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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인이 쓰는 시인의 초상 : 나태주 / 윤효

맑은물56 2014. 3. 19. 14:46

시인이 쓰는 시인의 초상

시인이 쓰는 시인의 초상 : 나태주 / 윤효
홀로 이룩한 원융무애, 풀꽃 만다라
   

나태주 시인

해방되던 해, 충남 서천 시골 외가에서 육 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초등학교 마칠 때까지 외할머니 손에 큰 아이, 그것도 외할머니와 단둘이 지내며 자란 아이, 중학교 입학을 계기로 친가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오히려 친가가 낯설었던 아이, 공주사범학교에 입학하게 됨에 따라 다시 집을 떠나야 했던 아이, 고등학교 격인 사범학교 1학년 때, 그러니까 열여섯 살 때 시에 눈뜬 조숙한 아이. 그러고는 흰 구름과 바람과 나무와 풀꽃을 벗 삼아 시를, 문학을 가슴 하나로, 오직 뜨거운 가슴 하나로 일궈온 아이,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짠한 인간애에 사무쳐 먹먹한 눈시울 훔칠 새도 없이 그냥 그대로 시인이 된 아이. 그래서 지금은 자연의 순연함을 자연스러운 모국어로 받아 적는 서정시로써, 인간과 인간 사이 그 쓸쓸한 울림을 노래하는 서정시로써 높다라이 일가를 이룬 시인, 그 이름 나태주, 나태주 시인.
사십 대 홀몸이셨던 외할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는
동안에도 어쩔 수 없이 심신 가득 배어들던 풀빛 그리움과
노을빛 외로움, 서러움을 어쩌지 못하고 평생을 뚜벅뚜벅 이고 지고
 걸어온 시인, 여태도 파닥거리던 유년의 가슴을 고스란히 안은 채
그 풀빛과 그 노을빛을 무시로 떠올리고 떠올리는 시인, 나태주, 나태주 시인.

크지 않은 키에 수더분한 외모를 지녀서 만만하게 보이기 좋은 시인,
온화한 얼굴에 목소리 또한 은근하여 얼핏 속 무른 사람쯤으로
에누리해서 대접받기 딱 좋은 시인.
그러나 더할 수 없이 주도면밀한 시인,
겉으로는 헐렁해 보여도 안으로는 뜨겁고 단단한 시인,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너그럽되 스스로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철두철미한 시인.
 몇 해 전, 어떤 병이 문득 차가운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손 기꺼이 부여잡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석 달이고 밥 한 그릇, 물 한 모금 끝끝내 넘기지 않고
그 악연(惡緣)을 기어코 선연(善緣)으로 갈무리해 낸 시인. 그래서
서울깍쟁이가 시골어수룩을 당할 수 없단 말을
떠올리게 하는 시인, 나태주, 나태주 시인.

줏대 없이 나부끼는 싱거운 천하태평쯤으로 지레짐작하기 십상인 시인, 오늘 일을 내일로
 내일로 자꾸 미루는 태화탕쯤으로 넘겨짚기도 십상인 시인. 그러나 그렇게 부지런할 수가 없는
시인, 시인 중에서 가장 바지런한 시인,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올해로
시력 40년을 헤아리는 동안 30권의 시집을 출간한 시인, 그 30권의 시집 위에 선시집과 동시집,
 동화집, 합동시집에 산문집까지 올려놓으면 그 높이가 어느덧 등신대(等身大)에 이르는 시인.
그러니까 추사 김정희 선생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면 추사 선생과 똑같이 여러 개의 벼루를
맞창 냈을 시인, 붓이란 붓은 다 모지랑붓으로 만들었을 시인, 나태주, 나태주 시인.

그 바람에 시가 묽으네 헤프네 안 들어도 좋을 훈수를 이따금씩 듣기도 하는 시인.
그러나 이것은 시인의 천품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경솔한 핀잔. 이를테면 79편으로 짜인
시인의 연작시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38번을, 그 시의 4연과 5연을 읽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 시인이 왜 이른바 다작 시인일 수밖에 없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는 일.
 “나를 산의 나무, 들의 풀이라/ 불러다오/ 내 몸의 어디를 건드리든지/ 푸른 풀물 향그런 나무
내음이/ 번질 것만 같지 않느냐!// 나를 조그만 북이라고/ 불러다오/ 내 몸의 어디를 건드리든지/
두둥둥둥 두둥둥둥/ 북소리가 울릴 것만 같지 않느냐!”. 골몰하지 않아도 천지만물과의
동일시(同一視)가, 감정이입(感情移入)이 절로 이루어지는 시인, 이를테면 온몸이
성감대인 시인. 그러니 하루에도 여러 편의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시인, 안 쓰면 눈자위가
짓물러서 안 되는 시인, 몇 해 전 병고 치를 때에도 의사와 가족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실 침대 밑에 대학노트를 숨겨놓고 몰래몰래 시를 써야 했던 시인, 나태주, 나태주 시인.



   



시의 흐름으로 보아 시인에게도 족보가 있다면서 자신의 가계도(家系圖)를 그려 보인 시인.
김소월 시인과 김영랑 시인은 할아버지뻘, 박목월 시인은 아버지뻘, 서정주 시인은 당숙뻘,
박재삼 시인은 삼촌뻘, 허영자 시인은 누님뻘이 된다고 스스로 밝힌 시인. 이러한 가계도를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자신의 개성을 또렷이 드러낸 시인, 나태주, 나태주 시인.

큰키나무든 떨기나무든, 바늘잎나무든 넓은잎나무든, 늘푸른나무든 잎지는나무든 나무라면
가리지 않고 우러러 경배하는 시인, 책을 많이 펴내느라 종이를 적잖이 소비했으므로 나무들에게
 미안하다고 절하는 시인, 작고 가녀린 풀잎을, 그 풀잎이 피워낸 이슬 같은 풀꽃을,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을 더욱 사랑하는 시인, 우리 땅 푸나무들을 우리 탯말로 호명하기를
좋아하는 시인, 우리 자연 속 푸른 생명들을 시 속에 들어앉히기를 매우 좋아하는 시인,
더불어 파르르 전율하는 그 생명들을 뾰족한 연필로 그리기를 좋아하는 시인. 그리하여 시인의
시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푸나무들을 한데 모으면, 또 거기에 시인의 풀꽃그림을 덧붙이면
곧바로 식물도감이 완성되는 식물성 시인. 어쩌면 필체마저도 태어나서 자라고 또 거기 터 잡아
살아가는 충청도의 비산비야(非山非野), 그 아기자기한 자연을 쏙 빼닮은 시인, 시인이 바로
시이고, 시가 곧 시인인 시인, 나태주, 나태주 시인.

풀꽃과 같이 작은 생명 속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우주의 섭리를, 인생의 요체를 헤아리는 시인,
불현듯 난초 이파리와 허공 사이에도 개입하여 거기 흐르는 기쁨의 강물에 심신을 흥건히
적시기도 하는 시인, 자동차 운전면허증도 없어 오직 금강변 시골길을 타박타박 걷고 걸으면서
 원융무애의 세계를 이룩한 시인, 풀꽃 만다라를 피워낸 시인, 나태주, 나태주 시인. 
 

윤효
시인. 1956년 충남 논산 출생. 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물결》 《얼음새꽃》
 《햇살방석》 등이 있음. 제16회 편운문학상 우수상, 제7회 영랑시문학상 우수상 수상. 현재
오산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출처 : 재미수필문학가협회
글쓴이 : 이정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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