마음으로 존재하며, 그 마음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기에, 그것이 전체이기에, 한마디로 그것의 경계를 의식할 수 없기에 그것이 없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없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 유·무로써 판별하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자기 경계와 한계를 가진 것, 유한한 것이다. 무한은 한계가 없기에 무한 그 자체로 자각되기가 힘들다. 유무의 상대성을 넘어선 공은 그런 것으로서 의식되기가 힘들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알지 못하듯이.
그런데 물고기가 정말로 물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어느 날 물고기가 물 밖에 던져진다면, 그는 즉각적으로 숨 막혀 하면서 물이 없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물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은 이미 물의 있음을 알고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닌가? 아는 것이 경계를 통해서라면, 없음을 알기 위해서는 있음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고기가 물 밖에 나가서 비로소 물을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 밖에는 물이 없으므로, 물 밖에서 알게 된 것은 물의 있음이 아니라 물의 없음이기 때문이다. 결국 물 밖에 나서는 순간 물의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은 물 밖에 나서기 이전에 이미 물의 있음을 알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물의 있음을 정말로 몰랐다면, 물이 없어질 때 물의 없음도 알지 못해야 할 것이다. 결국 물고기는 물 안에서 이미 물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물고기가 물 밖에 나가기 전에는 물을 모른다고 한 것은 무엇인가? 물고기는 무엇을 모른 것인가? 물고기가 물 밖에 나가기 전에 알지 못한 것은 물이 아니라, 자신이 물을 안다는 사실을 모른 것이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물을 안다. 이미 물의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물고기 자체가 물과 구분되지 않으며, 물고기의 의식 자체가 곧 물의 의식인 것이다.
그가 알았던 소금의 맛도 소금물 맛이고, 그가 느꼈던 감촉도 물의 감촉이다. 그가 보는 것과 먹는 것 모든 것에 이미 물이 스며들어 있다. 모든 것이 다 물인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물이기에, 물고기의 의식 자체가 온통 물의 의식이기에, 그는 물을 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스스로 자신이 물의 의식을 갖고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일 뿐이다. 물의 의식이 자신의 전체의식이기에, 자신이 그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기에, 그 스스로 전체의식을 갖고 있되, 다만 자신이 그 의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뿐이다.
각각의 유정이 자기개체성을 넘어서서 도달하게 되는 무한의 지평, 그 전체의 무한이 단지 추상적 빈 공간이나 무기물적 물질이 아니라 자기자각성을 갖는 한마음이라는 것, 그리고 각각의 유정이 모두 그 한마음으로 존재한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이미 한마음을 스스로 자각하고 의식하며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본각). 그런데 그러면서도 우리는 또한 그 한마음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기에, 그 한마음을 한마음으로 깨달아 알지를 못한다(시각의 부재).
4.) 말나식의 그릇된 분별과 집착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아는 것과 그 무엇을 무엇으로서 분별하여 아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한마음을 아는 것은 우리가 그 마음의 작용을 하며 산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세간을 보고, 자신의 유근신을 알며, 종자도 의식한다. 이들은 모두 아뢰야식의 상분이며, 이 상분을 보고 아는 마음작용은 바로 아뢰야식의 견분이다. 우리는 아뢰야식의 상분과 견분을 모두 의식한다. 아뢰야식의 자체분의 전변작용을 우리 마음 스스로 하고 있으며, 그 작용이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이기에 각자가 그것을 직접 알고 있는 것이다. 다만 아뢰야식 자체가 전체이기에, 우리는 그 마음의 작용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알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아뢰야식의 마음 작용을 잘못 분별한다. 어떻게?
세계 전체를 보는 아뢰야식의 작용을 그 작용에 의해 그려진 세계 속의 나, 유근신의 나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세계 전체를 보는 아뢰야식의 견분작용인 료了를 그렇게 보여진 세계 속의 나인 유근신의 의意의 작용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보편적 일심의 마음작용을 개체적인 의의 작용으로 읽는다. 그렇게 해서 일심의 마음작용이 개체적인 유근신의 의의 작용에 의해 다시 가려지고 왜곡되고 오도된다.
아뢰야식은 세계를 만들고 세계를 보는 작용이다. 유정은 그 의식이 있다. 그렇기에 자신을 알고 세계를 아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알지 못하고, 잘못 계탁분별한다. 다시 말해 아뢰야식의 견분과 상분을 그런 것으로 알지 못하고 그것을 오히려 자신의 식으로부터 독립적인 그 자체 실재하는 자아와 세계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집과 법집을 갖게 된다.
알다: 무엇을 알다. : 본각 차원의 앎
분별하여 알다: 무엇을 무엇으로 알다. : 시각 차원의 앎
자성분별: x를 x로 알다(바로 알다)
계탁분별: x를 y로 알다(잘못 알다)
<아뢰야식의 견분과 상분>을 <식 독립적 자아와 세계>로 잘못 안다: 망분별 이로부터 아집과 법집을 갖게 된다: 망집착
이처럼 아뢰야식의 견분과 상분을 그런 것으로서 알지 못하고 잘못 분별하여 그것을 식 독립적인 자아와 세계로 이원화하고 실체화하는 것이 무명이다. 아뢰야식의 견분을 의意의 작용으로 여김으로써, 아뢰야식의 마음작용을 세계를 보는 눈의 작용으로 읽지 않고 보여진 세계 속의 나, 의意의 근을 가지는 유근신인 나의 작용으로 읽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뢰야식의 작용은 나의 유근신에 갇히게 되고, 따라서 세계는 유근신 밖에 있기에 내 마음 바깥의 객관 실체로 읽히고 만다. 그래서 나와 세계는 주객 대립의 것으로 간주되고, 결국 주객을 포괄하는 전체로서의 마음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세계 전체를 보는 보편적 눈으로서의 한마음을 잊고 자신을 사적 의지주체, 사적 욕망주체로서만 간주하면서 망분별과 망집착을 쌓아나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한마음을 자기 자신으로 바로 알지 못하는 무명으로 인해, 즉 시각의 부재로 인해 아집과 법집에 쌓여 집착의 업을 짓고 산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아와 세계를 그려내는 아뢰야식 자체를 아주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자아와 세계를 알고 있으며, 그만큼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누구나 한마음에 대한 본각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미 누구나 부처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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