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길]‘방짜’ 외길 60년 이봉주 옹
열두 대문 안의 처녀는 변할 수 있어도
이제 유기는 식기로서 요긴했던 과거의 소용가치가 거의 퇴색해버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전처럼 애용했던 관습이 다시 되살아나지 않을 것이고, 이미 유기의 시대는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여러 가지 증좌가 분명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에는 결코 놋쇠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적어도 징, 꽹과리와 같은 타악기만큼은 다른 금속으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피 속에서 북방민족의 카랑카랑한 리듬을 지워버릴 수 없는 한, 그래서 이 땅에서 농악의 울림이 사라지지 않는 한 놋쇠를 다루는 솜씨 역시 멈춰질 수는 없을 것이다(이종석 문화재전문위원).
원래는 고향에 세우고 싶었다. 평안북도 정주, 거기서 30여 리 떨어진 납청(納淸)은 그야말로 산자수려(山紫秀麗)의 별천지였다. 납청이란 이름은 이곳 사람들이 경치 좋은 곳에 세운 정자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청이 청을 불러 상청으로 한곳에 모여 하늘과 구름 사이에 한 점 속됨이 없으니 정자 밖의 모든 청마저 스스로 납래한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납청은 산간이면서도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왕래하는 큰길에 접하는 교통의 요로이기도 했다. 이런 주변 여건 속에 납청 양대(良大, 방짜유기)가 태어났다. 질 좋은 숯을 구하기 쉬운 산간마을 여건에다 교통이 편리하니 산물을 내다팔기 쉬웠다. 정주 태생의 이봉주(83·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옹은 평생을 걸쳐 이룩한 업적을 모아 고향에 방짜유기촌을 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아무리 애태워도 지금은 갈 수 없는 곳. 그는 오랫동안 납청 방짜유기의 명맥을 유지해오던 안양의 작업실을 정리하고, 2003년 문경으로 내려왔다. 문경의 수려한 산세와 지리적 여건들이 어쩌면 고향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가은에 부지를 마련하고 자신의 꿈을 조금씩 실현시켜나가기 시작했다. 현재 이 옹의 방짜유기촌이 들어선 곳은 하필이면 견훤유적지로 가는 길목이다. 가은 아차산에는 견훤이 태어났는 전설이 서린 금하굴이 있다. 자기가 태어난 곳 밖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했던 견훤의 꿈과 이 옹의 꿈 사이에는 어떤 유감성이 있는 것일까.
이옹은 납청유기의 본고장 정주 출신이지만 본격적으로 유기장의 길로 들어선 것은 오히려 해방 후 월남하고 나서부터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유기행상을 하면서 자연스레 방짜유기를 접할 수 있었지만 유기공방의 문턱이 워낙 높아 그 기술을 미처 배우지는 못했다. 유기에는 제작방법에 따라 방짜, 반방짜, 주물의 세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방짜를 최상으로 쳤다. 방짜의 경우는 납청, 반방짜는 순천, 주물은 안성이 주요 산지였다. 방짜는 78%의 순수 구리와 22%의 순수 석(상납)을 정확히 합금하여 용해된 금속괴(바둑)를 불에 달구어 메질(망치질) 등의 단조를 거쳐 만들어진다.
옛날 양갓집 마나님들은 놋점(양대공장)에 직접 찾아와 놋성기를 주문하면서 웃돈을 얹혀주며 쇠를 잘 써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때 자존심 센 방짜장들은 ‘열두 대문 안의 처녀는 변할 수 있어도 놋쇠는 변할 수 없소’라며 웃돈을 거절하곤 한껏 콧대를 세웠다고 한다. 그것은 최상급의 유기를 만들어내는 방짜장의 자존심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방짜의 제조과정에서 합금 배합의 정확성을 내세우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 납청장인의 기술과 기질을 이 옹에게 전해준 이는 동향 출신의 탁창여씨였다. 그는 38선을 넘나들며 납청의 장인들을 월남시켜 방짜유기의 명맥을 잇게 한 남한 유기의 대부 격으로 불리는 사람이었다. 1948년부터 탁씨 밑에서 유기 일을 배운 이옹은 타고난 힘과 탁월한 솜씨로 일취월장했다. 당시만 해도 유기는 대야, 양푼, 요강 등 혼수품에 꼭 낄 정도로 필수품이었으니 당연히 벌이도 좋았다. 유기공장의 제품 제조는 원대장(유기장 우두머리)의 책임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무리 대상(大商)이나 점주라 하여도 그들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었다. 그래서 원대장들이 파업을 하거나 결근을 하더라도 오히려 술대접을 하며 구슬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산림법이 강화되면서 가정의 연료가 나무에서 연탄으로 바뀌자 연탄가스에 변색이 잘 되고 보관하기 어려운 유기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옹 역시 한때 막노동이나 호떡장사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어차피 평생의 업으로 삼은 유기장의 길을 버릴 수는 없었으니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연장만은 내다팔지 않았다. 그 보답은 엉뚱한 데서 왔다. 1970년대 유신정국으로 접어들면서 집회와 시위가 늘어났고, ‘데모꾼’들이 꽹과리를 많이 찾으면서 유기장은 다시 붐을 맞았다. 각급 학교의 농악대까지 가세하면서 한 달에 꽹과리만 1500개가 넘게 팔리기도 했다.
1983년 이옹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1994년에는 지름 161㎝, 무게 98㎏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징을 만들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고, 청와대 및 아셈회의장 등에 공식 납품하면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상도’나 ‘대장금’ 같은 인기드라마의 소품으로 이옹의 유기들이 단골로 사용되었다. 문경으로 옮겨온 후에는 12만 여㎡에 달하는 부지에 방짜공장을 짓고 일을 하면서 사택과 기숙사, 전시교육관, 수련장 등을 갖춘 본격적인 방짜유기촌을 형성해나갔다. 원래 이곳에 지으려 했던 방짜유기박물관은 대구시의 지원으로 대구시 동구 도학동에 지난해 5월 문을 열었다. 처음 일부에서는 방짜유기의 전통과는 무관한 대구에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지금은 생각보다 많은 관람객이 찾고 있어 모두 긍정적으로 돌아섰다.
현재 이옹 밑에서는 조교 격인 아들 형근(50)씨를 비롯해 이수자 5명, 전수장학생 2명 등 9명이 방짜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특히 형근씨는 이옹이 1984년 눈에 놋쇠 파편이 튀는 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한 이래 다른 뜻을 모두 접고 안양의 작업장을 오가며 가업에만 전념하고 있다. 예부터 방짜유기를 제작하는 일은 ‘칠혹야반의 예술’이라고 불린다. 달빛조차 없는 한밤중, 그것도 자정부터 시작하여 먼동이 틀 무렵에야 일손을 멈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야반작업에는 반드시 5인 이상이 한 팀이 되어 협동으로 작업해야 한다. 원대장(이옹은 팔십 노구를 이끌고 아직까지도 원대장 일을 맡는다)을 중심으로 3명의 메질꾼(센망치, 곁망치, 앞망치)이 둘러서고 화덕 옆에는 풀무잡이(안풍구)가 위치한다. 분업이 아니라 완전한 협업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꾀를 부리거나 딴전을 피우면 그날 일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 철저한 협동의 정신이 최상의 유기를 만들어낸 비결일지도 모른다.
이옹의 가슴 속에는 아직도 풀어내지 못한 원이 쌓여 있다. 그가 혈혈단신 월남할 때 어머니는 자식의 손을 붙잡고 마지막 부탁을 했다. “부디 위험한 짓 하지 말고, 어떤 일이 있어도 동생들만큼은 잘 건사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때 북에 남은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고, 아홉 동생 중 둘은 벌써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전해 들었다. 납청의 수려한 자연은 어떤지 몰라도, 그 명성 높던 납청양대의 전통은 이미 맥이 끊긴 지 오래라고도 들었다. 그나마 그 맥을 잇고 있는 자신이 ‘어떡허든 고향에 가게지구’ 다시 되살리고 싶었던 꿈은 이제 생전에 이루기 힘든 일이 되어버린 듯도 하지만, 두고 온 고향에 대한 미련만은 끝내 어쩌지 못한다. 내 배운 것이라곤 유기 만드는 일밖에 없으니깐 고향에 있는 동생놈들, 조카놈들 데려다가 일이나 가르쳐 먹고살게끔 했으면 좋으련만….
방짜제품은 표면이 매끄러운 주물제품과는 달리 완제품 상태에 메자국이 은은하게 남아 있어 수공제품의 멋이 그대로 드러난다. 한 유기장의 손에는 메질 같은 삶의 흔적들이 가득한데,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한쪽 눈엔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글·사진 유성문<편집위원> rotack@lycos.co.kr
원래는 고향에 세우고 싶었다. 평안북도 정주, 거기서 30여 리 떨어진 납청(納淸)은 그야말로 산자수려(山紫秀麗)의 별천지였다. 납청이란 이름은 이곳 사람들이 경치 좋은 곳에 세운 정자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청이 청을 불러 상청으로 한곳에 모여 하늘과 구름 사이에 한 점 속됨이 없으니 정자 밖의 모든 청마저 스스로 납래한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납청은 산간이면서도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왕래하는 큰길에 접하는 교통의 요로이기도 했다. 이런 주변 여건 속에 납청 양대(良大, 방짜유기)가 태어났다. 질 좋은 숯을 구하기 쉬운 산간마을 여건에다 교통이 편리하니 산물을 내다팔기 쉬웠다. 정주 태생의 이봉주(83·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옹은 평생을 걸쳐 이룩한 업적을 모아 고향에 방짜유기촌을 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아무리 애태워도 지금은 갈 수 없는 곳. 그는 오랫동안 납청 방짜유기의 명맥을 유지해오던 안양의 작업실을 정리하고, 2003년 문경으로 내려왔다. 문경의 수려한 산세와 지리적 여건들이 어쩌면 고향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가은에 부지를 마련하고 자신의 꿈을 조금씩 실현시켜나가기 시작했다. 현재 이 옹의 방짜유기촌이 들어선 곳은 하필이면 견훤유적지로 가는 길목이다. 가은 아차산에는 견훤이 태어났는 전설이 서린 금하굴이 있다. 자기가 태어난 곳 밖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했던 견훤의 꿈과 이 옹의 꿈 사이에는 어떤 유감성이 있는 것일까.
이옹은 납청유기의 본고장 정주 출신이지만 본격적으로 유기장의 길로 들어선 것은 오히려 해방 후 월남하고 나서부터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유기행상을 하면서 자연스레 방짜유기를 접할 수 있었지만 유기공방의 문턱이 워낙 높아 그 기술을 미처 배우지는 못했다. 유기에는 제작방법에 따라 방짜, 반방짜, 주물의 세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방짜를 최상으로 쳤다. 방짜의 경우는 납청, 반방짜는 순천, 주물은 안성이 주요 산지였다. 방짜는 78%의 순수 구리와 22%의 순수 석(상납)을 정확히 합금하여 용해된 금속괴(바둑)를 불에 달구어 메질(망치질) 등의 단조를 거쳐 만들어진다.
옛날 양갓집 마나님들은 놋점(양대공장)에 직접 찾아와 놋성기를 주문하면서 웃돈을 얹혀주며 쇠를 잘 써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때 자존심 센 방짜장들은 ‘열두 대문 안의 처녀는 변할 수 있어도 놋쇠는 변할 수 없소’라며 웃돈을 거절하곤 한껏 콧대를 세웠다고 한다. 그것은 최상급의 유기를 만들어내는 방짜장의 자존심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방짜의 제조과정에서 합금 배합의 정확성을 내세우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 납청장인의 기술과 기질을 이 옹에게 전해준 이는 동향 출신의 탁창여씨였다. 그는 38선을 넘나들며 납청의 장인들을 월남시켜 방짜유기의 명맥을 잇게 한 남한 유기의 대부 격으로 불리는 사람이었다. 1948년부터 탁씨 밑에서 유기 일을 배운 이옹은 타고난 힘과 탁월한 솜씨로 일취월장했다. 당시만 해도 유기는 대야, 양푼, 요강 등 혼수품에 꼭 낄 정도로 필수품이었으니 당연히 벌이도 좋았다. 유기공장의 제품 제조는 원대장(유기장 우두머리)의 책임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무리 대상(大商)이나 점주라 하여도 그들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었다. 그래서 원대장들이 파업을 하거나 결근을 하더라도 오히려 술대접을 하며 구슬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산림법이 강화되면서 가정의 연료가 나무에서 연탄으로 바뀌자 연탄가스에 변색이 잘 되고 보관하기 어려운 유기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옹 역시 한때 막노동이나 호떡장사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어차피 평생의 업으로 삼은 유기장의 길을 버릴 수는 없었으니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연장만은 내다팔지 않았다. 그 보답은 엉뚱한 데서 왔다. 1970년대 유신정국으로 접어들면서 집회와 시위가 늘어났고, ‘데모꾼’들이 꽹과리를 많이 찾으면서 유기장은 다시 붐을 맞았다. 각급 학교의 농악대까지 가세하면서 한 달에 꽹과리만 1500개가 넘게 팔리기도 했다.
1983년 이옹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1994년에는 지름 161㎝, 무게 98㎏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징을 만들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고, 청와대 및 아셈회의장 등에 공식 납품하면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상도’나 ‘대장금’ 같은 인기드라마의 소품으로 이옹의 유기들이 단골로 사용되었다. 문경으로 옮겨온 후에는 12만 여㎡에 달하는 부지에 방짜공장을 짓고 일을 하면서 사택과 기숙사, 전시교육관, 수련장 등을 갖춘 본격적인 방짜유기촌을 형성해나갔다. 원래 이곳에 지으려 했던 방짜유기박물관은 대구시의 지원으로 대구시 동구 도학동에 지난해 5월 문을 열었다. 처음 일부에서는 방짜유기의 전통과는 무관한 대구에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지금은 생각보다 많은 관람객이 찾고 있어 모두 긍정적으로 돌아섰다.
현재 이옹 밑에서는 조교 격인 아들 형근(50)씨를 비롯해 이수자 5명, 전수장학생 2명 등 9명이 방짜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특히 형근씨는 이옹이 1984년 눈에 놋쇠 파편이 튀는 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한 이래 다른 뜻을 모두 접고 안양의 작업장을 오가며 가업에만 전념하고 있다. 예부터 방짜유기를 제작하는 일은 ‘칠혹야반의 예술’이라고 불린다. 달빛조차 없는 한밤중, 그것도 자정부터 시작하여 먼동이 틀 무렵에야 일손을 멈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야반작업에는 반드시 5인 이상이 한 팀이 되어 협동으로 작업해야 한다. 원대장(이옹은 팔십 노구를 이끌고 아직까지도 원대장 일을 맡는다)을 중심으로 3명의 메질꾼(센망치, 곁망치, 앞망치)이 둘러서고 화덕 옆에는 풀무잡이(안풍구)가 위치한다. 분업이 아니라 완전한 협업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꾀를 부리거나 딴전을 피우면 그날 일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 철저한 협동의 정신이 최상의 유기를 만들어낸 비결일지도 모른다.
이옹의 가슴 속에는 아직도 풀어내지 못한 원이 쌓여 있다. 그가 혈혈단신 월남할 때 어머니는 자식의 손을 붙잡고 마지막 부탁을 했다. “부디 위험한 짓 하지 말고, 어떤 일이 있어도 동생들만큼은 잘 건사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때 북에 남은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고, 아홉 동생 중 둘은 벌써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전해 들었다. 납청의 수려한 자연은 어떤지 몰라도, 그 명성 높던 납청양대의 전통은 이미 맥이 끊긴 지 오래라고도 들었다. 그나마 그 맥을 잇고 있는 자신이 ‘어떡허든 고향에 가게지구’ 다시 되살리고 싶었던 꿈은 이제 생전에 이루기 힘든 일이 되어버린 듯도 하지만, 두고 온 고향에 대한 미련만은 끝내 어쩌지 못한다. 내 배운 것이라곤 유기 만드는 일밖에 없으니깐 고향에 있는 동생놈들, 조카놈들 데려다가 일이나 가르쳐 먹고살게끔 했으면 좋으련만….
방짜제품은 표면이 매끄러운 주물제품과는 달리 완제품 상태에 메자국이 은은하게 남아 있어 수공제품의 멋이 그대로 드러난다. 한 유기장의 손에는 메질 같은 삶의 흔적들이 가득한데,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한쪽 눈엔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글·사진 유성문<편집위원>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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