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김동리의 생애와 문학

맑은물56 2009. 2. 26. 11:14

김동리의 생애와 문학

suri21 2008.10.0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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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의  종교적 세계인식 - 김종균 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1999>


1. 종교적 삶과 휴머니즘


1. 구경적 삶과 원초적 생명력


김동리((1913-1995, 金東里)가 태어나서 자란 경주 성건리 마을 앞에는 형산강 지류인 서천이 흘렀다. 여기에는 푸른 물이 빙빙 돌아 넘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예기청수(藝妓淸水)라는 늪이 있었다. 이 늪은 전설과도 같은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채 새로운 이야기를 늘 만들어 내었다. 사람이 특히 젊은 여자가 해마다 빠져 죽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밤이면 도깨비불이 새벽까지 번득였다. 이 늪이 무당 모화가 굿을 마치고, 시나위 가락 속에 저승으로 간 바로 그 늪이다.

김동리는 자기 고향을 전설화 했는가 하면 자기 고향의 이야기나 자연을 소설화 했다. 그만큼 경주는 김동리 소설의 고향이기도 했다. 김동리가 고향의 숲과 늪에서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청장년기를 보냈다는 사실은 그의 소설을 위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만약에 그가 일찍이 고향의 늪과 숲을 버리고 도회로 나와 문명 속에 빠졌었다면 아마도 소위 그의 문학을 자리매김 하는 반근대적 문학, 자생적 한국문학, 근대 초극의 문학 등의 이름으로 불리지는 않았을 런지도 모른다.

김동리가 남달리 도시적인 것보다는 자연, 그중에서도 신비와 무서움을 간직한 부헝듬과 늪을 자기 가슴 속에 간직하고 근대 문명을 보았기 때문에 근대 문명의 모순과 부조리와 한계를 남보다 빨리 그것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와 아울러 김동리는 동양문화의 지주인 불교와 유교 및 도학 그리고 신선 사상과 샤머니즘에 이르기까지 동양정신의 원천을 천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친화를 통해 그 삶과 문학의 원초적 동인(動因)을 형성해 갈  수 있었다.

한편 김동리는 미션 스쿨의 교육을 통해 서구 사상의 원천이라 할 기독교 사상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서구 문명의 실체와 그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동리에게는 기독교가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1) 김동리 문학의 원천적 기초의 테제가 기독교(욱이)와 샤머니즘(모화), 지상(사반)과 천상(예수), 반근대로서의 제3휴머니즘의 세계 지향이었다면 김동리의 부헝듬의 숲과 늪의 자연 체험은 그만큼 근원적인 창조적 생명의 세계이었다.

김동리가 남들처럼 쉽게 도시 문명에 감염되지 않고, 더욱 서구 근대 문명에 맞부딪쳐 나가면서도 한쪽으로는 원시에 가까운 샤머니즘의 세계를 용감하게 보여주거나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부헝듬의 숲과 늪에서 원시적 생명력을 키웠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그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었다면 남들처럼 서구 문명을 따르는 자가 되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같은 상반된 정신세계의 체험은 김동리의 삶과 문학을 그만큼 원천적으로 풍부하게 하였다. 김동리가 당시 우상처럼 받들어지던 사회과학 소위 마르크스적 세계인식에 대해 반기를 들고, 그 허망함을 우직하리만치 꼬집어내어 비판하고, 더욱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몰 인간성을 강하게 매도할 수 있었던 것도 또한 이에 기인한 것이다.

부헝듬 늪 속에서 자라던 이시미가 비 오는 날, 비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이무기의 이야기를 듣고 의심 없이 그대로 믿었던 소년 김동리는 자라서도 이무기가 자라서 용이 되어 하늘을 오른다는 이야기를 믿었다. 그래서 그는 억쇠와 덕보의 이야기를 남이 비웃거나 말거나 눈 딱 감고 전차 소리가 들려오고, 저녁이면 전등불이 밝게 들어오는 서울 종로 연건동 하숙방에서 쓸 수 있었다. 이는 김동리가 근대 서구 문명의 한계를 먼저 보아 버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서구 문명인의 콧대를 꺾어 놓고 싶었던 것이다. 남들이 서구 문명의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며 조밥이라도 얻어먹으려 하는 양을 볼 때 김동리는 그 짓이 가소(可笑)로와 보였는지도 모른다.

김동리는 장난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 장난은 그들에게는 웃음 감으로 보였는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놀라움으로 비쳤다. 그 놀라움은 돈키호테와도 같은 힘이 그에게서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김동리는 분명히 한국문학사에 돈키호테였다. 어느 누가 감히 근대 문명의 거센 물결을 거스를 수 있었던가? 여기에 김동리의 위대성이 있다. 

김동리는 경주 성건리에서 1913년 부 김임수(壬守)와 모 허임순(許任順)의 5남매 중 3남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김동리는 자기 고향 산천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부헝듬의 늪과 숲은 육친과 같았다. 김동리는 어려서 늪과 숲 속에서 하루 종일 살았고, 늙어서도 틈만 나면 고향의 늪과 숲을 찾아가 그 속에 뭍혀 며칠을 보내고는 했다. 이는 어느 누구의 영향도 아니었다.


그것이 언제부터의 일인지도 분명치 않다. 아주 어릴 적부터니까 타고난 기질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동네는 성외에서도 가장 농촌이라는 인상을 풍기는 마을이었다. 이 송홋골 앞에, 동쪽으로 뛰어나온 듯한 두 개의 산을 부헝듬이라 불렀는데, 남쪽 것을 윗부헝듬, 북쪽 것을 아랫부헝듬이라 불렀다. 이 두 개의 부헝듬은 다같이 동쪽을 향해 심한 벼랑이 져 있었고, 그 벼랑에는 활엽수들과 칡넝쿨이 무성히 엉켜 있었다.2)


김동리에게 부헝듬의 활엽수와 칡넝쿨로 뒤덮인 숲과 푸른 이끼로 덮여 있는 늪은 원시의 세계와 같았다. 이무기와 물 구렁이가 산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의 푸른 물은 무서움과 신비로움을 더 했다. 숲 속에는 지네, 개구리, 두꺼비, 까치독사 등 파충류가 우굴 대었고, 숲 위에서는 뻐꾸기, 부엉이들이 요란스럽게 울어대었다. 김동리는 한마디로 자연의 아들이었다.  

그의 맏형은 한학과 동양철학의 대가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범부 김기봉이었다. 김동리는 부친보다 자기 어머니와 맏형의 영향을 더 많이 받으며 자랐다. 둘째 형은 경주읍에서 부친과 함께 건어물상을 경영했다. 한때 김동리는 학교를 중퇴하고 둘째 형을 도와 건어물 상회 일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다솔사와 해인사 등 절간을 전전하며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 그때마다 그는 자기 맏형을 찾아가 도움을 받았다.

김동리 집안은 중농에다가 건어물상까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다. 하지만 맏형이 독립운동자로서 일제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라 식구들은 일제 당국의 감시와 잦은 가택 수색으로 곤혹을 치러야 했다. 김범부는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일종의 부랑자적 생활을 했기 때문에 집안 살림은 둘째 형과 모친이 주로 했다. 김동리의 부친은 주사가 심해서 모친과 불화가 잦았을 뿐만 아니라, 집안 살림도 돌보지 않았다. 부친의 주사로 인한 모친과의 불화는 집안의 화목을 깨고 살림마저 기울게 했다. 결국 일제말기에 이르러서는 김동리네 집안을 경제적으로 궁핍해졌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아 몰락했다. 

김동리의 모친 허씨는 전형적인 유교 집안에서 자랐고,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러던 허씨가 교회에 나갈 결심을 한 것은 남편의 심한 주사 때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점필재 김종직 17대 손임을 자랑하던 김동리 집안은 난가가 되었다. 김동리 모친 허씨의 기독교로의 개종은 김동리에게 직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를 온통 미션 스쿨을 다닌 까닭도 모친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동리에게는 맏형 범부의 정신적 영향 또한 만만치 않았다. 김동리는 이 같은 유교와 기독교의 양립된 가치 지향적 가정에서 자라면서도 정신적으로는 별로 갈등을 느끼지 않았다. 김동리는 어려서는 모친을 따라서 교회에 다녔을 뿐이고, 커서는 어려서의 습관대로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갔을 뿐 별로 신앙심은 깊지 않았다. 김동리는 기독교보다는 오히려 동양철학과 불교 및 샤먼이즘에 더 마음이 끌렸다.    

김동리의 모친 허씨도 원래는 불교 신자로서 경주읍에 있는 분황사에 자주 불공을 드리러  다니었다. 특히 석가 탄신일 때면 김동리에게 새 옷을 입혀 가지고 절에 가고는 했다.   

   

그날의 분황사, 이날만은 딴판이었다. 절 경내가 온통 종이꽃과 깃발과 초롱(종이 등)으로 꽃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흥분과 행복감으로 가슴이 뿌듯했다. 이윽고 밤이 되니 그 많은 초롱에 불이 켜졌다. 법당 안 불빛과 꽃과 깃발로 꿈속의 궁전같이 보였다. 나는 어머니 무르팍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새벽녘에 눈을 떳을 때 그 황홀한 불빛 속에서 스님들이 계속 염불과 절을 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생애에서 아직도 이 분황사의 초파일 밤보다 더 진한 행복감을 경험한 일이 없다.3)


김동리는 어려서 사월 초파일 어머니를 따라 분황사에서 가서 하루 밤을 보내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었다. 김동리가 어려서 느낀 “일생일대의 행복감”은 그의 생활과 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된다. 그 후 일제말기 김동리의 청년기의 방황 역정에서 가장 깊게 자리 잡는 곳이 다름 아닌 절간이었다. 그가 어려울 때마다 찾아가는 절, 그곳은 어린 시절 분황사의 그 행복감의 신뢰 때문이었으리라. 실제적으로는 맏형 범부의 안내와 그를 찾아서 가기도 했어도 그가 실제로 절을 좋게 느끼지 않았다면 용무를 끝내고는 곧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간에 머무르려는 것이 그가 절을 찾아간 용무 그것이었기에 몇 달이고 며칠이고 그 곳에 머물러 있었다. 일제말기 절필하고 은둔한 곳도 다른 곳이 아닌 절(다솔사)이었다.

김동리의 모친 허씨가 교회에 다니게 된 오직 한 가지 이유는 부친의 심한 술주정 때문이었다. 교인들은 금주, 금연을 했기 때문에 허씨는 자기의 신앙심을 통해 남편의 주벽을 고치려 했는지도 오른다. 지극히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시작한 허씨의 기독교에 대한 신앙은 매우 돈독했던 것 같다. 이렇게 보면 김동리는 어려서부터 종교적 분위기를 느끼며 자랐다고 말할 수 있다. 생활로서는 농사와 장사를 아울러 하는 집안이어서 농토와 돈에 대해서도 남보다 일찍 깨달을 수 있었으나 김동리는 장사꾼의 아들로서 보다는 농사꾼의 아들답게 자랐다. 아니 그보다는 지사의 아우답게 자랐다.

모친 허씨의 권유로 미션스쿨을 다니기는 했어도 김동리는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에는 늘 불교의 세계와 동양의 윤리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경상도적인 인정과 풍토의 영향도 컸었겠지만 그의 생활과 정신적인 지주는 역시 유교와 불교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일생동안 맏형의 그늘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 그를 따라 동양철학에 심취했는가 하면 주역에 일가견을 갖게 되었고, 당대 고승이나 한학자들과도 교류를 하게 되었으며, 독립 운동가들의 고통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몇 달씩 선방 생활도 해보았고, 도시의 하숙 생활 아닌 더부살이 방 신세도 해 보았으며, 학비를 못내 학업을 중단해보기도 했는가 하면 일제말기 극한 상황에서는 징병을 피해 산사에 숨어도 보았다.

김동리는 작가로 등단하기까지 남다른 생활고와 정신적 경험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컸던 생활 체험은 불교적 정신 체험, 유교적 생활 체험, 자연 즉 고향 부헝듬의 늪과 숲의 원시 생명적 체험이었다. 김동리가 분황사 초파일 밤 느낀 “일생일대의 행복감”이 문화적 행복감이었다면 늪과 숲에서 본 생명적 원시성의 놀라움과 신비로움의 체험은 자연적 행복감이라 할 것이다. 일제말기 그에게는 생활이 없었다. 그 역시 자기 맏형을 따라 경주, 서울, 부산, 다솔사, 해인사를 맴돌며 떠돌아다닌 부랑자였다.

김동리의 문학은 소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려서부터 몹시 고독을 느낀” 김동리는 부헝듬 숲과 늪에서 살았다. 한편 김동리는 “무언가 몹시 불안하고 우울하고 무섭다고 느꼈다”.4) 김동리는 유년시절부터 죽음을 생각했다. 김동리 유년시절을 장식하는 “고독, 물(늪), 불안, 우울, 공포” 등은 모두 죽음과 연관된 단어들이다. 김동리는 유년시절 교회에  나가면서도 천당이란 말 그 자체가 왠지 실감이 나지 않았고, 죽음이란 막연히 캄캄한 밤과 같은 것이거니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 캄캄한 밤 같은 죽음을 경험하고 싶어 했다.5) 왜 그랬을까? 한마디로 성경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동리는 기독교를 통해서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김동리는 죽음의 문제를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는 선이의 죽음 앞에서는 더 했다.   

        

나의 유일한 소꼽동무를 잃음과 동시에 나의 작은 가슴에는 이날까지 씻어지지 않는 죽음이란 검은 낙인이 찍혔던 것이다. 선이의 죽음이 그렇게도 나의 어린 가슴을 눈물로 멍들게 한 것은 죽음의 손길이 너무나 뜻밖에 나를 때렸기 때문일까. 

그해 겨울 누나는 그녀의 나이 열여섯 살 때 무슨 병으론지 죽고 말았다. 선이와 남순이 누나의 죽음,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인하여 나는 무척 우울하고 병약한 소년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나는 봄부터 가을까지 늘 혼자서 냇물 가와 산기슭으로 돌아다니는 외로운 소년이기도 했다.6)  


김동리는 이웃 집 소녀 선이와 고종사촌 누이 남순의 죽음을 일찍 겪었다. 사랑하던 두 소녀를 잃은 김동리는 한없이 슬프고 외로웠다. 소년시절 두 소녀의 죽음은 김동리로부터 종교보다는 문학을 더 생각하게 했다. 죽음을 보기보다는 죽음을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동리는 19살 되던 해 남순이의 죽음을 소재로 하여 첫 번째 소설 ꡔ누나의 추억ꡕ을 썼다. 선이와 남순은 김동리의 첫 연애 감정의 대상이었다. 사랑의 대상을 잃은 김동리는 죽음과 저승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김동리는 어린 나이에 공지니7)에 호기심이 있어 그들을 따라가 보기도 했다. 김동리는 저승과 이승을 자유자재로 왕래하는 공지니가 부럽고, 신비로웠다.  


「애기님한테 물어보겠는데, 동산골 처녀가 좋은가, 나원당 처녀가 좋은가?」 그러자 소년는 수그렸던 고개를 들며 입에서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을 내었다. 그러자 천장 가까운 바람벽에 걸어두었던 손수건이 흔들렸다. 바람 한점 없는 방안이요,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고 걸려 있던 흰 손수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새 날개처럼 달달거리기 시작한 것이다.8)


김동리는 공지니가 휘파람 소리를 내자 방안의 손수건이 흔들리며 달달거리는 장면을 신비로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들이 자리를 뜨자 그들을 계속 따라 갔다. 김동리에게는 그것이 속임수라든가 거짓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더욱 김동리는 잃은 은수저를 찾아준 사실을 바로 직전에 이야기함으로써 공지니의 점이 사기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이 김동리가 근대 합리주의를 부정하기 시작한 원초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것,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김동리는 두 소녀의 죽음을 통해 절실히 깨달았고, 공지니의 신비로운 행위를 통해서도 실감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그는 삶의 운명적인 면과 그 운명을 타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세계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미신이라고 매도하는 공지니 점, 무당의 굿, 바위나 나무에 빌어 소원을 성취한 전래의 범 신적 행위 일체를 이유 있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실제로 믿으려 했다는데 김동리 삶의 원점이 있다. 남들이 다 미신으로 치부하는 그것들을 믿을 뿐만 아니라 소설을 통해 보여준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 근대주의의 합리성의 우상을 비웃음이 아니겠는가.      

과학을 배우기 전에 먼저 미신을 배워버린 김동리는 근대 교육을 통해서도 과학적 두뇌를 갖지 못했다. 그는 현상에 대해서 과학적 태도로 보다는 신앙, 종교, 철학적으로 바라보려 했으며, 미신 그 자체를 비 과학이라고 매도하지도 않았다. 김동리는 오히려 이를 근대 과학의 한계로 보았다. 물론 그가 과학적 지식이 부족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현상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신앙적 진리가 앞서는가, 과학적 진리가 앞서는가에 따라 그가 취하는 행동이나 판단은 같지 않다. 이때 김동리가 취한 태도는 다분히 과학적 진리이기 보다는 철학적 진리 쪽이었다. 신앙적, 종교적, 철학적 진리는 주관적 진리에 더 가깝다. 김동리가 객관적, 합리적, 과학적 진리보다는 주관적 진리를 믿게 된 것도 알고 보면 인간의 운명을 깨닫고 나서부터이다. 김동리에게 있어서 두 소녀의 죽음은 그들의 운명인 동시에 두 소녀의 죽음 자체는 극복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인간의 운명, 그것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그 운명을 타개해야 한다는 믿음, 그것이 곧 그가 말하는 삶의 구경적 탐구를 문학하는 이유로 삼는 까닭이 되는 것이다. 주어진 운명을 알고 그 운명을 최대한으로 실현하는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일, 그것은 작가가 해야 할 최대의 임무라는 것이 김동리의 생각이었다. 죽음은 어쩌지 못하는 인간의 운명이다. 하지만 죽음이 있기에 삶이 그만큼 충실해질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이 운명이니까 죽음 앞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극복하는 길은, 아니 영원히 사는 길은 그가 얼마만큼 이 생에 즉 운명에 충실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 김동리의 판단이었다. 그러니까 구경적 삶은 바로 운명인 죽음을 극복하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김동리가 사랑하던 소녀 선이와 남순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이야기가 문학이 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김동리는 소년시절 겪은 사랑하던 두 소녀의 죽음으로부터는 문학과 운명을 생각하게 되었고, 자기 맏형으로부터는 철학하기를 배웠으며, 어머니로부터는 기독교를 알게 되었다.

김동리는 스스로가 “영혼까지 철저히 어머니를 닮은 것” 같다고 했고, ꡔ사반의 십자가ꡕ를 쓰게 된 것도 모친의 영향이 컸다고 했듯이 모친 허씨는 김동리에게 현실과 영혼(교회)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생각하게 한 여인이었다.     


어머니는 내 나이 일곱 살적부터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해 절대 복종, 절대 무저항밖에 모르던 어머니로선 처음이자 마지막인 일대 저항이자 반격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음주와 주정에 대한 항거요, 보복이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일생일대의 큰 변혁, 유교에서 기독교로의 전향이랄까 개종이랄까, 어머니는 큰방의 천정 구석에 농신(農神)을 모셔둔, 윗대부터 내려오는 신주단지를 내리어 뜰 밖에 내어다 박살을 내버린 뒤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9)               


허씨는 이같이 남다른 과격한 면이 있었다. 이로부터 김동리와 그의 누이는 어머니를 따라서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초 중 고등학교를 모두 미션스쿨을 다니게 되었다.

두 소녀의 죽음에서 김동리는 운명과 저승을 깨달았듯이 김동리는 기독교를 통해 문화와 과학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김동리의 마음은 기독교의 세계보다는 무속과 토속적인 신앙의 세계에 더 끌렸다. 하지만 김동리의 이 같은 신앙 세계에 대한 공통 체험은 그의 문학의 소재를 풍부하게 했다.

김동리는 처음에는 민속신앙의 세계에 심취하여 이를 소재로 한 작품을 씀으로써 한국 근대문학의 새 영역을 개척했고, 1954년 즉 한국전쟁 이후 5년간은 기독교적인 작품 쓰기에 몰두하여 그의 대표작 ꡔ사반의 십자가ꡕ를 비롯하여 ꡔ부활ꡕ, ꡔ목공 요셉ꡕ, ꡔ마리아의 회태(懷胎)ꡕ 등을 썼다. 그러나 김동리의 초기작은 거의 토속신앙의 세계에서 취재한 작품이 많고 비교적 모두 성공작일 뿐만 아니라 그의 문학세계의 원천인 동시에 문학사적으로 획을 긋는 작품들이다. 그중 대표적인 작품은 ꡔ산화ꡕ, ꡔ무녀도ꡕ, ꡔ바위ꡕ, ꡔ황토기ꡕ, ꡔ산제ꡕ 등이다. 이같이 김동리 문학이 민속 신앙적 문학과 기독교적 문학으로 양립하게 된 원초성은 사랑하던 소녀 선이의 죽음과 자기가 꼭 닮은 어머니 허씨의 기독교로의 개종에 그 원인이 있다. 하지만 김동리 문학의 본영은 역시 민속신앙과 불교의 세계가 혼융된 한국인의 토속적 신앙과 그 정신적 삶의 세계를 보여준 문학이었다.

김동리는 한때 불교 특히 참선을 통해 자신을 구제해 보려고도 했다. 1938년경 김동리는 맏형 범부와 함께 다솔사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만해(卍海) 한용운이 이곳에 왔다. 범부와 만해는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만해 선생이 내 백씨를 보고,

「범부, 중국 고승전에서는 소신공양이니 분신공양이니 하는 기록이 가끔 나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아…」

했다. 내 백씨는 천천히 입을 열며,

「글쎄요, 형님이 못보셨다면야…」

하고 자기도 기억이 없노라는 것이다. 내가 참견을 했다.

「소신공양이 뭡니까?」

나에게 있어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10)  

김동리는 소신공양(燒身供養)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는 “아래턱이 달달달 떨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때 김동리는 벌겋게 단 향로를 머리에 쓰고, 가부좌 자세로 앉아 소신공양을 하는 수좌를 인간 정신의 극치로 생각했다. 그 인간에 짝할 다른 인간을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 불교 정신의 구경적 삶을 김동리는 소신공양에서 보았던 것이다. 이로부터 20년이 지나서야 김동리는 비로소 만적(萬寂) 소신공양 수좌의 구경적 삶의 이야기를 소설로 쓸 수 있었다. 그 작품이 바로 후기소설을 대표하는 ꡔ등신불ꡕ이다. 이 작품은 김동리의 기독교 체험의 극치로 나타난 ꡔ사반의 십자가ꡕ와 같은 시점에 발표되었다. 이같이 김동리에게 있어서 불교와 기독교 및 토속신앙 즉 종교적 세계는 그 문학의 본체이자 정령(精靈)이기도 했다. 따라서 ꡔ무녀도ꡕ, ꡔ등신불ꡕ, ꡔ사반의 십자가ꡕ가 김동리의 정신세계를 대표하는 동시에 김동리 문학을 대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동리는 대학을 다닌 사실이 없다. 더욱 김동리는 현해탄을 건너 본 일도 없다. 김동리는 공립학교에서 식민지 교육을 받은 일도 없다. 김동리의 근대 문명 체험은 오직 미션스쿨에서 받은 교육이 전부이다. 김동리는 경주 제일교회에서 운영하는 계남소학교 6년, 대구 계성중학 2년, 서울 경신중학을 3학년에 편입해 1년을 다니다 학비가 없어 중퇴하였다. 이것이 김동리 학력의 전부이다.

김동리가 비록 미션스쿨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인격도야는 유교와 불교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용운(韓龍雲)과 조지훈(趙芝薰)의 경우와 같이 김동리도 한문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17세 학교를 중퇴한 이후는 줄곧 불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문학 수업을 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문과 불교에 조예가 깊었던 점 말고도 일본 교육을 안 받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은 다같이 일제말기에 절필하고, 친일적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서 대학을 중퇴하였거나, 현해탄을 왕래했던 이들이 거의 친일적 행동을 하지 않은 이가 없었음을 볼 때 이들의 전통적 교육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더욱 김동리에게 있어서는 기독교 교육은 반식민지 교육적 성격이 짙었고, 항일운동자로 지목받는 범부의 영향 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친일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제말기 김동리의 생활 후원자는 다솔사 주지 최범술(崔凡述)과 맏형 김범부였다. 다솔사는 김동리 영혼의 안식처이자 그 문학의 산실이었다. 실로 김동리의 초기소설은 최범술과 김범부의 슬하에서 씌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이들의 도움은 컸다. 김동리가 본격적으로 문학 공부를 시작한 것은 경신중학교를 중퇴한 이후 17세부터이다. 이때 김범부는 부산에 살고 있었다. 김동리는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내려가 형과 동거하였다.


형님 댁 골방에는 철학 서적이 한 4, 5백 권 쌓여 있었고, 문학 책도 더러 눈에 띄었기 때문에 나는 그 벽장 속같이 어두운 골방에 틀어박혀서 ꡔ플라톤ꡕ, ꡔ괴테ꡕ 따위를 뒤적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책 읽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처음 보는 항구의 풍경은 쉴새없이 내 마음을 유혹했다. 무슨 신비한 이야기가 엮어지고 있는 듯한 으슥한 위치의 혹은 화려한 간판의 극장들, 이런 것들은 나를 이역의 미아로 만들었다. 이때까지 내가 살아온 경주나 대구나 서울에 비해 부산은 여간 활동적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11)


김동리는 형 김범부에게 ꡔ은하ꡕ라는 시 한편을 보여주었다. 김동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시 한편을 썼다가 “돛대 없이 배탄 백의인”이란 시구 때문에 경찰에 끌려가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고, 선이와 남순의 죽음을 소재로 소설과 시를 써 보기도 했지만 문학을 하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쓰고 싶어서 썼을 뿐이었다. 하지만 ꡔ은하ꡕ의 경우는 좀 다르다. 부산에 내려오기 전 김동리는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12)을 통해 문학적 분위기를 만끽해보기도 했던 터라 과연 자기가 문학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를 생활의 후원자이자 집안의 정신적 지주인 자기 형에게 자신의 문학에 대한 적성 여부를 테스트 받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형처럼 철학을 할 것인가 아니면 문학을 할 것인가를 객관적으로 심판 받고자 했던 것이다. ꡔ은하ꡕ를 읽고 난 김범부는 “물에서 남녀가 생겨나던 옛날, 개구리 알은 은하처럼 둥둥 흘러갔거니”라는 제2연을 지적하면서 “철학보다 문학 쪽이대이”13) 라고 했을 떼 김동리는 작가가 될 결심을 분명히 했다.

까닭 모를 고독과 설움에 싸여 산과 들과 내를 헤매며, 경주․대구․서울․부산 거리를 방황하던 김동리는 이제 고독과 설움을 이기고, 끝없는 방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이 다름 아닌 문학의 길이었다. 작가가 될 것을 결심한 김동리는 김범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선학원에 기거하게 되면서 불교 관계의 문화, 정치, 경제 등 각 방면의 인사들을 알게 되었다. 김동리는 선학원에서 젊은 시인 지망생 서정주을 처음 만났다. 이들은 의기가 투합해 서울 거리를 헤맸다. 이때부터 김동리의 변신이 시작되었다. 문인들과의 교류와 작가로서의 등용문 뚫기가 그것이었다. 거처할 곳이 없어 떠돌아다니던 김동리는 신춘문예 현상 모집에 당선되면 돈이 생긴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다다미방에서 소설 두 편, 희곡 한 편, 시조 두 편, 민요 한 편, 동요 한 편, 대충 열 편 가량을 한 달 조금 못되는 동안에 써서 각 신문에 투고를 했다. 그렇게 많이 써서 보낸 것은 그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요행히 당선이 되었으면 해서가 아니고, 보내는 대로 몽땅 당선이 될 터이니까 그만큼 상금 수입이 많아질 것이라고 내 나름대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신년호(1934년) 신문(조선일보―필자)을 보니 시 ꡔ백로ꡕ 한 편이 입선되었고, 그 밖의 것은 모두 낙방이었다.14)

    

이렇게 시작된 김동리의 작가되기는 1936년 그의 나이 24세 때 일단 마무리 되었다. 김동리는 1934년 「조선일보」에 시 ꡔ백로ꡕ가 입선되었고, 1935년 「조선중앙일보」에 단편소설 ꡔ화랑의 후예ꡕ가 당선되었으며, 1936년 「동아일보」에 ꡔ산화ꡕ가 당선됨으로써 당당히 작가로 데뷔하였다. 1935년 1월 김동리는 ꡔ화랑의 후예ꡕ 상금을 받아 가지고 다솔사로 내려갔다. 자기 맏형 범부가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다솔사는 해인사 말사로서 경남 사천군에 있는 고찰(古刹)이다. 김동리는 다솔사가 마음에 들었다. 이해 겨울을 다솔사에서 보냈다. 물론 그 후에도 틈만 나면 김동리는 다솔사를 찾아 갔고, 일제말기에는 내내 그 곳에서 살았다.


내가 묵는 절간 방문 앞에는 크고 작은 파초가 여러 포기 다른 나무와 꽃들을 가리듯 하고 서 있었다. 넓은 툇마루에 나앉아 갠 하늘과 파초 잎만 바라보고 있노라면 뻐꾸기 소리, 꾀꼬리 소리, 딱따구리 소리, 북소리, 경쇠 소리들마저 귀로 들려온다기보다 파초 잎이 묻혀다 눈에 전해주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곤 했다.15)  

       

다솔사는 김동리의 제2의 고향이었다. 경주 성건리 고향에 있는 것 모두가 그대로 다솔사에 있었다. 오히려 그보다 더 아름답고 숭고한 것들이 있었다. 그가 부헝듬 늪에서 보았던 원시의 생명들도 그대이었고, 개구리 울음도 들려왔으며, 가랑잎에 파묻혀 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숲도, 늘 지나치던 초가집도, 들릴까 말까 늘 망설이던 주막도, 거기에 한 술 더 떠 노량진 앞바다까지 내려다보이는 소나무 숲까지 있었다. 또한 맏형까지 같이 있었으니 영락없이 경주 고향집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김동리는 하루 종일 산사 주위 경관을 맴돌며 한 겨울을 곱다시 다솔사에서 보내고 봄이 되자 해인사로 자릴 옮기었다.

김동리는 왜 해인사로 갔는가. 참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김범부도 해인사로 왔다. 이들 형제는 이렇게 의기가 투합했다. 그러나 김동리는 참선을 할 수가 없었다. 남들처럼 가부좌가 안 됐던 것이다. 여기서 김동리는 “무언가 운명적인 것을 느끼었다.”16).고 한다. 이때부터 김동리는 우울한 얼굴로 해인사 일대의 모든 암자를 찾아다니며 무언가 얻고자 했으나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당시 김동리는 “니힐리즘의 독소와 죽어가는 민족의 설움이 고독과 엉키어 지탱할 수 없는 자기를 참선을 통해 구해보고자 했지만”17) 참선마저 할 수 없게 되자 허탈감에 빠져 경주 고향으로 돌아왔다.         

김동리는 해방을 사천군에서 맞았다. 김동리는 일제말기 서울․경주․대구․다솔사를 떠돌면서 4, 5년의 세월을 보냈다. 김동리는 1935년 문단 데뷔 이래 1941년 일제말기 절필하기까지 5, 6년간 단편소설 21편을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세대논쟁을 벌여 문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김동리는 다솔사에서 경영하는 광명학원 교사가 되자 결혼도 했다. 1941년 일제에 의해 광명학원은 강제 폐쇄되었고, 김범부는 체포되어 경찰에 구속되었다. 조선어로 소설을 쓸 수 없게 되자 김동리는 마침내 절필을 선언했다. 이로부터 3, 4년 동안 김동리는 급박해지는 생활환경(징용)을 피하기 위해 사천 양곡배급소에서 일했다.

김동리의 종교적 세계인식의 형성 과정을 그의 자서전 ꡔ나를 찾아서ꡕ를 통해 살펴보았다. 김동리의 유년기와 일제말기 청년기의 생활 체험을 통해 볼 때 그의 정신세계를 한마디로 전통 지향적 보수주의18)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남다른 종교 체험 즉 불교․샤머니즘․기독교․원시 신앙에 의한 복합 종교 체험을 통해 볼 때 그의 정신세계를 종교적 세계인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김동리의 전통 지향적 정신세계는 궁극적으로 불교와 샤머니즘 및 동양 정신의 원형인 도교이었다. 김동리는 극악한 일제말기의 생존 상황과 근대주의 즉 모더니티의 도전에 그 자신의 종교적 세계인식으로 맞섰던 것이다. 그의 종교적 대응 방법은 민족 구원의 한 방편이었다. 이때만큼 김동리의 종교적 대응과 구원 정신이 빛날 때가 없었다. 그만큼 김동리는 일제말기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가 말하는 구경적 삶을 실현했고, 그 삶을 형상화하였다. 그의 대표작 <무녀도>․<사반의 십자가>․<등신불>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김동리의 일제말기 삶과 문학이 문제시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김동리는 작가로서 문학사적 임무를 다 했던 것이다. 

 

 

2. 반근대주의와 그 문학

 

1900년 이래 한국문학은 일방적으로 모더니티 지향성을 보여 왔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 김동리에 와서 비로소 한국문학의 일방적인 모더니티 지향성은 끝이 나게 되었다. 이광수의 ꡔ무정ꡕ이 한국의 근대에의 출발을 완성시킨 최초의 작품이라면 김동리의 ꡔ황토기ꡕ는 한국의 근대에의 종언(終焉)을 완성시킨 최후의 작품이기 때문이다.1)   

1935년 카프가 해산되면서 문학사적으로 전형기가 형성되자 일방적인 모더니티 지향성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전통 지향적 보수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문학은 모더니티 지향성과 전통 지향성이 공존하는 동등한 이중구조를 갖게 되어 변증법적 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전통 지향적 보수주의의 대표 주자는 김동리었다. 특히 소설 장르에 한정해서 보면 김동리의 출현이 전통 지향적 보수주의 문학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려준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김동리는 이른바 모더니티 지향성의 문인들에 맞서 세대 논쟁을 주도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전통 지향적 보수주의 문학의 주역으로 부상하기에 이른 것이다.2) 김동리와 그 문학의 전통 지향성은 일제와 근대주의의 도전에 대한 응전의 양상을 띠었다. 김동리의 전통 지향성이 문학사적 의미를 띠는 것은 김동리에 의해서 한국문학의 일방적인 모더니티 지향성이 종말을 고했기 때문이다.

모더니티(근대지향)가 서구적 동인 즉 1930년대 중반 스페인 인민전선의 붕괴, 파시즘의 창궐, 나치스에 의한 반달리즘(vandalism), 중․일 전쟁(1937) 이후의 천황제 군국주의 등의 사태에 직면하자 완전히 파탄되기에 이르는 한편 이 같은 외부 상황에 덧붙여 국내적 동인으로서 김동리의 전통 지향성과 동양 문화사론, 「문장」지가 보여준 고전정신 등의 영향을 입어 한국문학의 일방적인 모더니티 지향성은 상실하게 되었다.3) 여기서 보다 직접적인 요인은 일제의 정치적 탄압 즉 신체제 구축을 위해 모더니티 지향성을 억압하며 일어난 카프의 해체가 결국 한국문학의 일방적인 모더니티 지향성을 가로막는 근본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 같은 문단 및 정치적 상황 하에서 출발한 김동리는 반 카프문학․반 모더니티 문학․반 국민문학을 선언하게 되었다. 김동리 문학은 크게 보아 3단계 과정을 거치며 성장하여 가지만 원칙적인 면에서 보면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 제1기는 김동리 문학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인 일제말기 즉 초기소설 시대이고, 제2기는 해방공간으로서 좌우익의 이데올로기 투쟁기에 본격문학으로서의 민족문학 운동을 벌이던 시기이며, 제3기는 남북전쟁 이후 6, 70년대 ꡔ사반의 십자가ꡕ로 대표되는 시기이다. 김동리 문학을 가리켜 한국적․허무적․신비적 문학, 샤머니즘적 운명의식과 허무의식, 신당의 문학, 원시의 문학, 신비주의적 샤머니즘 문학, 니힐리즘 문학, 유니크unique한 순수문학, 현실 도피의 문학 등으로 불렀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김동리 문학이 새삼 재평가 되면서 각광을 받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근대문학은 김동리 문학으로부터 시작한다느니, 근대 초극의 문학이니, 반 근대문학이니, 전통주의 문학이니 하여 근대주의 극복으로서의 김동리 문학의 가치와 위상을 재정립하려는 의도가 그것이다.4)    

일제말기 한국문학은 전형기적 특성과 신체제적 특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이로부터 한국문학은 민족 주체의 신세대 문학과 반민족 문학인 국민문학으로 나눠지게 되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일방적인 모더니티 지향성의 지양성(止揚性)이었다. 김동리는 카프문학과 함께 국민문학을 거부하였다. 김동리의 반 카프문학은 당대 모더니즘 문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모더니즘 문학은 탈 이데올로기 문학의 길을 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소설이 순수 예술성을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박태원(朴泰遠)과 이상(李箱)의 모더니즘 소설에 의해 객관적 묘사와 인간 내면 탐구가 이루어졌다. 모더니즘 작가들이 리얼리즘 문학에 대해 반동적이기는 했어도 이들은 어디까지나 서구 근대 문학 사상의 범위 안에 있었다. 김동리의 반 카프문학 운동은 근대주의에 대한 회의와 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근대사상의 근본적인 요소인 과학주의, 합리주의, 실증주의, 유물주의 등의 개념이나 관념만을 가지고서는 인류의 운명은 해결되지도 않으며, 진실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진리는 또한 인식되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서 씨(김동리―필자)에 의하여 우리의 근대사상은 완전히 부정되고 마라버린 것이다.5) 


김동리의 반 국민문학의 입장은 국민문학의 반민족적 성격에서 비롯되었다. 국민문학은 한마디로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일본 중심 사상을 코치하는 신체제 국책 문학이었다. 모더니즘 문학이 서구 근대 문명을 지향했다면 신세대 문학은 한국 전통 정신을 지향하였다. 이같은 상반된 정신 지향성은 자연히 상극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전형기를 통해 한국문학은 변증법적 변신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대의 모더니티 지향성과 전통 지향성이 대응 관계를 이루고 있을 때 신체제 지향성 문학이 정치적 배경을 엎고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민족 주체의 신세대 문학은 탈종속적 문학․탈 서구적 문학․탈 카프문학․탈 국민문학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세대 작가의 등장으로 한국문학은 순수 예술 지향적 문학으로 자리 잡아 가게 되었다. 이로부터 한국문학의 주체는 신세대 작가들이 되었다. 신세대 문학은 해방 공간에서 민족문학의 주체로 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한국문학을 주도하였다. 신세대를 대표하는 김동리는 민족정신을 민족 단위의 휴머니즘으로 인식하였다. 그가 주창하는 순수문학은 민족정신이 기본이 되는 민족문학이었다. 그가 말하는 민족문학은 인간성 옹호와 인간성 확장을 근간으로 하는 휴머니즘 문학이기도 했다. 


민족정신이란 본질적으로 민족 단위의 휴머니즘이다. 따라서 휴머니즘을 그 기본 내용으로 하는 순수문학과 민족정신이 기본 되는 민족문학은 별개의 것일 수 없다. 현대의 우상 즉 유물사관의 기계적 공식주의를 타파하고 진실로 민족문학을 수립해야 하는 이유도 이에 있었다. 새로운 인간 정신의 창조에 의한 순수문학의 세계사적 사명을 수행함이 오직 순수문학의 진의를 실천하는 정당한 방법이다. 순수문학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문학정신의 본령정계(本領正系)의 문학을 말한다. 문학정신의 본령은 인간성 옹호에 있으며, 인간성 옹호가 요청되는 것은 개성 향유를 전제한 인간성 창조 의식이 신장되는 때이니만치 순수문학의 본질은 언제나 휴머니즘이 기조로 되었다.6)


신세대로 대표되는 김동리 문학은 한마디로 제3휴머니즘 지향과 순수예술 지향성을 보였다.   김동리의 민족 문학 사상으로서의 휴머니즘 선언은 카프문학을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김동리는 문학 사상적인 면에서는 휴머니즘을 주창하는 한편 문학 기술적인 면에서는 작가의 장인정신을 강조하였다. 김동리는 창작에 있어서 이데올로기나 문예사조 보다는 개성과 창조를 생명으로 여기었다. 그는 사상가이기 전에 우선 순수 예술가 즉 작가가 이고자 했다. 소설을 쓰는 기술자를 자처한 김동리는 소설의 예술성 확보와 소설기술 혁신에 전념하였다. 김동리는 문학의 주체가 작가일 때만이 개성과 생명을 확보할 수 있고, 작가의 주관적 체험을 통해서만이 리얼리티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신세대 작가들은 가치의 분산과 다양화를 지향하면서도 작가의 전문성 확보에 전념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문학의 전문성은 이데올로기나 지식이 아니라 문학의 예술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술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세대 작가들은 일상적 평범한 언어에서 벗어나 작가 특유의 개성적 문장으로 작품을 쓰고자 했다. 신세대의 언어 문학 예술적 경향은 탈 이데올로기적 입장에서 순수 예술성과 인간성을 옹호하며 성장한 해외문학파7)나 탈 동인지적 성격을 띠면서도 문단의 중심에 있었던 구인회8)의 영향도 없지 않았지만 신세대 작가 특히 김동리의 반 카프문학적 성격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김동리는 소설 언어 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소재의 측면에 있어서도 반 카프문학의 성격을 띠었다. 그는 원시 종교의 세계 즉 반근대적 세계에서 창작의 소재와 정신을 취함으로써 전통 지향적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구인회 작가들이 모더니티 지향성이 짙었던 것과는 달리 신세대 작가들은 전통 지향적 성향이 강했다. 구인회 작가들이 창작 태도에 있어서 객관성을 중요시 했다면 신세대 작가들은 주관성을 오히려 더 중요시 하였다. 소재 또한 구인회 작가들은 모더니티를 상징하는 도시에서 취하였지만 신세대 작가들은 도시 보다는 비도시 즉 반근대적 성격이 짙은 산촌이나 원시 신앙의 세계에서 취하였다. 구인회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작품은 작중인물은 도시 지식인 위주로 되어 있으나 신세대 작품은 반지식인, 반근대적 인물들 즉 무당이나 퇴락한 촌 노들로 되어 있었다. 작품 구성이나 언어 표현 방법에 있어서도 이들은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신세대는 민족문학과 계급문학의 양대 문학 세계에서 제3자적 입장에 놓여 있던 탈 이데올로기의 문학 즉 순수문학 운동으로서의 해외문학과 구인회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지 않았다. 해외문학파나 구인회는 분명히 서구문학의 아류 또는 이식 기능으로 존재했다. 비록 이들이 반 프로문학적이고 반 민족주의적 반 이데올로기적 문학 경향을 띠었다 해도 이들은 분명히 모더니티 지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신세대 작가 특히 김동리는 반 프로문학적, 반 모더니티적, 탈 이데올로기적이었다. 따라서 한국근대소설은 1935년 신세대 문학에 와서야 한국 문학의 일방적인 모더니티 지향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신세대 작가는 계용묵, 김동리, 김영수, 김유정, 김정한, 박노갑, 정비석, 최명익, 최인준, 현덕 등이었다. 하지만 신세대 문학의 속성은 김동리 소설과 비평으로 대표되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지칭하는 신세대 문학의 속성은 김동리 문학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김동리 문학의 지향점은 제3휴머니즘에 있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의 세계를 거부하고 제3휴머니즘의 세계를 이룩하려 했다. 김동리는 물질주의․과학주의․기계주의에 의해 말살되어가는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는 자본주의의 극복이 곧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말처럼 이상 사회의 도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의 한계를 인식 극복하여 신인간주의 즉 제3휴머니즘의 세계로 나가려 했다.

               

제3휴머니즘은 이와 같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결함을 근본적으로 시정하는 일방, 마르크시즘 체계의 획일적 공식적 메커니즘을 지양하는 데서 새로운 고차원의 제3세계관을 확립하려는 데에 그 지향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저주받는 묵은 체제와 타기할 만한 기계론자들 사이에서 회의와 번민 속에 악전고투하고 있다는 이 사실이 곧 한 개 새로운 위대한 세계관을 형성하려는 진통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귀하고 신성한 활력이라 할 것이다.9)


김동리가 말하는 제3휴머니즘은 서구에서 일어난 휴머니즘 운동의 제3단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김동리의 제3휴머니즘 운동은 서구 휴머니즘 운동의 계승으로서가 아니라 서양 위주의 인간성 탐구에서 벗어나 동서양 합일체로서의 인간 탐구를 의미한다. 서양에 있어서의 제1기 휴머니즘 운동은 신화 및 궤변과 계율에 대해 항거하여 본원적 인간성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제2기 휴머니즘 운동은 신에 의해 말살되어 가는 인간성을 되찾아 이성적 인간의 회복과 문예부흥 정신을 이룩했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은 고대의 신화나 중세의 신처럼 현대의 우상이 되었다. 김동리는 특히 과학주의 기계관의 결정체인 유물사관을 과학의 우상화 현상으로 간주하였다. 이 같은 과학의 우상화 현상을 타개하고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운동이 말하자면 김동리의 제3휴머니즘이었다. 이 운동의 근본 취지는 동서 정신의 창조적 지향에서 새로운 정신적 원천을 찾아 인간성을 말살하는 유물사관을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적 기구의 결함과 유물 변증법적 세계관의 획일주의적 공식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보다 더 고차원적인 제3세계관을 지향하려는 것이 제3휴머니즘 운동의 근본 취지였다.10)       

유물사관과 자본주의는 다 근대주의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제3휴머니즘은 유물사관과 자본주의가 지니고 있는 한계성을 극복하고 제3세계관을 지향하기 때문에 근대를 초극할 수 있다는 신념을 보여주었다. 근대성의 초극과 극복으로서의 제3휴머니즘 운동은 반근대성에서 출발하여 근대의 초극을 지향하였다. 따라서 유물사관이나 자본주의가 지니고 있는 어느 특정 계급의 옹호나, 공식적 기계론적 메커니즘에서 벗어나 인류 구원의 메시지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 운동을 통해 전횡적인 근대성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었고, 모순성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제3휴머니즘 운동의 성과는 크다 할 것이다. 더욱 근대성 극복의 방향이 설정되었다는데 그 의미 또한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주의의 말로에서 도달된 과학만능주의와 물질 지상주의와 기계 문명주의 등은 고대에 있어서의 신화적, 미신적 제신의 우상처럼, 중세에 있어서의 계율화한 전제신의 압제처럼, 또다시 한 개 새로운 근대적 우상이 되어 인간에게서 꿈과 신비와 낭만 그리고 구경적인 욕구를 박탈하게 되었다. 여기서 인간은 이 과학주의, 물질주의, 기계주의를 비판하고 이를 초극하고자 하는 새로운 의욕에 도달하게 된 것이며 이것이 곧 제3휴머니즘이란 표어로써 대표되는 제3세계관에의 지향이라 일컫는 것이다.11)         


김동리는 제3휴머니즘 운동을 통해 인간의 “꿈, 신비, 낭만, 구경적 욕구”를 되찾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 붕괴 후에 오는 신세계, 즉 공산주의에 의해 건설되는 유토피아의 세계가 인간이 지향하는 최고의 이상 사회라는 주장에 대해 김동리는 그것이 망상임을 역설하였다. 마르크시즘 세계관이나 자본주의 세계관은 다 같은 근대주의 세계관이기 때문에 어느 것도 결국 근대주의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 김동리의 논리였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가 붕괴한 후에는 필연적으로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한다는 저들의 믿음 즉 소위 사회과학적 변증법의 공식화는 망신(妄信)이라는 것이다.12) 하기 때문에 김동리는 자본주의적 세계관이나 마르크스적 세계관에 공감할 수 없었다. 하기 때문에 김동리에게는 “인간의 꿈과 신비와 낭만과 구경적 삶”을 박탈하는 근대주의에 대한 거부가 “인간의 꿈과 신비와 낭만과 구경적 삶”을 실현하는 첫 단계가 되었다. 그 모색의 도정이 말하자면 김동리의 문학적 인생이다. 철학․종교․문학을 통한 그의 탐색 과정은 실로 남다른 정신적 고통의 역정이었다.

김동리는 어떻게(how)의 문제보다는 무엇(what)의 문제에 집착했다. 어떻게 사느냐 보다 왜 사느냐를 먼저 물었고 그 나름의 결론을 낸 다음 그는 어떻게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젊은 날의 방황과 초조는 이 같은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그 해답을 그는 불교와 샤머니즘 및 도교 신선 사상에서 구하고자 했다. 그는 해인사와 다솔사를 수시로 찾아 갔다. 그 결과 김동리는 몇 가지 명제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중에 하나의 명제가 죽음과 운명이었고, 또 다른 명제가 문학하기란 무엇인가였다. 죽음과 운명의 명제서 얻어낸 것이 구경적 삶이었고, 문학에서 얻어낸 것이 구경적 삶의 형식이었다. 운명의 형식화가 말하자면 김동리가 생각해낸 문학이었다. 구경적 삶이 다름 아닌 죽음에 이르는 운명의 형식이라면 문학이야말로 구경적 삶의 탐구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 김동리가 도달한 무엇에 대한 결론이었다.

김동리의 그 다음 문제는 문학이냐 종교이냐의 문제이었다. 김동리가 발견한 문학과 종교의 차이점은 신앙과 창조의 문제였다. 종교는 “찬송하고 기도하고 귀의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문학은 “사색하고 상상하고 창조(표현)한다”는 점이다. 종교는 이미 발견되고 체현된 신에 대하여 복종하고 신앙하고 귀의하는 것으로 구원 받고자 하지만, 문학에 있어서는 각자가 자기 자신 속에 혹은 자기 자신을 통하여 영원히 새로운 신을 찾고 구하려 하기 때문에 자기 운명의 자각과 극복을 구경적 삶을 통해 실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다면 김동리가 선택할 수 있는 쪽은 과연 어느 쪽일 수 있을까? 단연히 문학 쪽일 수밖에 없다.

김동리는 종교적으로 “복종하고 신앙하고 귀의하기”는 이미 체험한 터이다. 그의 기독교 체험과 불교 체험이 그것이다. 거기서 김동리는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하지도 못했다. 김동리가 구경적 삶의 체현체로 문학을 선택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구경적 삶의 형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를 방해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서구 근대주의적 세계관이었다. 김동리가 근대성을 극복코자 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었다.  

김동리는 누가 문학을 하는가? 문학의 주체는 누구인가의 문제에 봉착했다. 작가가 문학의 주인인가? 사회가 문학의 주인인가? 무엇이 문학의 주체인가? 김동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작품을 쓸 수 없었다. 이 문제는 마르크스주의 문학관과 직접 관련되어 있었다. 여기서는 작가는 한낱 사회의 반영자, 대변자 기능밖에 갖지 못했기 때문에 문학 주체는 오히려 당과 사회였다. 김동리에게는 문학 주체의 탈환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주체자로서 주체의 세계를 보여주려면 먼저 문학 주체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김동리는 문학 주체는 어디까지나 작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김동리는 한 시대와 사회를 초월한 인간의 보편적이요, 근본적인 문제 다시 말하면 자연과 인생의 일반적 운명에 대한 독자적 해석이나 비평에서만 문학은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따라서 김동리는 그 밖의 것 즉 문학의 시대적 사회적 의의나 공리성 여부의 문제는 주체의 환경일 뿐이라고 생각했다.13)

김동리의 그 다음 명제는 문학하는 것이란 무엇일까? 이었다. 이 물음에 대해 김동리는 “어떤 구경적인 생의 형식이 아니어서는 아니 된다.”고 대답한다. 구경적인 생의 형식이란 무엇인가? 문학하는 것은 먼저 사는 것이 아니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문학하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김동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들에게 부여된 우리의 공통된 운명을 발견하고 이것의 전개에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수행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천지의 파편에 그칠 따름이요, 우리가 천지의 분신임을 체험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이 체험을 갖지 않는 한 우리의 생은 천지에 동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우리의 공통된 운명을 발견하고 이것의 타개에 노력하는 것, 이것이 곧 구경적 삶이라 부르며 또 문학하는 것이라 이르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것만이 우리의 삶을 구경적으로 완수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14)


김동리에 의해면 “우리의 공통된 운명을 발견하고, 그것의 타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구경적 삶이요, 구경적 삶의 형식이 문학이기 때문에 문학을 통해서만 구경적 삶이 완수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공통된 운명”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나아가 그 공통된 운명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의 공통된 운명의 타개”에 대한 모색(摸索)과 고통의 실체가 다름 아닌 김동리의 문학이다.

김동리 일제말기 소설은 크게 보아 두 가지 경향을 띠고 있다. 첫째 경향은 반 모더니티로서의 전통 지향성 작품이며, 둘째 경향은 당대 민족 현실 확인 양상으로서의 근대성 작품이다. 하지만 이 같은 두 경향은 원천적으로 볼 때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 그 동일성은 반 모더니티성이다. 김동리는 당대 민족 현실을 그 자신의 종교적 세계인식을 통해 무화시키고자 했다. 김동리에게는 식민지 현실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적이었다. 한 가지는 서구 근대주의로 말미암아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의 문제이었으며, 다른 한 가지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민족이 말살되어 가는 현상이었다. 따라서 김동리는 근대주의와 일제의 식민 정책에 어떤 방법으로라도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동리는 자신의 제3휴머니즘의 세계관을 통해 서구 근대주의에 대응코자 했으며, 일제의 신체제화 현상을 종교적 세계인식을 통해 극복코자 하였다. 김동리는 일제말기 민족적 저항의 무력화(無力化)를 자각하고 식민지 현실 자체를 무화(無化)시키려는 방법을 모색케 되었다. 현실의 무화 방법을 김동리는 불교와 샤머니즘의 세계에서 발견했다. 김동리에게는 유교와 기독교는 생활 체험으로서 현실적인 의미밖에 없었지만 불교나 샤머니즘은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김동리는 유교나 기독교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문명적 세계인식을 갖게 되었지만 동양철학 그중에서도 주역(周易)이나 노장(老壯) 철학을 통해 정신적 근원적 문제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불교와 샤머니즘의 신앙 정신세계에 대한 통찰을 통해 종교를 통한  현실 대응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따라서 김동리의 정신세계의 원천은 주역, 노장 자연 사상, 불교, 샤머니즘 등의 종교 철학의 세계이었다. 이 같은 세계인식의 형식화가 말하자면 김동리의 소설이었다.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 즉 삶과 죽음의 운명적 문제를 포함하여 우주와 인간의 관계성을 밝혀 보려는 김동리의 종교 철학적 욕구는 주역의 원리, 노장의 무위(無爲) 사상, 불교의 공(空)과 무(無)의 사상, 샤머니즘의 생사일여(生死一如) 정신 세계을 통해서 실마리가 풀려가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운명의 인식과 운명의 극복 양상을 김동리는 불교와 샤머니즘의 세계인식과 형식을 통해 깨달았던 것이다. 현상에 대한 인식과 극복의 방법은 자아의 세계인식과 무관할 수 없었다. 김동리는 자신의 직관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도 식민지 현실의 고통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 고통의 실체가 그의 초기소설 제1계열 즉 ꡔ화랑의 후예ꡕ 계통의 작품들이며, 확인된 고통의 현상 세계 극복의 실체가 그의 초기소설 제2계열 즉 <무녀도> 계통의 작품이다. 김동리의 초기소설은 불교적 세계인식과 무속적 신앙의식을 통하여 식민지 현실을 무화시키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김동리 초기소설에 나타나는 식민지 민족 현실과 그 대응 양상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그 실상을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출처 : [직접 서술] 블로그 집필 - suri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