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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삼백 리 성묫길 [수필과 비평 4월호]

맑은물56 2011. 4. 11. 18:30

삼백 리 성묫길

 

나의 성묘길은 고향 가는 길이며 또한 삼백 리 길이다. 그곳에는 이미 내 땅 한 평이 없었지만 아버지만큼은 고향으로 보내드리고 싶었다. 친척, 친지들이 한결같이 공원묘지나 화장을 권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일 년에 두 번만이라도 오랫동안 아버지를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오고 가며 내 자식에게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말해줄 시간도 필요했다. 무엇보다 더 필요했던 것은 살면서 힘들 때 소리 내 울어야 할 곳이 나는 필요했다. 또 기뻐 누군가에 자랑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을 때 달려갈 곳이 내겐 절실하게 필요했었다. 그래서 많지 않은 돈 오백 만원을 가지고 땅을 잘 보신다는 아버지 친구 한 분을 모시고 고향땅 언저리를 여러 번 드나들었다. 다행히 운이 좋아 고향에서 멀지 않은 양지바른 곳에 백오십 평 땅을 살 수 있었고 이듬해 봄, 벼르고 벼른 이장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소년 가장이셨다. 미처 걸음마도 배우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일제강제 노역으로 끌려가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지금의 러시아령인 사할린의 탄광에서 일을 하셨는데 안타깝게도 그곳에서 한쪽 다리를 잃으셨다. 그래서 뱃삯을 보내주면 고향으로 갈 수 있겠다는 편지를 보내셨다는데 할머니는 그 돈을 세상 어디에서도 융통할 수 없었다. 발만 동동 구르는 사이 8.15 광복을 맞았고 사할린은 공산, 소련땅이 되었다. 두 동강 난 3.8선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올 길이 막혀버리자 할아버님은 조금이라도 고향 가까운 곳에서 죽겠노라고 북한으로 가셨다니 할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평생의 비극이었다.

 

소년가장으로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하실 수 있는 일이라야 농사일이 전부였다. 누군가 일을 해야 생계를 이어갈 텐데 농사일 말고는 달리 길이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남의 땅에 소작을 해야 하는 처지였으니 지대를 내고 나면 봄의 씨앗을 남기기도 어려운 궁핍한 가계였다. 그래서 작은할아버지께서 빚을 내어 밭 600평을 어렵게 사 주셨다. 시골 읍내에서 함석 일을 하시던 작은할아버지도 살림이 빠듯하셨지만 어렵게 사는 형수와 집안 장조카를 위해선 그렇게 해야 맘이 놓이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3남 3녀를 두고 어렵게 살림 하시던 작은할머니의 원망이 심하리란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작은 할아버지는 어느 날 송아지 한 마리를 사오셨다. 얼른 키워서 땅 사준 빚을 갚으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고마운 마음에 송아지를 정말로 정성껏 키우셨다. 그래서 큰 소가 되었을때 빚이 없어지는지 알았는데 작은 할아버지는 황소를 내다 파시고 다시 작은 송아지를 사오셨다. 한 번 더 키워야 하나보다 하고 열심히 키웠더니 또 송아지를 사오시고, 삼세번이면 다 갚았겠지, 하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계속해서 송아지를 사오시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송아지가 몇 번 어미 소가 돼야 빚이 다 갚아지는지 여쭤보고 싶었지만 베풀어 준 은혜를 모르는 것 같아 결국 아무 말도 못하셨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집과 달리 자식들에게 농사일을 시키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갈수록 그립다. 온 식구가 달려들면 손쉬운 게 농사일인데 언제나 삽을 어깨에 메고 혼자 다니셨던 내 아버지, 생각건대 단 한 번도 밭일 열심히 하는 옆집 아들들을 부러워하시지 않았던 그 미련하신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삼백 리 성묘길 뿐이다. 성묘를 갈 때 나는 자가용을 타고 간다. 기차도 있고 고속버스도 많지만 아무리 차가 밀려도 항상 자가용을 타고 간다. 요즘 세상에 차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만 그래도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 옛날 송아지를 키우실 때 도시로 간 친구들이 자가용을 타고왔다고 한없이 부러워하시던 아버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켜켜이 쌓인 그리움을 어떻게 달랠까만 그런 성묘길이 삼백 리면 어떻고 오백 리면 어떤가. 갈수록 간소화 되는 시대, 요즘은 인터넷으로 차례지내는 사람도 생겼다지만 앞으로도 나는 삼백 리, 성묘길을 마다않고 갈 것이다. 송아지를 타고가는 심정으로 내 차를 타고 갈 것이다. 

출처 : 석교가 열어가는 세상
글쓴이 : 石橋/1002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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