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한의 생애와 문학suri21 2008.10.08 10: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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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한
김정한 초기소설과 민족적 세계인식
김종균 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1999>
차례
Ⅰ. 역사적 삶과 민족주의
1. 저항적 삶과 민족 현실
2. 반골의식과 항일문학
Ⅱ. 일제말기 소설과 민족적 세계인식
1. 농민의 현실인식과 저항의식
1. <사하촌>―자위(自衛)적 농민
2. <항진기>―생성적 농민
2. 노동자의 현실인식과 윤리의식
1. <옥심이>―훼절과 모성애
2. <기로>―훼절과 노동 현장
3. 죽음의 유형과 저항적 성격
1. <사하촌>―희생적 죽음
2. <추산당과 곁 사람들>―통속적 죽음
3. <그러한 남편>―저항적 죽음
4. 민족 현실과 부랑자 의식
1. <월광한>―자유에의 동경
2. <낙일홍>―조선인 교사의 비애
3. <묵은 자장가>―병마(病魔)의 계절
Ⅲ. 대립구조와 상징성
1. 물과 불의 상징성
2. 동물의 상징성
Ⅳ. 민족적 세계인식의 특성
1. 민족적 현실인식과 저항의 양상
2. 죽음의 유형과 민족 현실
Ⅰ. 역사적 삶과 민족주의
1. 저항적 삶과 민족 현실
김정한(1908-1996, 金廷漢)1)은 1936년 신세대의 일원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하지만 김정한은 신세대 문학의 속성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는 오히려 해체된 카프계열에 속해 있는 듯이 보였다. 그가 사회주의 리얼리즘 창작 방법을 표방한 것은 당대 문단적 경향이나 사회적 상황으로 볼 때 매우 무모한 짓이었다. 하지만 김정한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전형기적 당시 문학사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민족 문학과 카프문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나갔다. 말하자면 김정한에게는 전형기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리얼리즘 세계인식과 민족주의에 대한 믿음뿐이었다. 따라서 그는 지방 작가로서 문단과 상관없이 자신의 문학하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 그의 문학하기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민족적 저항하기였다. 김정한 일제말기 소설이 카프문학과 구별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제말기 김정한 소설을 카프문학이냐? 민족문학이냐고 묻는다면 단연 민족문학 쪽이다. 김정한은 계급주의적 입장과 민족주의적 입장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시하였다. 말하자면 김정한은 신간회와 같은 입장에서 민족적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하기 때문에 임화 같은 카프 쪽에서 보면 카프 작가같이 보였고, 민족문학 쪽에서 보면 항일 작가처럼 보였다. 김정한 소설이 카프소설처럼 보인 또 하나의 이유는 소작인들을 옹호하는 농민소설적 측면 때문이었다. 임화가 신세대 중에서 김정한을 주목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김정한은 소설 쓰기와 함께 행동으로써 식민지 학정(虐政)에 저항하였고, 창작과 행동을 통해 항일정신을 구현코자 하였다. 김정한이 보여준 항일정신은 식민지 사회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삶의 행동 양식이었다. 김정한은 항일정신이 극도로 억압되었을 때 가르치기(교사)와 글쓰기(작가)를 포기하고, 극한투쟁을 벌였다. 김정한은 학창시절은 항일 학생운동으로 일관하였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서는 조선어 지키기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작가가 되어서는 항일 저항문학으로 일관하였다.
김정한은 식민지 학정과 착취에 맞서는 결의를 지속적으로 보였다. 그는 문학을 통해 식민지의 민족 현실을 형상화코자 하였다.2)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날로 혹독해져 김정한 당대에 이르러서는 민족이 존망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같은 역사적 현실을 그는 확인하고 싶었다. 김정한의 민족 현실 확인은 그대로 민족사의 증언이었다.
김정한은 1940년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강화되어 “조선어 교육을 못시키고 친일문학 아니면 못 쓸 바에야 교원도 손을 떼고 문학도 손을 떼어야겠다.”3)면서 1940년 3월 교사직을 사퇴했고, 그해 11월에는 절필했다. 말하자면 김정한이 소설을 쓰거나 교사 노릇을 한 것은 민족문화와 민족어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조선어를 가르치지 못하는 교사 생활이 그에게 무의미했듯이 항일문학을 못하는 글쓰기 또한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김정한의 역사적 민족 항일의식은 그의 삶을 역경으로 몰고 갔다. 하지만 김정한은 항일투쟁만이 민족을 구원하는 길임을 굳게 믿었다.
김정한은 유년 시절 그의 부모가 밀주 단속을 나온 일본 순사와 그 보조원에게 뺨을 맞는 것을 보았다. 이때부터 배태된 그의 항일정신은 중학 시절은 항일 학생운동으로 이어졌고, 초등학교 교사 시절에는 동방요배 비판으로 구체화 되었으며, 작가가 되면서부터는 저항문학으로 구현되었다. 김정한은 특히 일본 순사들에게 시달리는 마을 사람들을 볼 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일본 순사를 원수로 여겼다. 더욱 자기 어머니가 순사 앞에서 벌벌 떨며 매를 맞을 때 김정한은 이(齒)를 갈며 원수 갚을 결심을 했다. 말하자면 김정한의 삶은 이때부터 항일로 치달았다.
일본 사람들과 그들을 따라다니는 조선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미워하게 된 것은 그들이 밀주 단속을 한다고 돌아다닐 때의 일이었다. 어머니나 아버지들의 뺨에 놈들의 손이 철썩하고 닿는 걸 보았을 5때 내 속에는 “조놈의 새끼들!”이란 말이 연신 맴돌았다. “원수를 갚아야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유년시대를 보냈다.4)
일본 순사와 조선인 보조원에게 시달린 농민들은 한결같이 항일 감정을 품게 되었다. 김정한은 자기 부모가 일본 순사에게 뺨을 맞을 때 원수 갚을 결심을 했다. 그 원수 갚음의 길이 곧 김정한의 문학하기의 동기가 되었다.
내가 나이 들어 경찰에 붙들려 가고 심한 고문을 당할 때마다 나는 왜놈들과 그들의 앞잡이들에게 뺨을 얻어맞던 그 시골 사람들… 아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의 일을 기억에 떠올리면서 고통을 견디었다. 내가 농민들을 소재로 하는 소설을 즐겨 쓰게 된 것도 모두 이 유년시절에 겪은 일들이 내 머리 속에 깊이 못 박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5)
김정한이 학생운동을 한 직접적인 동기도 일제시대 교사를 한 이유도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수치와 압박을 이겨내기 위한 항일 투쟁이었다.
김정한의 항일 역정은 학생 시절의 스트라이크, 교사 시절의 조선 교사 권익옹호운동과 조선어 가르치기 운동 그리고 동방요배 비판, 학생들의 차별적 대우 반대 등으로 행동화되었다. 대학 시절은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양산농민투쟁에 참여했으며, 동아일보 지국 경영 시절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해방을 맞을 때까지 김정한은 불령조선인 명단에 올라 저들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4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김정한은 유년 시절 서당 훈장한테 억울하게 매를 맞았다. 이로부터 김정한에게는 불의에 대한 저항감과 반골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마을 서당과 절 학교에 다니던 김정한은 훈장과 스님들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다. 서당 훈장이던 자기의 종조부에 대한 감정이 직접적인 동기였다. 종조부는 친손자보다 자기의 종손자인 김정한이 공부를 더 잘 하자 김정한을 미워하고 마침내 때리기까지 했다. 이 일로 김정한은 서당을 그만두고 절학교를 다니었다. 이로부터 김정한은 인간차별, 스승의 권위를 인정코자 하지 않았다. 김정한은 자기 종조부와 같은 훈장들을 위선자, 이기주의자로 생각하게 되었고, 세속적인 권위에 대한 반감과 인간에 대한 불신감마저 갖게 되었다.
김정한은 유년 시절 친일 불교 체험을 했다. 김정한은 절 학교에서 신학문을 접하였다. 그는 당시 친일적인 절이나 타락한 중들을 보게 되었다. 이들은 식민지 정책자들과 야합하여 법당에 “천황폐하 성수만세(天皇陛下 聖壽萬歲)”, “황군무운장구(皇軍武運長久)” 등의 문구을 써 붙이고 예불 때마다 외었다. 이때의 체험은 김정한이 이후 친일 불교를 매도하고 배척하는 동기가 되었다.
유년시절 김정한의 눈에 비친 불교와 유교의 현상은 매우 피상적이기는 해도 이 같은 현상 파악과 체험은 곧바로 그의 문학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었다. 어린 시절 그가 보고 체험한 불교나 유교는 어디까지나 부정적인 측면이 현상적으로 노정된 부분이었다. 김정한은 불교와 유교의 본질과 전통적 가치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불교와 유교가 타락한 현상을 진실로 안타까워했을 뿐이다. 그만큼 김정한은 한국의 전통 사상 또는 문화로 유교와 불교를 인정했던 것이다. 그의 생활 태도는 불교보다는 유교에 더 가까웠다. 그는 전통 유교 선비였다.
김정한의 이 같은 유년 시절의 체험은 한마디로 현실에 대한 부정과 매도 즉 가치 전도 현상에 대한 불만 그것이었다. 일본 순사들의 야만적 횡포와 마을 사람들의 굴욕적인 수치감을 비롯해 자기 종조부의 옹졸함과 위선자적 자세, 그리고 타락한 중들의 허세와 친일적인 작태 등은 유년 시절 김정한 자신이 감내할 수 없던 부정적 현실이었다. 이로부터 순사, 종조부, 중 등은 일제, 유교, 불교에 대한 부정적 징표로 그의 문학에 나타나게 되었다.
김정한은 낙동강 유역 궁벽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농민들의 궁핍한 생활을 직접 체험하면서 자랐다. 김정한은 민족 교육을 몸소 체험하며 자랐다. 김정한은 당시 민족 항일 학생운동의 진원지라 할만한 중앙고보와 동래고보를 다니었다. 그는 거의 해마다 있던 스트라이크에 참여해 자신의 항일 감정을 마음껏 폭발시켰다.
동래고보하면 전국적으로 알려진 반일전통을 가진 학교였다. 이는 나의 반골정신을 더욱 자라게 한 결과가 되었다. 2학년 때부터 학교를 마칠 때까지 소위 스트라이크가 없는 해가 없었다. 나는 가담 아니한 때가 없었다. 일인들이 시키는 일이라면 사사건건 반대를 했다. 장발에 혼자 촌놈처럼 두루마기를 입고… 스트라이크는 군국주의적인 억압, 멸시… 이런 것들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다.6)
김정한은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민족정신 교육과 항일운동 체험이 몸에 밴 김정한은 일제의 노예 교사가 될 수 없었다. 그는 부임 즉시 반골기질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선어(鮮語)”라는 모욕적인 교과목 명칭을 “조선어”로 변경토록 하였고, 토요일마다 하던 여학생들의 일본인 교장 사택 청소를 중지시켰으며, 조회 때마다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큰 절을 드리는 소위 “동방요배(東方遙拜)”를 비판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조선인 교원 연맹을 결성하려다가 발각되어 경찰에 체포되어 감금되었다.7) 이 일로 김정한은 교사 생활 10개월 만에 불령조선인 교사로 낙인 찍혀 파면되었다.
초등학교 교사직에서 쫓겨난 김정한은 1929년 2월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났다. 김정한은 도일하여 도쿄에서 1년간 일본어를 배워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예과에 입학을 했으나 곧 서민적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예과로 옮겼다. 김정한은 대학 독서회에서 문학 서적보다 사회과학 계통의 서적을 더 많이 읽었다. 당시 그는 문학보다 사회 문제에 더 관심이 있었다. 특히 마르크시즘과 유물사관 세계인식에 혹해 있었다. 왜냐하면 제국주의나 군국주의를 이론적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항일운동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사회과학의 탐구도 오래가지 못했다. 대학을 1년도 못 다니고 중퇴했기 때문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때의 독서 체험은 그 자신의 항일운동이나 노동운동 그리고 문학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를 계기로 조선 각지에서 노동쟁의와 농민 투쟁이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맹렬히 일어났다. 이 같은 노동 농민 투쟁은 학생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전국적으로 번진 농민운동은 양산농민투쟁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김정한의 항일운동은 대학 시절에는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김정한은 여름 방학 중 귀국해 양산농민투쟁에 연루되어 수감된 농민들의 구호운동을 벌이다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로 인해 김정한은 대학을 중퇴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김정한은 사회과학 서적보다는 정치성과 사회성이 농후한 문학 작품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사회 전반에 대한 반항정신은 학생운동과 문학 작품 독서를 통해 그의 머리 속에 깊이 자리잡아 갔다.
김정한은 일제말기 4번 옥중 생활을 했다. 첫 번째는 동래고보 시절 항일 동맹휴학 사건에 연루되어서이고, 두 번째는 대현보통학교 교원 시절에 조선인교사연맹을 결성하려 했기 때문이며, 세 번째는 대학 재학 시절 양산농민투쟁에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네 번째는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경영할 때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이때 그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옥고(獄苦)를 치렀다. 김정한은 옥살이를 하면서 감방장도 해보았고, 치질로 고생도 했으며, 벽을 긁어 옥중시 50여편을 쓰기도 했다. 일제말기의 김정한의 생활은 한마디로 옥중 생활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간수의 눈을 속여가며 곧잘 딱딱한 벽을 긁었고, 겨우 알아볼만한 약간 불그레한 글씨로써 다른 감방에 든 친구에게 연락 쪽지를 쓸 수도 있었고, 때로는 입고 있던 차 입 옷 안쪽에 시조같은 것도 적었다. 줄잡아 5, 60 수는 넘어 적었으리라고 짐작되는데, 내가 옥에서 풀려 나갔을 때는 한 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내는 다시 차입할 옷이 없어 그 옷를 그만 빨아버렸기 때문이다.8)
김정한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40년 3월 밤중에 일본 헌병과 조선인 보조원에게 체포되었다. 곧바로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고문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때리고, 차고, 쑤시고, 물을 먹이고, 굴뚝 시험까지 했다. 김정한은 신문지를 길게 말아서 두 콧구멍에 굴뚝처럼 꽂아 두고, 그 끝에 불을 붙여 연기가 코로 들어가게 되면 눈알이 빠지는 것 같고 코끝이 타게 되면 까물쳐 버리는 고문을 당했다.9)
김정한 문학의 기본 모티브는 유년 시절 그의 부모가 일인 순사에게 뺨 맞음과 서당과 절 학교에서의 자신이 당한 학대(虐待)와 비리(非理)였다. 김정한으로 하여금 일인 순사에 대한 원한은 항일감정을 품게 했고, 종조부의 자신에 대한 학대와 중들의 비리는 사회에 대한 반항심을 갖게 했다. 이로부터 김정한은 일생동안 항일 감정과 반골 정신으로 지니게 되었다. 그의 궁핍한 농촌 생활 체험과 농민투쟁 체험, 민족 교육과 항일 교사 체험은 민족적 저항문학의 바탕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김정한의 문학하기는 한마디로 항일하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2. 반골의식과 저항문학
김정한은 1936년 ꡔ사하촌ꡕ이 조선일보 신춘문예현상에 당선됨으로써 작가로 데뷔했다. 하지만 김정한은 1931년부터 「학지광」, 「신계단」, 「조선시단」, 「문학건설」 등에 시와 소설을 발표 했다. 김정한은 공식 문단 데뷔 이전에는 경향문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문단 데뷔와 동시에 경향문학적 성격보다는 민족문학적 경향을 더 짙게 되었다. 이 같은 변모는 카프의 해체와 전혀 무관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의 세계관이 계급의식으로부터 벗어나 민족과 인간의 문제로 확장되면서 인간성의 확장과 회복이라는 보편적 문학의식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당대 신세대 문학이 새로운 문학의 길을 모색하며 반이데올로기 문학의 기치를 높이 들 때 김정한은 새로운 경향의 문학보다는 전통적 리얼리즘 문학을 고수코자 했다. 김정한은 일제말기 1941년 12월 ꡔ묵은 자장가ꡕ을 끝으로 절필을 선언할 때까지 단편소설 11편을 발표했다.10)
김정한 일제말기 소설에 대해서 많은 평자들이 그 문학의 저항성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높이 평가11) 하여 온 바와 같이 김정한 문학하기는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의 항일 체험이 혁혁한 만큼 그 작품 또한 치열한 작가의식을 충분히 형상화했다고 보기는 어려울지 몰라도12) 당대 시대적 상황을 감안할 때 그의 아이러니적 문학 형상화13)나 상징적 투쟁의식의 표출14)은 십이분 그의 민족적 저항에 값하는 것이다.
김정한의 항일문학하기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문단적 경향이나 문학사적 상황과 무관하게 전개되었지만 그의 관심은 민족성의 회복과 식민지 민족 현실의 극복에 있었다. 김정한이 특히 농민들의 생활을 통해 당대 민족 현실을 조감한 것은 그의 생활 체험이 바탕이 되어 이룩한 성과이기는 해도 식민지 현실로 볼 때 매우 적절한 소재의 선택이었다. 김정한은 지역적 특수성이나 사회적 계층간의 틈을 문학적 보편성으로 승화시켜 보려 했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자아와 세계의 대립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같은 자아와 세계의 대립 양상은 그의 소설 구조를 단순화시킨 험이 없지 않지만 이념 구현에는 효과적이었다.
김정한은 선과 악의 문제를 압박자와 피압박자 간의 문제로 파악했다. 이 문제는 결국 부자와 빈자, 정치와 권력, 경제와 사회, 개인과 집단의 상관성 문제로 확대되었다. 성실한 빈자와 불의한 부자의 관계를 김정한은 정치와 권력의 문제로 인식하였다. 그만큼 김정한은 정치에 관심이 컸다. 김정한은 해방이 되자 곧바로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기도 했다.15) 때문에 김정한은 불의한 정치와 권력에 한사코 저항했다. 이는 그의 윤리였다. 일제시대 그가 지속적으로 보여준 항일운동도 말하자면 압박과 불의에 대한 항거였다. 일제 통치 자체가 불의한 정치와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김정한 소설이 피압박 민족과 민중의 구원문학이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김정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문제를 놓치 않았다.
김정한은 당대 식민지 민족 현실을 아이러니와 상징을 통해 표출하였다. 김정한 소설 체계는 전체적으로 볼 때 대립 구조를 이루고 있다. 대립 구조의 구체적인 상징물은 물과 불이었다. 따라서 김정한 소설의 기초 이미지는 물과 불이다. 일제말기 김정한 소설의 물과 불의 은유적 의미는 매우 크다. 억압 사회에서의 작품 행위는 은유와 상징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당대 체제에 불만이 큰 작가일수록 그러하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물과 불이 균형 상태를 이루지만 비정상적인 사회에서는 물과 불이 불균형 상태를 이룬다. 이같이 물과 불의 이미지는 삶과 죽음, 그것이다. 물과 불이 균형을 이룬다함은 삶을 의미하며, 물과 불이 불균형을 이룬다함은 죽음을 의미한다. 일제말기 김정한 소설은 모두 물과 불이 불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다. 왜 그랬을까? 일제 식민지가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제말기 김정한 소설에는 가장(家長) 부재 현상이 두드러지다. <사하촌>의 상한이네는 부친과 모친이 모두 가출하고, 노조모와 어린 손자가 남아 있을 뿐이다. <옥심이>에서는 문둥병자인 남편이 아주 소록도로 떠난다. <묵은 자장가>의 승제 아버지도 집을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전염병에 걸린 승제 모친 혼자서 혹심한 가뭄에 농사를 짓는다. <월광한>의 은순의 남편도 집에 없다. <기로(岐路)>에서도 은파의 남편도 집에 없다. <그러한 남편>의 남편은 아주 자살을 해 영원한 부재자가 되었다. 일제말기 김정한 소설 9편 중에서 6편이 가장 부재의 작품이다. 이같이 결손(缺損) 가정이 많다는 것은 당대 식민지 사회가 극단적인 비정상적 사회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작품은 모두 물과 불의 이미지가 심각할 정도로 불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다.
가장 부재의 소설이 한 유형을 이루면서 김정한 소설은 상징성이 더 강해졌다. 삶의 균형이 깨진 시대적 불구성을 가정의 결손으로 은유했듯이 김정한은 당대 사회의 불균형을 물과 불의 상징성을 통해 보여주었다. 생활의 기본 이미지인 물과 불이 불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곧 당대 삶의 가치가 그만큼 어느 한쪽으로 편집(偏執)되어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김정한 소설은 물과 불의 상극 이미지를 통해 일제와 한민족의 상극상을 상징화했고, 가장 부재 현상을 통해 국권 상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한 가정의 불구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행한 일이다. 더욱 가족 구성원은 한결같이 늙은 할머니나 시어머니 아니면 젊은 며느리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무능력자들이었다. 거기에 강제 노동과 소작농에 대한 당국의 수탈이 겹쳐 이들 부녀자들은 삶 자체를 박탈당한 상태였다. 따라서 젊은 며느리들은 자연히 훼절하는 경우도 많이 생겨 그 나마의 가정도 나날이 파탄되어 갔다. 일제말기 김정한 소설에서는 강제 노동과 부녀자들의 훼절 현상이 실증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같은 강제 노동 착취의 현장을 ꡔ옥심이ꡕ와 ꡔ기로ꡕ에서도 볼 수 있다. 옥심이는 도로 공사판에 강제로 끌려 나갔다가 십장에게 훼절을 당했고, 은파는 수도 공사판 감독에게 훼절을 당했다. 옥심이나 은파는 다 불행하게 된 남편을 버리고 십장이나 감독을 따라 가출했다가는 아들을 못 잊어 돌아온다. 이같이 부녀자들이 훼절하거나 가출하는 이유는 가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 부녀자들이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전적으로 모성애 때문이다. 이들이 불행하게 된 남편(문둥병자, 징역살이)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은 애정보다는 유교 윤리 때문이었다. 이들의 삶을 지탱하는 힘은 모성애와 윤리(不更二夫)였고, 이들의 삶을 파괴하는 것은 생존을 위협하는 궁핍한 살림살이었다.
1936년에 출발한 김정한의 저항문학은 그의 항일 체험이 바탕으로 되어 있다. 김정한은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순적백성들의 인간단지를 만들고자 했다. 일제말기 극악한 민족 현실에서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는 항일운동은 그 문학 못지않게 값진 것이었다. 이 같은 민족적 정항 정신과 문학은 한마디로 그의 역사의식과 민족적 세계인식의 결과였다. 민족 수난기의 역사적 증언인 그의 문학이나 행동은 그대로 식민지 현실에 대한 대응이요, 극복의 방법이었다. 역사가 도전에 대한 응전이라면 김정한은 일제의 역사적 도전에 민족적 저항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일제말기 김정한의 소설이 보여주는 물과 불의 기본 은유체계와 상극구조는 선악의 문제 이전의 생사의 문제였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극한 상황에서의 생존의 이야기가 말하자면 일제말기 김정한의 소설이다. <<FONT color="#ff0000">이 책의 글을 더 읽어보려는 분은 위 첨부파일을 클릭하세요.>
출처 : [직접 서술] 블로그 집필 - suri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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