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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교기초 교리 9. 팔정도 ② 올바르게 살아가는 실천의 길

맑은물56 2011. 11. 16. 16:10

팔정도 ② 

올바르게 살아가는 실천의 길

 

불교가 존재하는 이유며 처음이자 마지막 가르침 중도(中道)는 일상에서도 자주 쓰는 말이다. 흔히들 ‘중도를 지켜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중도를 지키는 것일까. 불교에서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연기(緣起)에 대한 이해와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한 팔정도의 실천이다.

 

연기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고 <아함경>에서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모든 것이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의미다. 즉 어느 것도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종교에서 신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스스로 존재하는 절대적 대상이라고 하지만, 그 역시 인간과 관계하는 한, 절대적이지 않다. 설령, 인간과 관계하지 않는 신이 있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연기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불교에서는 공(空)이라 한다. 하지만 이때의 공은 ‘텅 빔’이나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다.

 

다만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성이 없는 것이므로, 공이라 할 뿐이다. 이것은 “연기(緣起) 그것을 우리는 공(空)이라고 말한다. 그것(空)은 가명(假名)이며, 그것(空)이 바로 중도이다” 라는 용수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즉 존재는 있고 없음(有無)이나 생겨나고 소멸(生滅)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 속에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원적 분별을 넘어, 연기적 관점에서 모든 존재를 보는 것이 중도다. 그리고 이러한 중도를 실천하는 방법이 바로 팔정도다. 연기적 관점으로 대상을 보는 것이 중도이지만, 이러한 이론을 배우고 이해한다고 모든 대상을 연기의 관점으로 볼 수는 없다.

 

이에 부처님께서 연기의 관점으로 대상을 보는 연습을 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팔정도이다. <초전법륜경>에서 말했듯이, 중도가 곧 팔정도이고, 팔정도를 통해서만 궁극적으로 열반은 성취된다. 열반은 중도에 대한 이해로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실참실수(實參實修)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팔정도가 없는 가르침, 팔정도를 실천하지 않는 수행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은 부처님이 열반 직전,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인 수밧다(Subbadha)에게 한 마지막 가르침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밧다(Subbadha)여, 법(法, 가르침)과 율(律)에 성스러운 여덟 가지 바른 길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면, 사문[(예류과(預流果), 일래과(一來果), 불환과(不還果), 아라한과(阿羅漢果)]에 들지 못한다.”

 

이처럼 ‘중도를 지켜라’는 말은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말라”는 이론적 의미로 보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팔정도를 실천하라’는 말이 내포돼 있다. 중도는 팔정도의 실천이며, 이는 곧 올바르게 살아가는 실천의 길이다.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말하고 이해하는 듯하지만,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이며,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것이 팔정도이다.

 

무릇 종교란 신앙의 대상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을 통한 신(神)의 선택을 중시하는 타력적(他力的)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이는 자칫 맹목적 믿음으로 변질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불교는 맹목적 믿음을 거부한다.

 

이해를 통한 믿음, 타력 이전에 자력(自力)을 중시한다. 이는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 팔정도임을 보더라도 확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처음 가르침도 마지막 가르침도 팔정도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팔정도는 불교의 존재 이유다.

 

황정일 동국대학교 연구초빙교수

 

[불교신문 2702호/ 3월12일자]

출처 : 호암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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