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 강의실 '징'

[스크랩] 창작교실 5월23일 강의 요점 정리

맑은물56 2009. 6. 5. 08:37

"징" 창작교실 제 3 강 (5/23)

 

@ 시재(詩材)에 대하여.

 

오늘, 우리를 놀라게 한 죽음이 있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해 본다.

 

산길을 걸어 가거나, 아니면 식당에서 뒤안으로 돌아가 본 경험이 있느냐?
식당 뒤안에 쌓인 돼지 잡뼈들을 본 적이 있다.죽음의 산물이다.
이런 것이 시가 태어나는 곳이다.일상 속에서...


우리가 눈 여겨 보기만 하면 시적 소재는 너무나 많다.

아파트에서 죽은 사람이 주위의 무관심 속에서 몇 일 만에 발견 되었다던가,
아니면 사물에서 찾아도 죽음은 너무나 많다.
이가 나간 컵을 가령 보자.기능의 상실도 사물의 죽음이다.
그런 부분들에 대한 관심이 시를 위해선 필요하다.


우리 주변을 보면 죽음의 현상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필 수 있다.

몇일 전에 텔레비젼에서 다규멘터리 프로를 봤다.
제목이 "해삼"이다.
해삼은 토막내어 짤라도 또 다른 개체로 살아 나는것을 봤다.
인간이나 동물들은 내장을 밖으로 끄집어내면 모두 죽는다.
그러나 해삼은 내장을 다 내어 주고  스스로 재생을 해 낸다.
그것은 또 다른 생명체의 삶과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서민들의 죽음은 쓸쓸하다.
특히 천민 자본라는 시대하 에서는...

남편이 죽었는데,그 남편의 사망 보험금을 타서 웃는 처 자식들을 본다.
가족이라지만 이는 영혼이 없는 인간이 아니던가.
그런 광고가 버젖이 보험광고로 흔히 나온다.
죽음의 내용이 아니라 죽음의 형식이 갖는 자본주의의 슬픔!
죽음이란것은 또 다른 자본을 추구하는 상품이고 자본 축적의 매개체란 점이다.

우리 주변의 죽음의 현황을 작은것에서 부터 큰것으로 좀 더 안을 들여다 보자.

 

* 지난 주에 내어준 세편의 시를 감상하자.

 

 - 먼저 이진영의 "눈물을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를 보면,

   죽음이 야멸차다.
   시제가 의아스러웠다.신을 바라보는 각 자의 종교적 관점의 차이도 있지만...
   시에서 보는 것 처럼 인간이 죽는 순간은 참 비루하다.

   이 시를 보면서 전에 읽었던 노자 [도덕경]에서 인상 깊은 구절을 발견했다.

    "天 地 不 仁" 이란 단어이다.

   이 구절이 넓은 의미에서는 위로가 되겠지만,
   어떤 종교의 신이든 인간세에 개입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인간에게 일일이 신은 손을 쓰지 않는다고 느꼈다.
   삶의 끝이, 존엄이란 말이 무엇인가?...


 - 차주일의 "냄새의 소유권" 을 보자.

   소재는 수건,냄새이다.
   가족간의 유대가 외형적 부의 가치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표현했다.
   여기서 수건은 공동체라는 가족의 유대감이 갖는 슬픔이다.
   수건이란 매개를 통해 냄새가 갖고 있는 의미를 잘 찾아내었다.
   냄새가 호,불호의 대상이 아니라 공유할 수 밖에 없는,
   가족이란 울타리 속의 위화감의 문제를 다뤘다.
   (사소한 가족 내부에서의 시적 소재를 캐취한 점이 중요하다)

 

 - 마지막으로 김기택의 "본인은 죽었으므로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는

   사람은 죽었는데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이런 정황은 얼마든지 있다.

   시에 감정과잉을 많이 하는 방편으로 묘사시가 텍스트로 쓰인다.
   김기택이나 이윤학의 시가 그렇다.
   시가 감정과잉이 되면 넋두리가 된다.
   이를 애둘러서 넌즈시 보이면 묘사의 정황들이 된다.

 

* 시의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면 시가 몸이 된다.
  시는 우리 일상 속의 불편이나 고통으로 따라오는 것을 시의 품으로 안아 줄 때
  시가 공감을 얻게 된다.그런 예는 주변에 많다.
  예를 들어 같은 꽃이 각각 결혼식과 장례식에 보내지는 경우, 그 쓰임은 대비가 된다.
  화려한 곳에 가고 쓸쓸한 곳에 가는 것에서 같은 꽃이라도 대접이 다르지만
  식이 끝나면 버려지는 경우를 본다.화려 하지만 버려지는 것이다.

  문정희 시인의 시에 곡비 (哭婢)란 단어가 나온다.
  슬퍼도 대신 울어줄 종을 일컫는다.
  곡 하는게 힘들어서 대신 하는 종이란 얘기다.예전엔 곡비가 있었다.
  죽음에서의 울음이 곡인데 그것 조차 대신하는 종을 보면 죽음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갖게 한다.

  시인은 종교의 구분도 하지 말고 안으라. 포용하라.
  시인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워야 한다.
  죽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란 성철 스님의 선어는 시어에서는 안된다.
  시는 구체화된 상황이나 정황을 보여줘야 된다.
 
  연리지(連理枝)를 보자.
  나무도 이종(異種)간에 사랑을 나누는데 그걸로만 보면 3류다.
  다른 것에 이입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길에서 지나가는 할머니의 그림자와 내가 그림자로 연리지 형태로 맺었다.
  이렇게 나무뿐 아니라 연리지 할 수 있는 것은 주위에 너무 많다.
  인과관계가 없는 곳에 마음을 덧 입히는게 시를 대하는 마음이다.
  정황들은 더 들어 가서 봐라.

 

  시어로  "무덤의 단골은 유족 뿐이다" 란 말이 있다. 

  단골이란 표현과 무덤이 절묘하다.


  송장메뚜기란 메뚜기가 있다.
  전혀 죽음과 관계가 없지만 그런 종류의 메뚜기가 있다.
  다른 개체가 다가오면 송장 처럼 죽은듯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런 단어 하나로도 죽음과 연결을 할 수 있다.


  고유명사와 순 우리말을 많이 익히면 표현에 도움이 된다.

 

  저기 불광동에 있는 교회를 생각 해보자.
  "佛光 교회" 종교상 아이러니한 이름이다.이런 것에서 시적 아이디어를 끌어낼 수 있다.

 

     참   외
     수   박

  과일 전에 쓰인 간판인데 잘못 읽으면 외박 참수가 된다.
  이런 것이 시적 아이디어를 끌어낸다.
 
  시의 수사기법으로 반어법인 "죽여줘요"도 그렇다.

  결국 시는 나 만이 알고 나만이 느껴야 한다.그래야 시가 만들어 진다.
  
 

 

출처 : 현실참여 문인ㆍ시민 연대
글쓴이 : 대덕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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