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 서예’ 보급 나선 서예가 정하건씨 |
[한겨레가 만난 사람] ‘웰빙 서예’ 보급 나선 서예가 정하건씨
추사 이래 최고인 유희강에 사사고교때 입선뒤 50년 한 길 고집
전통 넘어 우리에게 필요한 참선
진면목 알아보는 사람 늘어날 것
“학문 갈고 닦으며 거듭 정진
붓갖고 노는 경지 이르고 싶다
송천 정하건(73). 종로구 인사동 송천서실 주인.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의 글씨 선생. 조계사 일주문 현판 ‘대한불교총본산조계사’(2006년), 해인사 해암종정 비문(2008년), ‘목민심서 율기편’(2004년, 2×12m), ‘신토불이’ 제액, 윤봉길 의사 기념관 제액 등 크고 장중한 글씨로 유명하다.
고교 때부터 50년 넘게 추사 김정희, 검여 유희강을 사표로 살아온 인물. 외도는 2년 남짓 공무원 생활이 전부. 1973년 스승 검여 유희강이 은거한 뒤로, 지금의 서실을 열어 35년째다. 동아미술제 심사위원, 예술의전당 운영위원,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예부문 심사위원장, 서울서예대전 추진위원장, 한국서가협회 회장과 명예회장을 지냈다. 최근 “서예는 웰빙이다”는 취지로 새롭게 서예 보급운동을 펴고 있다.
‘웰빙 서예가’ 정하건씨 “서예는 현대인 마음 다스리는 최고급 수양”
“얼마 전 어머니와 딸이 찾아왔어요. 딸한테 서예를 가르쳐 달라는 거예요. 딸이 어머니한테 그러더군요. 왜 시대에 뒤떨어진 서예를 하라고 들볶느냐고. 그래서 이런 말을 해줬어요.
전공을 한다거나 서예학원을 차린다면 나처럼 고리타분하고 못 살 거다. 하지만 취미로 한다면 가장 앞선 현대인이 될 거다. 요즘 웰빙 웰빙 하는데 서예가 진짜 웰빙이다. 정신 맑아지고, 몸도 좋아지고. 우리가 2천년 전부터 즐겨온 최고급 수양이다. 잘 쓰고 못 쓰고는 중요하지 않다. 하느냐 않느냐가 중요한 차이다. 또래를 봐라. 영어·인터넷·디엠비 휴대폰, 서로 뭐가 다르냐. 서예를 하나 더 한다면 가장 튀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요. 그 친구 요즘 잘 나와요.”
첫 마디부터 준비된 논리다. 35년 동안 서예세계를 지켜오면서 서예가 교과 과정에서 빠지고,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외면하는 등 바닥으로 추락하는 경험을 했던 그는 요즘 서실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서예를 단순히 전통유지 측면에서 봐서는 안 됩니다. 서예야말로 우리가 잊어버렸던 진짜 참선이고 웰빙입니다. 지금보다 형편들이 더 나아지면 서예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사람이 늘어날 것입니다.”
송천의 작품 세계를 꿰어도 바닥에 깔린 한을 읽어내는 이는 많지 않다. 그가 서예계에 첫발을 들인 것은 고교 때인 1957년. 한글 〈기미독립선언서〉로 국전에 입선했다. 그 이후는 가시밭길. 한글로 여러 차례 출품을 했지만 낙선을 거듭했다. 알고 보니 한글 심사는 여초(김응현)와 소전(손재형)이 하는데 자기 제자 이외의 작품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는 것. 한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검여 유희강을 찾아가 문하에 들었다. 검여는 추사 이래 가장 뛰어난 서예가로 치는 이. 술을 좋아해 호방한 그는 반신불수가 되면서 서예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지만 불굴의 의지로 재기해 고졸한 왼손글씨의 세계를 열었다. 하지만 그가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제자들은 앞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했다. 송천은 특선 다섯 번으로 국전 추천작가가 되지 못하고 20년에 걸쳐 15회 입선을 해야 하는 길을 걸었다. 자기 문하로 오라는 다른 유파 원로의 권유를 뿌리쳤기 때문.
외골수 기질은 우이동에 마련한 ‘구봉루’에 얽힌 사연에서도 드러난다.
“예술하는 사람은 술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술을 못 하는 체질인데 실험을 했어요. 술을 마신 양에 따라 글씨가 어떻게 달라지느냐는 …. 활달해지기는 하지만 정확도가 떨어지더군요. 술의 호방함만 취하면 되지 않느냐. 나는 술 대신 자연과 산에 취하겠다. 그래서 여기로 온 겁니다.”
4·19 국립묘지 근처의 구봉루 3층 창문 밖으로 북한산·도봉산·수락산의 아홉 봉우리가 들어온다. 산의 정기를 흠뻑 받아들일 수 있는 위치다. 1975년 작은 집을 장만하고 10여년 뒤 매물로 나온 옆집을 사고 5년 이상 돈을 모아 1992년 현재의 집을 지었다. 그가 생활하는 3층 서재는 작은 침실을 제외하고는 전체를 텄다. 벽을 따라 사방이 천장까지 올린 책장. 서예·그림·한학과 서예에 관한 책, 오래된 탁본과 법첩, 옛 현판, 각종 벼루와 먹, 그리고 전국에서 모아들인 수석. 창틀에는 난이 볕을 쬔다.
예서 작품 중암첩장(重巖疊 :겹겹이 우뚝 솟은 산봉우리, 1995년작)은 늙은 소나무 둥치 같기도 하고 돌덩어리가 겹쳐 쌓인 듯하다. 특히 장 자의 마지막 획이 깎아지른 절벽 같다. 우이동 이곳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작품이다. 서예를 위한 맞춤집도 오랜 계획에 따라 준비된 셈이다.
“산천 정기로만 되는 게 아니죠. 학문을 갈고닦고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는 아침에 정한수를 뜨는 것으로 하루를 열고 저녁에 그릇을 부시는 것으로 닫는다. 신선한 물처럼 맑게 시작하고 미끌미끌해진 물을 버리듯이 세속에 부대껴 탁해진 정신을 비우겠다는 의지다. 그래야 추사와 비슷해지지 않을까. 책상에는 추사의 영정이 놓여 있고 곳곳에 추사의 글씨가 걸려 있다. 추사와 검여의 힘차고 웅강한 글씨를 모체로 청경한 맛을 넣겠다는 게 평생의 꿈이다. 북비(北碑)와 남첩(南帖)을 아우르겠다는 것.
“마라톤에서 마지막 스퍼트가 중요합니다. 저는 65살 이후를 그렇게 정했어요. 제 글씨를 보고 딱딱하다고 하는데, 부드러운 초서는 남겨두었어요. 골인지점에 이르면 붓을 갖고 노는 경지가 되겠지요.”
글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