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나의 침실로 / 이상화

맑은물56 2009. 2. 23. 16:55

나의 침실로 / 이상화


        http://cafe.daum.net/niegroup 나의 침실로 / 이상화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 가련도다 아,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水蜜桃)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도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두운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____뭇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욱____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마음의 촛불을 봐라. 양털 같은 바람결에도 질식이 되어, 얄푸른 연기로 꺼지려는 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 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곳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는지____ 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寺院)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이도 없으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___ 내 몸에 파란 피____ 가슴의 샘이, 말라 버리듯, 마음과 목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_____ 내 침실이 부활의 동굴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두운 밤 물결도 잦아 지려는 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이상화(李相和, 1901.4.5~1943.4.25)

    시인
    본관 : 경주(慶州)
    호 : 무량(無量), 상화(尙火), 백아(白啞)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대구
    주요작품 : 시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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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화(李相和) 는 시인.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무량(無量), 상화(尙火), 백아(白啞). 7세 때 아버지를 잃고 14세 때까지 큰아버지 일우(一雨)의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였다. 18세에 경성중앙학교 3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였다. 1922년 파리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

      친구 백기만의  「상화와 고월」에 의하면, 1917년 대구에서 현진건, 백기만, 이상백과 「거화(炬火)」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시작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21세 때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를 만나 황사용, 나도향, 박영희 등과 함께 「백조(白潮)」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1922년 문예지 「백조(白潮)」 동인, 「말세(末世)의 희탄(阮嘆)」 「단조(單調)」 「가을의 풍경」 「나의 침실로」 「이중(二重)의 사망」 등을 발표하고 이듬해 일본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 및 프랑스문학을 공부하고 1924년 귀국했다.

      또한 김기진 등과 함께 1925년 파스큘라라는 문학연구단체에 가담하였으며, 그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 이종암(義烈團李鐘巖)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개벽」지를 중심으로 시, 소설, 평론 등을 발표하고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에 가담하였으며 1935년부터 2년간 중국을 방랑하고 1937년 조선일보사 경북총국을 맡아 경영하기도 했다.

       교남학교(嶠南學校) 교원으로 영어와 작문을 지도했고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여 독서와 연구에 몰두 「춘향전」 영역, 「국문학사」 「불란서시정석」등의 집필을 기획했으나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43세에 죽었다.

      1943년 3. 21위암으로 타계하였으며, 묘소는 달성군 화원읍 구라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그의 시비는 1948년 동향인 김소운의 발의 및 그가 재직했던 대륜고등학교 동문의 후원으로 달성공원에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졌으며 1995. 8. 15 광복50주년을 맞이하여 항일민족시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두류공원 인물동산에 동상을 건립하여 제막하였다

      작품으로 위에 적은 외에  「비음의 서사」 「마음의 꽃」 「조소(嘲笑)」 등 다수가 있다.

    개벽 開闢 - 3.1운동 이후 천도교(天道敎)를 배경으로 발행된 월간 종합지. 발행연도는 1920~1949년이고

    발행주기 월간이다.

    백조 白潮 - 1922년 l월 9일 창간된 순문학 동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