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교육 소식

[기획] 우리 시 교육 바로 가고 있나 2

맑은물56 2010. 7. 8. 16:02

[기획] 우리 시 교육 바로 가고 있나 2
시 교육 현장에서의 비판적 점검
 
계간시인세계
시 교육 현장에서의 비판적 점검
박제된 시의 꿈

김영미 경기여고 교사

시가 있는 교실 풍경
소월의 「진달래꽃」을 소리내어 읽는 여고생들은 발랄하고 파릇하다. 그러나 장미나 후리지아가 친숙한 그들에게 ‘진달래꽃’과 ‘영변의 약산’은 실감나지 않는 추상적 사물들이다. ‘보내우리다’란 말투의 화자는 더욱 낯설다. 그들에게 ‘진달래꽃’은 겨울의 검은 대지 위에서 문득 이른 봄볕에 눈물겹도록 가득 피어 가슴 저미는 꽃이 아니라, 책갈피에서 무심코 발견한 한 개 빛 바랜 마른 꽃일 뿐이다.    

노랗게 머리를 물들인 중학생이 자기가 쓴 시를 낭송하고 있다. 제목은 「가출」이다. 머쓱해 하던 처음과는 달리 시를 읽는 목소리는 점차로 진지하고 심각해진다. 친구들은 그의 실제 이야기를 심각한 표정으로, 혹은 폭소로 들으며, 함께 오락실을 기웃거리고, 햄버거집을 찾기도 한다.

오늘날 시를 공부하는 교실의 모습들은 이 두 장면의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다. 이 둘은 겉으로 매우 달라 보인다. 그러나 시와의 단절이란 어려운 고민과 마주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교과서에 나오는 시, 전범으로 배워야 될 시와 학생들이 서로 소통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의 주변은 온통 속도로 무장한 화려하고 역동적인 시각 매체들로 채워져 있다. 이와 반대로 시는 정적이고 무채색인, 흥미없는 존재일 뿐이다. 시를 가르치고 공부하기 어려운, 이러한 시대에 교사와 학생이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시를 가르치는 시간, 학생들 앞에서 한 편의 시가 그들에게 과연 무슨 의미를, 힘을 가질 수 있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시와 학생들 사이의 먼 거리, 그 소통 불능에 대한 체감과 좌절을 교실에서 만나게 된다.

지식으로 매장된 시의 소외
학교에서 시는 많은 경우, 지식으로 가르치고 배우도록 강요받는다. 교과서의 내용과 구성, 체제가 그러하다. 시험과 입시 등의 현실적 제도들은 이를 더욱 공고히 한다. 또한 중·고등학생을 향한 시의 지식에 관한 담론들은 여기저기 너무나 많이 산재해 있다. 지식의 습득이 시를 배우는 본질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학생들이 먼저 만나는 교과서의 작품들은 시라는 장르적 특성을 순차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예시 자료의 나열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교사는 운율을, 화자를, 어조를, 비유를, 정해진 의미를 충실히 가르쳐야 하고, 학생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의 학습은 시교육의 한쪽 축일 뿐, 이것이 전부여서는 결코 안 된다. 말할 나위 없이 더 중요한 축은 학생들이 시를 생동감 있게 감동을 가지고 향유하는 것이다. 지식의 습득이 고정적이고 명확한 답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향유는 유동적이고 고정된 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전자는 학생을 소극적인 독자에 머물게 하고, 후자는 적극적인 재현자로서의 독자를 만든다. 

“「진달래꽃」은 3음보의 규칙적 운율을 가진 시이며, 전통적 운율을 계승한 작품이다”라고 설명할 때, 학생들은 소월의 시를 시가 아닌 지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순간에 시가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문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시에 포함된 지식들을 소리 높여 꼼꼼히 설명하던 교사는, 어느 순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학생들의 표정을 발견하게 된다. 자괴감과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다.

이런 시수업에는 학생이 직접 텍스트와 만나고, 그 울림을 느낄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시와의 자유로운 만남이 폐쇄되어 버리고 만다. 상호소통하는 관계가 아니라, 일방통행인 관계에서 시가 생명으로 하는 감수성, 다양한 의미의 생성은 매장될 수밖에 없다. 지식에 갇혀 시 본래의 유연함과 따뜻함, 풍요로움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아무런 감동이나 정서적 울림 없이 단지 해부해야 될 대상으로 시는 차갑고도 무감각하게 책상 위에 놓여지게 된다. 실험실에서의 피실험체처럼.

시를 공부하는 시간이지만 시는 학생들에게서 소외되고, 학생들은 시에서 소외되고, 교사는 시와 학생들에게서 소외되고 만다. 이는 시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하는 궁극적 물음 내지 방향이 기본적으로 잘못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시의 본질과 시 교육의 방향은 동일해야 한다. 과학이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지식으로 세계를 파악하게 하는 것이라면, 시는 정반대로 직관적이고 통합적인 눈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평면적인 지식이 전자의 중심에 놓인다면, 입체적인 내적 울림이 후자의 중심에 놓인다. 시를 지식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시의 본질에 위배된다. 시는 시로서 시답게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오늘날 문학 교육으로서의 시의 죽음은 시의 본질과 맞물려 출발하지 않고, 강제로 이해시키려고 하는 지식의 압박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스펙트럼으로서의 소통
시 교육에서 우선해야 하는 것은 다른 장르가 아닌 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학생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감수성이 깊이와 넓이를 확장토록 해야 한다. 시에 들어 있는 섬세하고 다양한 눈과 예민한 감수성을 통해 새로운 사물의 의미와 감추어진 세계를 알고, 발견해 가는 것이다. 시가 가진 정서적 울림을 학생들이 스스로 체감하도록 해야 한다. 교사는 지식 전달자가 아니다. 그 울림을 느끼도록 안내하고 그 공명을 증폭시키는 자이다. 정서적 울림은 시와 학생간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지식으로 가르치는 시 수업은 이 소통의 넓은 스펙트럼을 폐쇄시킨다. 시와의 소통은 기존의 지식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의 의미를 스스로 생성해내는 학생들의 능동성을 열어줄 때 가능해진다.

장르는 무엇이며, 운율을 만드는 방식은 어떠하고, 주제가 무엇이란 등등의 사실을 제시하기 전에 학생들에게 던져 준 박두진의 「해」는 새롭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태양’으로 다시 태어난다. 학생들은 과학책에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제시되는 모습의 태양을 만난다. 나아가 태양이 솟는 자신만의 세상을 새로이 만들어 낸다. 그 안에서는 붉은 태양이 장렬히 솟기도 하고, 검은 태양이 솟기도 한다. 이것은 박두진이 갈구한 객체로서의 ‘해’와 일치하지 않는, 학생들이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낸 주체적 자각물이다. 지은이에 의해 의미가 고정된 ‘해’가 아니고, 자신의 느낌으로 자유로이 만들어낸 그의 ‘태양들’인 것이다. 지식이 시 교육의 중심에 있을 때, 이러한 풍요로움은 결코 누릴 수 없다.

한창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학생들은 발랄하고 다양하게 시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따라서 시의 의미나 해석을 고정시키지 말고, 학생들이 그들의 입장에서 향유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 스펙트럼의 장을 열어줌으로써 살아 있는 향기와 울림을 현재화시켜야 한다. 학생들에게는 자기화의 힘이 무한으로 내재되어 있다. 시를 향유할 때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이 보는 세계를 내면화한다. 교과과정의 강제성을 떠나, 자연스러운 자기 표현의 욕구를 시로 표출한다. 이제 그들은 시의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인 시의 생산자가 되는 것이다. 시와의 소통은 시의 이해와 감상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시를 통해 자신과 세계를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열다섯, 열일곱 무렵의 학생들은 누구나 시인이다. 그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 세계를 보는 통찰력을 갖게 하는 것, 통합적이고 따뜻한 서정의 눈으로 메마른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갈 힘을 길러주는 것, 이것이 시 교육이 가야 할 길이라면, 오늘의 시 교육은 그 실현을 위한 고민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김영미   1965년생. 공주사범대학, 이화여대대학원 석·박사 과정 수료(문학박사). 「한국 현대시의 어조 연구」,「김안서시 연구」,「정지용시의 운율 의식」,「안서시에 있어서의 번역시의 문제」,「이한직론」등 논저가 있음. 경기여고 교사, 이화여대 강사.
 
교과서 시 교육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김주환  전국국어교사모임

1. 문학 교육의 목표와 내용
『문학』 교육과정에서는 문학 교육의 목표를 ‘문학의 수용과 창작 활동을 통하여 문학 능력을 길러, 자아를 실현하고 문학 문화 발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바람직한 인간을 기른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세부 내용으로 다음 네 가지를 제시했다.

가. 문학 활동의 기본 원리와 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이해한다.
나. 작품의 수용과 창작 활동을 함으로써 문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기른다.
다. 문학을 통하여 자아를 실현하고 세계를 이해하며, 문학의 가치를 자신의 삶으로 통합하려는 태도를 지닌다.
라. 문학의 가치와 전통을 이해하고 문학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문학 문화 발전에 기여하려는 태도를 지닌다.

상당히 복잡하게 진술하고 있지만 위의 목표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문학 교육의 목표를 ‘문학 능력’을 기르는 것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세부항목에서 여러가지를 나열하고 있어 혼란스럽지만 문학에 대한 지식 습득, 문학적 감수성과 상상력, 문학적 가치와 자신의 삶 통합, 문학적 문화 참여 등도 ‘문학 능력’과 연관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학생들의 문학 능력을 길러서 문학적 문화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문학 교육의 목표인 셈이다. 문학적 문화에 참여한다는 것은 문학적 삶을 살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문학 능력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문학 능력이 무엇인가에 대해 『문학교육원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문학 능력이란 문학적으로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능력이 된다. …
따라서 문학 능력은 단순히 무엇을 할 줄 아는 식의 기능에 머물지 않고 문학을 체질화하는 수준으로 습득하여 문학과 함께 생각하고 문학적으로 살아가는 태도의 문제이자, 문학에 동참하여 공유하고 문학을 창달하는 문화적 능력의 문제로 확대된다.

문학 교육의 목표는 학생들의 문학 능력 향상을 통해 보다 잘 살게 만드는 것(인간다운 삶)이다. 그렇다면 과연 ‘문학 능력’이란 무엇이며 이 문학 능력은 ‘국어 사용 능력’ 혹은 ‘국어 능력’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다. 『문학교육원론』에서 이야기하는 바를 살펴보면 일차적으로 문학 능력은 문학적인 이해 표현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 사용 능력을 단순한 기능적 능력이 아니라 사고능력이나 문화적 능력으로 해석하게 되면 문학 능력을 예술적  언어 사용 능력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문학적 문화를 향유하고 체화하는 문화적 능력도 결국은 언어를 통한 이해와 표현과정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 능력’을 ‘예술적 언어 사용 능력’으로 보면 문학 교육과 국어 교육의 관계 또한 분명해진다. 국어 교육의 목표는 ‘언어 사용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 ‘언어 사용 능력’에는 ‘논리적 사용 능력’과 ‘예술적 사용 능력’이 있다. 일상적 언어 활동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을 정확하고 논리적인 언어 사용 능력이라고 한다면 예술적인 언어 활동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상징적 언어 사용 능력이다. 이렇게 보면 국어과와 독립된 교과로서의 문학 교과라는 것은 허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문학 교과는 국어과와는 다른 어떤 것을 가르치는 교과로서 규정되어 왔다. 문학 교과서가 문학적 지식과 전통에 집착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국어과와 다른 예술 교과로서 문학 교과를 설정했기 때문에 문학 교과서는 문학의 특수성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학의 언어가 일상의 언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 문학 텍스트를 통해서도 언어의 논리적 사용 능력과 예술적 사용 능력을 함께 기를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 교과를 국어 교과와 구분하는 태도는 올바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국어과 교육과정 영역 구분을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언어, 문학 여섯으로 나눈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렇게 나눔으로써 문학은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와 다른 무엇이 되어버렸다.

문학 교육이 예술적 언어 사용 능력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교육 내용은 무엇이어야 할까? 국어과 교육과정에서는 ‘언어 활동과  언어와 문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익혀, 이를 다양한 국어 사용 상황에서 활용하는 능력을 기른다.’고 규정하고 있다. ‘능력’을 향상시키려면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10학년 문학 영역 교육과정 내용
·문학의 기능을 안다.
·작품의 구성 요소와 그 기능을 이해한다.
·문학의 갈래에 따른 작품의 미적 가치를 파악한다.
·작가, 작품, 독자의 관계를 알고, 이를 작품 수용에 능동적으로 활용한다.
·작품에 드러난 사회 문화적 상황을 파악하고, 이를 작품 수용에 능동적으로 활용한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문학적으로 표현한다.
·한국 문학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려는 태도를 지닌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문학 능력을 기르는 것은 다른 문제다. 문학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문학 능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문학은 하나의 새로운 교과로서 자신의 학문 체계를 가르치는 데 급급했다. 문학의 학문적 원리와 문학사적 지식을 제공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학생들은 문학을 어려워하고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문학 교과서는 그야말로 문학 전공자들의 자기 현시의 장일 뿐이었다.

문학은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며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학문으로서의 문학적 태도는 학생들을 위해서도 문학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학생들이 문학적 삶을 살게 하는 데 문학교육의 온전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문학 교육의 내용은 곧 문학 작품에 대한 체험을 넓히는 데 두어야 할 것이다. 사실 문학적 지식을 습득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러한 지식은 문학 작품을 보다 잘 이해하고 즐기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교육과정이나 교과서를 보면 문학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문학적 지식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작품 분석이 활용되는 전도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문학적 지식이라는 것은 문학적 연구의 소산이다. 문학 현상에 대한 탐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문학 현상에 대한 탐구와 문학을 즐기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모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학 작품을 감상할 수 있고 창작할 수 있다. 문학적 연구는 문학 현상을 탐구하여 그 내적 원리를 규명함으로써 문학적 문화를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다. 그것은 언제나 진행중이며 누구도 문학의 본질을 완전히 규명해 내지는 못하였다. 문학의 본질은 곧 인간과 언어의 본질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적 연구의 결과를 문학 교육의 내용으로 삼아 제시하는 것은 참으로 본말이 전도된 것이며 문학 권력의 자기 재생산을 위한 기도일 뿐이다. 학생들은 문학 작품을 읽고 창작해 보는 경험 속에서 문학에 대한 흥미를 높일 수 있으며 문학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 속에서 나름대로 이해와 표현의 원리를 익힐 수 있다. 이렇게 얻은 지식이야말로 학생들의 삶을 살찌우는 진정한 지식이다.

문학적 표현과 이해의 능력, 즉 예술적 언어 사용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문학적 표현과 이해 활동을 열심히 해야 한다. 문학적 표현과 이해 활동을 하려면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어떤 작품을 읽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읽기 수준이나 인식의 범위를 고려해서 적절한 작품을 읽도록 안내하는 것이야말로 문학 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어차피 문학적 체험이라는 것은 작품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학생들이 향유할만한 작품 목록을 제시하고 읽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읽기 자료의 목록이 전학년에 걸쳐서 제시되어 초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읽어왔다면 누구나 상당한 수준의 문학 능력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그러한 목록이 없고 이를 체계적으로 읽도록 지도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서 학생들의 문학 능력은 개인적 체험의 정도에 따라 매우 뛰어난 학생들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초보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음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어떤 능력을 키워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문학 능력이란 예술적 언어 사용 능력이라고 했다. 남이 하는 예술적 표현을 이해하고 자신도 좀더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술적 언어 사용 능력은 우리의 삶을 인간적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풍요롭게 해준다. 문학 작품은 대부분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심미안을 갖는 것은 곧 사람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가는 데 있어서 멋과 여유를 갖도록 한다. 문학 작품을 향유하면서 얻은 능력은 이처럼 일상적인 삶 자체를 변화시키는 힘을 갖게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작품을 읽었다는 자위가 아니라, 작품에 대한 이해와 창작 활동을 통해 이와 같은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말을 배우는 시기에는 시인이었다. 어른들이 쓰는 상투적 표현과 달리 새로운 세계를 낯설게 표현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갈수록 어른들의 상투적 표현을 따라 하게 되고 그만큼 감각도 무뎌지고 삶도 상투적이 되어버린다. 세계에 대한 경이와 감동을 잊어버리고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문학에 관심을 갖고 흥미를 느끼는 이유도 바로 이런 원초적인 욕망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학생들에게는 문학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 잠재되어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언어 능력은 누구에게나 잠재 능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적인 문학적 활동을 통해 어린 시절 이후 잠자고 있는 예술적 언어 사용 능력을 깨워야 한다. 흔히 말하는 문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능력을 어떻게 자극하여 활성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학 교육 혹은 국어 교육의 과제이다.

2. 교과서를 통해서 본 시 교육의 문제점
교과서를 살펴볼 때 고려해야 하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 그 하나는 교과서 전체의 체제와 틀이다. 체제와 형식은 내용을 규정하기 때문에 교과서의 틀은 교육내용과 방향을 지정해준다. 따라서 교과서의 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국어 교과서의 틀은 큰 차원에서 별로 변화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틀이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국정 교과서는 지식 기능 중심의 편성체제를 갖고 있다.
 
『고등 국어』의 경우는 읽기의 즐거움과 보람, 짜임새 있는 말과 글, 다양한 표현과 이해, 바른 말 좋은 글, 능동적인 의사소통, 노래의 아름다움, 생각하는 힘, 언어와 세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국어과 교육과정에서 제시하는 지식과 기능들을 직접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반면 『고등학생을 위한 우리말 우리글』은 나, 과학 이야기, 멀리서 웃는 그대여, 신화 속으로, 세상을 보는 눈, 돈, 이미지 세상, 흔들리며 피는 꽃, 우리말글살이, 자연과 사람, 따로 또 같이 등과 같이 주제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자연과 사회, 인간의 문제를 대단원의 제목으로 잡았다. 이와 같은 주제 중심의 교과서 편성틀은 외국의 경우에도 많이 살펴볼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보는 것이다.

둘째로 고려해야 할 것은 작품 선정의 문제다. 지금까지 국어 교과서는 대체로 읽기 자료 중심이었다. 어떻게 보면 읽기 자료 모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국어 활동이 언어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다. 문제는 어떤 텍스트를 선택했느냐에 따라 학생들의 관심과 흥미, 학습 방향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텍스트를 선정하는 기준은 교육의 방향을 일정하게 규정한다.

셋째는 학습 활동이다. 지금까지 교과서 분석에서 학습 활동에 대한 분석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제재분석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학습 목표와 방향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 학습 활동이라고 해야 한다. 아무리 나쁜 텍스트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유용한 학습자료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린 것이다. 이 교육의 방향을 구체화하고 있는 학습 활동에 대한 분석이나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학생들의 학습 과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1) 작품 선정에 대해
『고등 국어』 상, 하권에서 시 단원은 한 단원 들어 있다. 상권의 <6. 노래의 아름다움>에서 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단원에서 다루는 작품은 「청산별곡」, 「어부사시사」, 「진달래꽃」, 「유리창」, 「광야」 다섯 편이다. 심화학습에서 다루고 있는 백석의 「여승」, 준비 학습에서 다루는 이은상의 「가고파」를 포함하면 모두 일곱 편이 실려 있다. 이 작품들은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 알 수 있는 작가의 작품들이다. 이런 작품을 선정한 기준에 대해 개발을 담당했던 김대행 교수는 “교과서에서 읽은 글은 그만큼 오래 기억되며, 또 교과서에 실린 글은 평생을 두고 다시 찾아 읽는 일이 드물다는 점을 고려하여 충분히 읽고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글로 제재를 선정하였다.”고 했다. ‘읽고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라는 선정 기준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함의를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우선 문학사적 측면에서의 가치가 작용하고 있으며 도덕적 가치 기재가 작용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들이 우리의 언어 문화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뜻과 이 작품들이 예술적 언어 사용의 모범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뜻을 함께 내포한다. 이른바 정전 중심의 작품 선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작품들이 학생들에게 충분히 가르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는데 별다른 이견은 없을 것이다. 또 고1 학생들이 읽고 이해하는 수준에서 적합한 작품이냐를 따졌을 때 충분히 읽고 학습할만한 수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작품을 선정한 데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선 이들 작품을 갖고 수업을 했을 때, 이들 작품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이 어떻게 일어날까 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들 작품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대체로 신통치가 않다. 학생들이 작품에 대해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학생들이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작품에 대해 그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야 하니 교사는 죽을 맛이고 아이들은 설명을 통해 그 작품의 아름다움을 ‘이해’한다. 시의 아름다움을 설명에 의해 이해한 학생이 참으로 시를 즐기고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시는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남아 있고 교사들에게는 가르치기 힘든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충분히 읽고 기억할 만한 가치 있는 글’인데 왜 이런 반응이 나오는가? 개발진들이 말하는 대로 수업의 문제는 교사의 문제이고 교사가 교수학습 과정을 제대로 이끌어 가지 못했기 때문일까? 물론 교사의 문제 또한 개입되어 있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작품 선정이 진정으로 최선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무언가 미흡한 점이 있다.
아이들은 어떤 작품을 좋아하고 재미있어 할까?  몇 년 전에 나온 다음과 같은 학생시는 모든 학생들에게 충격과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시험

또 봐?

이 시를 읽은 학생들은 시가 주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두 개의 단어와 하나의 문장 부호로 학생들을 단번에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 시는 시험을 발표하는 선생님과 그 말을 듣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한눈에 연상된다. 그리고 그 학생들의 속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이 시는 앞에서 말한 ‘충분히 읽고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절대 채택될 수 있는 시는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가 무엇인지를 느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아이들이 이 작품을 읽고 재미를 느끼는 이유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아이들이 품고 있는 시험에 대한 불만을 자극하고 터트려 주었기 때문에 재미있다. 즉 이 작품의 가치는 작품의 내적 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읽는 이의 정서에 있다. 시란 어쩌면 이러한 ‘우리들의 공감대’를 확인하고 이를 자극하는 데 존재이유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좋은 작품이란 ‘우리들의 공감대’를 확인하고 이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주는 작품일 것이다. 「시험」이라는 작품은 학생들의 공감대를 자극하여 재미를 안겨주었지만 이러한 감정을 상승시켜주는 내적 구조가 취약하다는 점에서 ‘학습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시의 즐거움이 어디에서 오며 작품 선정에서 고려해야 할 요소가 무엇인가를 시사한다.

학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서와 가치냐 하는 것은 학생들의 작품 이해와 감상에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학생들의 공감 여부는 작품 선정에서 크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학생들의 공감형성과 함께 이 정서와 인식을 상승시킬 수 있는 요소를 갖춘 작품이야말로 교육자료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위에서 선정된 작품들은 지금 이 시대 고등학교 학생들의 정서적, 인식적 자장을 고려한 바탕 위에서 이를 향상시킬 목적으로 선정되었는지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시대적으로 볼 때, 이미 반세기 이전의 작품들로만 선정되어 있어 정서적, 인식적 공감이 쉽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어떻게 보면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라면 위에서 든 작품 정도는 이해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굳이 자기 체험에 기초한 작품이 아니고 먼 옛날이나 나의 경험과 좀 다른 것이라도 상상력을 발휘해서 공감하고 시의 맛을 느끼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초등학교 교실에서부터 학생들의 자기 정서와 인식에 대한 공감을 느끼고 시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훈련을 해 오지 못한 아이들에게 갑자기 함축적 표현을 읽고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토끼타령

그린다고 그린 게
토끼 한 쌍 그렸네.
두 눈은 도래도래,
두 귀는 쫑긋,
앞발은 짤막,
허리는 잘록,
꼬리는 몽탕.
앞산 뒷산에
깡동깡동 뛰어 올라간다. (읽기 2-2)

초등학교 2학년 교과서에서 다루어지는 이 작품은 운율적 반복의 원리에 의해 구성되어 있어 말의 재미를 줄지언정, 정서적·인지적 측면에서는 새로운 공감이나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또한 표현에서도 상투적 표현의 나열이라서 학생들에게 참신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2학년 아이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생각이 어른들 뺨칠 정도다. 그런데 이 시에 표현된 인지적 수준은 유치원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아이들이 이 시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겠는가? 이 시를 배우는 목적은 토끼에 대한 상투적 표현을 익히는 것뿐이다. 토끼는 ‘깡총깡총’ 뛴다고 생각했는데, 이 시에서는 ‘깡동깡동’으로 표현해서 참으로 ‘참신하다’고 해야 할까?

「시험」 같은 시는 굳이 교실에서 다루지 않아도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부터 위와 같은 작품들에만 익숙한 학생들에게 「시험」이라는 시는 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주는 신선한 작품이다. 공감과 향상의 원리에 의해 작품을 선정하고 이를 통해 학생들의 시적 상상력을 키우려는 노력은 어느 한 단계에서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초중고 모든 과정에서 일관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초등학교에서는 동시 중심의 문학적 태도와 관습이, 중등에서는 국문학적 태도와 관습이 지배적으로 작용해서 작품이 선정될 뿐, 진정한 의미에서 학생들의 정서적 인식적 공감과 향상에 기초한 작품 선정 원리를 발견할 수 없다.

2) 학습 활동을 통해서 본 시 교육의 문제점
학습 활동을 어떻게 주는가는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몫이다. 여기에는 시 교육의 전략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앞에서 든 「토끼 타령」의 질문을 살펴보자.

# 「토끼타령」을 읽고, 물음에 답해 봅시다.
(1) 토끼의 생김새를 어떤 말로 나타내었나요?
(2) 토끼의 움직임을 어떤 말로 나타내었나요?
# 「토끼타령」을 읽고, 생각이나 느낌을 말하여 봅시다.
# 토끼의 모양을 흉내내는 말에 어울리는 몸짓을 하여 봅시다.

작품을 읽고 별 내용이 없어서 아무 느낌도 없는데 생각이나 느낌을 요구하는 이 질문에 답하려고 할 때, 아이들은 어떤 느낌을 가질까? 아이들은 이 시가 별볼일 없는 시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이 시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이 질문에서 중요한 (1), (2)번 질문은 시적 표현의 함축성을 이해하기보다는 생김새를 나타내는 말과 움직임을 나타내는 말을 구분하는 국어지식과 관련된 수업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단원의 중요한 목표는 ‘시를 읽고, 생각이나 느낌을 말하여 봅시다.’는 것이다. 이런 억지 활동 속에서 학생들은 시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키워가기는커녕 시는 나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편견을 쌓아가게 된다.
『고등 국어』 상권의 <6. 노래의 아름다움>에서는 단원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안내하면서 작품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학습 활동이 어떻게 제시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문학 작품의 아름다움을 실현하는 작품의 구성 요소와 기능을 이해한다.
·문학 작품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자신의 듣기 활동을 조절하면서 듣는 태도를 지닌다.

[혼자하기] 1. 이 시의 낭독을 들은 후 작품의 분위기와 정서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는지 말해 보자.
[혼자하기] 2. 이 시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면서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이 시의 음악성에 대해 말해 보자.
(2) 이 시에 나타난 형상성에 대해 말해 보자.
(3) 이 시에서 함축성이 잘 드러난 표현을 찾아보자.
[함께하기] 3. 이 시의 화자인 ‘나’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구상하여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발표해 보자.
(2) 다른 사람의 발표를 듣고, 자신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 메모해 보자.
(3) 이해할 수 없거나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을 메모하여 발표자에게 질문해 보자.

이 질문과 활동을 보면 이 학습 활동을 구성한 사람들이 수업을 해 보았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우선 1번에서 이 시를 낭독한 다음 분위기와 정서를 파악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다. 안타깝다든지, 애절하다든지 하는 말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정서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는지는 도무지 말하기 어렵다. 이것은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비평적 판단을 요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2번 문제는 이 단원의 대부분의 작품에 동일하게 제시된 질문이다. 시의 아름다움은 음악성, 형상성, 함축성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이 요소를 알면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는 목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음악성, 형상성, 함축성 등에 대해 알아두기에서 간단히 설명을 하고 이 기준에 의해 작품을 살펴보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한두 줄 설명으로는 이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 개념을 가지고 작품을 설명하도록 요구받기 때문에 학생들은 작품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전에 이 질문 앞에서 주눅들어 버린다. 3번은 활동중심 교육과정을 반영하려고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활동을 하려면 시의 화자인 ‘나’의 상황과 심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앞의 활동이 ‘나’의 심리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질문이었는지 의심스럽다. 이에 대한 충분한 활동이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 보는 활동을 하게 될 때는 무성의한 활동이 되기 쉽다.

「진달래꽃」은 고등학생들이 이해하기에 그리 어려운 시는 아니고 공감의 여지가 없는 작품도 아니다. 그렇지만 질문을 보면 참으로 작품이해를 어렵게 만들고 싫증나게 한다. 질문과 활동의 기본 방향은 학생들의 현재 정서적, 인식적 상태에서 출발해야 하며 누구라도 텍스트를 읽으면 생각과 느낌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정교하게 구성해야 한다. 예를 들어 1번 질문에서 낭독을 했으면 쉬어 읽는 부분에 유의해서 가락을 느껴 보게 하고 리듬이 어떤지 느껴보도록 안내해야 한다.
 
그리고 반복되는 어휘, 구절, 연 등을 찾게 하고 반복이 의미의 변화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살피게 한다. 그리고 각 연에서 표현되고 있는 역설적 의미들을 탐색하고 의미와 정서가 어떤 흐름을 갖는지 전체적인 짜임새를 파악하도록 구체적인 질문을 주어야 한다. 즉 “고이보내 드리우리다”는 말 속에서 화자의 심리가 어떠한지를 상상해 보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왜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지, 이러한 심리를 가진 화자의 성별, 사회적 지위, 나이, 시대적 배경 등을 상상해서 재구성해 보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자신이라면, 지금과 같은 시대적 상황이라면 이런 목소리와 태도가 가능할까 견주어 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질문과 활동은 작품 속으로 들어가 작품을 온전히 느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이런 안내역할이 충실할 때, 그냥 읽을 때와 다른 깊이와 감동을 느낀다. 이것이 새로운 깨달음과 인식의 확장을 경험하는 진정한 즐거움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작품을 읽는 즐거움을 느낀 학생들은 이런 즐거움을 다시 느껴 보기 위해 새로운 시를 찾아 읽어 보고 어려운 시에도 도전하려는 의욕을 가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향상인 것이다. 그러나 『고등 국어』에서 다루어지는 질문과 활동들은 작품에 대한 핵심적 이해와 동떨어진 추상적 지식의 나열에 그치고 있다. 오히려 작품보다 못한 질문으로 작품 이해에 혼선을 초래하고 읽기 싫도록 만든다. 이것은 학생들의 예술적 언어 사용 능력이 어떻게 발휘되고 향상되는지에 대한 이해, 학습 과정에 대해 성실하게 고민하지 않고 그저 문학적 지식에만 안주해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적 지식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지 문학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문학적 지식을 무조건 배제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그 지식이 작품을 이해하고 표현하는데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모르면서 일방적으로 제시하고 습득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코뚜레를 꿰어서 소를 죽이는 일이다.

3. 바람직한 시 교육을 위하여
지금까지 국어 교과서나 문학 교과서의 구성 방식은 지식을 중심으로 하는 지식 습득 모형이었다. 즉 지식 제시 → 작품 감상의 방식이다. 관련된 지식을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학 작품은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시 자료로 활용되거나 연습 자료로 제시될 뿐이다. 또한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도 읽는 이가 자유롭게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기보다는 주어진 내용을 이해하고 주제를 파악하는 것, 나아가 문학적 요소를 파악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학생들은 지식을 습득해야 하고, 주어진 작품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 제시된 작품 또한 학생들의 관심과 흥미가 중심이 되어 선정된 것이 아니라 문학사적 평가 속에서 반드시 읽어야 할 목록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렇게 교과서가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관련 지식을 이해하도록 하는 데 있어서도,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교사의 헌신적인 노력과 설명이 필요하게 돼 있다. 학생들은 점점 흥미를 잃어가고 있는 반면 교사가 설명해야 할 몫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지식이나 문학사를 앞 자리에 세우기보다는 직접 작품을 읽고 해석해 보고 문학적 창작 경험을 가져 볼 때, 예술적 언어 사용 능력을 기를 수 있다. 일단 물건을 만져 보고 뜯어 본 다음 그것이 무엇인지를 탐색해 나가는 것이 학습의 흥미를 지속시키고 인식을 심화시키는 길이다. 활동을 중심에 두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작품을 중심으로 이해와 표현 활동을 해나가는 가운데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개별 작품에 대한 이해가 곧 문학에 대한 이해를 뜻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문학이란 하나의 속성이며 이런 속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개별 작품의 총합이 곧 문학은 아니라고 해도 작품을 떠나서 존재하는 문학의 속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문학 교육이 활동 중심일 수밖에 없는 것은 문학이 언어 예술이기 때문이며 언어는 듣기/말하기나 읽기, 쓰기의 방식으로 소통되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상이 없는 활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활동의 대상은 작품이며 작품을 읽고, 토론하고, 비평하고, 창작해 보는 활동 가운데서 문학의 속성을 이해하고 개념적 지식 또한 얻을 수 있다.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곧 언어에 대한 감각을 키운다는 것과 같다. 독자는 주어진 낱말과 문장, 표현 구조 등을 바탕으로 필자가 전하고자 하는 바의 느낌과 생각을 새롭게 구성한다. 물론 이때의 의미란 필자의 그것이라기보다는 독자에 의해 해석된 의미이다. 따라서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독자가 주어진 언어 자료를 자신의 스키마(Schema :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구조, 또는 개인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경험의 총체)와 결합시켜 해석적 텍스트를 구성하는 것이다. 만일 주어진 언어 자료와 자신의 경험이 적절하게 연결되지 않을 경우 이해는 이루어지지 않고 스트레스를 양산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육에서는 언어자료만을 중시했지, 학생들의 정서적·인지적 경험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되는가, 혹은 주어진 언어자료가 어떤 정서적·인식적 자극을 주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제는 작품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문학이 이를 가르쳐야 한다는 전제를 버리고 아이들의 문학 능력을 진단하고 이를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때다. 학생들이 예술적 언어 사용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은 백지이론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을 이해하지 못한 태도이다. 문학적 지식이 없다는 것과 문학 능력이 없다는 것은 다른 것인데도 종종 이 두 가지가 혼동된다.

누구나 언어 능력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문학 능력도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이다. 문학 수업은 이러한 타고난 학생들의 능력을 향상시켜주는 데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과 흥미야말로 교육의 시작이다. 그런데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을 배제하고서 정전만을 고집한다면 교육의 가능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쉽게 이해되는 작품이라고 해서 학생들이 흥미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흥미와 관심은 정서적, 인지적 공감에서 시작해서 높은 수준으로 향상될 때, 더욱 높아진다. 이러한 교육적 관점에서 작품을 선정하고 활동을 마련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문학 교육이라는 말은 문학과 교육을 결합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서로 동등한 관계일 수 없다. 문학과 교육에서 중요한 무게를 갖는 것은 교육이다. 교육은 학생, 곧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며 문학은 그 인간이 만든 문화적 생산물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모자란 인간이라도 그 인간은 말할 수 없이 오묘한 세계를 갖고 있는 신이 만든 예술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만든 예술을 가지고 신의 예술 영역을 유린해 왔던 것이 지금까지의 문학 교육이었다. 아이들을 죽이고서 어떻게 문학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학의 위기는 엄밀하게 말해서 문학적 오만의 위기일 뿐이다. 문학 교육은 이러한 문학적 오만에서 벗어나 신이 만든 예술품인 학생을 존중하고 학생을 위해 봉사하는 태도를 가질 때 비로소 제자리를 잡을 것이다.

김주환    우리말교육연구소 부소장. 장위중학교 교사
 
 
현장에서 본 우리 시 교육

서정윤 시인·대구 영신고 교사

‘우리 시 교육, 바로 가고 있나?’라는 물음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보다 부정적인 시각이 더 강하다는 것은 좀더 나은, 아니 올바른 교육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현재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늘상 학생들과 함께 시를 가르치고 배우는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시 교육에 대해 과연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마침 이런 기회가 주어져서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문제들을 몇 가지 짚어 보기로 하겠다.
첫째로 초등학교 6학년까지의 교과서에는 주로 동시가 실리니까 논외로 하고, 중학교 1학년에서 고등학교 3학년까지 6년간 배우는 우리 학생들의 시 교육이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 개화기의 시이면, 2학년 때는 1920~30년대의 시, 3학년이면 해방전후의 시, 고등학교 교과서 상에서는 1960~70년대의 시, 하에서는 1980~90년대의 시, 이렇게 체계적인 교과서 편찬이 이루어져야 하겠다는 말이다. 체계가 없이 그저 고전시에서부터 40년대까지의 작품들만 완전히 뒤섞인 채 여기저기에 실려 있으니 졸업을 하고 나서도 그것이 시의 전부인 양 생각할 수밖에 없고 시를 적어서 좀 봐주십사 하는 문학도들조차 1920~30년대의 시를 흉내낸 작품들이 대부분인 것이다.

둘째로 문학성이 결여된 작품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문학성 자체가 그 작품의 당락, 즉 실리고 실리지 않고를 결정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교과서 편찬위원들의 친분관계에 의해, 혹은 정권의 선호도 내지는 정부의 친밀도에 의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 더러 눈에 띄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압축과 비유, 상징이라는 시문학의 기본적인 특성을 가르치다가도 거기에 완전히 배치되거나, 소년소녀적 관념에 매달린 작품을 보면 정말로 힘이 빠진다는 건 나만이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 문학성이라는 것은 완벽하게 객관적인 잣대가 완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 사람과 가까운 친구, 혹은 친지가 이름 있는 비평가가 되어 그 비평가의 훌륭하다라는 말 한 마디에 정말로 훌륭한 작품이 되어버리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 상황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객관적인 잣대나 기본적인 문학성은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 오늘날 국어 교육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생각이다.

또 6차 교육과정으로 바뀌어 오면서 국어 교과서에서 시들이 사라지고 그 사라진 시들은 문학 교과서로 묶이게 되었다. 하지만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국어를 이해하고, 시를 외우면서 모국어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게 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국어 교과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실용화 중심의 교과서로 바뀌어 나가는 데는 정말 안타까운 점이 많이 있다. 고등학교 졸업해서 실험 보고서, 전세 계약서 하나 작성하지 못한다는 것이 교과서가 바뀐 이유라고 하지만 그러면 과연 바뀐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은 실험 보고서나 전세 계약서를 잘 작성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는 게 답이다. 어차피 실험 보고서나 전세 계약서 같은 실용적인 글들은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방법을 배우면 되는 것이다. 그런 실용적인 것들, 우리 생활에 당장 필요한 것들을 위해 우리의 고등학교 교육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고등학교 교육은 우리 사회를 구성해서 살아갈 신참자에게 보편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국어를 이해하고 우리말에 대한 애정이 생기도록 유도해주면 그 다음 그 국어로 실용적인 말들을 만들고 응용하는 과정은 스스로 할 수 있고 그것이 스스로 안 되면 전문가의 도움을 조금 받으면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교과서를 실용적인 것으로 개편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의 7차 교육과정 국어 교과서는 가르치는 데도, 배우는 데도 너무 삭막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교과서로는 국어에 대한 애정을 가져라 라고 말할 수도 없으며 또, 한글날에 대한 관심도 한글에 대한 사랑도, 우리 말에 대한 애정도 자꾸만 식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하루 수업을 받는 시간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 국어시간이고, 문학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은, 우리 시 교육이 너무 획일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교육을 해온 우리들의 잘못이다. 입시, 혹은 시험으로 학생들을 순위 매기기만 해온 우리 교육의 나쁜 점이라는 말이다. 시라는 것은 너무나 다양한 것이고 또 그 자체가 생명력을 가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제망매가」와 똑같은 작품이 현재에 나온다면 누가 감동하며 읽을 것인가. 늘상 하는 얘기지만 시는 발표 후에는 독자의 것이다. 시가 발표되고 나서도 시인의 것이라고 얘기하는 곳은 교육현장뿐일 것이다. 시인이 어떤 상황 어떤 기분에 의해 시를 썼든지 무슨 상관인가. 그 시를 읽는 독자가 자신의 배경지식에 의해 받아들이고 이해하면 그만인 것을……. 하지만 오늘날 교육현장에서는 참고서를 읽어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선생님들도 학생들에게, 시를 읽고 각자 느끼는 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라고 가르치고 싶지만 그 내용들이 시험에 나오고 입시에 출제가 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실력 없는 선생으로 낙인 찍혀(곧 있을 연봉제에) 퇴출될 수도 있기에 입시에 출제되는 대로 이것이 정답이다 라고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왜 우리의 학생들은 문학작품을 읽고 주제는 무엇이고 중심소재는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야 하는가, 또 그들은 왜 문학작품을 읽고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가슴을 가지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는 바로 국어 교육을 하는 현장에서 깊이 반성하고 또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 학생들에게도 문학 작품을 읽고 느낄 수 있는 가슴을 다들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단지 그들에게서 그것을 끄집어내어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을 뿐이다. 우리 학생들이 시를 읽고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끄집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서정윤   1957년 대구 출생. 1984년 《현대문학》으로 데뷔. 시집 『홀로서기』 외 다수. 현재 대구 영신고 교사.
 
시 한 편을 스스로 읽어낼 수 있는 독자를 만드는 교육이 필요하다

박완호 시인·풍생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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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쳐 온 지 벌써 열두번째 해를 맞이하고 있지만 돌이켜 보면 성취감보다는 부끄러움과 아쉬움이 앞선다. 대부분의 국어 교사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직접 작품을 쓰는 입장이다 보니 그 정도가 조금이라도 더할 듯싶다.
우리의 문학 교육은 끊임없이 절름발이 독자들을 만들어 왔다. 예나 지금이나 문학 교육은 학교 안에서나 그 의미를 지닐 뿐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특히 시의 경우가 가장 심하다고 하겠는데, 시가 갖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문제가 심각한 편이다. 실제로도 학생들은 시 분야를 공부하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고 있지만 그 돌파구를 찾는 일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손을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기 때문에 이 글을 통해 간단하게나마 우리 시 교육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나름대로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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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적게는 수십 편에서 많게는 백여 편 이상의 시들을 읽고 배워왔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대하는 시 한 편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읽어 낼 수 있는 학생은 별로 없다. 우리의 시 교육이 이처럼 무기력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문제 풀이를 위한 교육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 작품 읽기는 기본적으로 개인적 경험과 이해의 차이에 따르는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하지만 문제 풀이에서는 단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한다. 객관식으로 치러지는 대부분의 시험에서 학생들은 다섯 개 정도의 보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은 자기의 생각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출제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정답과 일치하지 않는 개인적인 시 읽기는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만다. 자기의 생각이 해설에 나타난 내용과 차이가 날 때 학생들은 자신을 불량품처럼 취급하기까지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나 학생들은 각종 자료에 제시된 작품 해설에 근거하여 시를 읽어 내려 애쓴다. 한 마디로 시의 구체적인 표현 내용을 통해 작품이 지닌 총체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해설을 읽고 거기에 제시된 주제나 특성들을 억지로 적용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 시 교육의 현실이다. 그렇다 보니 아무리 많은 작품을 배우더라도 수업 시간에 배우거나 해설에 제시된 내용만을 알 수 있을 뿐 새로운 작품을 읽어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스스로 한 편의 시를 읽고 감상할 수 있는 적응력을 길러 주기 위해서는 우선 문학적 독서와 경험을 통해 그러한 능력을 갖춘 교사가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게 사실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국어 교사들 역시 비정상적인 문학 교육을 받아 온 까닭에 개인적으로 특별한 문학적 독서나 경험을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능력을 지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설사 그만한 능력을 지닌 교사가 있다 해도 개인의 힘으로 시험에 대비한 시 교육이 지닌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획일적인 정답을 요구하는 시험(특히 객관식)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하지 못하는 한 바람직한 문학 교육의 실현은 머나먼 꿈과도 같다.

시험 및 평가 제도의 개선 없이 정상적인 시 교육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개인적 차이를 존중하고 그 차이에서부터 비롯되는 다양한 반응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 반복적 경험과 자기 논리의 발전을 통해 학생들은 새로운 문학 작품을 읽어 낼 수 있는 적응력을 키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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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등학생 때 배운 교과서에 비하면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지금의 교과서 역시 시  작품의 선정 및 수록에 있어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6차 교육과정의 국어 교과서에는 「진달래꽃」(김소월), 「광야」(이육사), 「설일」(김남조),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한용운) 등이 실려 있으며, 7차 교육과정에는 「진달래꽃」(김소월), 「유리창」(정지용), 「광야」(이육사) 등이 실려 있는데 이들 대부분이 이십여 년 전에 내가 배운 국어 교과서에 들어 있던 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7차 교육과정의 문학 교과서는 출판사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지지만 기본적인 틀은 크게 다르지 않고 수록된 시들도 대부분 비슷하다. 예전에 비해 새로 수록된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시들이 있는데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문학 교과서는 예전의 것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실정이다.

·「산문에 기대어」(송수권),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황지우) ― 블랙박스
·「우리가 물이 되어」(강은교) ― 문원각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황동규), 「귀천」(천상병), 「우리 오빠와 화로」(임화), 「무등」(황지우), 「파랑새」(한하운), 「오분간」(나희덕),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사평역에서」(곽재구), 「들길」(도종환) ― 민중서림

문학 교과서에 수록된 시들은 대부분이 일제 강점기를 비롯하여 적어도 수십 년 이전에 발표된 것들로 지금의 시적 경향과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다. 새로 실린 시들도 도종환·나희덕의 시 말고는 그다지 새롭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 보니 학생들은 다양한 작품을 읽을 기회를 갖지 못하고 현재의 문학적 경향이나 수준을 파악하기 어렵다. 학생들이 시대·경향 면에서 다양한 성격의 작품들을 접할 수 있도록 해 문학사적 이해와 함께 동시대의 문학 흐름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래야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시 교육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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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그 발생에서부터 감상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있어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다. 한 편의 시는 개인적 경험의 차이를 토대로 다양하게 읽혀질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의 시 교육은 개인적 차이를 무시한 채 획일적인 읽기만을 지나치게 고집한 나머지 스스로 문학 작품을 읽고 감상하는 태도를 기르는 데는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한 문제 인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과거의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제 시 교육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태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 변화의 출발은 먼저 시험 및 평가 제도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의 시험 형태로는 능동적으로 문학 작품을 읽어 낼 수 있는 독자를 만들어 내기 어렵다. 따라서 다양하고 깊이 있는 작품 읽기가 가능해지도록 각자의 경험과 가치의 차이에 따르는 개인의 주관적 감상을 인정하고, 나름대로의 논리적 타당성을 근거로 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교과서 또한 시대나 시인, 시적 경향 등을 근거로 다양하고 균형 있는 작품의 선정과 수록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적극적인 감상이 가능하도록 작품 해설보다는 문학 작품에 대한 다양한 접근 방식을 제시하고 학생들이 실제로 적용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 스스로가 해설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한 편의 시를 읽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기 위해 문학적 독서와 경험을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많은 문제를 안고 있기는 해도 문학 교육의 미래가 그렇게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저마다 해결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며 교육 과정 역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의 문학 교육은 조금씩 바람직한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중이다. 
 
박완호   충북 진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1년 《동서문학》으로 시 등단. 시집 『내 안의 흔들림』. 현재 풍생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문화저널21 & 계간 시인세계 / 문학부문 munhak@mhj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