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 이제하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보라빛 노을을 가슴에
안았다고 해도 좋아
혹은 하얀 햇빛 깔린
어느 도서관 뒤뜰이라 해도 좋아
당신의 깨끗한 손을 잡고
아늑한 얘기가 하고 싶어
아니 그냥
당신의 그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
마구 눈물을 글썽이고 싶어
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
피곤하고 피곤한 그리움이여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 시집 <빈들판> (나무 생각,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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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하 시인은 시인으로 보다는 소설을 주업으로 삼으면서 그림 영화평론 등 장르를 넘나드는 전방위 예술가이다. 그의 소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이상 문학상 수상작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또한 음유시인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조영남이 리메이크 하여 알려진 ‘모란, 동백’은 원래 그가 작사 작곡해 부른 노래이기도 하다.
이 시는 1954년 시인이 고등학교 재학시절 쓴 작품으로 당시 <학원>문학상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한때 이 나라의 문학 소년소녀들을 온통 들뜨게 했다는 이 시는 <학원>을 통해 알게 된 유경환(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바 있는)이란 친구로부터 ‘친구 먹자’는 내용의 편지를 받고 답장 형식으로 쓴 작품이다. 마산 촌뜨기가 <학원>지 사진소설의 모델로 나왔던 ‘잘 나가는’ 서울내기가 친구하자니까 흥분이 되어 연애편지 쓰듯 쓴 시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동성의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런 간절한 그리움의 정서반응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궁금증이라면 모를까 친구에 대한 그리움 치고는 좀 과하지 않을까. ‘마구 눈물을 글썽이고 싶’고, ‘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 피곤하고 피곤한 그리움’이라니 아무래도 문재의 과장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그 대상이 이성이라면 사정은 달라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는 상황이고,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 그녀가 보낸 편지 한 장에도 그리움은 한없이 증폭되어 밀물처럼 온몸에 스며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시인의 조숙한 문학적 ‘끼’가 넘친 결과라 할지라도, 독자는 시에서 느껴지는 그 순수한 마음과 낭만을 수습해 읽으면 그만인 것이다. 특히 봄 햇살 마냥 좋은 이즈음에 소리 내어 읽으면 스멀스멀 사랑과 우정에 대한 그리움이 피어오르기 딱 좋은 시다. 시를 읽으면서 누군가가 내게 보내왔던 편지를 생각하며 봄의 감미로움에 아련하게 빠져들어도 좋겠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한 장의 편지로 만삭의 그리움을 풀어낸다면 이 봄에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AC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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