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 중편소설 연구suri21 2007.09.16 2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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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1985 김종균, ꡔ염상섭 중편소설 <두출발>의 대비 분석적 연구ꡕ, 한국외대, 논문집 18
염상섭 중편소설 연구
―<萬歲前>과 <두 出發> 그리고 <未解決>-
김종균1)
1. 서언
염상섭은 소설 각 장르에 걸쳐 작품을 썼다. 그 가운데 단편소설은 형식상 문제점이 없지 않다. 나는 <염상섭연구>(1974)에서 단편소설을 제1계열과 제2계열로 분류한 바 있다.2) 당시에는 중편소설을 인정하지 않고, 단편소설에 편입시켜 비교적 길이가 짧은 작품은 제2계열에 넣고, 비교적 길이가 긴 작품은 제1계열에 넣어 구분했으나 그 후 살펴보니 중편소설 형식을 갖춘 단편소설이 적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염상섭 소설에서 중편소설 장르를 별도로 설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상섭은 단편 작가라기보다는 대표적인 장편 작가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최초의 중편소설 작가이다.
따라서 문학사적으로 볼 때 이광수가 근대 장편소설 장르를 개척했다면 염상섭은 중편소설 장르를 개척한 작가이다. 1917년 이광수가 <無情>을 발표함으로써 비로소 한국에 본격적인 모더니티 문학이 등장하게 되었고, 1921년 김동인이 단편소설 <배따라기>를 발표하고, 1922년 염상섭이 최초의 중편소설 <墓地>를 발표함으로써 한국근대문학은 명실공히 소설 장르의 전형을 갖추게 되었다. <무정>이 고소설의 이야기 성을 벗어나지 못한 반면에 <배따라기>나 <묘지>는 이를 극복하여 근대 단편소설과 중편소설적 성격을 확보하였다. 염상섭의 <묘지>는 당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식민지 현실의 문학 형상화를 이룩한 독보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염상섭의 중편 작가로서의 문학사적 위상 또한 확고하게 되었다. 한국 근대소설사에 있어서 염상섭은 1920년대 중편소설 <묘지(만세전)>와 1930년대 장편소설 <三代>만으로도 자신의 문학사적 소임을 다 했다고 말할 있다.
염상섭은 중편소설 <萬歲前>을 쓰기 전에 초기 삼부작을 통해 중편소설 장르를 실험한 바 있다. 특히 <標本室의 청개구리>나 <除夜>는 중편소설에 맞먹는 길이를 가진 작품으로서 이미 이 두 작품에 <만세전>의 형식과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에 기본 틀이 서울에서 평양으로 이어지는 기행적 이야기로 되어 있듯이 <만세전>도 똑같이 도쿄에서 서울까지의 기행적 이야기로 되어 있다. <제야>에서 전근대적 윤리(정조)와 근대적 윤리(연애)를 문제 삼았듯이 <만세전>에도 전근대성과 식민지성을 매도 부정하고 있다.
이 같이 염상섭은 처음부터 당대 사회 상황과 개인의 관계 즉 자아와 세계의 대응 양상을 문제 삼았다. 식민지 사회는 어디로 보거나 문제적인 사회가 아닐 수 없다. 그 문제성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억압과 정치적 탄압 및 경제적 착취이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중편소설 내지 장편소설의 장르 선택은 필수적이다. 원래 중편소설의 장르적 성격이 그러하듯이 작가의 사회적 관심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역사적 과도기에는 사회적 문제가 비등하기 마련이다. 이 같은 사회 문제를 전형화 하여 나가자면 단편소설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3)
이렇게 보면 염상섭 소설의 장르 분류 문제도 만만치 않다. 즉 <만세전>에 이어 씌어진 <너희들은 무엇을 얻었느냐>(1923), <眞珠는 주었으나>(1925)
따라서 본고에서는 장르 문제보다는 작품적 성격을 논의함으로써 염상섭 소설의 장르 문제 해결에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즉 중편소설 성격이 확연한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통해 그 차이점을 발견해 보는 일이다. 염상섭 소설은 초기 삼부작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비롯되어 최초의 중편소설 <만세전>과 본격 단편소설 <금반지>(1924) 및 본격 장편소설 <사랑과 죄>(1927)에 이르러서 소설 장르가 완성되었다. 이렇듯 그 출발부터 염상섭 소설 장르는 석연치 않았다. 첫 작품 <표본실의 청개구리>가 전형적인 단편소설도 중편소설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글에서는 <만세전>, <두 출발>, <未解決> 등의 중편소설 성격과 염상섭의 사회 현실인식과 그 대응 양상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염상섭 소설은 초기를 지나 중기 즉 1927년에 이르면서는 작중인물에 새로운 변수가 생긴다. 무산계급 운동자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전 작중인물은 전근대적 인물과 근대적 인물로 대별될 수 있는 일상적 생활인들이었지만 이즘에 이르러서는 사회주의 운동자들이 번번이 등장하여 인물 구도가 바뀌어 간다. 하지만 민족적 유산계급과 사회적 무산계급은 대립되기 보다는 이 두 계급의 변증법적 구도로 전개되어 간다. 즉 심퍼사이저(stmpathizer: 동정자)의 등장이 그것이다. 염상섭 장편소설의 심퍼사이저의 등장은 당대 대립적인 사회 현실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따라서 염상섭의 현실인식과 대응 방법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염상섭은 당대 사회를 대립구조로 파악했다. 전근대성와 근대성의 대립을 비롯하여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의 대립, 민족주의자들과 일제의 대립, 사회주의자들과 일제의 대립 등 총체적으로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대하여 민족적으로 대응하여 나가는 것을 기본자세로 하였다. 이 같은 대립적 사회를 중화시키는 기능자가 말하자면 심퍼사이저였다. 염상섭의 현실 대응 방법은 한마디로 심퍼사이저 방법이었다. 이것은 염상섭의 당대 사회의 대립을 극복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를 가리켜 염상섭의 민족적 현실 대응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염상섭은 중립적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엄연히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어려서도 그랬고 일본에서 청년기를 보낼 때에도 그랬듯이 항일운동가였다.4)
2. <만세전>―민족주의적 현실인식
<만세전>은 모두 8장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국한문으로 표기된 기행(紀行) 형식의 소설이다. 이야기는 노정을 따라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노정은 시간을 따라 진행되고 시간과 사건은 일정한 정점(頂点)을 향하여 나아간다. 시간과 사건의 정점은 아내의 죽음과 합치되어 있다. 하지만 사건과 시간의 극한치는 결코 아내의 죽음에 놓여 있지 않다. 그보다는 노정의 현장 즉 민족 현실에 놓여 있다.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위기의식으로 감싸여 있다.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고 초조한 느낌이 있다. 이 같은 불안의식도 아내의 죽음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그만큼 아내의 죽음은 뒷전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 작품은 아내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아내의 죽음이 민족 현실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아내의 죽음은 상징적이다. 말하자면 아내의 죽음은 전근대의 죽음인 동시에 근대에로의 전환 및 지향을 의미한다.
민족적 대전환을 이 작품은 아내의 죽음으로 상징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아내의 죽음의 원인은 산후더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인화가 노정의 현장에서 확인한 민족 현실에 있다할 것이다. 구더기 같은 인간들, 무덤 같은 현실의 상징적인 죽음이 말하자면 아내의 죽음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흥미 거리는 아내가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에 있지 않다. 이인화는 아내가 죽기 전에 집에 도착하려고 결코 조급해 하지 않는다. 그는 느긋하게 이발도하고 술집에 가서 여급들과 술을 먹을 뿐만 아니라 여자 친구 집에 들리기도 하고, 자기 형 집에 들려 쉬어가며 서울 본가로 돌아온다. 집에 와서도 결코 아내의 곁으로 빨리 다가 가지도 않는다. 이렇게 보면 이 작품의 불안의식은 아내의 죽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 또한 분명하다. 그렇다면 불안의식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한마디로 변화하는 전환기적 사회 현상 때문이다. 따라서 <만세전>은 결코 애정소설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단편소설일 수도 없다. 그렇다고 장편소설도 아니다. 이 작품이 중편소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 같은 사회적 현실의 반영 때문이다. 염상섭은 시종일관 민족주의적 세계인식을 통해 당대 사회 현실을 문학 형상화하였다.
그러면 이 작품에 나타나는 전환의식에 따른 불안의식부터 살펴보자. 작품 첫머리부터 구주전쟁과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세계1차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민족자결주의가 잇대어 이야기 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전환기적 성격은 이로부터 이 작품의 주류를 이룬다. 이야기는 계속 단위 시간을 따라 전개된다. 대학 생활의 마지막 시험, 1년 중 마지막 달인 12월, 1년 중 마지막 계절인 겨울, 인생의 마지막인 죽음, 도쿄를 떠나야 하는 긴급성, 아내가 병사 직전에 놓여 있는 정황, 전보의 긴급성 등등 이 작품은 한마디로 전환기적 위기의식으로 가득 차게 한다. 아내의 죽음은 '나‘의 새 출발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나’의 새 출발은 민족의 새 출발을 상징하는 3․1 운동과 동시에 일어난다. 3․1 운동의 민족적 저항을 이 작품은 밑바닥에 깔고 있다. 이로써 염상섭의 초기소설에 보였던 허무주의적 색채는 말끔히 씻기고 민족적 저항으로 현실과의 대응성을 보인다.
ꡔ만세전ꡕ의 이야기는 도쿄에서 서울까지 오는 기간과 노정으로 되어 있다. 그 기간은 꼭 3일간이었다. 작중 화자인 ‘나’는 오후 1 시쯤 도쿄 하숙집에서 아내가 위독하다는 본가의 전보를 받고, 밤 11시 차로 도쿄를 떠나 고오베(神戶)에 도착하여 하루 밤을 역 앞 여관에서 묵고, 그 이튿날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하여 밤 기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다음날 아침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나’는 김천에서 낮을 보내고, 저녁 때 밤 기차를 타고 새벽에 서울 역에 도착한다. 이 귀국 노정도 시간적 관념이 최대의 효과를 이루고 있다. 닿음과 그침, 출발과 도착의 연거푼 작용 속에서 전환의 의미와 불안의식이 근원적으로 배태되어 있다. 시간적 단위의 배경을 밤과 겨울로 본다면 도쿄와 서울을 잇는 동일한 시간대가 조성되어 있다. 이인화는 밤에 도쿄(東京)를 떠나 새벽에 서울에 도착했다. 차나 기선은 모두 밤을 이용했다. 시간대와 노정 현장은 매섭게 추운 겨울을 밑바닥에 깔고 있다. 따라서 밤과 겨울의 상징성과 ‘묘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당대 사회의 전환기적 불안의식이 <만세전>에서는 밤,겨울,무덤으로 나타나 있다. 밤은 곧 광명의 낮을, 겨울은 생명의 봄을, 무덤은 부활의 탄생을 의미한다. 12월은 새해를 맞는 시간대이고, 아내의 죽음은 '나’의 새 생활을 의미하며, ‘나’가 도쿄를 떠나 서울까지 오는 시간대는 밤,겨울,무덤을 의미하지만 ‘나’가 서울을 떠나 도쿄로 가려함은 새벽,봄,부활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나’의 도쿄에서 서울까지의 기행은 어둠의 시간대이다. 어둠의 시간과 공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일제시대를 상징한다.
<만세전>의 작중 화자인 '나’의 행동은 도쿄에 있을 때와 서울에 있을 때로 크게 나뉘어진다. 그러나 ‘나’의 행동은 노정 중에 주로 드러난다. 일본에서의 '나’는 자지 자신의 문제에 집착을 한다, 즉 귀국 수속을 하는 준비 기간이 10시간쯤 되는 사이에 우편환을 찾고, H교수의 승낙을 받고, 이발을 하고, 여행 도구를 사고, M 헌(軒)에 가서 정자와 P를 만나 술을 마시며 수작하고, 술에 취해 개천가를 걷고, 전차를 타고, 하숙집에 돌아오는 길에 친구 X를 찾아 귀국을 알리고, 함께 짐을 들고 도쿄 역에 도착하여 차표를 사려는 창구 곁에서 정자(靜子)가 내미는 보자기 상자를 받으면서 이별을 한다. ‘나’는 귀국 노정 중 내내 술을 마신다. 전환기의 상징적 매체가 술이다. 마시고, 취하고, 깬다는 과정도 이에 포함된다. M 헌에서 취하여 나온ꡐ나’는 굉장히 울적한 기분으로 개천가를 걸어 하숙집으로 돌아온다.
나는 自己 自身에 對한 反抗인지, 自己 以外의 무엇에 對한 反抗인지, 그것 조차 명료히 깨닷지 못하면서, 덮어 놓고 압헤 닥치는대로 무엇이든지 해내이랴는 듯한 터무니업는 울분이 가슴 속에서 용심지 가티 치미러 올너왔다. 컴컴한 속에서 열병에 띄운 놈 모양으로 폭켓트에 찔넛든 두 손을 꺼내어 가지고 뿌리쳐보기도 하고, 입엇든 外套나 웃저고리를 버서서 O橋다리 밋트로 보기조케 던져버렷스면 하는 공상도 했다.(중략) 瞥眼間에 눈물이 비집어 나올만치 저향할 수 업이 애처로운 생각이 물밑듯하야, 참을 수 없는 空虛와 孤獨을 感하면서 눈물이나 마음껏 흘녀 보았으면하는 생각이 니러낫다.5)
‘나’의 일본에서의 신분은 조선 유학생이다. 졸업 시험을 중단하고 귀국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아주 느긋한 인상을 준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도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다. 차분하게 일상적 일들을 처리할 뿐만 아니라 여유 있게 술집에 가서 여급들과 객담을 주고받으며 술을 마신다. 그러나 이 같은 평온한 외면적 행동과는 달리 그의 내면은 울분과 고독감에 싸여 있다. ‘나’의 울분과 고독감은 한마디로 식민지 청년의 비애이었다. 도쿄에서 고오베까지 오는 동안 ‘나’는 밤 기차 속에서 정자가 준 술에 취하여 정자의 생각에 빠지고, 여자 유학생 을라(乙羅)를 만나려고 고오베에서 내려 하룻밤을 쉬는 등 ‘나’는 자신의 문제에만 집착한다. 여기서 ‘나’와 일본 사회와의 무관성을 인식할 수 있다. ‘나’는 일본 사회 현상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냉철함을 지니었다. 일본은 식민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해탄을 건너려는 순간부터ꡐ나’는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나’와 사회의 문제, ‘나’와 민족의 문제 등으로 확대되어 점차로 민족의식을 통해 현실을 관찰하고, 인식하려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만큼 ‘나’와 조선 사회는 상관관계를 유지한다. 여기에 ‘나’의 민족주의적 세계인식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ꡔ만세전ꡕ에 반영된 당대 조선 사회는 한마디로 염상섭의 민족적 현실인식의 반영이었다. 시모노세키에서 ‘나’는 밤 기선을 타려는 순간부터 일본 형사와 조선인 보조원의 조사와 감시를 받는다. ‘나’는 승선하자마자 곧 그들의 감시를 피해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나’는 목욕탕 안에서 일인들의 모욕적인 대화를 들으면서 모멸감을 느끼었다. ‘나’는 일인들이 조선인을 멸시하는 태도와 노동자를 착취하는 그들의 악랄한 태도에 울분하기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이로부터 ‘나’의 관심은 자기 자신보다는 민족 현실 쪽으로 기울어진다. 아내의 죽음은 까맣게 잊은 듯이 ‘나’는 식민지적 민족 현실에 집착한다.
‘나’는 그 다음날 새벽 부산에 도착했다. 김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부산 거리를 맴돌다가 선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그간 부산 거리가 많이 변하여 있음을 ‘나’는 실감한다. 우선 일인들이 거리에 많이 있고, 집들도 거의 일본식으로 지어졌으며, 그전보다 거리가 깨끗하게 느끼어졌다. 그와 반대로 조선인들은 볼 수 없게 초췌해졌고, 거의 변두리로 쫓겨나 있는 듯했다. 그만큼 부산은 일인들의 도시가 되어 갔다. ‘나’는 술집에서 일본인 아버지를 찾아 나선 작부의 신세타령을 들으면서 또 한번 식민지 백성의 비애를 심하게 느낀다. 이 같은 ‘나’의 관찰과 체험은 한마디로 민족적 시각의 결과이다.
‘나’는 부산을 떠나 기차를 타고 김천에 도착하여 자기 형의 집에서 하루 낮을 보낸다. ‘나’는 형의 생활과 모습을 보는 순간 식민지 정책이 조선인들을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실감한다. 형은 초등학교 교사이지만 환도를 일본 순사처럼 차고 다니었다. 그만큼 조선인들은 일본 식민지 정책에 동화되어 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유교의식에 젖어 있었다. 형은 아들을 얻기 위해 어린 여자를 첩으로 얻었다. 여기서 ‘나’가 주목하는 사회 문제는 식민지화 되어가는 현실과 전근대적 인습의 타성을 버리지 못하는 조선인의 생활 태도이다. ‘나’의 관찰의 대상은 계속해서 현실의 양면적 부정성에 놓여 있다. 식민지화 되어가는 현실과 전근대적 인습의 세계에 ‘나’는 부정적인 자세를 취한다.
‘나’는 김천에서 밤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한다. 기차에서 ‘나’는 헌병 보조원에게 붙잡혀 가는 갓 장수, 환도를 찬 조선인 헌병 보조원, 사기꾼처럼 생긴 신사, 사냥을 다니는 일인 관리들, 대전역 구내에 붙잡혀와 묶여 있는 조선인 여자, 분내 나는 기생 등을 계속 부정적인 시각으로 관찰한다. 그뿐만 아니라 기차 칸은 공포와 긴장감이 내내 감돈다. 창밖은 컴컴하고 눈이 내린다. 김천서 서울까지 오는 동안의 밤 기차 풍경은 글자 그대로 공포의 현장이다. 식민지 하의 민족 현실의 축소판이었다. ꡔ만세전ꡕ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이 바로 이 대목이다.
子正이나넘은뒤에 차는大田에와서닷다. 나는 모자를집어쓰고 차에서나려서 「플렛트홈」으로 거러나갓다. 그동안에 눈이 五六寸은싸인모양이다.
나는 놀랏다. 그중에는 머리를파발을하고 뎅이가된치마저고리의매무시지 흘러나리운 절문녀편네도 亦是結縛을하야안치엇다. 붓그럽지도안은지 나를부러워하는듯한눈으로 물그럼히치어다보다가 고개를숙이엇다. 뒤에는 쌕쌕자는아이가 매달렷다. 나는 가슴이선듯하고대리가 리엇다.
발자곡한아 말한마듸 덱걱소리도업시 어러부튼듯이안젓는 乘客들은, 웅승그릿드리고드러오는, 나의얼굴을 치어다보며 如前히오그랏드리고안젓다. 結縛을지은계집은 다시 나를치어다보앗다. 겻헤안젓는巡査지 불상히보이엇다. 木柵안으로드러오며 나는 닭업시 처량한 생각이 가슴에복바쳐올으면서 몸이 한층더 부르를리엇다. 눈물이 슴여나올것가타얏다. 나는 乘降臺로올러스며, 속에서 憤怒가치밀어올라와서이러케부르지젓다. ……
「이것이 生活이라는것인가? 모다 되어젓버려라!」
車間안으로 드러오며,
「무덤이다. 구덱이가 는무덤이다!」 라고 나는 지긋지긋한 듯이 이살을악물어보앗다. 나는 車가나기前에 自己자리로와서 드러누엇다.6)
여기서 보다시피 ‘나’의 분노는 민족적 분노이다. 묶인 여인을 볼 때 ‘나’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왜 그랬을까? 그가 동족이었기 때문이다. 대전 역에서의 ‘나’의 체험은 한마디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게 했다. 여기서 문제는 ‘나’의 민족적 연민과 분노이다. 그는 왜 이 같은 연민과 분노를 느끼었을까? 민족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인화의 남다른 민족애를 느낄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염상섭의 민족애이다. 따라서 염상섭의 민족 현실 대응 방법을 이로써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양면적 대응은 한마디로 그 자신의 이중적 성격과 결코 무관치 않다. 그것은 염상섭의 근대지향성과 전통지향성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일제에 대한 항거와 전근대적 현상에 대한 항거이기도 하다.
‘나’는 아침에 서울 역에 도착한다. ‘나’는 왜 밤에만 기차나 기선을 탔을까? 한마디로 일경의 감시가 귀찮았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역시 구습에 젖어 있는 집안 분위기를 느끼며 불안감과 위기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나’는 아내의 죽음보다는 가족들의 행동에 더 관심을 표명한다. 특히 부친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아무런 행동은 하지 못한다. ‘나’는 특히 부친의 전근대성과 식민정책에 동화되어 가는 모습을 몹시 못마땅해 한다. 족보를 새로 만들어 양반 행세를 하려는 가문의식이나 산소를 잘 써 가문과 영달을 도모하려는 미신적인 풍수에 연연하는 고식적인 생활 의식, 아내의 병에 한방 치료만 고집하는 비과학적 태도, 며느리를 공동묘지에 묻지 않으려는 권위의식, 장례 후의 무당 굿거리 등 전근대적인 생활의식을 비판하는 동시에 친식민지적 행태인 정치적 협잡과 사기성 짙은 동우회 문제, 일인들의 조정에 놀아나는 조선 양반들의 권세욕, 신여성의 경박성 등 당대 현실의 허위성에 대해 ‘나’는 감정적으로 보다는 논리적으로 대응한다. ‘나’는 그 허위의 실상을 다 알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개혁하기 보다는 정신적으로 부정적인 현실을 매도할 뿐이다. ‘나’의 부정적 현실인식은 당대 식민지 조선 사회를 무덤으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즉 당대 사회는 무덤, 구더기가 우글우글하는 공동묘지라는 것이다.
‘나’의 이 같은 현실인식은 무엇을 의미할까? 한마디로 식민지 지식인의 비애이다. 그가 도쿄 개천가를 술에 취해 걸으면서 느끼었던 울분과 저항보다 한층 처절한 저주의 감정이다. ‘나’가 모두 죽어버리라고 외치는 까닭은 생활이 없음에서이다. 그가 현실을 구더기가 들끓는 무덤, 공동묘지로 인식한 까닭 역시 생활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왜 당대 식민지 생활을 생활로 인식하지 않았을까? 한마디로 생활의 진실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체험하는 현실은 모두 자기의 진실과는 거리가 먼 허위적 세계이었기 때문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식민지 한 지식인의 자성적 성찰의 세계가 말하자면 <만세전>이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염상섭의 민족주의의 화신이다. 허무주의를 떨쳐버린 청년 염상섭의 확고한 민족적 신념을 우리는 이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인화가 서울을 벗어나려는 심정을 가리켜 현실 도피라고 보는 것은 그의 민족적 현실인식을 간과한 말이다.
이상에서 보았다시피 <만세전>은 당대 사회의 양면성이 기행적 사실성을 통해 형상화되었다. 일제의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억압 및 전근대적 인습의 세계가 그것이었다. 염상섭은 전근대적 현실과 허위적인 근대적 현실을 다 함께 부정하였다. 그는 당대 사회를 무덤으로 상징 형상화함으로써 강력한 민족 부활의 의지를 암시하였다. 아내의 죽음은 전근대적 세계의 죽음을 상징하는 동시에 ‘나’의 새 생명을 의미하듯이 사회의 죽음 또한 허위적 근대 세계 즉 식민지적 현실과 이에 동화되어 가는 친일적 세계의 죽음을 상징하는 동시에 민족의 부활을 의미한다. 민족의 부활은 이후 일어난 3,1운동과 세계적 신기운으로써의 민족자결주의의 선언으로 이어져 나간다.
3. <낙동강>의 프로문학적 성격
<낙동강 (洛東江)>(1927)7)은 신경향파적 경지를 벗어나 본격적인 프로문학 KAPF의 목적에 합당한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대체로 문학사적 의미의 테두리 안에서 논의되어 왔으나 여기서는 염상섭의 프로문학 의식과 대비해서 조명희의 프로문학 의식의 일단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낙동강>은 한마디로 당대 식민지하의 농촌의 농토문제와 신분문제를 사회주의 계급의식에 의해 혁파하려는 의지를 보인 작품이다. 농토문제는 주로 동척(東拓)으로 대표되는 일제의 농토 착취 정책에 의해 농민들이 농토를 빼앗기는 문제를 소작농민조합원들의 투쟁을 통해 지켜보려는 저항성을 보였고, 신분문제는 백정과 상인(商人)들의 싸움에 소작농민조합, 여성동맹원이 백정들의 편에서 상인들과 싸움으로써 사회평등(신분)을 쟁취하려는 투쟁성을 보이고 있다.
<낙동강>의 배경이나 인물은 매우 서정적이지만 내용은 격렬한 투쟁성을 보이고 있다. 포구인 이 마을은 갈밭이 있고, 푸른 강물이 흐르며, 평화롭고 넉넉한 농촌이었으나 동양척식주식회사(일제가 경제 착취를 위해 설립한 어용회사)에 의해 갈밭을 빼앗기고 농토를 잃은 농민들은 간도로 살 자리를 찾아 떠난다. 그 중의 한 가족이 박성운네이다.
<낙동강>은 박성운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낙동강 어부의 손자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박성운은 서당, 보통학교, 국립간이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군청농업조수로 2년간 근무한다. 독립운동이 폭발하자, 그는 군청조수직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참가한다. 이로부터 박성운은 열렬한 독립운동투사가 되었다. 일경에게 체포되어 1년 반 동안 철창생활을 한다. 박성운이 석방이 되었을 때는 “모친은 돌아가고, 늙은 아버지는 집도 없게”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박성운의 독립운동 사실은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사회주의자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사회주의운동의 전개 과정은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박성운은 문제의 세계사적 인물이기는 해도 소설적 구조면에서 볼 때 열렬한 혁명가라기보다는 매우 휴머니티 한 사회운동가이다. 이 작품은 인물 형상화보다는 사건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박성운은 서북간도에서 아버지마저 잃고, 5년 동안 중국대륙을 헤매며 노동계급운동을 벌이다가 서울로 돌아와 혁명대열 앞에 섰으나 저들의 파벌 싸움에 환멸을 느끼고 귀향한다. 그는 “남조선 일대를 망라한 사회운동단체를 만들어 혁명운동을” 벌이는 한편 농촌야학을 실시하여 농민 교양화에 힘쓴다. 이 같은 박성운의 사회운동은 일제의 심한 탄압과 감시를 받는다.
박성운은 마을의 두 가지 사건에 직접 개입한다. 첫째 사건은 갈밭사건이다. “마을 앞 낙동강 기슭에 여러 만평되는 갈밭이 있어 이 갈을 비어 자리를 치고, 이 갈을 털어 삿갓을 만들고, 그 갈을 팔아 옷을 구하고 밥을 구하였었다.” 말하자면 갈밭은 이 마을 사람들의 생활터전이었다. 이 갈밭이 남의 손에 넘어가 마을 사람들은 갈도 벨 수 없게 되었다.
박성운은 갈밭 되찾기에 앞장선다. 여러 방면으로 노력해 보았으나 다 허사가 되자 박성운은 조합원을 동원하여 자기네 목숨이나 다름없이 알던 갈을 베게 하였다. “저편의 수직군하고 시비가 생겼다. 사람까지 상하였다.” 박성운의 갈밭 찾기는 이렇게 싸움으로 번지었다. 이것이 박성운이 저들과 벌인 첫 번째 싸움이다.
두 번째 사건은 형평사원(백정들의 모임)들과 장거리 군들의 싸움이다. 박성운은 “청년회원, 소작인조합원, 심지어 여성동맹원까지 총출동을 하여 가지고 형평사원편을 응원하러” 달려갔다. 이 일의 발단은 “이해 여름 어느 장날이었다. 장거리에서 형평사원들과 장꾼―그 중에서도 장거리 사람들과 큰 싸움이 일어났다. 싸움 시초는 장거리 사람 하나가 이곳 형평사지부 앞을 지나가면서 모욕하는 말을 한 까닭으로 피차에 말이 오락가락 하다가 싸움이 되고 또 떼 싸움이 되어서 난폭한 장거리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형평사원 촌락을 습격한다는 급보를 듣고” 박성운이 가담하게 되었던 일이 그것이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것은 장거리 사람들이 난폭하여 먼저 싸움을 건 것으로 되어 있고, 또 이들이 백정들의 촌락을 습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장거리 사람들이란 용어는 상인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로소득자들, 착취자들, 자본주의자들, 유산자들이란 개념이 모두 포함될 성질의 말일 듯싶다.
싸움이 진정된 후 장거리 사람들을 “너희들도 이놈들, 새 백정이로구나”라며 무산계급 즉 소작인조합원과 여성동맹원들을 조소하고 매도하지만 박성운은 “형평사원을 우리 무산계급은 한 형제요 동무로 알고 나가야 한다”고 열렬히 옹호한다. 나아가서 박성운은 백정의 딸인 로사를 앞세워 “당신은 최하층에서 터져나오는 폭발탄 같아야 합니다. 가정에 대하여, 같은 여성에 대하여, 남성에 대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 반항하여야 합니다.”고 혁명의식을 강조하고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박성운은 “원래 정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근래에 감정을 의지로 누르려는 노력이 많은 터이다. 혁명가는 생무쇠쪽 같은 시퍼런 의지의 마음씨를 가져야 한다.”고 스스로 자책하면서 그를 자기 생활의 모토로 삼기 시작할 정도로 새 사람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박성운은 징역살이를 하는 중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자기 고향에 돌아와서는 회생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이와 같은 박성운의 무산계급운동, 노동자 농민해방운동은 최서해의 작품에 보이는 바와는 달리 개인적인 원한이나 극빈을 극복하기 위해 죽이고 죽고 싸우는 일은 없이 사회 전체 아니 자기 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함께 투쟁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청년회, 여성동맹, 소작인조합, 형평사원, 사회운동 단체 등등의 조직을 결성하여 기성문화, 기성윤리, 유산자들과 대결한다. 이 조직이야말로 그들의 힘이었다. 이 일은 의식의 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갈밭 싸움은 빼앗긴 것을 되찾고자 하는, 유산자들과의 선량한 떼 싸움이었고, 장거리 사람들과의 싸움은 신분제도의 인습에서 벗어나려는 싸움이었다. 무산계급 즉 노동자, 농민들은 백정에 대한 천민의식이나 차별의식이 없다. 다만 이들은 평등사회를 이룩하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다.
소작농민들의 이같은 항거는 생활터전인 갈밭을 어느 개인이 소유해 버린 것, 그것도 권력과 결탁하여 부당하게 소유한 것, 더욱 일본의 경제 침탈 회사인 동척이 소유한 것에 대해 자신들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이와 아울러 가진 자들의 고루한 인습에 대해서도 사회평등을 앞세워 이의 타파를 위해 저들과 싸운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경제적, 사회적(신분)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 저들과 싸운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최서해 작품에서의 싸움과는 그 성질이 전혀 달라진다. 약을 안 지어 준 한의사에게 내 아들은 네가 죽이었으니 너도 죽어보라고 달려드는 싸움이나, 소작료 대신 딸을 빼앗겨 지주 집에 불을 지르는 행위 등등 말하자면 모든 원인을 자기 자신 돈 없는 것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엉뚱하게도 시혜를 베풀지 않는다고 싸움을 걸고, 그를 죽이고 자기도 죽는 일 등 즉 개인적인 원한과 분풀이는 이 작품에 없다. 이에 반해 <낙동강>의 떼 싸움은 사회적 싸움이다. 이 싸움 중에서 죽은 사람도 죽인 사람도 없다. 그만큼 최서해 작품 세계의 무산계급의 투쟁양상과는 이렇게 다르다.
<낙동강>에는 일제의 경제적 착취, 침탈 현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북간도로 쫓겨 가는 농민들의 피폐상과 새로 들어선 동척의 창고 건물을 대조시킨다든가, 갈밭의 소유 문제와 농민들의 생존문제를 부각시키거나, 농민운동에 대한 탄압 등이 고발되고 있다.
박성운은 봉건인습에 대해, 유산자들의 착취에 대해, 일제의 탄압과 경제적 침탈에 대해 맞서 싸우면서 무산계급의 대동단결과 조직적인 대결을 위한 의식혁명에 전념하다 결국 두 번의 옥살이를 겪고 병들어 죽은 무산계급혁명의 모범적인 투사였다. 그의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결국 무산계급 혁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혁명투사의 분투와 희생이 쌓이고 쌓여 그 어느 땐가는 무산자가 주인인 평등공영사회가 이루어진다는 작가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4. 결어
이상에서 염상섭 중편소설의 장르적 성격과 그 특성을 자아와 세계의 대응 양식을 통해 살펴보았다. 염상섭은 리얼리즘 작가였다. 그가 처음부터 중편소설 장르를 선택하여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염상섭의 소설 쓰기는 식민지 민족 현실에 대한 민족적 대응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초기에 니힐리즘에 빠지게 된 것도 알고 보면 그 자신의 민족애 때문이었다. 그의 니힐리즘 극복 단계에서 등장한 문학 형식이 초기 중편소설 이다. 그가 남보다 즉 이광수나 김동인 보다 소설 쓰기가 늦은 것도 그 자신의 근대적 세계인식의 문학 형상화을 담을 그릇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중편소설 장르가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이광수는 소설 장르에 대한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이 고소설 스타일을 빌어 <무정>을 썼고, 김동인은 당대 만연한 단편소설 양식을 빌어 ꡔ감자ꡕ를 썼다. 하지만 염상섭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는 문학 특히 소설이 무엇인가를 알았기 때문이다.
염상섭은 소설을 이야기로 보지 않았다. 염상섭의 소설관은 처음부터 리얼리즘 세계인식의 형식화이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염상섭의 리얼리즘관이다. 이 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된다. 그의 생활 문학관과 프롤레타리아 문학관이 그것이다. 특히 그의 중편소설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당대 사회문제이기 때문이다. 염상섭은 현실을 문제 삼았다. 오늘의 문제 그것은 식민지 현실과의 대응이었다. 현실을 통한 민족적 대응이 말하자면 초기 그가 파악한 생활 문학관이었고, 민족주의 문학관이었다. 이 같은 염상섭의 민족적 세계인식의 형식화가 <만세전>이었다. 이 작품에 나타는 민족 현실은 민족의 상징적 죽음이었다. 무덤과 구더기로 상징된 식민지 상황은 “민족의 가사 상태” 바로 그것이었다. 따라서 기행적 형식을 빌려 파악한 실증적 민족 현실은 어떤 방법으로라도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될 윤리적 대상이었다. 전근대성과 식민지성의 극복이 그것이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이인화가 취하고 있는 현실 대응은 한마디로 생활 문학관에 의한 민족주의적 대응이었다.
염상섭의 당면 문제는 보았다시피 전근대성의 극복과 식민지성의 극복이었다. 따라서 제국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이념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의 이념이었다. 염상섭은 민족주의와 함께 사회주의를 식민지 대응 이념으로 선택하였다. 이로부터 염상섭 소설은 다분히 정치소설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당대 계몽소설에 대응되는 소설로서의 정치소설은 식민지 사회에서 리얼리즘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소설 형태였다. 정치소설의 바탕은 사회 개혁과 함께 이념 투쟁이 필수적이다. 모든 에피소드는 사회 문제와 연관되어 있고, 개인의 행동과 사유 또한 사회성에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중편소설적 이야기는 필연적이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공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염상섭의 이중적 성격에서는 가능했다. 염상섭은 전통 지향적 보수주의자이면서도 동시에 근대 지향적 진보주의자였다. 이 같은 그의 양면적 성격은 좋은 뜻에서 인간적이었다. 이와 같은 염상섭의 이중적 성격은 그의 생활과 작품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그 한 예를 <두 출발>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보았다시피 이 작품의 전통 지향적 보수주의자이자 항일적 민족주의자인 안영덕 댁은 일제에 의해 근대 지향적 개화주의자로 변해가고 친일적 경향을 띠어간다. 또한 안씨네 하인 원석은 혁진청년단원들의 도움으로 자유인이 되어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전통 지향적 민족주의는 일제의 식민 정책의 강화와 정치적 탄압으로 더 이상 표면적으로 식민지 상황의 대응 수단이 될 수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운동 역시 그렇기는 하지만 아직은 직접적으로 대응력을 상실한 상태는 아니었다. 이후 염상섭의 소설에는 점차 민족주의자보다 사회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등장한다. 민족주의자들은 심퍼사이저로 변신함으로써 전통 지향적 민족주의의적 입장을 견지한다. 염상섭 소설 특히 장편소설의 심퍼사이저는 그만이 지닌 독창적인 민족적 대응 저항 양식이었다.
당대 사회 문제의 하나가 기독교 사회의 부패와 타락이었다. 특히 목자들의 반기독교적 작태는 심각한 사회 문제이었다. 이 같은 정신적 세계의 타락에 대한 염상섭의 관심을 <미해결>에서 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염상섭의 기독교 체험과 기독교 부정의식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작품에 또 하나 흥미로웠던 것은 기독교 교회 내분에 프롤레타리아를 개입시켜 해결코자한 점이다. 더욱 이들은 토론을 통해 기독교 목자들의 교회 주도권 쟁탈전에 끼어들어 저들을 승복시킨다. 여기서 종교성과 과학성의 문제를 아울러 생각할 수 있다. 염상섭의 근대 지향적 성향의 일단이 이를 통해 드러난다.
위에서 논의한 작품에는 세 여인의 죽음과 한 소작인 농민의 죽음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가 박성운의 죽음이 기본 모티브로 되어 있다. 이들의 죽음은 당대인의 삶을 변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근대적 삶에서 근대적 삶에로의 지향이 그것이었다. <만세전>의 이인화 아내의 죽음이나 <미해결>의 정순과 애련의 죽음이 비록 그 의미는 같지 않다 하더라도 이들의 죽음은 그들의 죽음으로 결코 끝나지 않았다. <두 출발>의 소작인 치전의 죽음, <낙동강>의 박성운의 죽음 또한 그렇다. 이들의 죽음은 한마디로 전근대 사회의 죽음인 동시에 당대 민족 현실의 상징적 죽음이었다.
염상섭의 중편소설은 그의 근대적 세계인식을 형상화하는데 가장 적절한 소설 장르였다. 염상섭은 생활 문학관과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을 통해 식민지 상황을 대응 극복하려 했다. 이 같은 당대 사회 문제를 문학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중편소설 양식이 가장 적합했다. 따라서 염상섭은 중․장편소설 양식을 처음부터 시도했다.<1999, 「염상섭소설연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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