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윤회와 해탈 (동학 108 호)
http://www.donghaksa.or.kr/new/donghakji/paper/108/08.htm
1.) 왜 윤회하는가?: 꿈의 비유
지눌은 “그것[청정한 마음의 본체/한마음]을 깨달아 지키면 앉아서 진여가 되어 움직이지 않고 해탈하며, 그것을 미오하여 등지면 육도를 왕래하여 윤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심은 알면 해탈하고, 그것을 모르면 윤회하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단지 알고 모르는 것에 의해 어째서 윤회와 해탈이 갈라지게 된단 말인가? 일심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어떤 차이를 만들기에, 그로 인해 윤회와 해탈이 갈라지게 되는가?
일체 존재는 식의 전변을 통해 그려진 식소변이다. 세계가 유정의 식을 떠난 객관 실유가 아니라 마음이 그려놓은 것이고 따라서 그 마음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통찰은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이 세계를 꿈에서 보는 세계와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꿈의 세계가 꿈을 꾸는 식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 현실세계는 그 세계를 보는 우리의 마음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꿈의 의식과 현실의 의식은 다음과 같은 공통의 구조를 가진다.
꿈속 나 ↔ 꿈속 너 나: 유근신 ↔ 너/기세간
(나1) (나1=말나식)
꿈의 세계 현실 세계
↑ ↑
꿈꾸는 의식(나2) 현실의 마음(나2=한마음)
꿈의 세계를 가능하게 한 것은 꿈꾸는 의식인 나2인데, 꿈속에서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나2의 작용을 나1의 작용으로 여기기에, 너를 포함한 세계를 내 바깥에 실재하는 객관세계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다가 내가 나 자신을 나1이 아니라 나2로서 알아채게 될 때 나는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그 때 비로소 꿈의 세계가 나2의 작용결과이며 따라서 꿈꾸는 의식(나2) 바깥의 객관 실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현실에 있어서도 이 현실세계를 가능하게 한 것은 나2(한마음)인데, 현실에서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그 한마음의 작용(아뢰야식의 견분인 료)을 나1(말나식의 의)의 작용으로 여기기에, 너를 포함한 세계를 내 바깥의 객관실유로 간주하게 된다. 그러다가 내가 나 자신을 세계 속 일부분인 나1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그리는 나2라는 것을 자각할 때 나는 현실이 꿈과 같다는 것, 이 세계가 나2인 한마음의 작용결과이며 마음 바깥의 객관 실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유식성의 깨달음이고 현실의 꿈으로부터의 깨어남이며 참된 공성의 자각이다.
그럼 우리는 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계속 꿈속을 헤매는가? 왜 계속 윤회하는가? 꿈은 내가 꿈꾸는 의식(나2)으로서 활동하되, 단지 그렇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한에서만 꿈으로 유지된다. 즉 그 나(나2)의 의식활동을 모두 꿈속의 나(나1)의 의식활동으로 착각하고 있는 한에서만, 꿈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래서 꿈속에서 나는 나를 나2로 알지 못하고, 나1로만 여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꿈도 내가 한마음(나2)으로서 활동하며 세계를 그려내되, 내가 나를 그런 나2로 알지 못하고 나1로만 생각함으로써 꿈이 유지된다. 나1은 곧 개체의식, 말나식이다. 말나식인 의意가 아뢰야식의 작용(나2의 견분)을 자기 자신의 작용으로 착각하기에, 잘못 분별하기에 나는 나를 나2로 알지 못하고 나1로만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2를 알지 못하기에 꿈이 지속되는 것이다.
2.) 윤회의 길
내가 나를 한마음으로 알지 못하고 의로 간주하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잘못 분별하게 되는 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의意는 안‧이‧비‧설‧신‧의 육근 중의 제6근이다. 육근을 가진 유근신有根身에 속하는 의이다. 그런데 유근신은 바로 아뢰야식의 식소변 중의 하나일 뿐이다. 결국 나(나2)가 스스로 세계를 그리면서 그 세계 속에 나 자신(나1)을 다시 그려 넣고 그걸 진짜 나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그 그림 속에 자기를 그려 넣고 나서, 그걸 자기로 여기고 자기가 화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는 그려진 세계의 모든 것을 바로 그 그려진 나1의 관점에서 다시 읽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나2의 마음을 망각하고 그려진 나1의 의식으로 살아가게 된다. 망각하였기에 되돌아갈 줄 모른다. 나는 나를 세계 속 나1로 여기므로, 언제까지나 이 세계 속에 나1로 머무르려고 하다. 나1에의 집착이 아집이고 나를 둘러싼 세계에의 집착이 법집이다. 나1에 머무르려는 아집과 그 나를 둘러싼 세계에 머무르려는 법집, 그 두 집착에 따라 업을 지으면 바로 그 업력, 그 욕망의 힘으로 인해 결국 나는 이 세계로 되돌아오게 된다. 욕망이 실현되는 것이다. 나는 그 업력에 따라 또 다른 나1(새로운 오온)을 형성하여 이 세계로 되돌아온다. 그것이 윤회이다.
꿈이 그 다음의 꿈을 불러 일으켜 꿈에서 꿈으로 이어지듯, 세계에서 지은 업은 업력을 남기고 업력은 다시 그 다음 세계를 형성하므로, 윤회의 세계는 계속 이어지고 그 세계 속에 허망한 자아의식과 자아집착도 계속된다. 이러한 윤회과정을 불교는 다음과 같은 12지 연기로 설명한다.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처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
자아와 세계가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유정의 식이 인연을 따라 그린 가상이라는 것, 그 아공과 법공을 모르고 아집과 법집에 머무르는 것이 무명無明이다. 자신을 한마음으로, 진여로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무명이다. 이 무명으로 인해, 아집과 법집으로 인해 업을 짓게 되는데 그 업이 곧 행行이다. 행이 남기는 업력이 종자로서 아뢰야식에 심겨지고, 그 식識은 자신의 업력에 따라 부모의 수정란에 들어가 새로운 오온인 명색名色을 이룬다.
그렇게 형성된 오온이 안·이·비·설·신·의 육근인 육입처六入處를 갖추게 되면 모의 태 바깥으로 나오고, 이에 육경의 세계와 접하는 촉觸이 이루어진다. 촉으로부터 고‧락‧사의 느낌인 수受를 갖게 되는데, 이로부터 거의 자동적으로 락수를 좋아하고 고수를 싫어하는 애愛증의 감정을 갖게 되며, 다시 좋아하는 것을 취하고 싫어하는 것을 버리려는 취取사의 집착이 있게 된다. 이러한 애와 취의 집착적 행위가 곧 새로운 업을 짓는 행위이며, 이 업이 남기는 업력이 다시 새로운 윤회를 일으키는 유有가 된다. 이 업력의 존재로 인해 다시 새로운 오온으로 생生하며 이어 노사老死의 삶을 살게 된다. 이처럼 12지 연기는 무명으로 인해 업을 짓고 그 업력으로 인해 다시 태어나 또 업을 짓고 그래서 그 업력으로 또 태어나게 되는 순환과정을 3세에 걸쳐 표현하고 있다.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처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
전생 // 현생(태내) / (태 밖) // 내생
인 / 과 // 인 / 과
3.) 해탈의 길
그렇다면 이런 업과 보로서 반복되는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은 어떻게 가능한가? 해탈은 현실세계가 가상이라는 유식성을 깨달아 현실의 꿈을 깨는 것이다. 그런데 꿈은 과연 어떻게 해야 깨게 되는가?
우리는 언제 꿈을 깨는가? 마음 바깥에 다른 실재가 없으므로, 잠자는 나를 깨워줄 다른 존재는 없다. 나는 스스로 깨어나야 한다. 자다가 스스로 깨는 경우는 언제인가? 잠을 충분히 다 자서 깨어날 수도 있지만, 악몽을 꿈으로써 깨어나기도 한다. 꿈속에서 나1이 더 이상 나1로서 살아가기 힘들 때,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쫓겨 벼랑 끝에서 공중으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또는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는 순간, 누군가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그 슬픔을 견딜 수 없는 순간, 그때 우리는 더 이상 그 꿈의 세계에 머무르지 못하고 거기를 벗어나오게 된다. 내가 더 이상 나1로 머무를 수 없을 때, 즉 나1이 무화되고 있을 때, 나는 나1이기를 멈추게 되며, 결국 꿈에서 깨게 된다. 나1을 벗어나 나2로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현실세계에서, 이 꿈속에서, 불교로부터 듣는 무아의 소리는 바로 우리의 꿈을 깨우는 소리이다. 스스로 나1로 머무르지 말고 나1을 무화시키고 그래서 나1을 버리고 나2로 깨어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1인 유근신과 이 기세간이 모두 꿈이라는 것, 한마음의 식소변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꿈에서 깨어나라는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일체 존재가 실유가 아니고 가유라는 것, 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공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그 안에 그려진 세계 속에서 너와 나의 분별이 허망분별일 뿐이고 아와 법에의 집착이 허망집착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자아가 공이라는 아공의 깨달음, 세계가 공이라는 법공의 깨달음이다. 아공의 깨달음은 아집을 멸하고 법공의 깨달음은 법집을 멸하며 따라서 집착으로 인한 업을 더 이상 짓지 않게 하여 결국 업력으로 인한 윤회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해탈이다.
해탈한다는 것,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마음이 더 이상 자아나 세계의 생멸상을 그려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꿈의 세계를 이루는 모든 생멸상, 자아나 세계 등 일체의 표상이 사라진다. 우리 마음에서 감각표상, 지각이나 의식의 표상, 말나식의 표상이 다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생멸상이 사라진 공(空)이 된다. 공으로 드러난 본성을 진여眞如라고 한다. 일체의 표상이 사라진 빈 마음은 그 자체 생멸을 넘어선 불생불멸의 진여이다. 꿈에서 깨어 자신을 진여로, 한마음으로 자각하는 것이 바로 해탈이다.
4.) 보살의 길
그렇다면 그렇게 해탈해서 무엇 할 것인가? 꿈을 깨어서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해탈하고자 함은 고통의 삶의 윤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함이다.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고통의 삶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다. 생로병사의 고통, 애별리‧원증회‧구부득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통해 고통의 삶으로부터 해탈한 자가 아라한이다.
그런데 아무리 꿈이라 해도 이 세계 안에 모든 중생이 다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고통의 삶이라 해도 우리가 함께 하는 이 세계를 떠나, 이 세계 속 중생을 떠나, 어디로 간단 말인가? 내가 해탈해서 나아간 자리가 중생을 외면한 자리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꿈에서 깨어난 후 아직도 꿈꾸고 있는 중생의 고통을 아파하면서 그 꿈의 세계에 다시 되돌아와 그 고통을 함께 하는 자가 바로 보살이다. 모두가 업과 인연으로 인해 이미 꿈을 꾸고 있다면, 꿈을 꾸되 좀 더 아름다운 꿈을, 좀 더 인간적인 꿈을, 좀 더 행복한 꿈을 꾸자는 것이 보살의 원願이다. 이 꿈이 각자의 꿈이 아니라, 우리가 같이 꾸는 꿈이므로, 모두가 행복하지 않으면 나도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가 보살이다.
행복한 꿈, 아름다운 꿈은 꿈을 꾸되 망집착과 망분별을 버린 그런 꿈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일단은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 분별과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무아와 공을 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반을 구해 생사를 버린다거나 부처되기를 구해 중생을 버리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가 자아라고 집착하는 오온, 꿈속에서 윤회하는 오온은 가상이지만, 그 가상을 그리는 진여‧일심‧한마음은 실재이다. 그것이 바로 공적영지의 마음, 공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럼 왜 무아라고 하는가? 진여나 일심은 자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음은 자아가 아니다.
그것은 나와 너의 개체성을 벗은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더 이상 나가 아니라 바로 우리이다. 하나의 우리, 한울이다. 우리의 선조는 이를 존칭 ‘님’을 붙여서 한울+님‧한울님‧하늘님‧하느님이라고 불렀다. 하느님은 곧 한마음이고 부처님이며 하늘 천天이고 태극이다. 곧 하늘의 주인, 천주이고 하나님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는 이 한마음, 일심을 통해 하나로 통한다고 본다.
http://www.donghaksa.or.kr/new/donghakji/paper/108/08.htm
1.) 왜 윤회하는가?: 꿈의 비유
지눌은 “그것[청정한 마음의 본체/한마음]을 깨달아 지키면 앉아서 진여가 되어 움직이지 않고 해탈하며, 그것을 미오하여 등지면 육도를 왕래하여 윤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심은 알면 해탈하고, 그것을 모르면 윤회하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단지 알고 모르는 것에 의해 어째서 윤회와 해탈이 갈라지게 된단 말인가? 일심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어떤 차이를 만들기에, 그로 인해 윤회와 해탈이 갈라지게 되는가?
일체 존재는 식의 전변을 통해 그려진 식소변이다. 세계가 유정의 식을 떠난 객관 실유가 아니라 마음이 그려놓은 것이고 따라서 그 마음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통찰은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이 세계를 꿈에서 보는 세계와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꿈의 세계가 꿈을 꾸는 식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 현실세계는 그 세계를 보는 우리의 마음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꿈의 의식과 현실의 의식은 다음과 같은 공통의 구조를 가진다.
꿈속 나 ↔ 꿈속 너 나: 유근신 ↔ 너/기세간
(나1) (나1=말나식)
꿈의 세계 현실 세계
↑ ↑
꿈꾸는 의식(나2) 현실의 마음(나2=한마음)
꿈의 세계를 가능하게 한 것은 꿈꾸는 의식인 나2인데, 꿈속에서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나2의 작용을 나1의 작용으로 여기기에, 너를 포함한 세계를 내 바깥에 실재하는 객관세계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다가 내가 나 자신을 나1이 아니라 나2로서 알아채게 될 때 나는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그 때 비로소 꿈의 세계가 나2의 작용결과이며 따라서 꿈꾸는 의식(나2) 바깥의 객관 실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현실에 있어서도 이 현실세계를 가능하게 한 것은 나2(한마음)인데, 현실에서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그 한마음의 작용(아뢰야식의 견분인 료)을 나1(말나식의 의)의 작용으로 여기기에, 너를 포함한 세계를 내 바깥의 객관실유로 간주하게 된다. 그러다가 내가 나 자신을 세계 속 일부분인 나1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그리는 나2라는 것을 자각할 때 나는 현실이 꿈과 같다는 것, 이 세계가 나2인 한마음의 작용결과이며 마음 바깥의 객관 실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유식성의 깨달음이고 현실의 꿈으로부터의 깨어남이며 참된 공성의 자각이다.
그럼 우리는 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계속 꿈속을 헤매는가? 왜 계속 윤회하는가? 꿈은 내가 꿈꾸는 의식(나2)으로서 활동하되, 단지 그렇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한에서만 꿈으로 유지된다. 즉 그 나(나2)의 의식활동을 모두 꿈속의 나(나1)의 의식활동으로 착각하고 있는 한에서만, 꿈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래서 꿈속에서 나는 나를 나2로 알지 못하고, 나1로만 여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꿈도 내가 한마음(나2)으로서 활동하며 세계를 그려내되, 내가 나를 그런 나2로 알지 못하고 나1로만 생각함으로써 꿈이 유지된다. 나1은 곧 개체의식, 말나식이다. 말나식인 의意가 아뢰야식의 작용(나2의 견분)을 자기 자신의 작용으로 착각하기에, 잘못 분별하기에 나는 나를 나2로 알지 못하고 나1로만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2를 알지 못하기에 꿈이 지속되는 것이다.
2.) 윤회의 길
내가 나를 한마음으로 알지 못하고 의로 간주하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잘못 분별하게 되는 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의意는 안‧이‧비‧설‧신‧의 육근 중의 제6근이다. 육근을 가진 유근신有根身에 속하는 의이다. 그런데 유근신은 바로 아뢰야식의 식소변 중의 하나일 뿐이다. 결국 나(나2)가 스스로 세계를 그리면서 그 세계 속에 나 자신(나1)을 다시 그려 넣고 그걸 진짜 나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그 그림 속에 자기를 그려 넣고 나서, 그걸 자기로 여기고 자기가 화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는 그려진 세계의 모든 것을 바로 그 그려진 나1의 관점에서 다시 읽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나2의 마음을 망각하고 그려진 나1의 의식으로 살아가게 된다. 망각하였기에 되돌아갈 줄 모른다. 나는 나를 세계 속 나1로 여기므로, 언제까지나 이 세계 속에 나1로 머무르려고 하다. 나1에의 집착이 아집이고 나를 둘러싼 세계에의 집착이 법집이다. 나1에 머무르려는 아집과 그 나를 둘러싼 세계에 머무르려는 법집, 그 두 집착에 따라 업을 지으면 바로 그 업력, 그 욕망의 힘으로 인해 결국 나는 이 세계로 되돌아오게 된다. 욕망이 실현되는 것이다. 나는 그 업력에 따라 또 다른 나1(새로운 오온)을 형성하여 이 세계로 되돌아온다. 그것이 윤회이다.
꿈이 그 다음의 꿈을 불러 일으켜 꿈에서 꿈으로 이어지듯, 세계에서 지은 업은 업력을 남기고 업력은 다시 그 다음 세계를 형성하므로, 윤회의 세계는 계속 이어지고 그 세계 속에 허망한 자아의식과 자아집착도 계속된다. 이러한 윤회과정을 불교는 다음과 같은 12지 연기로 설명한다.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처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
자아와 세계가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유정의 식이 인연을 따라 그린 가상이라는 것, 그 아공과 법공을 모르고 아집과 법집에 머무르는 것이 무명無明이다. 자신을 한마음으로, 진여로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무명이다. 이 무명으로 인해, 아집과 법집으로 인해 업을 짓게 되는데 그 업이 곧 행行이다. 행이 남기는 업력이 종자로서 아뢰야식에 심겨지고, 그 식識은 자신의 업력에 따라 부모의 수정란에 들어가 새로운 오온인 명색名色을 이룬다.
그렇게 형성된 오온이 안·이·비·설·신·의 육근인 육입처六入處를 갖추게 되면 모의 태 바깥으로 나오고, 이에 육경의 세계와 접하는 촉觸이 이루어진다. 촉으로부터 고‧락‧사의 느낌인 수受를 갖게 되는데, 이로부터 거의 자동적으로 락수를 좋아하고 고수를 싫어하는 애愛증의 감정을 갖게 되며, 다시 좋아하는 것을 취하고 싫어하는 것을 버리려는 취取사의 집착이 있게 된다. 이러한 애와 취의 집착적 행위가 곧 새로운 업을 짓는 행위이며, 이 업이 남기는 업력이 다시 새로운 윤회를 일으키는 유有가 된다. 이 업력의 존재로 인해 다시 새로운 오온으로 생生하며 이어 노사老死의 삶을 살게 된다. 이처럼 12지 연기는 무명으로 인해 업을 짓고 그 업력으로 인해 다시 태어나 또 업을 짓고 그래서 그 업력으로 또 태어나게 되는 순환과정을 3세에 걸쳐 표현하고 있다.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처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
전생 // 현생(태내) / (태 밖) // 내생
인 / 과 // 인 / 과
3.) 해탈의 길
그렇다면 이런 업과 보로서 반복되는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은 어떻게 가능한가? 해탈은 현실세계가 가상이라는 유식성을 깨달아 현실의 꿈을 깨는 것이다. 그런데 꿈은 과연 어떻게 해야 깨게 되는가?
우리는 언제 꿈을 깨는가? 마음 바깥에 다른 실재가 없으므로, 잠자는 나를 깨워줄 다른 존재는 없다. 나는 스스로 깨어나야 한다. 자다가 스스로 깨는 경우는 언제인가? 잠을 충분히 다 자서 깨어날 수도 있지만, 악몽을 꿈으로써 깨어나기도 한다. 꿈속에서 나1이 더 이상 나1로서 살아가기 힘들 때,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쫓겨 벼랑 끝에서 공중으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또는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는 순간, 누군가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그 슬픔을 견딜 수 없는 순간, 그때 우리는 더 이상 그 꿈의 세계에 머무르지 못하고 거기를 벗어나오게 된다. 내가 더 이상 나1로 머무를 수 없을 때, 즉 나1이 무화되고 있을 때, 나는 나1이기를 멈추게 되며, 결국 꿈에서 깨게 된다. 나1을 벗어나 나2로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현실세계에서, 이 꿈속에서, 불교로부터 듣는 무아의 소리는 바로 우리의 꿈을 깨우는 소리이다. 스스로 나1로 머무르지 말고 나1을 무화시키고 그래서 나1을 버리고 나2로 깨어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1인 유근신과 이 기세간이 모두 꿈이라는 것, 한마음의 식소변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꿈에서 깨어나라는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일체 존재가 실유가 아니고 가유라는 것, 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공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그 안에 그려진 세계 속에서 너와 나의 분별이 허망분별일 뿐이고 아와 법에의 집착이 허망집착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자아가 공이라는 아공의 깨달음, 세계가 공이라는 법공의 깨달음이다. 아공의 깨달음은 아집을 멸하고 법공의 깨달음은 법집을 멸하며 따라서 집착으로 인한 업을 더 이상 짓지 않게 하여 결국 업력으로 인한 윤회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해탈이다.
해탈한다는 것,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마음이 더 이상 자아나 세계의 생멸상을 그려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꿈의 세계를 이루는 모든 생멸상, 자아나 세계 등 일체의 표상이 사라진다. 우리 마음에서 감각표상, 지각이나 의식의 표상, 말나식의 표상이 다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생멸상이 사라진 공(空)이 된다. 공으로 드러난 본성을 진여眞如라고 한다. 일체의 표상이 사라진 빈 마음은 그 자체 생멸을 넘어선 불생불멸의 진여이다. 꿈에서 깨어 자신을 진여로, 한마음으로 자각하는 것이 바로 해탈이다.
4.) 보살의 길
그렇다면 그렇게 해탈해서 무엇 할 것인가? 꿈을 깨어서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해탈하고자 함은 고통의 삶의 윤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함이다.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고통의 삶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다. 생로병사의 고통, 애별리‧원증회‧구부득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통해 고통의 삶으로부터 해탈한 자가 아라한이다.
그런데 아무리 꿈이라 해도 이 세계 안에 모든 중생이 다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고통의 삶이라 해도 우리가 함께 하는 이 세계를 떠나, 이 세계 속 중생을 떠나, 어디로 간단 말인가? 내가 해탈해서 나아간 자리가 중생을 외면한 자리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꿈에서 깨어난 후 아직도 꿈꾸고 있는 중생의 고통을 아파하면서 그 꿈의 세계에 다시 되돌아와 그 고통을 함께 하는 자가 바로 보살이다. 모두가 업과 인연으로 인해 이미 꿈을 꾸고 있다면, 꿈을 꾸되 좀 더 아름다운 꿈을, 좀 더 인간적인 꿈을, 좀 더 행복한 꿈을 꾸자는 것이 보살의 원願이다. 이 꿈이 각자의 꿈이 아니라, 우리가 같이 꾸는 꿈이므로, 모두가 행복하지 않으면 나도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가 보살이다.
행복한 꿈, 아름다운 꿈은 꿈을 꾸되 망집착과 망분별을 버린 그런 꿈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일단은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 분별과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무아와 공을 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반을 구해 생사를 버린다거나 부처되기를 구해 중생을 버리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가 자아라고 집착하는 오온, 꿈속에서 윤회하는 오온은 가상이지만, 그 가상을 그리는 진여‧일심‧한마음은 실재이다. 그것이 바로 공적영지의 마음, 공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럼 왜 무아라고 하는가? 진여나 일심은 자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음은 자아가 아니다.
그것은 나와 너의 개체성을 벗은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더 이상 나가 아니라 바로 우리이다. 하나의 우리, 한울이다. 우리의 선조는 이를 존칭 ‘님’을 붙여서 한울+님‧한울님‧하늘님‧하느님이라고 불렀다. 하느님은 곧 한마음이고 부처님이며 하늘 천天이고 태극이다. 곧 하늘의 주인, 천주이고 하나님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는 이 한마음, 일심을 통해 하나로 통한다고 본다.
출처 : 태극선법 현동선원
글쓴이 : 태백에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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