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이태준의 생애와 문학

맑은물56 2009. 2. 26. 11:15

이태준의 생애와 문학

suri21 2008.10.0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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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장편소설 연구- 김종균 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1999>   


Ⅰ. 교양적 삶과 문화주의

  1. 고아(孤兒)의식과 현실인식 

  2. 장인(匠人)정신과 그 문학 

Ⅱ. 장편소설과 문화적 세계인식

  1. <성모>― 민중문화의 교양화 

    1. 통속성과 사랑 모티브

    2. 교양성과 모성애 모티브    

    3. 민중문화의식의 구현

  2. <화관>―민중의 교양화와 민족현실  

    1. 교양성과 통속성

    2. 인물유형과 이중구조

    3. 교양문화의식의 구현

  3. <청춘무성>―복지사회 구현과 문화세계 

    1. 교양과 통과제의

    2. 통속성과 이중구조

    3. 복지문화의식의 구현

  4. <별은 창마다>―신체제와 문화적 현실인식 

    1. 이중구조와 시대 상황

    2. 작중인물과 현실인식

    3. 신체제문화의식의 구현

Ⅲ. 교양소설적 성격

  1. 작중인물의 유형 

  2. 교양소설적 양식 

Ⅳ. 문화적 세계인식의 특성  

  1. 문화적 현실 대응 

  2. 문학사적 특성 

 

      
     

Ⅰ. 교양적 삶과 문화주의


1. 고아의식과 현실인식


이태준(1904-, 李泰俊)은 고아로 자랐다. 이태준의 문학하기의 직접적인 동기는 자아 극복과 자아 성취였다. 자아 극복은 고아의식과 서얼의식의 극복이었고, 자아 성취는 권력과 경제 즉 사회적 출세였다.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말하자면 이태준의 문학하기였다. 이태준은 이광수와 같은 점이 많았다. 문학하기의 동기 또한 비슷했다. 이광수도 고아였고, 이태준도 고아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고아 체험으로부터 시작한다. 고아는 남달리 자아 성취욕이 강하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정상인들 보다 몇배 높다고 한다. 이들은 사실은 명예욕보다 권력욕이나 경제 욕에 대한 성취 욕구가 더 컸다.

이태준과 이광수의 일차 인생의 목표는 사회의 세속적 출세이었다. 그 증에서도 권력과 경제력에 대한 욕구가 제일 강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것을 할 수가 없었다. 이광수나 이태준이 할 수 있는 것은 글쓰기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글쟁이로 만족할 수 없었다. 이들은 권좌의 꿈을 일생동안 버리지 못했다. 이광수가 자기는 문사가 아니라 대학자요, 민족의 지도자임을 자처한 것처럼 이태준 역시 사회 지도자임을 자처했고, 옛 선비 연 했을 뿐만 아니라 문단 지도자로 군림하기도 했다. 그는 해방이 되자마자 좌익 문단에 가담하여 지도부 임원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이들의 문학 해위는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들이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역시 권력과 돈이었다. 이들이 얼른 보기에는 돈과 권력으로부터 초연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의 일제시대의 친일적인 행각이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특히 이태준의 일제말기 장편소설의 주인공들은 돈의 욕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들이 권력과 돈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한용운처럼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역시 이태준이였고 이광수였다.  

이태준은 서얼 출생일뿐만 아니라 고아이었다. 이태준 문학의 기본 모티브는 고아 체험이었다.1) 이태준은 일생 동안 서얼의식과 고아의식에 시달리며 살았다. 따라서 서얼의식과 고아의식의 극복은 그 자신의 일생일대의 과업이기도 했다. 이태준은 문학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 했다. 그의 장편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태준의 분신이었다.     

이태준은 1904년 강원도 철원(용담)에서 이문교(李文敎)2)와 그의 소실 순흥 안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태준의 부친은 무엇에 쫓기듯이 가산을 정리하여 가족들을 이끌고 1909년 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사를 갔으나 그해 가을 불길한 소식을 듣고는 졸도한 후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가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당한 가족들은 서둘러 귀국했다. 그러나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이태준의 모친이 귀향선 안에서 해산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태준 가족은 외할머니, 어머니, 누이 송옥, 정서방 등이었다. 이들은 심한 파도에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함경도 연안 부두인 배메기(梨津)에 정박했다. 이후 이들은 근처 도시 소청(素淸)으로 가서 음식점을 시작했다. 이때 이태준은 서당에 다니며 천자문을 배웠다. 1912년 겨울 이태준이 서당에서 돌아와 보니 그의 모친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태준은 유년기에 연거푸 부모를 잃는 불행을 당하였으나 외할머니 덕분에 이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태준에게는 부모의 죽음 보다는 고아로서의 삶이 더 문제시 되었다.   


1. 아버지는 하룻날 불붙듯 급한 이상을 품기 만 한 채 밤중 달 걸친 파도소리 고요한 창 밑에서 삼십 오세를 일생으로 한 많은 눈을 감고 말았다.(중략) 그때가 마침 하관하는 때라 허연 관이 여러 사람들의 배 줄에 실려 가라앉듯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다.

2. “주검이란 갑자기 남이 되는 걸까?” 요 아래로 떨어진 어머니 손을 몇 번 움칫거리다가 가만히 만져보았다. 돌처럼 차다. 제 손까지 써늘해짐을 느끼었다. 그러나 울음은 도무지 나오려 하지 않았다.

3. 날이 저물자 원산은 집집마다 전깃불이 켜졌다. 전등이 제일 환한 데를 가보니까 정거장이었다. 거기는 누구나 쉴 수 있는 걸상이 있었다. 배가 고파 잠이 올 것 같지 않더니 깜빡 잠이 들었다. “이 자식아? 어디서 자?”라는 청소부 소리에 놀라 쫓겨나오니 밖에는 언제부터인지 비가 부슬부슬 내리었다. 전등들은 그냥 밝으나 밤은 깊은 듯 괴괴하였다.3)        


위 인용문 1은 이태준이 6살 때 목격한 부친의 죽음이며, 2는 그의 나이 9살 때 당한 모친의 죽음이다. 졸지에 고아가 된 이태준은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이후 이들은 철원 용담으로 돌아와 이태준은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 오지에 사는 오촌 댁에 입양되어 나무꾼 아이가 되기도 했으나 다시 용담으로 돌아와 봉명학교를 설립한 오촌 이동하 댁에 기거하면서 이 학교를 다니어 졸업했다. 졸업 후 이태준은 집을 나왔다. 이태준은 걸어서 원산에 이르렀다. 인용문 3은 이태준이 겪은 원산에서의 첫날밤의 정경이다. 기차역 삼등 대합실에서 자다가 쫓겨난 이태준은 갈 곳이 없었다. 이태준은 객주 집 호객꾼이 되었다. 이태준은 어린 나이에 많은 사람을 접하게 되면서 세상살이를 차츰 알게 되었다. 외할머니가 원산으로 이태준을 찾아와 빈대떡 장사를 하며 그를 보살펴주었다. 이태준은 미국 유학의 꿈을 안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동현까지 갔다가 무일푼이 되어 걸어서 고향 철원으로 돌아왔다. 그간의 걸인 행세는 글자그대로 이태준의 고아 체험 그것이었다. 이태준은 청년기 2년여를 북지에서 걸인 생활을 하며 보냈다. 그의 이 같은 고생살이는 일종의 통과제의였다. 

이태준은 1921년 상경하여 휘문의숙에 입학하였다. 이태준은 고학을 했다. 책장사로 학비를 벌어가며 4년 반 학업을 계속하는 동안 결석이 잦고 학비를 체납하는 일이 많았다. 이태준의 문재는 휘문의숙 재학 때 발탁되었다. 이태준은 교지 <휘문>(1924) 제2호에 <부여행>, <물고기 이야기> 등을 발표하면서 문우들과 어울려 지내게 되었다. 당시 휘문의숙에는 박종화․정지용 등이 재학 중이어서 이태준의 문학 수업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태준이 이 학교를 중퇴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백두진(白斗鎭)과 동맹휴학을 주동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이태준은 졸업을 1학기 앞두고 1924년 6월 퇴학당했다.    

이태준은 1925년 봄 도일하였다. 이태준은 도쿄에서 단편소설 <오몽녀>를 써서 그해 7월 <조선문단>에 투고하여 입선이 되었다. 이 작품은 이태준의 문단 데뷔작이 되었다. 이로부터 이태준은 작가가 될 결심을 하고 문학수업에 전렴하게 되었다. 이태준은 1926년 4월 상지(上智)대학 문과에 입학해 더욱 문학 수업에 정진하였다. 이태준은 도쿄 체류 기간 중 미국인 뻬닝호프 박사를 통해 자유사상과 기독교 사상을 접하게 되었지만 사회주의 사상 쪽에 더 기울어 있었다. 신문 배달을 하며 고학을 하던 이태준은 그의 각별한 도움을 받았다.4) 그러나 그는 1년 반 만인 1927년 7월 학업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한 이태준은 1929년 개벽사에 입사하여 창작에 전렴했다. 당시 「개벽」의 편집장은 박영희로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본거지였던 탓도 있었겠지만 이태준은 도쿄 시절에 관심이 컸던 사회주의 운동에 경도되어 있었다. 이태준 스스로가 말하듯이 이태준은 사회에 불평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태준의 사회에 대한 남다른 반항심은 그의 고아의식의 발로였다.5) 1930년 이태준은 이화여전 음악과를 나온 이순옥과 결혼하였다. 이후 이태준은 중외일보 기자,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이화여전 강사를 역임하는 한편 순수문학 단체인 <구인회>에 가담하였으며, 1939년 2월 「문장」의 편집을 담당하게 되면서는 문단의 중심적 인물이 되었다. 

이태준은 일제말기 황군위문작가단, 조선문인협회 등 친일적 문화인 단체에 가담하였고6), 그의 장편소설에는 신체제 순응적 색채가 짙게 반영되었다. 한마디로 이태준은 친일의 늪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태준은 1943년 6월 역사소설 <왕자호동> 연재가 끝나자 절필을 선언하고 고향 용담으로 내려가 해방이 될 때까지 낚시로 소일하였다. 해방이 되자 이태준은 조용만의 증언처럼 “지사적 영웅심 때문에 문단의 헤게모니를 쥐려고 좌익으로 돌아섰다.”7)

이상의 간략한 생애의 서술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태준은 남다른 고통의 유년기를 보냈다. 그 중에서도 6살 때 아버지를 잃고, 9살에 어머니를 잃어 천애의 고아가 된 일은 그의 생애에 커다란 갈림길이 되었다. 친척에 입양되어 자라면서 천대와 괄시를 받기도 했고,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그는 걸어서 조선 북지를 떠돌아다니며 걸식을 하며, 갖은 고생을 다하였다. 이 같은 유년 시절의 고통스러운 불행은 그의 문학적 자원이 되었다.   

이태준의 청년기는 고학 체험으로 채워져 있다. 이태준은 서울 생활을 하면서부터 전통 문화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고, 도쿄 유학을 통해서는 근대문화를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이태준의  일제말기 장편소설에는 도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여러 편 있다. 이태준은 일본의 근대문화를 동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태준은 책의 고급 장정, 고급 찻집 분위기, 화랑, 서점, 음악, 건축, 극장, 공원, 백화점 등 문화적 분위기와 일본인들의 교양 즉 일본 문화에 매료되어 있었다.8) 한마디로 이태준에게는 도쿄 문화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태준의 도시 체험은 한마디로 고통의 삶이었다. 경제적 궁핍은 물론 사회적 천대와 문화적 멸시는 그가 직접 체험한 바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전통문화와 근대문화의 체험이 특히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태준은 누구보다도 기성 사회 질서와 문화에 반항감이 컸지만 그 반면에 어느 누구보다도 기성 권력에의 순응력도 가지고 있었다. 청년기에 이르러 이태준의 반항적 감정과 행동은 순응적 감정과 행동으로 바뀌어 갔다. 저항성은 관념화 되어 갔고, 순응성은 사실화 되어 갔다. 그만큼 저항적이었던 고아의 성격이 순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바뀌게 된 중요한 직접적인 동기는 경제적 궁핍과 정치적 억압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태준은 도시에서의 고학 체험을 통해 자신의 현세적 욕망인 사회적 출세를 위해서는 기성 사회에 대한 반항적 감정이나 불평보다는 순응적 태도가 효과적임을 깨달았다.

따라서 이태준은 전통문화 익히기의 일환으로 문인 양반 생활 익히기에 힘썼다. 그는 문인 생활을 하면서부터 조선 선비 문화를 스스로 체현(體現)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는 교양과 문화적 소양(素養)를 이로써 보상하려 했다. 이태준은 자기네 조상은 양반이고, 자기 부친은 혁혁한 개화파 선각자지만 자기 자신은 어디까지나 첩의 아들로서 천대 받는 서얼 출신이고, 거랑꾼 고아였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남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통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태준의 전통 확보는 정신으로서 보다는 생활로 나타났다. 이태준은 문인의 상징물인 문방사우를 갖추고 난부터 기르기 시작했다.     


귀품은 아니나 향기는 좋던 사란, 건란, 십팔학사 세분을 삼년이나 길러온다. 책이 지리 할 때, 붓이 막힐 때, 난 잎을 닦아 주는 것이 제일이다. 난은 그만치 심경을 가라 앉혀 준다. 그러므로 ‘養蘭以養神’이라는 말도 있다.9)


이태준이 난을 기르는 이유가 이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심란한 심경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이태준은 왜 심란했을까? 왜 이태준의 난은 향기는 좋지만 귀품이 아닐까? 이태준은 좋은 향기의 귀품 난을 사실은 갖고 싶었다. 그는 왜 책 읽기가 지리 했고, 왜 글쓰기가 안 되었을까? 왜 그는 난 잎을 닦으며 마음을 달랬을까?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이 어딜까? 한마디로 현세적 욕망 즉 권세의 욕망 때문이었다. 권세의 욕망을 달래기 위해 이태준은 난을 기르기 시작했다. 권세의 욕망을 다스려야 문인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즘에 이르러서는 이태준은 고아도 서얼도 아니었다. 이미 그는 고아도 서얼의식도 초월한 때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권세에의 욕망이었다.  

이태준의 방벽에는 추사(秋史)의 글씨가 한 폭 걸려 있었고, 문갑 위에는 난 세분과 투박한 백자 몇 점이 놓여 있었다. 이 가운데 그의 시선이 자주 머무는 곳은 제기(祭器)와 추사 글씨였다. 그의 시선은 왜 제기와 추사 글씨에 자주 머물렀을까? 그 비밀은 한마디로 전통과 창조 문제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전통을 지키면서도 창조를 할 수 있을까? 즉 어떻게 하면 법을 지키면서도 탈법을 할 수 있을까의 문제 때문이었다. 제기는 전통을 상징하고, 추사 글씨는 창조를 상징한다.  


나는 문갑 위에 李朝 祭器 하나를 놓고 無時로 바라본다. 거미줄처럼 금간 틈틈이 옛 사람들의 생활의 때가 푹 배어 있다. 날카롭게 어여 낸 여덟모의 굽이 우뚝 자리 잡은 우에 열고 우긋하고, 매끄럽게 연잎처럼 자연스럽게 변두리가 훨쩍 피인 그릇이다.(15-208)

阮堂의 자유분방하게 휘둘러 놓은 획 속에 나는 이틀 저녁을 가쳐 있었다. 완당의 필격, 필의, 필후를 이틀 저녁을 체험한 셈이다. 완당의 획은 어떤 성질의 동물이란 것이 만져지는 듯하다. 완당 서를 아직 것 천자를 보아온 것이다. 이 이틀 저녁 24자를 模寫해 본 데서 나로서의 완당 書眼은 갑절 늘은 셈이다. 모방에 이처럼 미적의 일면이 있음은 놀라운 일이다.10)


이태준은 전통 정신보다는 그들의 장인 정신을 본받고자 했다. 이태준은 이조 제기의 기능보다는 그 모양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태준이 제기에서 전통 장인 정신을 발견한 것은 전통 문화 정신으로서 보다는 예술성 즉 형상화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추사 글씨를 모사하면서 느끼는 감흥력 또한 그의 장인 정신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태준은 사상적 창조보다는 예술적 표현에 더 관심이 있었다. 제기를 만든 이름 모를 어느 장인의 예술성과 추사의 독창적인 글씨에서 법과 탈법을 이태준은 동시에 배우고자 했다. 이태준은 밤을 새워가며 추사 글씨 24자를 모사하였다. 가능하다면 이태준은 도공이 만든 제기를 직접 만들어 보고 싶었을 것이다. 이태준은 한마디로 추사나 도공의 장인정신을 본받고자 했다.

이태준은 선천적으로 사상가적 재질보다는 예술가적 재질이 더 우수했다. 여기서 말하는 예술가적 재질이란 것은 창조적 능력보다는 장인으로서의 기술력을 말한다. 이태준이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은 제기를 만든 도공처럼 되는 일이었고, 동시에 추사처럼 독창적인 예술가가 되는 일이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그것을 할 수 있는 장인으로서의 재질이 있었다. 문장가로서의 재질이 그것이었다. 이틀 저녁에 완당(阮堂)의 24자의 글씨를 모사하는 능력과 거기서 기쁨을 느끼는 예술적 감응력은 그만이 지닌 장인으로서의 특출한 재능이었다. 이태준은 전통문화를 탐구했다기보다는 전통문화를 향유했다 함이 옳을 것이다. 추사 글씨를 모사해 보는 것, 그것은 연습(기능 익히기) 이상일 수 없다.

이태준은 문인 선비 즉 작가가 되길 결심했다. 이태준은 예술적 표현을 창조로 인식했다. 그는 나타내기 또는 모범을 모사하기를 예술적 창조로 생각했다. 한마디로 이태준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은 모방으로서의 예술 그것이었다. 이태준은 마침내 소설가가 되길 결심했다. 


      예술의 信徒가 되자. 소설의 한개 신도가 되자. 소설의 愚昧한 신도로만 살고 또 쓰고 싶은 것이다. 역사는 아름다운 인류의 강물이다. 좀더 정확하고, 좀더 구체적이고, 좀더 아름다운 기록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 소설은 생활을 극적인 내용이게, 미가 있는 형식이게, 기록한 것으로서 소설도 다른 예술과 함께 "表現"이 생명이다.11) 


이태준이 소설의 신도가 되길 선언한데는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태준은 많은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유년기 고아 체험이 그의 무궁한 소설 재료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의 삶 자체가 곧 소설이었다. 이태준은 자기의 생활을 이야기로 표현할 수 있는 장이로서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태준은 이미 휘문 학교 재학 시절 그 문재를 인정받은 바 있었다. 

이태준은 소설을 극적인 감동적 표현의 이야기로 인식했다. 그가 말하는 정확하고 구체적이고 아름다운 기록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모방적인 미적 표현이다. 극적인 내용이 어떻게 현실을 리얼하게 나타낼 수 있겠는가? 극적(劇的) 이야기는 과학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설화적인 이야기이다. 다시 말하면 플롯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스토리 중심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태준의 이야기는 그가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해도 염상섭의 소설만큼 리얼하지 못하다. 무슨 까닭일까? 한마디로 이야기가 극적이기 때문이다. 이태준 소설의 아름다움은 관념의 아름다움에 지나지 않는다. 이태준의 소설이 어딘가 모르게 이광수 소설을 닮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술의 신도가 되길 맹세한 이태준은 스스로 장이가 될 것도 결심했다.

이태준의 모방의 대상은 추사였다. “나도 추사 같은 예술가가 되자”고 결심한 그는 추사 글씨 모사로부터 추사 닮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태준은 추사의 예술 사상 보다는 추사의 글씨에 매료되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추사 글씨 모방으로서는 결코 추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태준은 모르고 있었다. 추사는 장인이기에 앞서 사상가였고, 예술가였으며, 정치가였다. 하지만 이태준은 추사 글씨에만 매료되었다. 왜 그랬을까? 표현 때문이었다.

예술은 사상의 형식화라고 흔히들 말한다. 불교 사상의 형식화가 곧 불교 예술이요, 불교문화이듯이 민족 사상의 형식이 곧 민족 예술이요, 민족 문화이다. 추사 글씨 즉 추사 예술은 추사 정신의 형상화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태준의 추사되기는 그 방법부터가 잘 못되어 있었다. 표현으로서의 문화가 예술로부터 시작되었듯이 삶으로서의 윤리는 종교로부터 시작하였다. 삶의 방법이 윤리나 종교라면 삶의 형식이 말하자면 문화이다. 이태준은 삶의 방법보다는 삶의 형식에 더 관심이 많았던 듯싶다.   


그 부드러운 돌 빛, 그 부드러우면서도 육중하신 어깨와 팔과 손길 놓으심, 쳐다보는 순간마다 분명히 알리시는 미소, 전신이 黎明에 쪼여지실 때는 이제 마악 하강하신 듯, 자리 잡은 옷자락 소리 아직 풍기시는 듯12)


이태준은 불상이 왜 이렇게 만들어졌으며, 이것은 불교의 진리를 어떻게 드러내고 있다는 설명은 없다. 다만 석굴암 불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이태준은 “예술가의 직무는 만들어 보여줄 뿐, 설명하지 않는다.”는 말을 철칙으로 여겼다. 이태준의 소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표현력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이태준은 예술에 있어서 윤리 보다는 표현미를 더 생각했다. 이태준은 한마디로 사상가이기 전에 예술가였고, 예술가이기 전에 장인(匠人)이었다.


이태준이 봉건주의적인 풍속과 악랄한 식민지 수탈 정책이라는 이중의 중하를 감당한 폐쇄 사회에서, 그자신의 정치학을 개진하지 못하고, 사회의 압력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거의 대부분이 그의 딜레탕티즘 때문이다. 그의 딜레탕티즘을 선비 기질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비평가들도 있으나, 그것은 선비 기질과 딜레탕티즘을 혼동한 결과이다. 그의 딜레탕티즘은 개인의 안위와 골동품에 대한 기호심의 소산이며, 지조와 이념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는 선비 기질과는 판연히 다르다.13)


이태준은 한낱 딜레탕트에 지나지 않았는가? 그럴 수도 있다. 그에게는 치열한 작가 정신보다는 화려한 장인 정신이 늘 앞섰다. 화려한 장인정신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의 문화적 세계인식의 한계가 아니었겠는가. 그렇다. 그는 창조정신 보다는 모방정신에 길들여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창조정신은 빈약했다. 창조력이 결여된 문화정신은 결국 모방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태준의 한계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태준에게는 옛 선비들이 생명처럼 여기었던 지조와 이념이 없었다.

이를 가리켜 그를 딜레탕트라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그는 딜레탕트가 되었을까? 문화를 그의 권력욕 성취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기 때문에 진정한 선비 정신 본받기를 거부하였다. 선비 정신을 본받아 실천한다면 자기는 출세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선비는 의리를 지켜야 하고 곧은 말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념과 지조가 있어야만 한다. 가진 자는 그렇게 해도 살 수 있고, 출세할 수 있지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수난의 길일뿐만 아니라 죽음의 길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태준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태준은 「문장」의 편집인이 되면서 문학잡지로서는 파격적으로 고전 작품뿐만 아니라 연구 논문까지 실었다. 왜 그랬을까? 고전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고전 부흥론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었겠지만 이태준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랬다. 「문장」에 실린 <조선문학연구초>(이희승), <봉산가면극극본>(송석하), <조선소설사개요>(조윤제), <무격의 신가>(손진태), <현대시조론>(이병기), <조선어문학명저 해제>(이병기), <사뇌가 해석 서설>(양주동), <고본 훈민정음의 연구>(정인보), <춘향전집>, <설화문학고>(조윤제) 등은 오늘날 고전 연구 논문의 고전이 되었다.

이 같은 이태준의 「문장」 편집 태도는 우수한 창작과 함께 고전을 통해 조선의 전통 정신과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려는 그의 문화정신의 발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태준은 끝내 그 정수(精髓)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태준이 자신의 교양화를 통해 문화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스스로 문화적 창조의 길로 들어서려 했지만 늘 그는 전통 밖에서 서성거리었다. 그가 고려 청자기나 조선 백자를 탐미하고 서화 골동을 항상 생활 주위에 두고 완상하며 지낸 것도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의 문화적 교양화을 위해서였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서얼의식과 고아의식을 극복해 보려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이태준의 문화인식 과정은 자기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배태되어 있는 서얼의식과 고아의식의 극복 과정이었다. 선비문화를 동경하면서도 선비들의 정신문화를 이어받지 못하고 그들의 생활 문화에 그쳤다는 것은 그 자신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불행이기도 하다. 선비 기질의 핵인 지조와 이념을 기반으로 하지 못한 이태준의 전통문화인식은 그 자신의 삶과 문학의 한계이었다. 하지만 그의 문화적 세계인식은 당대 통속적 사회의 문화화와 속물들의 교양화에 기여하였다.



출처 : [직접 서술] 블로그 집필 - suri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