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인생 마지막 편지](48) 윤효 - 지구의 주인, 나무에게
- 윤효 | 시인
이른 아침부터 붉은 울음을 가쁘게 토해내고 있는 저 매미들의 속내는 무엇일까 헤아리며 네게 이 편지를 쓴다. 여러 해 동안의 땅밑 세월을 견디고 얻은 이 지상에서의 시간이 겨우 한 달뿐이라는데, 그래서 저리 울어대는 것일까? 아니면, 땅밑이 훨씬 아늑하고 평화로웠다고 사무치게 그리며 울어대는 것일까?
나무야, 며칠 전에 이 편지의 청탁을 받았어. 인생의 마지막 순간, 그 순간에 떠오르는 가장 그리운 이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써달라는 거야. 좋다 했지. 그런데 문제는 거기 붙은 단서였어. 수신인에서 가족은 제외해 달라는 거야.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한 사람을 떠올리되 살붙이는 빼라니, 피붙이는 배제하라니. 세상에 이리 가혹한 청탁이 또 있을까?
나무야, 그렇다면 누구일까, 누구여야 할까? 내게 그 사람은 바로 너였어. 사실은 이 물음을 화두 삼아 며칠을 서성였어. 이 사람 저 사람 여러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더군. 내 아무리 누추한 생이었지만, 선연선과(善緣善果)의 고마운 인연들이 어찌 한둘뿐이었겠어. 먼저 나를 키워준 어릴 적 고향의 벗들과 여러 은사님이 떠올랐지. 그리고 내 생업의 현장에서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따라준 어린 벗들, 들꽃모임 ‘화사들’과 나무모임 ‘생명의숲’과 문단의 여러 인연들이 떠올랐어. 그 한 사람 한 사람과 나누었던 향그러운 눈빛을 어찌 내가 잊을 수 있겠어.
나무야, 그런데 왜 너를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불러 세웠느냐고? 알면서도 너는 짐짓 다시 묻는구나. 그래, 나무야, 바로 너였어. 내가 가장 오랫동안 우러르며 따랐던,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기대고 있는 존재가 바로 너니 그럴 수밖에. 오죽하면 내가 첫 아이의 이름자에 ‘나무 수(樹)’를 넣었겠어. 그리고 우리 네 식구 인터넷 아이디의 돌림자로 ‘tree’를 쓰겠어.
나무야, 사실 너는 나만의 주인이 아니라 이 초록별 지구의 주인이야. 네가 지구의 주인이라는 근거를 나는 여럿 가지고 있어. 이 지구에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도록 일궈낸 주역이 바로 너였잖아. 먼 옛날, 그러니까 태초에 네가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와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너의 날숨으로 지구의 공기를 채워주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생태계가 꾸려졌겠어. 또 이 지구가 ‘초록별’로 불리는 것도 누구 때문이겠어. 요일 이름에도 다 나와 있어. 네가 지구의 주인이라고. 일요일은 해, 월요일은 달, 화요일은 불, 수요일은 물, 목요일은 나무, 금요일은 쇠, 토요일은 흙이잖아. 이 일곱 가지 가운데 생명을 지닌 존재는 너뿐이야. 바로 너를 지구 생명체의 대표로 내세우고 있는 거지. 요일 이름의 유래가 본래 이런 것이 아니라고 남들은 우기겠지만 나는 이렇게 믿고 있어.
나무야, 그러고 보니 내가 시인의 꿈을 처음 마음에 새긴 것도 너 때문이었어. 지금도 또렷이 생각나. 충남 논산시 부적면 부황리 164번지, 여기가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잖아. 초등학교를 마치고 읍내 중학교로 기차통학을 할 때, 역에서 내려 신작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야 했지. 그 길 따라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고. 중학교 2학년 가을 어느 해질녘이었지. 그날따라 그 미루나무의 행렬을 내내 따라 걷고 싶었어. 하염없이 걷고 걸어서 아스라이 먼 그 어떤 곳에 닿고 싶었어. 그리곤 불현듯 나는 장차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어. 일순에,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솟아나온 생각이었지만, 내 생의 닻이요 덫인 시가 철커덕 내려지는 순간이었어. 그 순간부터 나는 너와 함께하게 되었던 거야.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너의 이름을 뜨겁게 부를 수밖에.
나무야, 그런데 이를 어쩌지? 줄곧 너를 우러르며 살았으면서도 정작은 너처럼 살지 못했어. 자연스럽게, 보다 더 자연스럽게 살았어야 했는데….
나무야, 그동안 나의 들숨이 너의 날숨이었고, 너의 들숨이 나의 날숨이었음을 기억하자구나. 너와 나, 우리는 달디단 숨결을 서로 나눠 마셔온 사이였음을 말이야. 그리고 내가 너의 품에 안겨 저 매미처럼 목 놓아 우는 날, 이 남루를 보듬어다오.
나무야, 그럼 안녕.
나무야, 며칠 전에 이 편지의 청탁을 받았어. 인생의 마지막 순간, 그 순간에 떠오르는 가장 그리운 이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써달라는 거야. 좋다 했지. 그런데 문제는 거기 붙은 단서였어. 수신인에서 가족은 제외해 달라는 거야.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한 사람을 떠올리되 살붙이는 빼라니, 피붙이는 배제하라니. 세상에 이리 가혹한 청탁이 또 있을까?
나무야, 그런데 왜 너를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불러 세웠느냐고? 알면서도 너는 짐짓 다시 묻는구나. 그래, 나무야, 바로 너였어. 내가 가장 오랫동안 우러르며 따랐던,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기대고 있는 존재가 바로 너니 그럴 수밖에. 오죽하면 내가 첫 아이의 이름자에 ‘나무 수(樹)’를 넣었겠어. 그리고 우리 네 식구 인터넷 아이디의 돌림자로 ‘tree’를 쓰겠어.
나무야, 사실 너는 나만의 주인이 아니라 이 초록별 지구의 주인이야. 네가 지구의 주인이라는 근거를 나는 여럿 가지고 있어. 이 지구에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도록 일궈낸 주역이 바로 너였잖아. 먼 옛날, 그러니까 태초에 네가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와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너의 날숨으로 지구의 공기를 채워주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생태계가 꾸려졌겠어. 또 이 지구가 ‘초록별’로 불리는 것도 누구 때문이겠어. 요일 이름에도 다 나와 있어. 네가 지구의 주인이라고. 일요일은 해, 월요일은 달, 화요일은 불, 수요일은 물, 목요일은 나무, 금요일은 쇠, 토요일은 흙이잖아. 이 일곱 가지 가운데 생명을 지닌 존재는 너뿐이야. 바로 너를 지구 생명체의 대표로 내세우고 있는 거지. 요일 이름의 유래가 본래 이런 것이 아니라고 남들은 우기겠지만 나는 이렇게 믿고 있어.
나무야, 그러고 보니 내가 시인의 꿈을 처음 마음에 새긴 것도 너 때문이었어. 지금도 또렷이 생각나. 충남 논산시 부적면 부황리 164번지, 여기가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잖아. 초등학교를 마치고 읍내 중학교로 기차통학을 할 때, 역에서 내려 신작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야 했지. 그 길 따라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고. 중학교 2학년 가을 어느 해질녘이었지. 그날따라 그 미루나무의 행렬을 내내 따라 걷고 싶었어. 하염없이 걷고 걸어서 아스라이 먼 그 어떤 곳에 닿고 싶었어. 그리곤 불현듯 나는 장차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어. 일순에,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솟아나온 생각이었지만, 내 생의 닻이요 덫인 시가 철커덕 내려지는 순간이었어. 그 순간부터 나는 너와 함께하게 되었던 거야.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너의 이름을 뜨겁게 부를 수밖에.
나무야, 그런데 이를 어쩌지? 줄곧 너를 우러르며 살았으면서도 정작은 너처럼 살지 못했어. 자연스럽게, 보다 더 자연스럽게 살았어야 했는데….
나무야,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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