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의 향기

[스크랩] 봄비/ 정소진

맑은물56 2011. 4. 12. 10:28

 

 

 

봄비/ 정소진

 

너를 능가할 연애 선수 아마 없지 싶다

경직된 여인의 몸을 안심시키듯

요란하게도 아니고 강하게도 아니고

낮은 목소리로 불러내는 맑은 환희

굳은 마음 푸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속속들이 놓치지 않는 달달한 애무로

얼어붙어 쌩한 고집마저 녹이는 솜씨 좀 보라지

 

네가 일으켜 세우는 저, 저 상큼한 연애세포들

너 다녀간 곳곳마다 새 생명 파릇하다

 

- 계간 <시하늘> 2011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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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서가 아주 메말랐거나 감성적 취향이 유난스러운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개의 여성들은 촉촉하게 비오는 날을 싫어하지 않는다. 특히 봄비는 여인의 감성을 자극하는 탁월한 질료이다. 시인이 ‘연애 선수’라며 추켜세울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 하나.

 

 하지만 그 봄비는 여인의 감성 뜰에만 내리는 것은 아니다. 양지의 백목련은 벌써 이울기 시작했고, 살구꽃과 벚꽃 그리고 진달래까지 제 세상 만난 듯 방창한 이때 대지를 가볍게 토닥이며 내리는 봄비는 우리의 봄날을 근원의 그 어딘가로 실어 나른다.

 

 봄비 속에 세상이 다 아늑해진다. 가뜩이나 가득한 봄기운에 솔솔 생기를 불어넣고, 지붕을 적시고, 막 피어오른 꽃망울들을 적시고, 아직 흙속에서 꼬물거리는 연초록의 싹들을 적시고서 우리 마음 깊숙이 자리한 영혼의 속옷까지 적셔준다.

 

 ‘저 상큼한 연애세포들’로 온통 마음이 다 젖었다. 그대 향한 그리움의 수문이 열려 온 몸이 다 축축하다. 비에 젖은 저 꽃가지가 움찔할 때 몸도 따라 꿈틀댄다. 구석구석 전 방위적 봄비의 애무에 혼곤히 젖어드는 건 우리들만이 아니다.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윗마을 뒷동산 살구꽃과 복사꽃도 근질근질 견디다 못해 꽃을 피울 것이다. 남녘의 눈부신 벚꽃위에는 맑은 물방울이 송알송알 맺혔다. 이렇게 가는 비바람에도 꽃잎 떨어져 봄은 더욱 질퍽해졌고 봄의 향연은 오히려 절정이다.

 

 요란하지도 강하지도 않았기에 ‘경직된 여인의 몸을 안심’시켜 ‘맑은 환희’를 불러들였나 보다. ‘달달한 애무’로 속속들이 다 녹인 후의 낙화는 새 생명을 틔우기 위한 축복된 이별이다. 꽃 진 자리마다 연둣빛 새순이 다시 빛나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

 

 생명 있는 것들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스며들어 세상을 부드럽게 하고 사랑을 깨우치고 생명의 끈을 이어주는 봄비. 너로 인해 이렇게 우리의 생명은 살아있고 마르지 않은 가슴이구나. 삶이 아직은 아름답구나. ‘너 다녀간 곳곳마다 새 생명 파릇’하구나.

 

 

ACT4

 


출처 : 현실참여 문인ㆍ시민 연대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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