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시인 유종인

[스크랩] 아무도 읽지 않는다 / 유종인

맑은물56 2009. 11. 30. 08:40

 

아무도 읽지 않는다 / 유종인

 

 

 

복사꽃 피었던 자리에 허공은 여전히 구멍가게를 내고

빈 것을 팔고 있다

 

 폭설에 꺾인 왕대나무 우듬지 위를 맴돌며

산까치는 허방에 놓을 횃대는 없는가

제자리서 날갯짓만 부산하다

 

보광사 한켠에 매달린 목어는

텅 빈 뱃구레 속으로 주먹눈을 받아먹으며

눈알이 퀭하다

 

숫눈에 막힌 산길이 짐짓 숫처녀마냥

깡마른 비구 발길에도 수줍은 신음 소리를 낸다

저도 읽혔으면, 밟혔으면, 드러났으면, 하면서도

짐짓 발자국 밑으로 숨어드는데,

 

한여름 보광사 계곡에선 민달팽이도

짐짓 더듬이 뿔이 돋아서 제법인데

무관(無冠)인 나는 성긴 머리칼만 쓸어 넘겼다

 

경내, 아무도 읽지 않던 빨치산 비전향 장기수 묘역은

그 여름 장맛비에 발이 빠지고, 그 가을 채 가기 전에

빨갱이 빗돌이라며 깨지고 붉은 페인트 세례를 받았다

 

그대와 나나, 읽으니까 사단이다

야단법석에 부처는 짐짓 뒷전이고

부처도, 아무것도 읽지 않으니까 좋다

여호와의 증인이 와도 부처는 그냥 뒷전의 미소일 뿐

 

아무도 읽지 않고 봐주니까, 그 여름 내 자지 같던

민달팽이도 희귀종인 채로 제대로 굼떴다 제대로다

 

 

 

/ 시인

- 1968년 인천 출생
- 1996년 「문예중앙」에 시 '화문석' 외 9편이 당선되면서 등단.
- 200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과 
-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 
- 2007년 ‘유하백마도'를 보다’ 로 '제2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 
- 시집으론 <아껴먹는 슬픔(2002) 교우록(2005) 문학과지성사 >      
                <수수밭 전별기(2007) 실천문학사> 
- 에세이집으로는 < 염전- 소금이 일어나는 거울(2007)>         
                <산책- 나를 만나러 떠나는 길(2008)> 
- 현재) 시인학교 詩냇물 5기(2008) ~6기(2009) 강의 
- 현재) 『 현실참여 문인 . 시민 연대』"징" 창작교실 강의 

출처 : 현실참여 문인ㆍ시민 연대
글쓴이 : 허브와풍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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