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나를 찾아 가는 길

[스크랩] 一. 무상정변지 (無上正遍智) - ⑪

맑은물56 2010. 5. 12. 16:34

  그러나 화살을 맞고서 그냥 죽을 수는 없었겠지요. 더구나 무시무시한 그런 힘을 가진 사자인지라 비록 독화살을 맞았지만 그 순간만은 더구나  그 원망과 사무치는 성내는 진심(眞心) 때문에 그때 분출되는 힘이라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시무시한 진심을 내서 포악스럽게 순간 그 사냥꾼을 덮쳐서 죽이려고 맘먹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삼보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법문을 통해서 들었기 때문에 방삼보계(謗三寶戒)가 상기(想起)가 돼서 그때 읊은 슬픈 노래가 여기 있는 견서사자게(堅誓獅子偈)입니다.

 

            원자상신명(願自喪身命)

            종불기악심(終不起惡心)

            향어괴색복(向於壞色服)

            원자상신명(願自喪身命)

            종불기악심(終不起惡心)

            향어출가인(向於出家人)

 

  원자상신명(願自喪身命)하니, 원컨대 내 신명(身命)을 다 바친다 하더라도 종불기악심(終不起惡心)이라, 끝내 나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나이다.

  향어괴색복(向於壞色服)이라, 향할 향(向), 말미암을 어(於), 헐을 괴(壞), 괴색(壞色)은 우리 가사(袈裟)의 색입니다. 모든 색을 다 합하면 괴색이 됩니다.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을 한데 모으면 그때는 괴색이 됩니다. 우리 법의를 가리켜서 괴색 그럽니다.

  원컨대 내 신명을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끝내 남을 헤치고자 하는 그런 악심은 품지 않겠으며, 특히 괴색 가사를 입은, 법의를 입은 사람에게 악심을 내지 않겠나이다.

  비록 독화살을 나한테 쏘았다 하더라도 그 가사를 입었다는 그것 때문에 -그 사냥꾼이 배신자요, 그 욕식밖에는 없는 사람이요, 또는 스님도 아닌, 그러나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었다는 그것 때문에- 그것만 가지고도 역시 내 신명을 곧바로 바친다 하더라도 내가 악심을 품지 않겠나이다.

  원자상신명(願自喪身命)하니, 원컨대 내 신명을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종불기악심(終不起惡心)이라. 원컨대 내 신명을 다 바친다 하더라도 끝내 악심을 내지 않겠나이다. 향어출가인(向於出家人)이라, 출가인에 대해 악심을 내지 않겠나이다.

  너무 출가인들을 돋보이게 말씀드려서 언짢게 생각하실지는 모르지만 생각해보면 사실은 소중한 것입니다. 재가인도 소중하고 다 소중합니다만 특히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 이렇게 살기 좋은 때 집안을 떠나서 삼십대 이십대에 그 나이로 해서 평생 독신으로 지낸다 하는, 또 늙은 말년에 오십, 육십이 되어서 자손들한테 시봉(侍奉)받고 편히 지낼 수 있는 분들이 혼자 지낸다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가정의 단란함을 맛본 분들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따라서 마땅히 우리 출가인들이 설사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괴색승복을 입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와 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의 미물에 불과한 사자 역시 그와 같이 스님도 아닌 엉뚱한 나쁜 사냥꾼이 입었지만 그 괴색 가사 때문에 악심(惡心)을 낼 수 없었습니다.

  인과(因果)라는 것은 지극히 소중한 것입니다. 비록 나쁜 맘으로해서 가사(袈裟)를 걸쳤다 하더라도 가사를 걸친 그것만으로 해서 그 사냥꾼은 나중에 성불할 수 있는 인연(因緣)을 만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술에 취한 바라문(婆羅門) 외도(外道)가 부처님한테 계(戒)를 받으려 왔습니다. 술에 취한 것을 부처님의 그런 청정한 안목으로 해서 모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선래비구(善來比丘)라, "아! 비구여, 잘 왔구나." 그 한 마디로 머리를 깍아버리고 법의를 입혀버렸습니다.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과 그 사람의 원력(願力)으로 해서 무슨 계를 받는다, 준다 하는 말없이 그냥 선래비구라, "비구여, 잘 왔구나" , 그 말 한 마디에 그냥 머리가 떨어지고 법의가 입혀졌으니 계를 받아서 하룻밤을 잤단 말입니다.

  그러나 술김에 계를 받았지만 술을 깨고 보니, 바라문이 술김에 와서 계를 받고서 그 이튿날 아침에 도망쳐버렸단 말입니다. 따라서 아난존자나 그러한 분들이 이제 부처님을 책망하는 듯 말씀을 했습니다.

 

   "세존께서는 다 아시면서 그와 같이 술 취한 사람에게 부처님의 청정한 계율을 주십니까?"

 

이와 같이 힐난조로 말을 했단 말입니다. 그때 부처님이

 

   "우담바라화(優曇跋羅華)는 비록 시든다 하더라도 여느 꽃보다 더 향기로우니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비록 파계(破戒)는 하고 나가 버렸지만 한번 가사를 걸친 그 공덕(功德) 때문에 계율(戒律)을 전혀 안 받은 사람보다는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번 부처님의 청정미묘(淸淨微妙)한 계를 받겠다는 그 마음을 냈기 때문에 그 마음이 자기 잠재의식(潛在意識)에 훈습(薰習)이 되어서 몇 생 후에는 그 인연(因緣)으로 성불(成佛)을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를 안 받은 사람보다는, 마치 우담바라와 꽃이 비록 시들었다 하더라도 여느 일반 꽃보다도 더 향기롭듯 그 사림이 일반 사람보다는 더 존중한 선근(善根)을 심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비록 성불의 길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비약적으로 바로 갈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으로 해서는, 앞서 말씀과 같이 해오(解悟)로 해서는, 이치(理致)로 아는 것으로 해서는 체용성상(體用性相)을 다 말할 수 있지만, 역시 그런 도덕적인 윤리 행동이 앞서서 우리 생리(生理)가 정화(淨化)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생리가 정화되지 않으면 도를 증명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사실은 도를 증명(證明)하신 분들은 참다운 증오(證悟)를 하신 분들은 파계(破戒)를 하래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욕계 번뇌가 끝나고 색계 번뇌가 끝나고 무색계 번뇌가 끝나서 삼계 번뇌가 끝나버리면 앞서 말씀과 같이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합니다. 시간, 공간을 초월하고 인과를 초월하는 그 분들이 어떻게 계율을 지킬 수가 없겠습니까. 인과에 얽매여 좋다, 궂다, 사랑스럽다, 밉다, 그런 마음, 유위(有爲) 공덕에 얽매여 죄를 범하는 것이지, 그런 인과에 얽매이지 않고 시공을 초월한 분들은 최를 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인은 그 사람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행동이 자기 아(我)에 걸리고 또는 음욕에 걸리고 어떤 유위 상대적(相對的)인 것에 걸리면 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마땅히 출가인이나 재가인이나 부처님 법을 그냥 구두로 해서 알 뿐만 아니라 참답게 증명해서 참다운 영원한 희락(喜樂), 영원한 법략(法樂)을 맛보기 위해서는 꼭 계행(戒行)은 청정(淸淨)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천태지의(天台智) 선사(禪師) 같은 분도 공부하는 방편문(方便門)으로 해서 첫째 지계청정(持戒淸淨)이라, 지계청정하지 않으면 아는 것에 그치고 사실은 힘이, 법력이 없단 말입니다.

  현대 같이 혼란스러울 때는 마땅히 선오후수(先悟後修)하는, 먼저 부처님의 대요를 알고, 실상묘해(實相妙解)라. 우주의 실상을 우리가 바로 느껴야 합니다. 비록 우리 범부지(凡夫地)에서 보는 것은 실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성저가 보는 사실 그대로를 관(觀)해야 합니다.

  부처님법을 증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계율이 앞서야 합니다. 청정한 계율이 앞서지 않으면 우리가 다생겁(多生劫)을 지나오면서 지은 우리 누겁의 그런 습기(習氣)를 녹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훈습(薰習)된 것은 그냥 단박에는 못 녹아집니다. 선근이 깊은 사람들은 빨리 갈 수 있으나, 선근이 희박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녹여야 하는 것입니다.

  녹이기 위해서는 마땅히 부처님의 오계(五戒), 또는 십계(十戒), 또는 더 나아가서 부처님의 청정대계인 보살계(菩薩戒), 이러한 계율을 지켜야만 생리(生理)와 심(心)이 둘이 아니고, 몸과 우리의 불성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몸이 정화되면 그때는 마음이 정화되는 것이기 대문에 마땅히 도덕적인 그런 계율을 앞세우면서 실상지혜(實相智慧)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 만남이라는 것이, 항시 느낍니다만 "루터"나 "칸트"같은 사람도 단상에 오르면 이 법문이 마지막 법문이구나, 이와 같이 느꼈다고 합니다. 저같은 사람은 나이도 많이 먹고 또는 그때그때 이와 같이 무상(無常)한 우리 현실을 생각할 때 이렇게 법상(法床)에 오르고 보면, 법상 이 자리가 부처님을 대신하는 자리인데, 부처님을 대신한다는 생각이 아니면 저 같은 사람이 올라올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을 대신하는 소중한 자리이기 때문에 그 부처님 말씀을 조금 더 해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 광촉(光觸)이란 말이 있습니다. 빛 광(光), 접촉할 촉(觸), 광촉이란 말을 꼭 기억해 두십시오. 공부가 돼가면 갈수록 광명(光明)에 우리가 접촉됩니다. 부처님의 광명에 접촉되면 우리 업장(業障)이 순식간, 또 업장이 무겁다 하더라도 굉장한 많은 업장을 녹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출처 : 성륜사
글쓴이 : 사랑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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