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스크랩] 불감증을 위하여 1/ 노혜경

맑은물56 2014. 8. 27. 21:16

 

 

불감증을 위하여 1/ 노혜경

 

 

나는 모든 확실한 것의 이름

하루가 끝날 무렵

눈을 들어 그림자에 깔린 거리를 본다

욕망이 거대한 입을 벌려

시간을 삼킨다.

비명을 지르며, 뒤틀면서, 그러다가

소리없이 사라져 가는

하얗고 붉고 아름다운 집. 견고해 보이는

먼지의 집

저것은 너의 집, 너의 길, 너의 산하

너의 나무, 너의 벌레, 너의 시간이다.

너의 사랑, 너의 분노, 너의 슬픔

내가 비추는 너의 모든 것인 세계 위에 빨갛고

확실한 동그라미를 쳐 놓겠다

어둔 곳에서라도, 춥거나 더운 언제라도

돌아와 다오

나를 모른다고 하지 말아 다오

서편 하늘에 새빨간 동그라미로 내가

못박혀 있겠다.

 

- 시집『새였던 것을 기억하는 새』(고려원,1995)

.............................................................................

 

 감각이 둔하거나 익숙해져서 별다른 느낌을 갖지 못하는 증상을 불감증이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세월호의 피로감을 말하면서 이제 그만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그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뎌진 감각에서 오는 타성으로의 후퇴이며 불감증의 다름 아니다.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로 그 피로감은 진실 규명과 그 제도적 장치를 끈질기게 요구한데서 기인한 피로보다는 참사 원인이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고 권력이 뭔가 자꾸 감추려 드는 것 같은 수상한 태도를 보인데서 비롯된 피로이지 않은가.

 

 ‘팽배한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불러온 결과다’ ‘정신 개조가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도 무용지물이다’ ‘적폐를 해소하고 새롭게 판을 짜야한다’ ‘국민운동을 일으켜 나라의 방향을 바꾸자’ 이것은 각계 원로들이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분연히 일어서서「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운동」을 출범시키면서 표방했던 구호들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특별법을 통해 원인을 철저히 밝혀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있었다.

 

 수사권이 부여되지 않은 진상조사위원회와 대통령이 임명하는 특검으로는 세월호 진상에 접근할 수 없다고 대다수 국민들은 생각했다. 수사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의견이 줘서는 안 된다는 의견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또 국민 열 명 중 일곱 명이 세월호 관련 검경 수사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사정은 어떤가. 무슨 연애질도 아니고 ‘밀당’한 결과가 고작 추천권의 꼼수 합의다. 이를 두고 청와대와 여당은 더 이상 ‘양보’는 없다며 완강히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그들은 7.30재보선 승리에 힘을 얻고서 적절한 타이밍에 몇몇 야당의원에게도 사정의 칼을 뽑아 야당이 잔뜩 위축된 상태에서 협상장으로 끌어들여 두 차례 ‘합의’한 결과가 그 모양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정치에 피로를 느꼈고, 일부는 좌우지간 이제 그만하자는 목소리도 내는 것이다. 세월호 이전의 타성으로 되돌아가면서 이기주의가 다시 발호하고 있다. 정권의 무능과 타락, 방임과 우왕좌왕으로 배와 함께 가라앉은 어린 생명들을 생생하게 목도한 그때의 심정으로 돌아간다면 함부로 짜증을 내고 불감할 수는 도무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한심한 사고 수습과정을 보며 대통령의 눈물이 거짓임을 확인하였음에도 분노하지 않는 이 불감증이라니. 얼마 전 고등학생들에게 자신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가 방패막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더니 단 7%만이 그럴 것이라 답했다. 이 땅의 미래 세대에게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는 것만큼 끔찍하고 화나는 일이 어디 있으랴. 정권의 보위를 위해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망쳐도 좋단 말인가. 그런데도 특별법을 당리당략차원에서 접근한다?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미래에 대한 믿음을 주기 위해서라도 원인 규명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뤄져야 하고 애초에 축소, 은폐의 여지없는 탄탄한 특별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적폐를 해소하고 국가 개조를 위해서라도, 최소한 특별검사만큼은 추천과정에서 정부의 입김과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김영호 씨의 단식을 ‘견고해 보이는 먼지의 집’에 대한 연민과 투쟁의 시그널로 본다. 붉은 노을에 깔린 더 붉고 선명하고 ‘확실한 동그라미’로 보았다. '서편 하늘에 새빨간 동그라미로' '못박혀'있는...

 

 한때 노혜경 시인의 ‘페이스 북’ 문패에는 ‘분노는 행동을 이끌어내는데 가장 확실한 에너지다. 혁명은 분노가 공적으로 확산될 때 발생한다.’란 문장이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오래전 유시민이 인용한 바 있는 ‘슬픔도 노여움도 없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는 네크라소프의 시구를 가슴에 담을 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숙한 사회는 화를 낼 때도 이성적으로 자기를 표현하고 불필요한 분노는 걸러낼 줄 아는 분노 관리가 잘 된 사회를 의미한다. 그래야 정제된 에너지를 얻고 그 에너지로 불감증을 앓고 있는 사람까지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권순진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