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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一. 무상정변지 (無上正遍地) - ⑥

맑은물56 2010. 5. 12. 16:30

  우리 인간이 이러한 불성(佛性)과 온전히 하나가 못 될 때는 삼명육통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만 온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는 석가모니와 더불어 둘이 아니고 또는 어떤 성자와 더불어 둘이 아닌 그 자리 법성(法性)과 더불어 둘이 아닌 그 자리를 온전히 우리가 체험했다고 생각할 때는 마땅히 인과율을 초월하고 또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못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못하는 것이 없고,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일체를 다 알고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 법신(法身) 공덕(功德)입니다. 이것은 어떤 누구나 다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 가운데 원래 갖추고 있는 무한한 공덕, 무한의 환희심(歡喜心), 그런 무한의 공덕 때문에 부처님 이름을 다보여래(多寶如來)라! 많은 다(多), 보배 보(寶), 그 보배가 하도 많으므로 다보여래라 했습니다. 또는 부처님의 몸이 한도 끝도 없이 넓어서 우주를 다 포섭하니까 그때는 광박신여래(廣博身如來)라! 또한 부처님의 공덕이 하도 환희로와 어떻게 가늘 수가 없어 그때는 환희광불(歡喜光佛)이라! 또는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이란 말입니다. 환희는 내내야 이것은 마음도 몸도 한없이 기쁜 것이 환희 아닙니까.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이라! 그 환희가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우리 자성공덕(自性功德), 우리 불심(佛心)은 그와 같이 환희심(歡喜心) 쪽으로 보나 또는 공덕이 많은 보배로운 쪽으로 보나 무한합니다.

   또는 행복(幸福)이 충만한 잘 또는 광명(光明)이 충만하니까 그때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란 말입니다. 또는 청정하니까 그때는 청정광불(淸正光佛)이라. 이와 같이 우리 자성, 우리 본래면목은 한이 없어 그 공덕이나 행복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조금도 체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경론(經論)을 따라서 이런 행복한 자성(自性)자리,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를 우리가 상기하고 다시 되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신명(身命)을 내걸고, 한 세상 어차피 살다가는, 세상을 다른 길로 안 떨어지고, 이런 환희심이 충만하고 또는 영생할 수 있고 무한한 공덕을 발휘할 수 있는 부처님자리, 이 자리에 안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복스러운 자리라 하더라도 우리가 과거세(過去世)에 지은 나쁜 버릇 때문에, 또 금생(今生)에 지은 버릇 때문에 단박에 성불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불하는 과정을 이와 같이 네 가지 깨달은 경계로 구분했습니다.

  본각(本覺)이라. 이것은 본래 우리가 불성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공부를 조금만 안한다 하더라도 준준무지(蠢蠢無知)한 무식자(無識者)라 하더라도, 어떠한 존재나 모두다 다 본각을 갖추고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또는 본원각성(本源覺性)이라. 어떤 존재나 본각(本覺)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각적인 차원에서는 모두가 성불(成佛)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보리수하(菩提樹下) 성도(成道)하실 적에 "모든 존재가 다 본각, 모든 것이 다 부처구나", 이와 같이 바로 보셨단 말입니다. 불안청정(佛眼淸淨)한 안목으로 보셨으니까 그와 같이 바로 보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각은 누구나 갖추고 있지만 닦지 않으면 우리 중생은 본각에 머물러 있는 것이지, 다시 말하면 부처님 불성이 잠재(潛在)만 돼 있지 우리가 부처의 공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공부하면 그때는 상사각(相似覺)이라, 서로 상(相), 닮을 사(似), 깨달을 각(覺), 비록 본각과 똑같지는 않지만 본각에 거의 닮아 있단 말입니다. 이것을 시각(始覺)이라. 비로소 시(始), 깨달을 각(覺). 그때는 겨우 본각을 알기 시작한단 말입니다.

  본각을 알기 시작할 때는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 육근은 내내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아닙니까. 우리 그런 안목이나 즉 우리 시각(視覺), 청각(聽覺), 후각(嗅覺), 미각(味覺), 촉각(觸覺) 또는 우리 의식(意識)이나 모두가 청정해야만 비로소 본각(本覺)을 어렴풋이 깨닫는 상사각(相似覺), 시각(始覺)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생리(生理)가 정화(淨化)되지 않으면 부처님의 깨달음을 체험(體驗)할 수 없습니다. 이치(理致)대로 한다면야 좀 재주가 있으면 해오(解悟)는 할 수 있지만 참다운 증오(證悟)라, 참다운 법성(法性)을 증(證)할 때는 역시 우리 생리가 정화돼야 하는 것입니다.

  생리가 정화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의 도덕률(道德律), 즉 말하자면 우리가 도덕적인 계율(戒律)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계율을 안 지키면 우리 생리가 정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이 원래 둘이 아니기 때문에 몸이 정화가 되면 마음이 정화가 되고, 마음이 정화가 되면 몸이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계율이 앞서지 않으면 설사 바른 지견(知見)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생리가 정화가 안 되어 성불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육근청정이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우리 시각, 청각,후각,미각, 촉가, 우리 의식이 그때는 청정하단 말입니다. 이렇게 청정해짐으로써 비로소 불심 가운데 들어있는 자성공덕인 본 깨달음을 맛봅니다.

  그러나 이 이상을 더 모르는 사람들은 이만큼 되면 환희지(歡喜地)에 이르기 때문에 환희용약(歡喜踊躍)해서 재미나고 도취해서 몰입해 가지고 공부가 다 되었구나, 그리해서 여기에서 만족을 취해서 공부가 다 되었다고 하는 분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뒤에도 그러한 분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근세에도 안 나왔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시각(始覺)으로 또는 거의 닮은 깨달음으로 해서 다 끝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으로 해서는 아직 육근청정이 완전히 못 되므로 시공을 초월하고 인과율을 초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시 인과(因果)에 묶여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생사(生死)를 못 벗어납니다. 생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간, 공간, 인과율을 초월해야만 생사를 벗어닙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을 온전히 알고서 아직 멀었구나, 하고 더욱 열심히 닦는단 말입니다. 더욱 닦아서 차근차근 수분각(隨分覺)이라, 자기 닦는 분수에 따라서 깨닫는 것입니다.

  보살초지(菩薩初地)에서는 초지(初地)만큼, 이지(二地)에서는 이지만큼 차근차근 깨달아 올라갑니다. 올라갈수록 부처님 공덕을 우리가 더욱더 발휘합니다.

  화염경(華嚴經), 능엄경(楞嚴經) 기타 대승경전(大乘經典)에서는 깨달아서 올라가는 그런 한계를 소상히 말씀했습니다. 그런 경전을 잘 안 보고, 보았다 하더라도 부처님 경전 말씀은 모두가 다 문자(文字)다, 방편(方便)이다, 해서 이것을  의중(意中)에 두지 않고 아만심(我慢心)을 부리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이나 그런 경전 말씀에는 어떤 때는 상징(象徵)과 비유(譬喩)가 있지만 모두가 이것은 참다운 금구설(金口說)이라, 참다운 진리(眞理)에 입각한 말씀입니다.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씀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꼭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거기에 집착해서 본래 자성자리, 본래 자성에 갖추고 있는 무한한 공덕자리를 우리가 인정하지 않고서 그것을 무시하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아는 한에는 우리는 올라가는 과정을 분명히 느끼고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수분각(隨分覺)이라, 이것은 보살초지(菩薩初地)부터 십지(十地)까지 올라간단 말입니다. 거기에 올라가는 각 초지(初地), 이지, 삼지,사지,오지,육지,칠지, 팔지,구지,십지(十地), 이러한 것도 역시 각 경(經)에는 다 소상히 어디에 올라가면 얼마만큼 공덕이 있다, 이런 말씀이 다 있습니다.

출처 : 성륜사
글쓴이 : 사랑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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