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Praha Charles University

맑은물56 2009. 2. 26. 11:21

Praha Charles University

suri21 2007.12.30 15:00

조회 531

Czech Praha Karelova University


  600년 전통의 까렐대학

나는 까렐대학 철학부 극동학 강좌 한국학과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강의했다. 이 대학의 정식 명칭은 까렐대학(Karelova)이었지만 촬스대학(Charles)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었다. 촬스대학은 1342년 촬스 황제에 의해 창립되었다. 이 대학의 신학과, 의학과, 언어학과, 법학과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 가운데서도 언어학과는 프라그학파를 이룰 정도로 이름이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내가 명문 까렐대학의 정교수로 임명된 것은 1993년 2월 15일이었다.

이 일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재단에서는 매달 1,500달러의 생활비를 보조해 주었다. 촬스대학 교수 월급은 300달러 정도였다. 나는 촬스대학에서의 한국학강의를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를 2년간 공무 휴직을 했다. 내가 촬스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준 이는 까렐대학 한국학 강좌장 부젝(Vladimir Pucek) 박사였다. 그는 2년 동안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체코학을 강의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와 한국학에 매우 정통했다. 부젝 교수는 촬스대학 극동연구소 부소장이었고, 한체친선협회장이었으며, 유럽한국학회 부회장이었다. 그는 <한국설화집>을 불어로 출판하기도 했고, 최초로 한국어의 체코어 교과서를 만들었다. 부젝 교수는 환갑 나이이었지만 한 채 양국의 국익증진을 위해 의욕적으로 일했다.

까렐대학은 600년이나 된 유서 깊은 대학으로 동유럽의 학문과 예술의 중심이었다. 까렐대학 건물은 프라하 시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다. 나는 주로 철학부 건물과 대학본부 건물을 드나들었다. 철학부 즉 문과대학은 후스 광장 북쪽 블따바강 가에 있었다. 이 건물 현관 앞에서 프라하성을 바라볼 수 있었다. 봄에 꽃이 한창 필 때 이쪽에서 바라보는 프라하성은 매우 아름다웠다. 큰 길 건너에는 화려한 프라하 음악관이 있었고, 그 옆에는 민속 박물관이 있었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법과대학과 의과대학이 있었다. 이렇게 보면 프라하는 대학도시와도 같았다.   

한국학과가 있는 대학본부는 다른 유럽의 대학들처럼 프라하의 중심지인 바츨라프 광장 앞 젤레뜨나(Celetna 20) 가장 번화한 상점가 사이 극장 곁에 있었다. 대학의 정문은 두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상가 쪽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유명한 모차르트 극장 쪽에 있었다. 이 극장에서 모차르트는 <돈 죠바니>를 직접 초연했다. 나는 아침 출근 때는 정문을 이용했고, 퇴근 때는 주로 상가 쪽의 묵중한 나무문을 이용했다. 많은 학생이 드나드는 이 두 문은 큰 건물의 현관문과 같았다. 사람이 밀고 들어오면 문은 저절로 닫히었다.

극장 쪽으로 난 정문은 노란 철문이 이중으로 되어 있었고 그 앞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으며, 여름에는 분수에서 물이 가늘게 솟아올랐다. 그 위 벽에는 희랍 문자로 UNIVIRIIYAE CARCLINA라고 철인되어 있었다. 늦가을까지 이 작은 정원에는 붉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 정문 현관에는 이 학교 설립자인 까렐 황제의 동상이 있었고, 그 옆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학위식 때만 문을 여는 강당이 있었다. 작은 정원을 지나면 길이 되는데 그 앞에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문 옆에는 두개의 돌사자가 앞발을 올리고 있는 석상이 있었고 물이 흐르는 작은 분수대도 있어 지나는 사람들이 학교 정문을 바라보며 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 옆의 아래층에서는 늘 신진 작가들의 작품전이 있었다. 이 현관에는 언제나 할머니 수위가 앉아 있었다.

상가 쪽의 정문은 높이가 4m 정도의 큰 나무문이었는데 그 문짝은 반들반들하게 손때가 묻어 있었다. 나는 그 문을 잡아당겨 열고 나와 후스 광장 쪽으로 걸어가길 좋아했다. 특히 저녁 때 이곳 상가는 더 화려했다. 후스 광장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지만 특히 여름에는 광장 가득히 걸상을 내 놓고 그 좋은 생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 정문 현관에는 이 대학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광판 사진이 벽에 붙어 있었다. 여기는 언제나 할아버지 수위가 앉아 있었다.

나의 프라하 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하자면 학교생활이었다. 이 대학에는 노교수가 많았다. 그들이 들고 다니는 가방은 대개 가죽이었는데 낡아 빛이 바래고 손잡이가 닳아 끊어질 지경이었다. 노인들은 그렇다 치고 어떤 젊은 여대생은 대를 물려 쓰는 가방인지 아니면 초등학교 때부터 쓰던 가방인지 정말 거지를 줘도 안 가져 갈 그런 가방을 들고 다니었다. 나는 왠지 이들의 이런 것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번쩍이는 가방을 들고 다니는 내 자신이 촌스러워 보였다. 노교수들은 언제나 자상하게 학생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가르쳤다. 이들은 한꺼번에 여러 사람을 상대하지 않았다. 한 학생과의 이야기가 끝나야 다른 학생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린애도 이들은 인격적으로 대했다. 저들의 의견을 언제나 존중했고, 저들은 교수의 말이면 절대 복종했다. 그만큼 이들은 신뢰와 존경 속에서 말없이 학업에 정진했다. 나는 이 같은 학교 분위기가 좋았다. 

촬스대학은 한마디로 전통과 현실이 공존하고 있는 가운데 창조적인 학풍을 지니고 있었다. 6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새로워지려고 애쓰고 있었다. 건물은 비록 예전 그대로지만 이들의 살아가는 방법은 현대적이었다. 그렇다고 저들의 전통적인 학풍을 결코 버리거나 경시하지 않았다. 이들은 장엄한 학위식을 갖지만 입학식은 없었다. 학위식도 작고 오래된 방에서 관계자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는데 장엄한 분위기는 대성당에서의 미사와 같았다.


  극동학강좌 교수들

나의 촬스대학에서의 실제적인 강의는 1993년 2월 21일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10여일의 준비 기간을 가졌었다. 그간 부젝 교수는 나에게 이 대학 보직교수들을 소개해 주었다.

부학장 블해르(Frantisek Vrhel)는 민속학 강좌장 겸 국제담당 부학장이었다. 그는 청바지를 즐겨 입었지만 철학부 학장이 되면서부터는 청바지를 입지 않았다. 블해르 학장은 세계민속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인도, 아랍, 중국 쪽에 더 관심이 있는 듯했다. 그의 방에는 대형 전 나체 여인 사진이 아주 적나라하게 걸려 있어 나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부젝 교수와는 아주 친분이 두터웠다. 그가 맡아보는 일이 국제문제이었기 때문에 교환교수 문제도 그의 소관이었다. 블해르 학장은 그후 한국문제 모임에도 몇 번 참석했다. 그는 그만큼 부젝 교수와 함께 한국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블해르는 영어를 능숙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소탈해 누구와도 쉽게 친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내가 형태를 촬스대학 언어학과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시키려하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었다. 그 당시 서로 학제가 달라 학력 인정에 논란이 많았다. 이들은 자기네 기준으로 학생들을 입학시키려 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4년제 대학이나 대학원 1년을 마친 학생도 저들은 그 학력을 인정하지 않고 저학년에 편입시키려 하였다. 이에 한국 유학생들은 불평이 많았다. 이 문제를 잠정적이지만 블해르 학장은 한국대사관측과 협의해 해결해 주었다. 즉 한국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학생은 여기 4학년에 편입할 수 있다는 원칙을 마련했다. 그러나 편입학 여부는 학과장의 재량으로 되어 있었다. 이 정도로 그는 한국학생들과 한국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물론 부젝 교수의 역할이 컸다.

촬스대학 부총장 로이다(Lojda)는 의학박사였는데 몸집이 매우 뚱뚱했다. 그는 학사담당 부총장으로 교내 일을 총괄했다. 나는 형태의 문제로 영어과 부강좌장 이인드라(Jindra) 박사도 만났다. 그는 형태보고 영어과 강좌 중에 미국인 교수의 강의를 우선 들어보라고 했다. 그도 턱수염을 탐스럽게 길렀는데 퍽 보기 좋았다. 

나와 직접관계 있는 분은 극동학 강좌장 끄랄(Kral) 박사였다. 그는 67세의 노교수로서 중국철학이 전공이었는데 특히 노장철학의 권위자였다. 끄랄 교수는 중국학, 일본학, 한국학, 몽골학, 베트남학의 강좌를 총괄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그는 수염을 허옇게 기른 시골 할아버지와도 같은 소탈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체코어로 <老子>와 <莊子>를 번역하기도 했고, 중국민화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며, 북경과 대만을 자주 다니었다. 그해 연말 나는 한국불화의 연하장에 중국식대로 “爆竹聲中迎新春 開花大吉添財源”이라고 인사말을 써 보냈다. 그는 한동안 도쿄에 갔을 때 다리를 삐어서 학교에 나오지 못해 부강좌장으로 있는 부젝 교수가 그의 일을 대행하기도 했다. 당시 극동학강좌는 극동문제연구소로 개편되면서 그 규모를 확장하고 연구소장에 끄랄 박사, 부소장에 부젝 교수가 임명되었다.

나는 한방에서 지낼 동료 교수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한국학과 여교수 마르따, 몽골학 교수 죽대리와 알래나, 베트남학과 교수 비엔과도 이때 처음으로 인사를 했다. 이들 학과는 사무실을 함께 쓰고 있었다. 중국학과와 일본학과가 이 만큼 큰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는 것과는 퍽 대조적이었다.

한국학과 사무실은 부젝 교수가 통괄했다. 이날 부젝 교수는 내게 열쇠 2개를 주었다. 한국학과 사무실에 들어가자면 두개의 문을 통과해야 했다. 큰 복도에서 205호실 문의 벨을 누르거나 열쇠로 열어야 했다. 문은 늘 잠겨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두운 복도가 나오는데 그 복도 양쪽으로 중국학과와 일본학과 사무실 겸 교실이 있었다. 한국학과 사무실은 그 복도 막다른 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다. 따라서 이 방에 들어가려면 2개의 열쇠로 문을 2번 열어야 했다.

한국학과 사무실에는 창문이 남쪽으로 하나밖에 없었다. 하기 때문에 전등불을 켜지 않으면 어두웠다. 하지만 저들은 비가 오는 날이나 저녁때가 아니면 좀처럼 전등불을 켜지 않았다. 이 방의 크기는 대충 10평 정도였는데 3면이 천장까지 책장으로 채워져 있었다. 방 가운데는 긴 책상이 놓여 있어 거기서 강의도 하고, 학과 교수회의도 했으며, 회식을 하기도 했다. 창가로 부젝 교수의 책상을 중심으로 몽골학과 교수와 베트남학과 교수의 책상이 놓여 있었다.

책상 하나를 가지고 3명의 교수가 서랍을 나눠 공동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에 비해 걸상은 많았다. 책장는 모두 나무문으로 닫혀 있어 책은 보이지 않았다. 책장문은 열쇠가 있어야 열 수 있었다. 이 열쇠는 마르따 교수가 보관하고 있었다. 창가에는 실내식물 화분이 3개 놓여 있었는데 화초는 싱싱하게 잘 자랐다. 화분들은 화초에 비해 작아서 뿌리가 밖으로 뻗어 나왔다. 이 화분 관리도 마르따 교수가 했다.

몽골학과 몽골인 죽대리 교수는 나와 동갑내기였는데 얼굴은 우리와 똑같았으나 말은 한마디도 통하지 않았다. 그는 체코에 온지 3년째나 되었지만 영어나 체코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두 딸을 데리고 부인과 함께 와 있는 그는 매우 점잖고 온순했다. 서로 말만 통했다면 나는 많은 말을 그와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와 한번도 정다운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는 빛바랜 낡은 중절모를 늘 썼으며, 시장바구니 같은 회색 천으로 된 가방을 들고 다녔다.

몽골학과 알래나(Alrena) 여교수는 가는 몸매에 매력적인 눈매의 여교수였다. 내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늘 잔잔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 후 내내 보이지 않기에 마르따 교수에게 그의 안부를 물었더니 병이 나 집에서 쉰다고 했다. 그는 2학기 10월이 되어서야 학교에 나왔다. 여름에 몽골에 다녀왔다며 몽골에서 찍은 사진을 내게 보여주었다.

알래나는 사진도 잘 찍는 듯했다. 몽골의 산하가 선명했고, 초원의 집들과 몽골인의 모습이 또렷했다. 내가 사진기술이 대단하다니까 그는 말없이 예쁘게 웃어주었다. 그해 나는 매주 화요일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를 볼 때마다 나는 진정으로 여인의 아름다움을 느끼었다. 한없이 바라보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알래나는 말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여인상이었다. 

비엔과 나는 강의 요일이 같아 자주 만났다. 비엔은 작은 키에 얼굴은 검은 편이었지만 까만 눈동자가 소녀처럼 맑았다. 그는 체코에 귀화한 베트남인으로 그의 남편은 하벨 대통령 비서였다. 비엔은 하노이에서 태어났으나 체코에 와 촬스대학을 나왔고, 그때 지금 남편과 사귀어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에 그를 이 방의 사환인 줄 알았다. 그는 그처럼 왜소했고, 어려 보였다. 한번은 그가 병이 났었다. 입술이 타고 얼굴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나는 안돼 보여 어디가 아프냐니까 말없이 이마만 찡그렸다. 만사가 귀찮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그날도 4명의 학생을 놓고 열심히 강의를 했다. 그들은 교실이 없어 학과 사무실에서 강의를 했다.


  극동학 강좌 한국학과

촬스대학의 극동학 강좌는 중국학이 중심이었다. 극동학 강좌에서 사용하는 방은 모두 6개였는데 강좌장실, 부속실이 있었고, 중국학과에서 2개의 방을 사용했고, 일본어과에서 1개의 방을 사용했으며, 한국학, 몽골학, 베트남학과에서 큰방 1개를 사용했다. 중국학과에는 중국인 교수가 2명 있었으나 일본학과, 한국학과, 몽골학과, 베트남학과에는 각각 1명의 외국인 교수가 있었다. 당시 학생들은 중국학과 15명, 일본학과 20명, 한국학과 7명, 베트남학과 4명, 몽골학과 2명이 있었다. 

한국학 강좌장은 부젝 교수였으나 실제적인 일은 마르따 교수가 다 했다. 1993년도 1학기 한국학 교수는 부젝, 마르따, 김종균 등 3명이었으며, 학생은 모두 6명이었다. 3학년 4명, 5학년 2명이 있었지만 5학년생 루찌애와 애바는 서울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 3학년 4명 또마쉬, 미로슬라브, 블란까, 알즈베따가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1주에 6시간을 강의했다. 5월에 5학년생들이 서울서 돌아오면서 「한국문학사」 2시간을 강의해 1주에 8시간이 되었다. 여기서도 실제적인 강의는 5월말이면 끝났다.

3학년들은 이미 전임 한국외대 권재일, 황종인 교수에게서 한글을 배웠기 때문에 읽고 쓸 줄 알았다. 나는 서울대 언어학연구소에서 문공부 의뢰로 새로 편찬한 <한국어> 1, 2, 3권을 가지고 갔었는데 그 중에서 둘째 권을 가지고 강의했지만 별로 힘들지 않았다. 이 책은 새로운 스타일의 회화가 많아 이를 설명하는데 애를 먹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재미있어 했다. 나는 원래 1학기에 어찌 되었건 교과서 1권을 떼는 습관이 있어 이 책을 부지런히 학생들에게 읽혔더니 너무 진도가 빠르다고 다른 교수들이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 책 말고도 내 스스로 교재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읽혔다. 시험도 2주에 한번씩 보았다. 여기서는 필기시험과 구술시험을 병행했는데 모두 교수의 재량으로 실시하고 평가했다. 시험기간은 6월 한 달 동안이었다. 나처럼 학기 중간에 시험을 보는 교수는 없었다.

여기는 10월이 신학기였다. 신입생들의 입학시험은 6월, 졸업시험은 9월, 신입생 입학은 10월에 있었다. 졸업식은 장엄하게 중세의 학위식 그대로 했으나 입학식은 작은 교실에 신입생을 모아 놓고 강좌장이 학사일정과 대학에서의 학업요령을 말하고 전임 교수를 소개하는 것으로 끝났다. 모든 것이 형식이기보다는 실질적인 가운데 매우 자유롭게 진행되었다. 그만큼 이들은 자율적으로 모든 일을 했다.

촬스대학에서는 학과에 따라 격년으로 신입생을 뽑았다. 그해 한국학과의 신입생은 남자 1명, 여자 4명 모두 5명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들어온 학생이 3명이었고, 이미 일본학과와 중국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과에 입학한 여학생이 각각 1명이었다.

이중에 클라라는 큰 딸아이까지 있는 34세의 중년여인이었다. 그는 지방대학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했고, 서울에 가서 1년 동안 한국어를 배우기도 했다. 첫 시간에 그는 내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말을 했다. 다른 학생은 한마디의 한국어도 못했다.

중국학과를 나온 여학생 마르게따는 둘째 주부터 병이 나서 한 학기 내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한국어」 첫째 권을 복사하라고 주었더니 1학기가 끝날 때까지 책도 가져오지 않았고 나오지도 않았다. 나는 몇 번 다른 학생들에게 마르게따에게 가서 책을 찾아오라고 했지만 집을 모른다고 했다.

남학생 루까쉬는 그때 22살이었다. 그는 멀쑥하니 키가 컸고, 싱겁게 잘 웃었는데 웃을 적마다 벌건 잇몸이 모두 드러나 흉해 보였다. 그러나 강의시간에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잘 나왔다. 루까쉬는 한국말이 우습다는 듯이 때때로 발음연습을 하면서도 자주 소리내어 웃었다. 이는 어느 결에 3학년 알즈베따를 꾀여내기도 했다. 그는 3학년 미로슬라브와 친구이기도 했으며, 함께 야구선수였다. 그는 이미 기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어학과에 입학해 한국어를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지만 다른 여학생들을 따라가지 못했다. 

여학생 스떼빤까는 18살이었다. 그는 상냥하고 귀여웠으며, 검정색 옷을 즐겨 입었다. 그는 영어와 독일어를 잘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쉽게 배웠다. 스떼빤까는 나와 함께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는 듯이 한 시간 내내 즐거워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중심으로 저들을 가르쳤다. 스떼빤까는 내가 여행 중 신세를 진 오스트리아의 웨르너 선생에게 쓴 연말 인사편지를 독일어로 번역해 주기도 했다. 그는 망년회 때 검은 원피스를 예쁘게 입고 나와 아리랑을 불렀다. 그후 나는 종강시간에 그에게 신년 선물로 노트 1권을 주었고, 나서미(羅西美)라는 한국식 이름을 지어 주기도 했다.

이 여학생은 깜찍하게도 어느 절에 3학년 또마쉬 호락을 꾀어내 애인으로 삼았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연애를 했다. 한 학기가 지나 또마쉬가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되자 스떼빤까는 그에게 열심히 엽서를 써 보냈다. 내게도 자기들이 또마쉬에게 보내는 편지에 글을 써 주길 바래 몇 줄 써넣어 주었다. 스떼빤까는 또마쉬가 떠나던 날 공항까지 나갔었다. 이들의 연애가 그후 어떻게 성숙했는지는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잘 어울릴 듯했다. 하지만 또마쉬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편이어서 내게 그런 내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네들끼리는 이미 커플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러시아국적의 알라는 야무지게 생겼는데 한국어 발음이 어려운지 매우 힘들어했다. 하지만 루까쉬, 스떼빤까와 함께 한번도 결석함이 없이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했다. 그는 작은 키에 눈동자는 까맸고 눈썹의 숱이 많았다. 나는 그가 체코인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는 러시아인이며, 모스크바가 고향이라고 내게 말했다. 알라는 내가 그해 여름 러시아 여행 중 신세를 진 러시아 어부에게 쓴 연말 인사편지를 또마쉬가 체코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러시아어로 번역해 주었다. 나는 한국어를 저들에게 가르쳤지만 저들은 보통 3개 국어 이상을 했다. 

나는 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기역 니은부터 가르치자니 매우 힘들었다. 쓰기, 발음 익히기만 1달을 했다. 먼저 마르따 교수가 체코어로 그 교과의 내용을 설명하면 나는 다시 한국어로 이를 반복하는 식으로 가르쳤다. 이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학생들은 내용을 거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발음을 따라 연습하고 일상적인 회화를 익히면 되었다. 이렇게 1학기를 마치니 이들은 제법 인사말을 정확히 할 줄 알아 망년회 때 한국말로 인사를 했고, 한국 유학생들과도 즐겁게 어울리었다. 그날도 스떼빤까는 능숙하게 한국어로 “많이 드세요.”라고 말했고, 알라는 “아주 한국말이 어려워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이들의 한국말을 들으면서 퍽 대견한  생각이 들었다.

까렐대학에서는 6월 한 달이 학생들의 시험 기간이었다. 마르따 교수와 함께 담당했던 1학년의 「한국어회화」는 1주일에 걸쳐 구두시험과 필기시험을 치렀다. 한 학생과 교수는 단독으로 만나 구두시험과 필기시험을 보았기 때문에 하루에 2명의 학생밖에 시험을 볼 수 없었다. 교수는 시험이 끝나면 즉석에서 그 학생의 성적을 그가 가지고 있는 학교수첩에 적어 주어야 했다.

나와 마르따 교수는 학생들의 성적을 의논해 결정했다. 이들은 우리처럼 숫자로 성적을 평가하지 않고 썩 잘 했음, 잘했음, 보통임 등으로 성적을 평가했다. 나는 이것이 타당해 보였다. 학생들은 교수가 성적을 그들의 수첩에 적어 주고 사인을 해주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물론 자신이 열심히 하지 않았으면 의례히 다음에 다시 수강할 줄 알았다.


출처 : [직접 서술] 블로그 집필 - 菩提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