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실화> 6월호 실린 것인데, 당시 탐사보도 전문필자로 활동했던 김태운의 글이다. 지용이 거제포로수용소에 갇혔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그 실체를 기록한 것은 이 글이 유일하다. 지용이 포로가 되는 과정은 물론 모윤숙 등의 수소문에도 포착되지 않은 이유가 소상하게 담겼다.
시인 정지용(鄭芝溶·1902~?)은 어찌 서울을 버렸는가? 한국전쟁 당시 풍문으로만 나돌던 정지용의 거제포로수용소 생활의 증언을 담은 글이 발견됐다. 나이 50줄을 바라보던 지용이 인민군의 문화공작대 요원으로 낙동강전투에 강제 투입됐다 생포돼 박창현(朴昌鉉)이라는 가명으로 포로생활을 했다?것이 골자다.
시사 종합월간지<실화(實話)> 1954년 6월호에 실린 ‘본지 독점-포로 되었던 시인 정지용, 그의 이북행 비화’는 이 같은 감춰진 얘기를 담고 있어 주목된다. 필자인 김태운(金泰雲)은 경향신문 기자를 지낸 후 탐사보도 자유기고가로 필명을 날렸던 인물이다.
김태운의 글은 <신태양> <실화> <법정> 등 간행물에서 자주 보인다. <실화>는 당시 최고의 월간지 <신태양>(1949년 3월 창간해 1959년 6월까지 80호 펴냄)이 펴낸 자매지로, 1953년 10월 창간해 1965년 5월까지 권위 있는 종합시사지로 이름을 날렸다.
글의 모티프는 당시 예술인들이 즐겨 찾던 명동의 명소 ‘모나리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던 몇몇 사람이 문득 “지용은 어찌 됐을까”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필자 김태운은 글 말미에 ‘시인 이활과 반공포로 김동식의 증언을 통해 글을 완성한다’고 토를 달아 이 글이 픽션이 아님을 밝혀 놓았다.
휴전 후 서울에 지용이 나타나지 않자 그의 행적을 두고 온갖 소문과 음해성 말들이 난무하는 터였다. 그 핵심은 두 가지. 하나는 북의 붉은 치하에서 자수하러 갔다 체포됐고 이후 북으로 끌려가다 폭격을 맞아 죽었다는 주장, 다른 하나는 전쟁 전 월북했다 내려온 임화 등을 만나 친구의 의리를 배신할 수 없다는 논리에 눌려 자진월북했다는 설이다. 하지만 치열한 논쟁에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김태운은 정지용의 행적을 놓고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며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고 있다. ▷다른 좌파 문인들과 달리 한사코 북(北)으로 가지 않았던 지용이 6·25 때 자수하고 전향 ▷좌파 문학가동맹이 한국전쟁 때 재남(在南-남에 잔류하던 문인)파와 보련(保聯-보도연맹, 1949년 좌익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한 반공단체, 정식 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다.
1949년 말 무려 30만 명이 가입했다)계를 주축으로 결성한 문화공작대에 소속 ▷문화공작 임무를 받고 7월 낙동강전투에 강제 투입 ▷ 8월 왜관 인근 ‘트리 오 트리’ 전투에서 인민군이 패퇴하면서 유엔군에 생포 ▷군속 노무자 박창현이라는 가명으로 거제포로수용소로 이송 ▷소제부 거쳐 취사반장 생활하며 술과 번민으로 허송세월 ▷ 북행이냐 남 잔류냐의 귀로에서 고뇌하다 자신의 죗값을 치를 방도가 없다고 판단해 북 선택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당시 시인 모윤숙이 정지용을 찾기 위해 거제포로수용소를 뒤지고 다녔다는 얘기와 맞물려 새로운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정지용이라는 본명이 아니라 박창현이라는 가명으로 포로생활을 했기에 모윤숙은 ?끝내 그를 찾아낼 수 없었고, 결국 우리는 그를 잃었다는 점이다.
필자는 당시 북행을 택했던 영자 포로 명단에서 1933년생 강원도 신고산 출신 ‘Pak Chang Hyun’(포로번호 0098017)이 있음을 확인했다. 지용이 가명으로 포로가 되면서 출생연도까지 거짓으로 기록한 것일까? 하지만 그가 정지용인지 여부를 구체적으로 밝힐 길은 없다.
정지용이 포로가 됐다는 주장은 몇몇 군데서 발견되지만 그 실상을 드러내는 데는 모두 실패했다. 최태응은 ‘납북문인 정지용의 비극’(<사상계> 1962년 12월호)이라는 글에서 ‘정지용이 강제 납북돼 영어 선전방송 일을 하다 유엔군에 붙들려 갔다는 얘기가 있다’며 ‘남쪽의 거제포로수용소에서 그를 보았다는 소문이 귀를 의심케 했다. 더 이상의 풍문 확인은 불가능했다’고 썼다.
시인 이근배의 글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정지용’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포로설’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휴전이 되던 해인 1953년 중학생인 나는 대중잡지에서 모윤숙이 정지용을 구하기 위해 거제포로수용소에 가서 명단을 모두 뒤지고 북송포로 명단에서도 확인하려고 했지만 끝내 못 찾은 안타까움을 마치 떠나간 연인을 부르듯이 절절하게 쏟아내는 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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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련의 시건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지?<이북통신>은 1950년 1월호에 지용의 글을 실었다. 친구 상허(尙虛) 이태준의 서울 복귀를 염원하는 내용이었다.
'애초에 잘못할 계획이 아니었을지라도 결과가 몹시 글러지고 말았으니 지금도 늦지 않았다. 조국의 서울로 돌아오라. … 빨리 빠져나올 도리 없거든 조국의 화평무혈통일을 위해 끝까지 붓을 칼 삼아 싸우고 오라.’
서울 휘문의숙(휘문고의 전신)을 나온 지용은 일찍 월북한 이태준의 1년 선배요, 역시 월북한 시인 오장환의 스승이었다. 1929년 일본 교토(京都) 도우시샤(同志社)대 졸업논문은 ‘윌리엄 블레이크 시의 이미지(Imagination in the poetry of William Blake)’. 귀국 후 모교인 휘문고 영어 교사에 이어 이화여전 강사, <경향신문> 주간, 동국대 강사 등을 지냈다. 당시 지용은 최고의 시동인지 <문장> 등에 주옥 같은 시를 쏟아냈으나 <문장>은 1941년 4월 일어 사용 거부로 폐간됐다.
“임화는 내 친구, 나는 그를 미워할 수 없어!”
시인 윤동주가 1942년 지용의 체취가 남은 도우시샤대 영문과에 편입한 것은 또 다른 인연의 시작이었다. 윤동주가 유학중 사상 불온,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돼 1945년 후쿠오카(福岡)형무소에서 옥사한 후 유작 <쉽게 씌어진 시>가 1947년 당시 정지용이 편집국장으로 있던 <경향신문> 2월13일자에 실렸다. 게다가 1948년 1월 유고 31편을 묶어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정지용이 서문을 썼다.
지용이 극심한 이념 갈등을 겪은 것은 1945년 말 좌파 계열의 조선문학동맹(뒤에 조선문학가동맹으로 개명)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다. 하지만 그는 적극적인 활동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용은 <경향신문>을 나온 후(1947년 7월 무렵) 불광동 녹번리에서 장남 구관(求寬) 씨와 함께 아들이 야구공을 만들어 번 돈과 인세로 생활하면서 살았다. 그러다 1950년 5월7일 <국도신문>에 기행문 <남해오월점철(南海五月點綴)> 연재를 시작했다. 그러다 서울에서 ‘붉은전쟁’을 맞았으며 6월28일자를 끝으로 그의 글과 이름은 우리 곁에서 종적을 감췄다.
기자 출신 소설가 고 최태응이 ‘납북문인 정지용의 비극’(<사상계> 1962년 12월호)에 쓴 글을 잠시 인용해 보자.
“지용은 조선문학가동맹 옛 친구이면서 인민군을 따라 남으로 종군한 임화·이원조·김남천·안회남·박태원·김사량 등 문화공작대 문우들을 만났다. 독설가요 핀잔과 기지를 지닌 참을 수 없는 비판주의자 정지용은 임화·이태준 등을 향해 ‘우쭐거리기 좋아하는 한심한 놈들, 네놈들이 건드럭거리는 꼬락서니는 돼먹지 않았지만 임화부터 천성이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과 반생 동안이나 얽힌 우정을 저버릴 수 없다’하며 ‘역시 임화는 내 친구야, 나는 임화를 미워할 수 없어!’하며 어정거리다 술을 내라, 밥을 내라 하던 끝에 끝끝내 그들을 따라 북으로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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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이 지리멸렬 패주에 앞서 보따리를 싸는 줄도 모른 채 지용은 북으로 갔다. 평양을 구경하고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자강도로 실려간 다음 정지용을 위해 짜였던 불행과 비극은 어느덧 서곡을 젖히고 당장 걷잡을 사이도 없이 공산당식 벼락과업으로 이어졌다. … 눈앞에 던져진 문서를 보는 순간 이 시인은 그만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오르는 듯 질린 입술을 파르르 떨었으리라.”
최태응의 글을 조금만 더 읽어보자.
“‘이걸 영문으로….’ 어학이 유죄였거나 말았거나 그 원고라는 것이 첫 장 첫 구절부터 ‘미 제국주의’로 출발해 욕설 비난 악담 중상으로만 가득 찬 내용 아닌가? 단지 번역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놈들은 그 자리에 녹음기를 갖다 놓고 실감있게 고함쳐 읽으라고 했다. 유창한 발음이었는지는 모른다. 허나 그것은 정지용의 울음을 거쳐 나오는 애달픈 부르짖음이었으리라.”
이렇게 쓴 다음 최태응은 “추측이 허락된다면 휴전에 앞서 지용은 사실상 그의 조로와 사변 전부터 지녔던 해소 및 영양실조로 이미 사경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남쪽의 거제포로수용소에서 그를 보았다는 소문의 확인은 불가능했다. 다만 패전 후 북한에서 박헌영의 남로당계와 월북계가 함께 숙청당하고 문맹 간부였던 임화·이원조·김남천·이태준 등을 미제의 스파이로 몰 때도 정지용의 이름은 오르내린 바 없고 지금까지도 잠잠하다는 사실이다.”
정지용의 내면을 알게 하는 몇 개의 기록이 있다. 우선 최태응이 <자유공론>(1970년 12월호)에 쓴 ‘속 대동강-오고 간 문인들’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출중하고 노련한 지용의 시재에도 불구하고 실로 안팎과 앞뒤가 없는 천성으로 지난날 문단에서 ‘철없는 늙은이’ ‘이해 있는 독설가’라고 일컬었다.”
이번에는 <이화 100년 야사>.
“애주가 호주가인 데다 이름까지 비슷해 학생들은 그에게 ‘정종’이라는 별명을 붙였지만 그의 시인 기질과 휴머니즘을 좋아하고 따랐다. 눈 오는 겨울밤 제자들과 마차를 타고 동대문까지 가서 넉넉잖은 월급을 털어 형제주점의 추어탕을 사주기도 하고, 가난한 학생에게는 아낌없이 도움을 주었다.”
지용은 이화여전에 재임중이던 1946년 9월 <경향신문> 창간 주간을 맡아 사실상 교수와 언론인을 겸했다. 이 대목에서 김학동은 <정지용 연구>(민음사, 1987)에서 이렇게 썼다.
마음 가녀린 지용, 서울서 살 자신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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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의 미스터리 행적은 1982년까지도 치열한 논쟁거리였다. 일본 추오(中央)대를 나와 한국문학을 전공해 동국대 대학원을 수료한 고노 에이지(鴻農映二) 가 그해 7월호 <현대문학>에 <정지용의 생애와 문학>으로 평론 추천완료되면서 이념논쟁이 불붙었다.
고노 에이지는 평론에서 지용의 납북론을 강하게 폈다. 그런데 탐사보도 전문가인 한민성이 ‘고노 에이지에게 경고한다’는 부제의 <추적 정지용>(갑자문화사, 1982년 9월)을 통해 “엄연한 사실을 거꾸로 기록하는 그 만용의 결과가 무엇인지 한번쯤 생각해 보았는가. 그것은 대한민국의 안전과 자유민의 생존에 가공할 해독인 것이다. 경고하노니, 양심이 있으면 음폐하고 조작한 사실을 정정하든지 공개사과하라!”고 했다.
이 무렵 지용의 해금 얘기가 나왔다. 큰아들 구관(求寬) 씨 등 유족이 나타나 “아버지 지용은 1950년 7월 말에 자주 드나들던 설정식 등 2~3인의 젊은이들과 한참 얘기하다 잠시 다녀온다고 나간 후 소식이 끊어졌다”는 것을 근거로 월북설의 오류를 주장했다.
당시 <한국일보> 논설위원 김성우는 <지용의 아들>(1982년 8월8일자)에서 “북한에서 살아 움직인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평양감옥소에서 폭격을 맞아 사망한 것 아닌지”라고 언급했다. 이후 1988년 지용의 시는 남한에서 해금됐다.
한국전쟁 당시 시인 김영랑은 유탄을 맞아 고인이 됐고, 소설가 김동인은 병사했다. 김수영·고원(高遠)·안동림( 安東林) 등은 포로수용소에서 남쪽을 택했다. 하지만 정지용은 영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번에 발굴된 김태운의 글은 지용에 관한 여러 대목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글에서와 같이 지용의 마지막 순간은 고통스러웠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울로 돌아와 살 수 있었으련만, 마음이 가녀린 지용이었기에 고민은 깊었다. 한 시인이 끌어안기에는 너무나 컸던 이념 갈등과 전쟁의 상흔을 되새기는 의미에서 글을 전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