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 허수경
너의 입술이 나에게로 왔다
너는 세기말이라고, 했다
나의 입술이 네 볼 언저리를 지나갔다
나는 세기초라고, 했다
그때 우리의 입김이 우리를 흐렸다
너의 입술이 내 눈썹을 지나가자
하얀 당나귀 한 마리가 설원을 걷고 있었다
나의 입술이 너의 귀 언저리를 지나가자
검은 당나귀 한 마리가 석유밭을 걷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거리의 모든 쓰레기를 몰고 가는 바람
너의 입술이 내 가슴에서 멈추었다
나의 입술이 네 심장에서 멈추었다
너의 입술이 내 여성을 지나갔다
나의 입술이 네 남성을 지나갔다
그때 우리의 성은 얼어붙었다
말하지 않았다
입술만 있었다
-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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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독일로 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해 떠난 허수경 시인은 2001년 동서문학상을 받으러 잠시 귀국한 이후 10년 만에 이 시집을 들고 다시 고국을 찾았다. 그동안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지도교수인 독일인과 결혼까지 했으며, 시집과 동시에 장편소설도 한 권 냈다.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은 판형과 디자인 등에서 여러 가지 ‘혁신적’인 모습을 띄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빌어먹을’ 혁신은 글씨가 아주 작아졌다는 것이다.
흐릿하고 난해한 시전(詩田)을 대충 훑고 지나가는데 ‘입술’에 내 입술이 포개어졌고, 단박에 지금은 물론 소멸되어 바스러진 네 조각의 붉은 입술을 추억했던 것이다. 내게도 입술은 욕망의 출구였다. 최초의 그 통로는 짧았고 서둘러 얼버무린 겉절이 성애였다. 몸이 비틀렸고 출렁였으나 이구동성(二口同聲)을 구가하진 못했다.
그녀는 사방이 더 어두워지기를 원했고 나는 좀 더 밝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산소가 많은 곳으로 가자 빗소리라도 들렸으면 그것은 나의 희망이기도 했지만 그녀도 같은 생각이길 바랬다. 나는 별똥별을 추적하고 있었고 그녀는 별똥별이 내려앉은 사막을 걷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별똥별이 떨어진 흔적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사막에서 만났다. 말은 필요치 않았고 시간은 더디 가주었다.
선풍기는 쉰 바람을 몰아쉬며 제 용도에 충실했고 거친 호흡과 비좁은 성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질러댔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읽다가 접어둔 부분에서 독서를 멈추었다. 담배를 배워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주머니 속 껌을 씹을 수는 없었다. 그녀도 몰래 침을 한번 꼴딱 삼킨 것 말고는 갈증을 다른 수단으로 해결하진 않았다. 당신을 꺼리지 않는다는 예의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후 입술의 형질은 변경되었다.
AC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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