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쓰는 시인의 초상
시인이 쓰는 시인의 초상 : 나태주 / 윤효 | |||||||||
홀로 이룩한 원융무애, 풀꽃 만다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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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대 홀몸이셨던 외할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는 동안에도 어쩔 수 없이 심신 가득 배어들던 풀빛 그리움과 노을빛 외로움, 서러움을 어쩌지 못하고 평생을 뚜벅뚜벅 이고 지고 걸어온 시인, 여태도 파닥거리던 유년의 가슴을 고스란히 안은 채 그 풀빛과 그 노을빛을 무시로 떠올리고 떠올리는 시인, 나태주, 나태주 시인. 크지 않은 키에 수더분한 외모를 지녀서 만만하게 보이기 좋은 시인, 온화한 얼굴에 목소리 또한 은근하여 얼핏 속 무른 사람쯤으로 에누리해서 대접받기 딱 좋은 시인. 그러나 더할 수 없이 주도면밀한 시인, 겉으로는 헐렁해 보여도 안으로는 뜨겁고 단단한 시인,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너그럽되 스스로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철두철미한 시인. 몇 해 전, 어떤 병이 문득 차가운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손 기꺼이 부여잡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석 달이고 밥 한 그릇, 물 한 모금 끝끝내 넘기지 않고 그 악연(惡緣)을 기어코 선연(善緣)으로 갈무리해 낸 시인. 그래서 서울깍쟁이가 시골어수룩을 당할 수 없단 말을 떠올리게 하는 시인, 나태주, 나태주 시인. 줏대 없이 나부끼는 싱거운 천하태평쯤으로 지레짐작하기 십상인 시인, 오늘 일을 내일로 내일로 자꾸 미루는 태화탕쯤으로 넘겨짚기도 십상인 시인. 그러나 그렇게 부지런할 수가 없는 시인, 시인 중에서 가장 바지런한 시인,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올해로 시력 40년을 헤아리는 동안 30권의 시집을 출간한 시인, 그 30권의 시집 위에 선시집과 동시집, 동화집, 합동시집에 산문집까지 올려놓으면 그 높이가 어느덧 등신대(等身大)에 이르는 시인. 그러니까 추사 김정희 선생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면 추사 선생과 똑같이 여러 개의 벼루를 맞창 냈을 시인, 붓이란 붓은 다 모지랑붓으로 만들었을 시인, 나태주, 나태주 시인. 그 바람에 시가 묽으네 헤프네 안 들어도 좋을 훈수를 이따금씩 듣기도 하는 시인. 그러나 이것은 시인의 천품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경솔한 핀잔. 이를테면 79편으로 짜인 시인의 연작시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38번을, 그 시의 4연과 5연을 읽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 시인이 왜 이른바 다작 시인일 수밖에 없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는 일. “나를 산의 나무, 들의 풀이라/ 불러다오/ 내 몸의 어디를 건드리든지/ 푸른 풀물 향그런 나무 내음이/ 번질 것만 같지 않느냐!// 나를 조그만 북이라고/ 불러다오/ 내 몸의 어디를 건드리든지/ 두둥둥둥 두둥둥둥/ 북소리가 울릴 것만 같지 않느냐!”. 골몰하지 않아도 천지만물과의 동일시(同一視)가, 감정이입(感情移入)이 절로 이루어지는 시인, 이를테면 온몸이 성감대인 시인. 그러니 하루에도 여러 편의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시인, 안 쓰면 눈자위가 짓물러서 안 되는 시인, 몇 해 전 병고 치를 때에도 의사와 가족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실 침대 밑에 대학노트를 숨겨놓고 몰래몰래 시를 써야 했던 시인, 나태주, 나태주 시인.
윤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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