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러한 부처님이 성불(成佛)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산하대지(山河大地), 산천초목(山川草木),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동시(同時)에 성불했다는 그 의의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이렇게 산을 보고 땅을 보고 또는 여러 가지 만상(萬象)을 봅니다. 만상을 본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은 자기 업장(業障)에 가려서 바로 못 봅니다. 업장이 녹으면 녹은 만큼 그때는 차근차근 바른 모습에 가까워 집니다. 바른 모습에 가까워져서 업장이 온전히 녹아지고 참다운 자아(自我), 참다운 "참나" 에 이르렀을 때에,참다운 진정한 자기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우주(宇宙)의 참 모습을 봅니다. 우ㄹ주의 참 모습을 볼 때는 이것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우주와는 굉장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아무런 생명(生命)이 없어 보이는 이러한 산이나 또는 돌멩이 하나까지도 모두 생명뿐입니다. 그러기에 화엄경(華嚴經) 약찬게(略纂偈)에 보면 산도 살아 있고, 냇물도 살아 있고, 나무도 살아 있고, 일체 동물이 모두가 다 우리 인간과 차이 없이 생명을 갖추고 있는 살아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산에는 산신(山神)이 있고, 물에는 용왕(龍王)이 있고, 또는 도량에는 도량신(道場神)이 있고 그런 것이 다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역시 모양은 이와 같이 보이지만 모양이 없는 우리 마음이 있으니까 이제 인간존재란 말입니다. 만일 우리 몸에 마음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와 똑같이 산에도 역시 모양은 산이지만 그냥 산만 있는것이 아니라 이른바 쉽게 말하면 산의 혼(魂), 산의 혼은 결국은 산신인 것입니다. 나무 하나가 있으면 나무라는 모양뿐만 아니라 나무에는 혼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내야 이제 나무 목(木), 귀신 신(神), 목신(木神)입니다. 하나의 돌멩이가 잇으면 그때는 돌 석(石), 귀신 신(神), 그때는 석신(石神)이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불교는 신(神)만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오해(誤解)하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어떠한 것도 모두가 다 거기에는 혼(魂)이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순수한 생명(生命)이 거기에 갈마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의 제한된 안목(眼目)에서는 그것이 죽어 있다고 보지만 그런 무생물(無生物)이나 모두가 바른 안목, 바른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볼 수 있는 안목, 본질을 보는 안목에서는 모두 다 생동(生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천지우주의 모든 존재는 무엇이나 하나의 진리로 하나의 생명으로 뭉쳐져 있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부처님께서는 보리수하에서 체험하시고서 기재기재(奇哉奇哉)라! 탄재탄재(歎哉歎哉)라! 기특하고 기특하도다. 감탄스럽고, 감탄스럽도다. 이와 같이 찬탄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덕분에 우리 중생은 생사윤회라 하는 그러한 인생 고해를 떠나서 참다운 해탈로 가는 그런 행복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도인들 역시 부처님 같이 온전히 다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정통조사님들은 모두가 다 무상대도의 맛을 봤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때는 전쟁도 하고 어떤 때는 무시무시한 고뇌(苦惱)를 다 겪지만 그러한 무수한 성자(聖者)들의 가르침 때문에 희망을 잃지 않고서 참다운 영생(永生)의 행복(幸福)을 바라보고 우리가 희망이 있는 인생을 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깨달은 이것은 한계가 없이 그냥 좋고, 또는 마음이 개운하고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아주 심수 오묘(奧妙)한 가르침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을, 깨달음을 구분하면 한도 끝도 없지만 우선 기신론(起信論), 마명대사(馬鳴大師)가 저술한 기신론에 의해서 깨달음의 한계 차서(次序)를 말하면 사각(四覺)이란 말입니다. 네 가지 차원으로 깨달음의 경계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상대도(無上大道)하 한다 하더라도 그런 깨달음에 이르는 심천(深淺)의 관계, 깊고 얕은 관계를 잘 모르면, 우리가 자칫하면 암중모색(暗中摸索)을 합니다.
처음에 초범(初梵)만 가 가지고 다 됐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고 중간쯤 가서 다 되었구나, 이것이 무상대도구나, 이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맨 처음까지 가기도 어렵지만은 부처님의 가르침 이것은 무상대도(無上大道)이기 때문에 조금도 흠이 없는 일체공덕을 갖춘 자리여야 합니다.
우리가 성불(成佛)에 대해서 보다 더 감격을 해야 한다. 보다 더 신심(信心)을 내야 한다, 이렇게 편달하는 법문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처님 가운데 들어 있는 우리 인간 정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 동시에 우주(宇宙)의 본성(本性)이 돼 있는 그런 불성(佛性), 그런 불성 가운데 들어 있는 무한한 공덕(功德)을 우리가 제대로 잘 모르면 그때는 바른 신심을 낼 수가 없습니다.
우선 우리 욕계(欲界)에서는 욕계 나름대로 재미가 있는 것인데, 먹는 것, 입는 것, 이성끼리 만나서 사는 것, 그래저래 재미가 있는 것인데, 부처님한테 가는 길, 부처님한테 갖추어 있는 그런 여러 가지 공덕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그러한 위대한 것이 있으면 모르거니와 그런 것이 없을 때는 욕계를 버리고서 무상대도로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중생은 아직은 그런 부처님 경계에 들어 있는, 즉 불성(佛性) 가운데 들어 있는 무한한 공덕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고구정녕 부처님께서는 말씀했다 하더라도 체험을 못하면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체험은 아직 못했다 하더라도 그 법신(法身) 부처인 우리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여기에 깃들어 있는 무한한 공덕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불경(佛經)에 나와 있는 말씀만 가지고도 백사십불공법(百四十不共法)이라, 공덕이나 재미나 이런 행복 같은 것이 백마흔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간추려서 말씀한 것이지 사실은 몇 겁을 두고서 계산을 잘하는 도인들이 헤아린다 하더라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백사십불공법, 일반 보통 사람들이나 보통 낮은 성인들은 같이 더불어 할 수 없는 그런 부처님만이 갖추고 있는 무한한 공덕입니다.
또한 동시에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삼명육통은 간단히 말하면 시간(時間)이나 공간(空間)이나 인과율(因果律)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도(道)라는 것이 시간에 얽매이고 공간에 얽매이고, 인과율에 얽매이면 이것은 도(道)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참다운 성품(性品), 이것은 인과율에 얽매이지 않고 시공을 초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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