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나를 찾아 가는 길

[스크랩] [스크랩]무아연기/한자경- (동학 104호)

맑은물56 2012. 3. 19. 15:14

한 자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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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대 철학과 및 대학원 졸업. 독일 프라이브르크 대학에서 독일철학(칸트) 전공, 동국대 불교학과 대학원에서 불교무아연기/한자경- (동학 104호) 철학(유식) 전공. 저서로 동서양의 인간이해, 유식무경, 일심의 철학, 불교의 무아론, 칸트 철학에의 초대 등이 있고,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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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아와 연기  (동학 104 호)



http://www.donghaksa.or.kr/new/donghakji/paper/104/06.htm



1). 문제 제기



무아란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몸이라는 경계를 따라 다른 사물이나 타자로부터 구분되어 있지 않은가? 또, 나는 분명히 먼 과거로부터 오늘까지 하나로 이어지는 ‘나는 나다’라는 자기동일적인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 그 나가 없단 말인가?



  그럼 불교는 왜 무아를 설하는가? 내가 현상적으로 있기는 하지만, 그 나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무아를 설하는 것일까? 나에 집착하기에, 그 나가 향유하고자 하는 돈이나 명예나 애인도 집착하게 되는 것이며, 그런 집착은 언제나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키므로 어느 지점에서인가 좌절할 수밖에 없어 결국 고통에 빠지게 되므로, 그런 고통을 없애기 위해, 자아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일까?



그러나 나에게 진정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향유할 돈이나 명예나 애인이 사라질 때가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이 언젠가 무화無化된다는 사실, 죽음이 아닌가? 그러나 그 고통도 결국 ‘죽지 않을 나’에 대한 집착이 있기 때문에 고통일 뿐이니, 바로 그 집착만 버리면 고통스러워 할 것도 없겠기에, 그래서 무아를 설하는 것일까?



그러나 나의 향유대상의 소멸이나 나의 생의 끝인 죽음보다 사실 우리에게 더 고통스러운 것 또는 더 당혹스러운 것은 오히려 자아가 아예 없다는 것, 자아가 본래 무라는 무아無我의 주장이 아닐까? 내가 본래 없는 것이라면, 그럼 이렇게 살면서 괴로워해 온 이것, 진리를 찾아 천 길 벼랑 끝으로 나를 내몬 이것, 이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냥 스치는 바람, 날리는 눈송이일 뿐인가? 내가 본래 없는 것, 무아이고 공空이라면, 그럼 그 공을 깨닫고자 하는 자, 그리고 그 공을 깨닫는 자, 이미 깨달은 자, 부처님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깨닫기 위해서 누군가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 누구가 없다면, 공이 어떻게 깨달아질 수 있겠는가? 공의 깨달음이 불가능하다면, 부처님은 뭘 깨달으셨고, 나는 또 뭘 깨닫고자 한단 말인가?



2.) 연기의 산물로서의 나



불교는 우리의 자아의식이 허망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우리가 흔히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몸과 마음의 결합체인 색수상행식 오온인데, 그 오온 안에서는 도저히 ‘이것이 바로 나다’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음을 안 것이다. 그래서 무상하고 고통스런 이 오온이 공이며 무아라고 설한다. 오온이 무아인 것은 그것이 자아라고 할 만한 핵으로부터 자라난 것이 아니라, 다른 무수한 중연들의 인연화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대지 위의 나무 한 그루가 기적처럼 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그 나무는 곁의 다른 나무나 주위의 공기와 흙, 물과 바람 그리고 태양빛으로부터 자신을 구분하여 자신을 경계 지어진 자아로 의식하면서, ‘나는 나다’라는 자기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나무 밖에서 그것을 보는 우리는 안다. 그 나무는 본래 그 곁의 나무로부터 씨 하나가 떨어져 땅 속에 묻혀 흙의 양분과 물을 먹고 생장하였으며 지면 위로 올라와서는 바람과 공기와 햇빛을 취해 그 나무가 되었다는 것을. 그 나무가 자신과 자신 아닌 것으로 구획짓는 그 경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이동해 가는데, 그 이동을 관통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자신의 경계 안에 머물러 있는 것, 자기동일적인 것으로 남아 있어 ‘나’라고 칭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 이렇듯 나무의 자기의식에 상응하는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나무의 자아의식은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 실제 나무는 그런 허황된 자기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자아의식을 갖는다. 오온으로 보면 나무와 다를 바가 없는데도 말이다. 예를 들어 나는 배가 고프면 내 앞의 빵을 집어 먹는다. 빵을 먹는 나의 몸과 먹히는 빵은 나와 나 아닌 것으로 구분된 것이다. 나는 나 아닌 빵을 먹는 것이다. 그런데 그 빵이 내 몸 속에 들어가 소화가 되면 그 빵은 내 피가 되고 살이 된다. 내 몸이 되는 것이다. 내 몸은 나 아닌 것이 나로 화한 것이다. 현재의 이 내 몸(색)은 과거 내 주위를 맴돌던 흙과 물, 불과 바람(지수화풍 4대)이 나의 욕망을 타고 나의 경계 안으로 밀려 들어와 나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나의 경계 밖으로 밀려나갈 때, 언제나 반복되는 나의 욕망은 그 다음의 공기와 물, 흙과 바람을 끌어들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책을 통해 어떤 생각 • 관념을 접할 때, 나는 당연히 그것을 읽는 나와 그렇게 읽히는 관념을 구분한다. 나는 그 관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도 하며, 또다른 사람이 그 관념을 비판하는 것을 들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일단 나의 의식이 그 관념을 나의 것으로 소화해내면, 그 관념은 결국 사유 주체인 내가 되고 만다. 나는 그 관념에 따라 세상을 지각하고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그 관념이 곧 나이므로, 누군가 그 관념을 비판하면 나는 인격 손상이라도 당한 듯 자존심이 상하게 된다. 이처럼 나의 현재의 느낌(수) • 생각(상) • 의지(행) • 인식(식)은 현재 나의 경계 안으로 들어와 나의 마음(식)을 형성하면서 나로 되어버린 것들이지만, 그것들은 과거 내 주위를 떠돌면서 내 마음을 출렁이게 하던 그의 느낌이고 그녀의 생각이고 그들의 의지이고 인식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것들이 내 안으로 스며들어 오고 다시 내가 그들에게로 나아가는 끊임없는 경계의 유동에 있어 언제나 일관되게 경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나란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신체적인 면에서나 정신적인 면에서나 색수상행식 오온 안에 본래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는 색수상행식 오온은 실체적 자아인 실아實我가 아니라 여러 인연이 화합하여 형성된 임시적 자아, 가아假我일 뿐이라고 말한다. “색은 물방울 같고, 수는 물거품 같으며, 상은 봄철 아지랑이 같고, 행은 파초나무 같으며, 식은 꼭두각시와 같다.” 이는 자기 자신을 자아라고 구획 짓고서 그 경계 안의 자아에 집착하는 것은 마치 실체 없는 물거품이나 아지랑이에 매달리는 것과 같이 허망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나는 원래 나 아닌 것들이 인연화합하여 형성된 연기의 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3.) 경계의 무한한 확장



이렇게 해서 흔히 나라고 여겨지는 오온의 실체성은 부정되며, 자아는 상호인과성이라는 연기적 관계 속으로 해체된다. 한 그루의 나무가 그 나무 밖의 다른 나무와 햇빛과 물과 공기를 머금고 그 나무로 자라났다는 것은 곧 공기가 지구대기 전체와 연관되고 물이 지구자원 전체와 연관되며 태양빛이 우주공간과 연관되기에, 그 나무 한 그루의 경계가 지구와 우주 전체로 퍼져 나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연기의 인과 고리는 무한히 반복된다. 그 나무는 그 이전 나무 안에 담겨 있던 우주 전체의 생명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색수상행식 오온을 가능하게 한 그 숱한 중연에도 우주 전체의 존재가 담겨 있다. 우주 전체 모든 것의 역사가 나의 색수상행식 오온 안에, 몸의 세포 하나하나마다에, 생각 하나하나마다에 기억(종자)으로 담겨 있다. 그렇게 억겁의 지구 역사가 나의 오온 안에 저장되어 있다. 그 억겁의 역사를 따라 전생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는 과거 독일 군인이었을 수도 있고 인도 승려였을 수도 있고 또 시베리아 무당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사슴이었을 수도 있고 뱀이었을 수도 있고 또 나비였을 수도 있다. 나는 과거에 모든 것이었을 수 있으며, 그 모든 것들의 기억이 내 안에 남아 있어 나를 이루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해서 나의 경계는 무한으로 확대되며, 결국 무한으로 해체된다. 내가 무한이 되고 너도 무한이 되면, 결국 나와 너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일체가 하나의 무한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 상호인과성이라는 연기의 논리는 각 개체의 경계를 끝없이 흩어 놓아 일체를 하나로 만들어 놓는다. 일체가 하나의 시스템 속 중중무진의 연기과정에 있으므로, 어느 것도 고립된 개체로 존재하지 않고 전체적인 상호인과작용 속에 있게 된다. 그래서 나비의 가벼운 날갯짓 하나가 지구 반대편에 비를 몰고 오기도 하고, 허공 속 작은 미소 하나가 천년 후 인간 가슴 속에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경계는 차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통과의 지점을 알려주기 위해, 그 너머로 나아가려는 향수와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안과 밖이 내통할 수 있는 구멍들로 이루어진 허상일 뿐이다.



따라서 경계에 쌓인 모든 개별자는 하나의 무한이 허공에 그려 놓은 무수한 가상의 원일뿐이다. 공중에 불어 놓은 비누방울처럼 둥근 막의 경계를 통해 안팎이 구분되며 개체가 형성되지만, 그 모든 개체는 결국 경계가 흩어져 무한으로 되돌아갈 운명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개체가 되돌아갈 무한, 그것은 무엇인가?



4.) 색즉시공의 진리



개체가 복귀하는 그 무한은 어떤 존재인가? 개체의 경계가 그 안으로 흡수되어 사라진 무경계의 무한은 어떤 존재인가? 우리가 어떤 것을 없지 않고 있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그것 아닌 것과 구분 짓는 경계에 의해서이다. 그 경계가 비록 찰나생멸의 무상하고 허망한 경계일지라도, 경계가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있음과 없음을 구분해 낼 재간이 없다. 그런데 모든 경계 지어진 개체를 포괄하는 전체는 그 자체 경계/한계가 없다는 의미에서 무한이다. 그 무한은 그 경계 없음으로 인해 그것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 유와 무를 달리 분별해 낼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유와 무를 넘어선 것,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 그러면서 다른 일체의 것의 유와 무를 성립시키는 터전, 불교는 그것을 공空이라고 한다. 모든 개체의 경계가 유동화하고 흩어져 경계 너머로 흡수되고 무한으로 해체될 때, 일체를 품에 안는 그 무한은 곧 공이다. 개체가 되돌아갈 무한은 결국 공인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을 말한다.



여기까지가 불교와 현대과학이 함께 할 수 있는 영역일 것이다. 수학이든 물리학이든 생물학이든 심리학이든 현대(포스트모더니즘) 과학의 작업은 근대(모더니즘)의 철통같은 경계들, 우주의 경계, 물질의 경계, 생명체의 경계, 의식의 경계를 흩어버리는 작업, 그래서 그것을 무경계의 공으로 확인하는 작업이어 왔다. 그 안에 사물들이 놓일 절대적 좌표로서의 절대 시공간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그 안에 담길 시공간적 사물들의 지축이 흔들린다는 것, 따라서 사물들의 경계가 끝없이 유동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의 내부가 99.9% 비어 있다는 것, 원자를 구성하는 소립자는 입자로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암흑 속 자신의 대칭쌍인 반입자를 만나 함께 소멸한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보는 고체의 물질세계가 실제는 비어 있는 공, 찰나생멸의 무상한 공이라는 것, 색즉시공을 말해준다. E=mc²의 공식도 질량을 가지는 물질이 질량을 갖지 않는 에너지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색즉시공을 말해주며, 이 장대한 우주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한 점 무한한 에너지 덩어리의 빅뱅 결과라는 것 또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진리, 일미진중함시방의 진리를 증명한다.



5.) 다시 던지는 물음



이처럼 현대과학과 불교는 모두 연기성을 통해 모든 개체의 경계가 무한으로 해체되며, 그 무한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연기성은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를 기술하는 사실명제이며, 우리는 그 연기에 따른 개체 생성의 반복을 연기의 유전문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연기의 유전문은 모든 중생이 연기의 산물이라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나는 나무나 돌처럼, 사슴이나 나비처럼 인연화합의 산물일 뿐이다. 그런데 내가 단지 인연화합의 산물일 뿐이라면, 그럼 나는 그냥 그 인연을 따라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악연이 쌓이면 악업을 짓고, 선연이 쌓이면 선업을 짓고, 그렇게 해서 끊임없이 그 인연의 고리를 따라 뭉쳤다 흩어지고 다시 뭉쳤다 흩어지면서 생사윤회를 반복하면 되지 않는가? 그것이 인연대로, 연기법에 따라 사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개체의 생사를 기氣의 이합집산으로 설명하면서 자연에 순응할 것을 권하는 유교와 뭐가 다를까? 단지 연에 따라 인연법에 따라 사는 것이 목적이라면, 스님들은 왜 부모자신의 연이나 세간의 연을 끊고 출가한단 말인가?



그것은 불교가 연기로써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연기의 유전문이 아니라 환멸문이기 때문이다. 과학에는 유전문만 있고, 환멸문은 없다. 유전문이 무명에서 비롯되는 생사윤회의 반복이고 고통이라면, 환멸문은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해탈이고 열반이며 환희이다. 연기가 유전문일 수 있고 환멸문일 수 있듯이, 연기를 통해 밝혀지는 무아의 진리는 우리에게 고통일 수도 있고 환희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윤회와 해탈, 고통과 환희의 분기점은 과연 어느 지점인가? 그 지점은 연기를 따라 개체의 경계가 소멸한 뒤 거기 남겨지는 무한과 공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태극선법 현동선원
글쓴이 : 태백에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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