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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해설: 혜거 스님 : 1- 10

맑은물56 2011. 3. 31. 13:44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해설: 혜거 스님

 

 

제 1 송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유가설아법 유종종상전)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피의식소변 차능변유삼)

(유식은) 아(我)와 법(法)을 가설함으로 말미암아 가지가지 현상계가 변화하는 이치를 설명한 것이다. 저 (가지가지 현상계)는 의식에 의해 변하고 이 변화의 주체(能變)는 오직 셋[심(心), 의(意), 식(識)]이 있을 뿐이다.

아(我)와 법(法)은 원래가 없는 것인데, 이것이 있는 것같이 생각되는 것은, 이것을 가정하여 설정해 놓았으니까 그러한 것인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여러가지의 모양(相)과 변화(轉)가 있게 된다.

그러한 것(彼)은 식(識 = 마음)에 의존하여 변하는 것[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 바, 이 변화하는 주체(能變)는 마음인데, 이것에는 오로지 3가지가 있을 뿐이다. 

< 해 설 >
이 유식은 부처님께서 오직 마음이 있을 뿐 무아(無我) 무법(無法)임을 설해 주신 이치를 요약해서 체계화한 것이다. 또 현상계의 모든 모습이 변화하는 이치를 아(我)와 법(法)을 가설하여 설명하고, 변하는 바 현상계의 모든 것은 의식(마음)의 작용에 의한 것이고 의식은 심·의·식 삼식(三識)뿐임을 밝혔다. 삼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 말나식(末那識), 의식(意識)이다.


이 첫 송(一頌)에서는 아(我)와 법(法)?가설일 뿐 무아·무법임을 밝히고 당초에 무아·무법이나 아법(我法)을 가설함으로 현상계의 모든 법이 변화함을 알게 했다. 이는 실상(實相)은 변하지 않음을 깨우쳐준 송(頌)으로서 아(我)와 법(法)을 비롯한 일체만법(一切萬法)은 마음에 의해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였다.

가설(假說) : 가설은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법문을 말한다. 진리(眞理)는 불언불설(不言不說)이기 때문에 현상계의 아(我)와 법(法)은 진설(眞說)할 수가 없으므로 가설이라 한 것이다.


아법(我法) : 일체만법(一切萬法)을 인식하고 분별하는 주체를 아(我)라 하고 나로부터 인식되어진 일체만법을 법(法)이라 한다. 아(我)에는 주재하는 아(我)와 상주하는 아(我)와 일체에 충만한 아(我)의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주재하는 아(我)는 주도적으로 지배하고 소유하고 분별하는 주체 곧 나라고 하는 나를 뜻하고, 상주(常住)하는 아(我)는 끊임없는 윤회를 반복하면서도 멸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나를 뜻하고, 일체에 충만한 아(我)는 법계(法界)로 더불어 하나이며 항구불변(恒久不變)하는 아(我)를 뜻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我)는 천지(天地)에 있어 천지를 주재하고 나에게 있어 나를 주재하는 아(我), 영원하여 상주불변하는 아(我), 법계로 더불어 하나인 법계일신(法界一身)의 아(我)인 진아(眞我)를 말한다.
법은 일체사물의 존재는 일정한 법칙 또는 궤범(軌範)에 의해 존폐(存廢)하므로 이를 법이라 한다. 법에는 일체만물의 법과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 등의 법이 있고 법률과 사상 등도 모두 법이라 할 수 있다.


종종상(種種相) : 종종상은 과거, 현재, 미래의 가지가지 모습, 시작도 끝도 없이 거듭 존재하는 나의 실상(實相)과 일체만법이 상대적인 인과 법칙에 의해서 존재하는 갖가지 상태를 말한다.


피(彼) : 피(彼)는 대명사로서 위의 종종상전(種種相轉)을 의미한다.


식(識) : 식(識)은 8식(八識)을 말한다. 8식을 요약하여 3식(三識)이라 한다. 8식에 탐진치가 없으면 지인(智人)이 되고 탐진치가 있으면 범부(凡夫)라 한다. 사람은 누구나 8식이 있으나 지우(智愚)의 차별과 부귀빈천의 차별이 있는 것은 모두가 마음(意識)에 의해서이다. 마음에 의해 일체만물의 명(命)이 다르고 고하장단(高下長短)의 차별이 있는 것을 업연(業緣)의 소치라 하고 업연(業緣)이 곧 마음에 의해 지어지기 때문에 일체만법이 의식소변(依識所變)이라 한 것이다.


능변(能變) : 능변은 변화의 주체를 말한 것으로 일체만물이 변천하고 인간의 운명을 주도하는 실체이니 곧 주관적인 의식을 말한다.


유삼(唯三) : 삼(三)은 삼식(三識)을 말한 것으로 심(心: 阿賴耶識), 의(意: 末那識), 식(識: 六識)을 말한다. 나를 주재하는 것이 곧 이 삼식(三識)이요, 우주만법을 주재하는 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오직 이 마음뿐임을 말한 것이다.

제 2 송

謂異熟思量 及了別境識 (위이숙사량 급요별경식)
初阿賴耶識 異熟一切種 (초아뢰야식 이숙일체종)

일송(一頌)에서 유삼(唯三)이라 말한 3식(三識)은 이숙(異熟)과 사량(思量)과 요별경식(了別境識)이다. 처음은 아뢰야식이며 이숙(異熟)이며 일체종식(一切種識)이다.

이것을 일러, 이숙식(異熟識)과 사량식(思量識)과 요별경식(了別境識)이라 한다.

그 처음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인데, 다른 말로는 이숙식(異熟識) 혹은 일체종식(一切種識)이라고 한다. ( 아뢰야식은 제8식이고, 사량식은 제7식인 말나식을 말하며, 요별경식은 제6식인 의식을 말함)

요별경식(의식)은 사람의 오관(눈,귀,코,혀,몸-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식(識)이며, 사량식(말나식)은 예지능력과 잠재능력으로 느끼는 식(識)인데 탐진치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한편 이숙식(아뢰야식)은 선악과 과보의 종자를 가진 식을 말한다.

사람이 깨어 있을 때는 6식이 작용하고, 깊은 꿈에 빠지면 6식은 꺼지고 7식이 작용하며,
육신이 죽어지면 8식만 남아서 그 8식이 종자가 되어 내생으로 연결된다.
사람의 8식인 그 종자(種子)의 결정판은, 사람이 죽는 순간, 그 순간에 갖게 되는 바로 그것이다.

< 해 설 >
이 송(頌)은 1송(頌)의 능변유삼(能變唯三)을 밝힌 것으로 제8 이숙식(第八異熟識), 제7 사량식(第七思量識), 제6 요별경식(第六了別境識) 등을 말한 것이다. 3식(三識) 가운데 첫째는 아뢰야식이니 이를 이숙식(異熟識) 또는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라고도 한다. 이 송에서는 3식의 명칭을 세워서 3식의 공능(功能)을 설명하고 제8 아뢰야식의 별칭(別稱)을 세워서 능변(能變)의 주체가 곧 마음임을 밝혔다.

이숙(異熟) : 이숙(異熟)은 제8 아뢰야식의 다른 이름으로 선악(善惡)의 인(因)을 함장(含藏)하기 때문에 종자라 하고 선악의 인(因)에 의해서 받는 과보가 다르기 때문에 이숙(異熟)이라 한 것이다. 이숙(異熟)에는 세 가지 뜻이 있으니 변이이숙(變異而熟), 이류이숙(異類而熟), 이시이숙(異時而熟) 등이다.


변이이숙(變異而熟)은 인(因)이 변하여 과(果)가 되어 성숙됨으로 변이이숙이라 하고,

이류이숙(異類而熟)은 인과가 같지 않음을 말한 것으로 선악의 원인이 무지(無智) 또는 대지(大智)로 바뀌어 성숙되므로 이류이숙(異類而熟)이라 하고,

이시이숙(異時而熟)은 인과가 동시(同時)가 아님을 말한 것으로 금생의 인(因)이 일·이생(一·二生) 또는 몇 천 생을 지나 과를 받는 것을 말한다.


사량(思量) : 사량은 제7말나식을 말한 것으로 항상 쉬지 않고 살피고 사량하고 계교(計較)하며 아애(我愛)를 집착한다. 이 7식은 8식의 인(因)을 의지하며 육근의식(六根意識)의 분별을 주도하는 중간의식(中間意識)의 역할을 한다.


요별경식(了別境識) : 요별경(了別境)은 제6식(第六識)을 말한 것으로 안·이·비·설·신·의 등의 감각기관이 눈은 보고 귀는 듣는 것처럼 각기 각각의 경계를 요별(了別)하기 때문에 요별경식(了別境識)이라 한다.

1송에서는 아뢰야식, 말나식, 육식의 총칭만을 말하고 여기에서는 3식의 역할 한계를 설명했다.
유식에서 변이를 설명하는 것은 아뢰야식 중에 함장되어 있는 십선종자(十善種子)가 성숙하면 인간으로서 천상(天上)으로 변현(變現)되고 계율을 잘 지켜 깨끗한 종자가 성숙되면 인간세상에서도 귀족으로 변현되고, 탐·진·치(貪·瞋·痴)의 종자가 성숙되면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으로 변현된다.


뿐만 아니라 아뢰야식은 종자식(種子識)이 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운명을 좌우하는 요체가 되고 제7 말나식과 제6 의식은 금생의 운명에서는 끊임없이 반복하여 역할을 하지만 내세로 연결되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말나식(末那識)과 제6 의식은 아뢰야식의 종자를 훈습(熏習)하여 업인(業因)을 함장케 하므로 육근의 감각기관과 의식 7식의 사량분별의 식(識)이 선(善)을 행하여 훈습한다면 악업의 과보로 빈천의 보(報)를 받는 중생이라 할지라도 선업의 인(因)이 되므로 아뢰야식을 변이하는 식이라 한다.

아뢰야식(阿賴耶識) : 아뢰야식은 8식이니 이숙(異熟)이라 하고 종자식이라 한다. 이를 무몰식(無沒識)이라고도 하는 것은 아뢰야식이 함장하고 있는 종자는 생사윤회에 유전(流轉)하면서도 멸몰(滅沒)되지 않기 때문이며 축장된 인은 과로 변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이숙식이라 하며, 오관(五觀)·육식(六識)·칠식(七識)·선악(善惡) 등 모든 심식(心識)의 주처(住處)가 되므로 함장식이라 한다.


제 3 송

유식(唯識)이란 마음이다. 마음을 유식이라 한 것은 마음은 마음을 통칭한 것이고 유식은 갖가지 마음의 작용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삼계는 오직 마음의 작용에 의해 존재한다 한 것이다. 유식은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설명한 사상으로서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마음을 분발하게 하는 요문이라 하겠다.

제 3 송 - Ⅰ

不可知執受 處了常與觸 (불가지집수 처요상여촉)
作意受想思 相應唯捨受 (작의수상사 상응유사수)

제8아뢰야식은 그 작용을 알 수 없고, 집수(執受)와 처(處)와 요(了)의 작용도 알 수 없다. 항상 촉(觸)과 작의(作意)와 수(受)와 상(想)과 사(思)로 더불어 상응하되, 오직 사수(捨受)로만 한다.

< 해 설 >
이 송(頌)은 마음의 주체가 되는 제8아뢰야식의 작용을 설명한 송(頌)이다.
제8 아뢰야식은 작용이 미세하고 광대하여 범부의 식견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가히 알 수 없다는 뜻으로 불가지(不可知)라 하였으며, 가히 알 수 없는 것은 집지(執持)하고 수용(受容)하는 자리와 그 종자인 집수(執受)의 공능(功能)이 불가지이며, 지니고 있는 마음자리와 수용할 수 있는 마음자리 처(處)도 또한 무한해서 불가지이며, 분별構?요지(了知)하는 요(了)도 또한 불가지함을 말한 것이다.

 

8식은 심소(心所: 마음자리)가 다섯인데 이를 5변행심소(五行心所)라 한다. 5변행심소는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이며 이는 5수(五受: 苦·樂·憂·喜·捨) 중에서 오직 불고불락(不苦不樂)하는 사수(捨受)와 상응할 뿐이다.

8식을 장식(藏識) 또는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능장(能藏), 소장(所藏), 아수집장(我受執藏)의 3장(三藏)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능장(能藏)이란 8식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비가 무한함을 의미하고, 7식(七識)이 선악의 업인을 지은 것을 8식이 훈습하여 깊이 저장했다가 반드시 보응을 받기 때문에 이를 훈습종자라고도 한다. 훈습종자는 안에서 인(因)으로 있다가 바깥 연(緣)을 기다려 과(果)를 받는다. 이러한 인의 싹이 아직 과보를 받지 않은 것들이 무량무수로 존재하며 모두가 8식에 보장(保藏)되어 있다가 결코 하나도 누락됨이 없이 과보를 받는다. 이렇듯 종자를 보존하는 힘을 능장이라 한다.


소장(所藏)이란 7식이 선악인과를 지은 것이 8식에 잠장(潛藏)될 뿐 8식이 직접 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소장이라 한다.


아수집장(我受執藏)은 집장(執藏)이라고도 하는 바 7식에 의해 훈습된 것을 8식이 지니고 있는 장식(藏識) 곧 지식·관념 등을 상주불변하는 나의 것으로 집착하여 아집(我執)·아견(我見)·아만(我慢) 등의 탐애(貪愛)를 일으킴을 말한 것으로 7식의 입장에서 집장 또는 아수집장이라 한다.

7식이 선악의 업인을 지어서 8식이 훈습하여 저장했다가 반드시 보응을 받게 하는 선악보응(善惡報應)의 인(因)에 대하여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는 6가지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① 찰나멸의(刹那滅義) : 멸이란 멸생(滅生)을 의미한다. 핵(核)이 멸하여 나무가 되듯이 전자(前者)가 멸하여 후자(後者)가 생한다. 따라서 사람이 전자의 인이 씨가 되어 태어나면서 씨인 전자의 8식은 멸하는 것이다.
② 과구유의(果俱有義) : 과구유(果俱有)는 전8식(前八識)의 핵이 이미 멸하고 새로 태어난 생명체에는 전8식의 원인이 하나도 소멸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 과구유라 한 것이다.
이와 같이 8식이 함장(含藏)하고 있는 업인이라 하더라도 모두 소멸하여 후세로 연결되지 않는 식이 있고, 하나도 소멸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식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곧 악의 업인은 소멸하고 선의 업인은 남길 수 있는 길이며 이 길을 닦는 것을 수행이라 한다.
③ 항수전의(恒隨轉義) : 항수전(恒隨轉)은 전8식의 인이 현행(現行)의 과보를 다하면 다음의 다른 인을 세운다는 뜻이다.
④ 성결정의(性決定義) : 성결정(性決定)은 선인선과(善因善果)·악인악과(惡因惡果)가 결정적으로 변할 수 없음을 뜻한다.
⑤ 대중연의(待衆緣義) : 대중연(待衆緣)은 제8식의 종자가 인으로 있다 해도 이에 상응하는 연이 없으면 생할 수 없고 언제까지라도 연이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⑥ 인자과의(引自果義) : 인자과(引自果)는 8식 중 낱낱의 종자는 자신의 과보만을 인도(引導)하여 생하기 때문에 보시의 인은 부귀의 과를 받고 불살생의 인은 장수의 과를 받는다는 뜻이다.


이상의 8식의 작용은 다양함이 무궁하고 정밀함이 미묘해서 문물(文物)을 창조하고 세상을 주도하게 된다. 이렇듯 미세하고 광대한 8식 곧 마음자리를 맑고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유식을 설명하여 수행의 정문을 삼게 한 것이다.

8식의 무한한 작용은 7식에 의해 훈습되어 존재한다. 훈습에는 능훈(能熏)과 소훈(所熏)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능훈(能熏)에 네 가지의 성질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① 생멸성(生滅性) : 찰나 생멸하는 본체가 상주하여 영원하지 않으므로 전변(轉變)하는 작용에 의해서 선도 되고 악으로도 될 수 있기 때문에 지금의 심성(心性)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
② 승용성(勝用性) : 승용성(勝用性)은 능훈(能熏)의 작용이니 7식의 작용을 인식하여 분별하고 연려(緣慮)함을 말한다.
③ 증감성(增感性) : 증감성(增感性)은 증진(增進)하고 감쇄(減殺)함을 말한 것으로 선이 증진되면 악이 감쇄되고 악이 증진되면 선이 감쇄됨을 말한다.
④ 화소훈성(和所熏性) : 화소훈(和所熏)은 능훈(能熏)의 7식과 소훈(所熏)의 8식이 화합하여 훈습되기 때문에 일컬어진 말이다.


7식을 능훈(能熏)이라 하고 8식을 소훈(所熏)이라 하는 것은 7식이 업인을 직접 만들기 때문이며 8식은 7식이 만든 업인을 소장하기 때문이다. 직접 업인을 짓는 7식의 능훈과 7식이 지은 업인을 소장하는 8식의 소훈이 각각 네 가지의 성질을 갖추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① 견주성(堅住性) : 8식은 7식이 지은 업인을 소훈하되 처음부터 불변하고 부동하여 영구히 견주(堅住)하므로 7식의 훈습을 받아들일 수 있으므로 견주성이라 한다.
② 무기성(無記性) : 8식은 그 성질이 비선비악(非善非惡)이어서 7식의 각종 훈습을 받아들이므로 무기라 한다.
③ 가훈성(可熏性) ; 8식은 그 성품이 유연하여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7식이 지은 모든 훈습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가훈성이라 한다.
④ 화능훈성(和能熏性) : 7식의 능훈성(能熏性)과 화합하여 7식이 지은 선악시비 등의 모든 업인을 훈습하여 지니므로 화능훈이라 한다.

제8 아뢰야식은 마음의 주체이며 능연(能緣)이며 경계를 요별(了別)할 수 있는 식(識)의 주처(住處)이다. 사람마다 식이 달라서 이해하는 것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면서 추위와 더위 등을 같이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천지가 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천지로 더불어 공유하면서도 또한 개체가 분명하기 때문에 만물과 함께 공유공락(共有共樂)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각기의 세계를 이루는 불가사의한 묘력(妙力)을 지니는 것이다. 이렇게 미묘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아뢰야식은 소연(所緣)에 의해서만이 능연심(能緣心)을 낼 수 있어서 경계가 없다면 마음의 작용은 일어날 수가 없다. 아뢰야가 경계를 받아들여 집수(執受)하는 데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① 모든 중생의 신체는 아뢰야가 투입(投入)되어야 생(生)이라 하며, 이를 생명의 시작이라 하고, 아뢰야가 떠날 때를 사(死)라 하며, 이것이 생명의 끝이다. 오로지 생명의 주체는 아뢰야뿐이다.
② 아뢰야는 생명이 씨(種子)로서 본래부터 존재하는 종자와 새롭게 훈습해서 생기는 종자가 있고 그 종성(種性)의 변화 또한 무량해서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무량한 종자가 모두 아뢰야에 의해 훈습되고 아뢰야에 의해 보존되다가 때를 기다려 연(緣)이 구족되면 보응을 받게 된다.
모든 중생의 어리석음과 지혜, 선과 악의 종자가 아뢰야에 의해 구별지어지므로 아뢰야의 실성을 깨닫는 것이 인간의 최우선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제 3 송 - Ⅱ

不可知執受 處了常與觸 (불가지집수 처요상여촉)
作意受想思 相應唯捨受 (작의수상사 상응유사수)

전편에서 제8식의 정상(情狀)을 요약해서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송문(頌文)의 뜻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불가지(不可知)라고 한 3자(三字)는 가히 알 수 없다는 뜻으로 8식이 지니고 있는 집수(執受)와 8식의 자리[處]와 요별[了]을 가히 알 수 없음을 의미한다.


집수(執受)라는 말은 지니고 수용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지니고 수용하는 것을 알 수 없다 한 것은 8식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능력과 8식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 한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처(處)는 소처(所處)로서 마음자리를 말한다. 이 자리는 오묘하고 불가사의해서 그 실처를 범인은 알 수 없음을 뜻한다. 요(了)는 요별(了別)이니 곧 분별해서 아는 힘이다. 이 또한 극미하고 미세하며 광대하고 무변하여 일체만물의 장단호오(長短好惡)를 가려내는 능력으로서 역시 범인의 소견으로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불가지집수(不可知執受) 불가지처(不可知處) 불가지요(不可知了)의 뜻을 요약해서 불가지집수처요(不可知執受處了)라 한 것이다.

이를 다시 세분해서 한 단씩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불가지(不可知) : 가히 알 수 없다고 한 이 말은 집수(執受)와 처(處)와 요(了)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고 집수(執受)와 처(處)와 요(了)는 모두 8식의 경계[所緣境]와 움직임[行相]으로서 상응하여 인식하는 작용이다. 이러한 작용을 요달해서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불가지(不可知)라 말한 것이다.


집수(執受) : 지니(執)고 수용(受)한다는 뜻이다. 집수(執受)의 한계가 무한해서 이를 알 수 없는 8식은 마음의 주체이며 스스로 경계를 요별할 수 있는 능연(能緣)이라 한다. 8식의 능연인 집수(執受)가 있으므로 소연(所緣)의 경계를 인해서 마음이 생길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듯 불가사의해서 가히 알 수 없는 8식의 집수(執受) 능력은 8식이 스스로 지니고 있는 마음과 밖에서 반연해 오는 경계가 일치해서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집수(執受)라 한다.


처(處) : 불가지처(不可知處)인 처(處)는 아뢰야식이 작용하는 처소(處所)로서 안으로는 그 공능을 알 수가 없고, 밖으로는 산하대지(山河大地) 우주만유(宇宙萬有)가 8식의 소연처(所緣處)가 아님이 없다. 8식이 바깥 대상을 반연함에 각각 업에 따라 감수(感受)하는 것이 동이(同異)함이 있으니 이를 공업(共業)과 별업(別業)이라 한다.


요(了) : 불가지요(不可知了)인 요(了)는 요별(了別), 변별(辨別), 분별(分別) 등의 뜻으로 객관적인 정황을 분별하는 견분(見分)의 인식작용을 의미한다. 낱낱의 식(識)에는 보는 것[見分]과 보이는 것[相分]이 있어서 아뢰야도 역시 식(識)이므로 견분(見分)이 있고 요별(了別)이 작용이 있다. 아뢰야식은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에 속하기 때문에 움직임(行相)이 미세하여 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범부는 선·악을 일으키는 육식(六識)으로 작용을 하므로 생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윤회를 반복하게 된다. 6식과 7식의 작용이 쉬어서 생사가 끊어진 자리가 아뢰야이므로 6식과 7식으로 마음을 쓰는 중생은 8식의 실처(實處)와 분별의 한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불가지처요(不可知處了)라 한 것이다.


8식은 선·악에 물들지 않으므로 무부무기(無覆無記)라 하고 무부무기이기 때문에 업혹을 일으키지 않고 오직 5변행심소(五遍行心所)만이 상응한다. 무소불능(無所不能)의 변행(遍行)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이를 4일체(四一切)라고 한다.

① 변일체성(遍一切性) : 선(善)·악(惡)·무기(無記) 삼성에 두루함을 말한다. 8식은 선·악에 물들지 않으므로 무부무기라 하고 다시 여기에서 선·악·무기에 두루한다 함은 8식이 모든 심소의 모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8식은 선·악의 씨를 지니지 않으므로 선·악과 더불어 상응하지는 않는다.
② 변일체지(遍一切地) : 모든 경계에 두루한다는 뜻으로 변삼계구지(遍三界九地) 또는 변삼지(遍三地)라고도 한다. 이는 8식이 삼계에 두루 응생(應生)할 수 있다는 뜻이다.
③ 변일체시(遍一切時) : 마음 곧 아뢰야식이 존재할 때 모든 곳 모든 때에 두두함을 말한다.
④ 변일체구(遍一切俱) : 8식은 육도(六途)에 능입(能入)하므로 범부업을 지으면 범부가 되고 보살업을 지으면 보살도를 이루기 때문에 일체구(一切俱)라 한다.


위에서는 8식의 공능(功能)인 집수(執受), 처(處), 요(了)를 요약했고, 다음엔 8식의 심소(心所)인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의 5변행심소(五遍行心所)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촉(觸) : 촉은 6근(六根), 6식(六識), 6경(六境), 3법(三法)이 화합하여 감각을 일으킴을 말한다.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는 촉(觸)은 삼화(三和), 분별(分別), 변역(變易)이라 설명하고 있다. 삼화(三和)는 육근, 육경, 육식이 화합하여 의식의 감각이 일어남을 뜻하고, 분별(分別)은 감각이 일어난 후에 분별이 일어남을 뜻하고, 변역(變易)은 분별의 상황에 따라 변역이 있게 됨을 말한 것으로 이는 촉(觸)이 심소의 첫째가 되어 모든 심소의 의지처가 됨을 뜻한다.


작의(作意) : 작의는 반응을 뜻한다. 근(根), 경(境), 연(緣)이 삼화를 이루어 분별하고 변역하는 반응을 일으키고 경각심을 내어 주의하고 삼가는 등 경계에 대해서 한번 재고(再考)하는 심소이다.


수(受) : 수는 수용의 뜻이다. 순경(順境)과 역경(逆境) 비순비역(非順非逆)의 경계를 수용한다는 말이다.


상(想) : 상은 앞의 경계를 헤아려서 각종 이름[名言]을 붙여 개념을 존재하게 하는 심소이다.


사(思) : 사는 마음으로 하여금 움직이고 작위하게 하는 심소로서 행동 이전의 사상이며 사고력이며 선·악을 일으켜 모든 업을 짓게 하는 심소이다.


이상의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는 일체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변행심소(遍行心所)라 하고 변행심소이기 때문에 제8식(第八識)과 7식(七識), 6식(六識) 등 모든 식(識)과 더불어 상응하여 마음을 일으킨다. 그 중에서도 제6식과 상응할 때 가장 적극적으로 작용하므로 스스로 생각하고 분별하며, 살피고 판단하며, 수용하고 배척하며, 동작을 일으키고 정지하며, 차고 더움을 분별하며, 견고하고 부드러운 것을 가려내는 작용을 약간의 오차 없이 충실하게 해낸다.


그러나 7식과 전5식(前五識)으로 더불어 상응할 때에는 상응만 하고 작용은 거의 미세하다. 가령 말하자면 눈으로 볼 때에는 눈이 볼 뿐이고, 귀로 들을 때에는 귀가 들을 뿐이고, 코로 냄새 맡을 때와 입으로 먹을 때, 몸으로 촉감을 느낄 때도 역시 상응해서 알 뿐 별도의 작용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5변행심소(五遍行心所)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계에서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자리가 6식이기 때문이다.
특히 제8식(第八識)과 상응할 때에는 상응만 할 뿐 작용은 거의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8식은 종자를 보장(保藏)하고 있을 뿐 능변(能變)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뢰야식은 생명의 근원이며 종자의 창고로서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부증불감(不增不減)하여 5변행심소(五遍行心所)와 더불어 상응하되 작용하지 않고, 윤회해서 변역하되 부동하는 자리이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종자가 되고 선(善)·악(惡)의 구별이 없으므로 탐진치(貪瞋痴)가 없다. 이는 아뢰야식이 5수 가운데 오직 사수(捨受)와만 상응하기 때문이다.


5수(五受)란 고·락·우·희·사(苦樂憂喜捨)를 말한다. 이는 모두 경계를 받아들이는 감각이다. 고·락(苦樂)은 신체적인 면에서 받아들이는 감각으로 신체적인 고통은 고(苦), 신체적인 즐거움은 락(樂)이라 하고, 우·희(憂喜)는 정신적인 면에서 받아들이는 감각으로서 정신적인 괴로움은 우(憂), 정신적인 기쁨은 희(喜)라 한다.


사(捨)는 순하지도 않고 거슬리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신체적으로는 고통(苦)과 즐거움(樂)을 여의고 정신적으로는 근심(憂)과 기쁨(喜)을 여의었으므로 버릴 사(捨)를 써서 사수(捨受)라 한다. 제8 아뢰야식은 경계를 인식하여 선·악을 구별하지 않으며, 고통과 즐거움, 근심과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만법의 근원이면서도 만법을 간섭하지 않고 생멸의 윤회를 거듭하면서도 불종자(佛種子)가 멸하지 않는다. 이러한 제8식의 심소는 언제라도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부처님법을 만나면 성불을 이루게 된다.


제 4 송

是無覆無記 觸等亦如是 (시무복무기 촉등역여시)
恒轉如瀑流 阿羅漢位捨 (항전여폭류 아라한위사)

제8 아뢰야식은 무부무기(無覆無記)이니 촉(觸) 등 오변행심소(五 行心所)도 또한 이와 같다. 항상 움직임(恒轉)이 마치 폭류(瀑流)와 같으니 아라한(阿羅漢)의 자리에서 버려진다.

< 해 설 >
이 송문(頌文)은 이미 3송(三頌)에서 아뢰야식의 체성(體性)을 밝힌 데 이어 아뢰야의 성질(性質)을 밝힌 구(句)이다. 아뢰야의 성질이란 범부로부터 불보살(佛菩薩)에 이르기까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품성을 말한다.


인간은 품성에 따라 불보살이 되기도 하고 고뇌중생이 되기도 한다. 만약에 중생이 고뇌에서 벗어나기를 진정으로 염원한다면 고뇌의 근원인 마음의 체(體)와 성(性)을 깨달아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마음의 체성을 깨닫고 나면 고뇌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품성은 무한해서 뜻을 발하면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으나 본래 생멸이 없는 큰 길은 버리고 작은 이익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여래장(如來藏)을 설하시어 아뢰야가 천하의 주인임을 밝히신 것이다.


무부무기(無覆無記) : 무부는 물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번뇌가 일지 않고 경계에 부동함을 말하고 무기는 그 원인이 선악에 속하지 않고 결과 또한 고(苦)와 낙(樂)을 받지 않음을 말한다.
제8아뢰야의 성질은 물들지 않으므로 번뇌가 없고 선악이 없으므로 인과(因果)가 없고 인과가 없으므로 고락(苦樂)을 받지 않는다. 아뢰야의 성질이 무부무기(無覆無記)이기 때문에 스스로 업을 짓는 일이 없고 업을 받는 일도 없다. 다만 여래장 또는 진여법성이라고도 하는 제8식은 맑고 깨끗하여 자체의 성(性)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7식이 선악을 지어 훈습한 습기(習氣)를 섭수하여 보존하여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촉등(觸等) : 송문 제2구에서 말한 촉등은 제8식과 상응하는 심소(心所)로서 촉·작의·수·상·사(觸·作意·受·想·思)를 말한 것이니 곧 오변행심소(五行心所)이다.
오변행심소는 제8식의 심소로서 말하자면 감각을 일으키는 자리가 촉(觸)이요, 분별하고 변화하는 자리가 작의(作意)요, 선악의 경계를 수용하는 자리가 수(受)요, 면전의 경계를 분별하여 생각하는 자리가 상(想)이요, 스스로 사량(思量)을 일으키는 자리가 사(思)이다. 이러한 오변행심소도 역시 작용은 하되 물들지 않고 장애도 받지 않으며 인과를 짓지 않으며 고락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오변행심소의 작용도 무부무기(無覆無記)이다.

 
이렇듯 아뢰야식은 심체(心體)가 무부무기요, 작용도 무부무기여서 본래청정이라 하고 본래청정하므로 일체만법에 상응하고 일체만법에 상응하므로 심왕(心王)이라 하는 것이다. 심왕(心王)이 청정하므로 심소(心所)도 청정하여 체(體)와 성(性)이 상응하기 때문에 그 한계가 무한하여 중생의 식견으로는 가히 알 수 없어서 불가지(不可知)라 한다. 제8식의 한계를 가히 알 수 없는 것은 8식의 체성이 본래 없고 오직 만법으로 더불어 상응하여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8식은 일체법과 모두 상응하면서도 일체법에 물들지 않고 일체법이 장애되지 않는 8식의 한계를 어찌 중생의 식견으로 알 수 있겠는가. 오직 물들지 않고 전변하지 않는 자리에서 8식의 체(體)와 성(性)을 요지(了知)할 수 있는 것이다.


항전(恒轉) : 항전이란 항상하면서 변화한다는 뜻이다. 8식의 마음은 불생불멸하여 항상하지만 상황에 따라 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부지불각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변화의 자체를 인식할 수가 없다. 6식(六識)의 전념(前念)과 후념(後念)의 변화는 누구나 흔적을 느끼지만 8식의 변화는 미세하여 변화의 상황을 겉으로는 조금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폭류(瀑流) : 폭류는 급류(急流)하는 물이라는 뜻이다. 물의 흐름은 표면상으로는 인식할 수 없으나 안으로는 흐름이 급속해서 멈춤이 없다. 8식도 이와 같아서 외관상으로는 생각의 실처를 알 수 없으나 안으로 끊임없이 분출되어 나오는 마음은 시작도 끝도 없어서 그 실체를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일어나고 멸하는 8식의 마음을 폭류에 비유한 것이다. 8식은 6식의 업인(業因)과 7식의 번뇌가 어떠한 경우에 어떻게 8식에 함장되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어서 항전(恒轉)하기를 폭류와 같다는 것이다. 8식이 항전함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제8아뢰야식의 실체는 상주불멸하여 본래 생사(生死)가 없어서 육신이 멸할 때 6식과 7식만이 따라서 멸하고 8식은 불멸(不滅)한다. 불멸할 뿐 아니라 불변하기 때문에 마치 금(金)으로 가락지나 목걸이를 만든다면 형상은 변했어도 금의 실체가 변하지 않듯이 육신이 윤회를 계속한다 해서 8식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둘째, 7식은 때로 선악의 업을 지어서 선악의 습기가 종자가 되어 8식에 함장(含藏)시켜 다음 과(果)를 받게 하므로 항전의 뜻이 있고 이를 업인의 습기가 진행한다는 뜻으로 진(進)이라고도 한다.


셋째, 8식 안에 훈습되어 성숙된 종자의 수량은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자류(自類)와 같은 외연(外緣)을 기다려 서로 합하여 외연이 충족되면 현행(現行)하다가 연(緣)이 다하면 점차 소멸되므로 이를 출(出)이라 하여 업인이 다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8식은 업인에 일진(一進)하고 업인에서 일출(一出)함을 반복하기 때문에 항상 불멸하는 뜻으로 항(恒)을 쓰고 항상 변하기 때문에 전(轉)을 써서 항전(恒轉)이라 했다. 이러한 8식은 외형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는 폭류처럼 변한다.


아라한(阿羅漢) : 아라한은 성문사과(聲聞四果) 중 제4위에 해당되며 증과(證果)하는 최상의 위치가 된다. 아라한과가 수행자의 최상의 위(位)에 해당되지만 아직 소승(小乘)에 속하는 것은 비록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을 타파하여 밖으로 경계에 물들지 않고 안으로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나 보리심을 발하여 중생구제의 대원(大願)이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라한은 범어로서 세 가지의 뜻이 있다.

① 살적의(殺賊義) : 수행자에게 가장 큰 적(賊)은 번뇌이기 때문에 번뇌라고 하는 적(賊)을 파해 없앤다는 뜻이다.
② 응공의(應供義) : 아라한은 이미 모든 루(漏)가 멸하여 덕(德)이 수승하여 세상에 존경의 대상이 되어 공양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응공이라 한다.
③ 불생의(不生義) : 불생불멸하는 열반을 증득하여 다시는 생사의 길에 들지 않으므로 불생(不生)이라 한다.


사(捨) : 사(捨)는 7식의 업인(業因)에 물들지 않으므로 버릴 사(捨)를 써서 사위(捨位)라 한다. 사(捨)는 집착을 버리고 외경(外境)에 부동함을 뜻한다. 여기에는 인식전환의 뜻이 있으니 탐진치(貪嗔痴)를 집착하던 마음이 탐진치를 버리고, 유루(有漏)를 집착하던 마음이 무루(無漏)를 증득하여 범부의 식견을 버리고 성현의 위에 진입하고자 하는 인식의 대전환을 뜻한다.


성문사과의 수행인이 인식의 대전환을 성취하여 아라한위에 이르고자 한다면 먼저 한결같이 아공관(我空觀)을 닦아야 한다. 아공관이란 아뢰야의 실체가 공함을 깨닫고 마음이 분상에서 마음이란 영원함이 없어서 무상하고 법의 분상에서 모든 법이 실체가 없어서 무아임을 인식하므로 본래 내가 없음을 관함을 말한다.


이렇듯 아공관(我空觀)을 닦아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의 이집(二執) 가운데 아집을 끊고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2장(二障) 가운데 번뇌장을 끊는다. 이를 버린다는 뜻으로 사(捨)라 하였다.
그러나 아직 법집을 끊지 못하고 소지장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비록 나(我)는 버렸다 하더라도 진리를 집착하여 주창할 사상(思想)을 고집하고, 바깥 경계에 순역(順逆)함이 자유롭지 못하여 마음이 부동하지 못하고, 악(惡)은 끊었으나 선종자(善種子)가 남아 있어 다시 과(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 이 위(位)이다.


수행자는 오직 아공(我空)의 이치를 깨달아 분별아집을 끊고 번뇌장을 끊은 후에 다시 구생아집(俱生我執)을 끊고 소지장을 끊어 선악을 모두 초월하여 일체법에 부동하고 허덕임이 없는 경지에 이르고자 발심해야 한다. 본래 청정한 8식이 상황에 따라 폭류처럼 변화하지만 아라한의 위에 이르러 번뇌와 집착이 모두 쉬어서 고락의 과(果)를 받지 않고 생사에 물들지 않음을 사(捨)라 한 것이다.


제 5 송

次第二能變 是識名末那 (차제이능변 시식명말나)
依彼轉緣彼 思量爲性相 (의피전연피 사량위성상)

다음 두 번째의 능변(能變)은 이 식(識)을 말나식(末那識)이라 한다. 말나식은 8식을 의지하여 움직이고 8식을 반연하여 사량(思量)하는 것으로 체성(體性)과 행상(行相)을 삼는다.

< 해 설 >
1송(一頌)에서부터 4송(四頌)까지에서 이미 제8아뢰야식의 체(體)와 성(性)을 설명했고 여기에서는 제7 말나식(第七末那識)의 체성(體性)과 행상(行相)을 밝히게 된다. 말나(末那)는 범어로서 번역하면 의(意)가 되는 바 제6 의식을 의식(意識)이라 번역하기 때문에 6식과 7식을 구별하기 위해서 말나(末那)라는 범어의 음을 그대로 쓰게 된 것이다.


제7 말나식의 특성은 항심사량(恒審思量)이다. 항심사량이란 항상 살피고 사량한다는 뜻으로 제8식의 견분(見分)을 항상 살피고 사량하여 나(我)의 본체(本體)로 여겨 깊이 집착한다. 7식이 항심사량(恒審思量)으로 성상(性相)을 삼는 데 반해 제8식은 항상하지만 사량하지 않으며 제6식은 사량하지만 항상하지 않고 전5식(前五識)은 항상하지도 않고 사량하지도 않는다. 오직 7식만이 항상하면서 사량하고 아애(我愛)를 집착한다. 따라서 사량하고 집착하는 것은 제7식의 유일한 공능(功能)이라 하겠다.


사량(思量)하고 아애(我愛)를 집착하는 제7 말나식을 능변(能變)이라 하는 것은 아집(我執) 아애(我愛)의 바탕이 되어 제6 의식과 전5식(前五識)을 소연경(所緣境)으로 삼아 사량분별하고, 제8의식의 심처(心處)를 소연경(所緣境)으로 삼아 8식의 공능(功能)을 집착하여 근신(根身)으로 여기고 아상(我相)을 지으며, 아(我) 이외는 모두 소연경으로 삼아 인상(人相)을 분별하여 안으로는 끝없는 중생심을 일으키고 밖으로는 일체만법을 분별하여 중생상(衆生相)을 일으켜서 식(識)을 임의로 주재하기 때문이다.


제7 말나식은 사량분별하고 집착하는 심소(心所)로서 예지력과 잠재의식을 발휘하지만 수행자는 반드시 이를 극복하여 분별의 주체인 집착을 끊고 무심을 이루어 법계에 자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법계는 본시 상도(常道)가 없어서 영원함이 없고 아(我)도 또한 본래 없어서 집착할 아(我)가 없는 것이다. 진아(眞我)를 찾는다는 것이 본래 꿈이어서 분별을 쉬고 집착을 끊어서 끊을 집착이 없고 쉬어야 할 분별이 없으면 바람이 멎고 물결이 잔잔해서 천하가 고요하듯이 적정한 그 자리가 중생이 성취해야 할 경지인 것이다.


제2능변(第二能變) : 제1능변은 아뢰야이고 제2능변은 말나식이다. 본래청정하여 생멸이 없는 진여열반을 등지고 중생심을 일으키는 식(識)이 곧 말나식이다. 이를 능변이라 하는 것은 아견(我見)에 집착하여 주관적 사고(思考)를 고집하기 때문에 객관적 분별이 생겨서 능소(能所)·피차(彼此) 등을 자기 입장에서 하므로 능변이라 한다.


의피전(依彼轉) : 7식은 8식 중의 종자와 현행작용(現行作用)을 의지하여 집착하고 분별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피(彼)는 아뢰야식을 말한 것이다. 7식의 의지처가 아뢰야식이기 때문에 의피(依彼)라 했다. 의(依)는 의지한다는 뜻이고 전(轉)은 움직인다는 뜻으로 작용하는 것을 말하고, 여기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유전의(流轉依)니 제7식 자신이 스스로 끊임없이 계속해서 유전(流轉)하여 작용함을 말하고,
둘째는 수전의(隨轉依)니 제7식이 8식을 따라서 전현(轉現)함을 말한다.


이와 같이 7식은 8식을 따라 작용하기도 하고 7식 스스로 작용을 일으켜 유전하기도 하여 부단히 탐진치를 계탁(計度)하는 등 사량분별을 일삼고 아집(我執), 아애(我愛)를 성상(性相)으로 삼기 때문에 중생의 윤회가 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7 말나식은 능연(能緣)의 심식(心識)으로 제8식을 소연대상(所緣對像)으로 삼아 8식의 공능(功能)을 집착하므로 아상(我相) 등의 상(相)이 있게 된 것이다.


중생이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8식을 연려(緣慮)하고 집착하여 아(我)로 여기지만 수행하여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이루면 사량분별이 끊어지고, 사량분별이 끊어지면 집착도 끊어져서 비로소 법계를 소요하여 대자연과 더불어 대자재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송문(頌文)의 3구(三句)에서 의피전(依彼轉)이라 한 것은 7식이 8식을 의지해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연피(緣彼) : 제7식이 8식을 소연대상(所緣對像)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범부가 오관(五觀) 6식(六識)이 경계를 잘못 분별하여 착오를 일으키는 것은 제8식에 소집(所執)된 자신을 더 과신하기 때문이다. 중생이 무지(無知)할수록 아견이 강해서 오류가 많고 지혜가 향상되면 사량분별하여 집착하지 않으므로 착오가 적어진다.


사량위성상(思量位性相) : 제7식의 작용은 사량분별이다. 성상(性相)이란 성품과 성품의 모습이니 곧 체성(體性)과 행상(行相)을 말한다.
7식과 8식은 서로 의지하는 관계로서 극히 친밀하여 불가분(不可分)하다. 의장(依仗)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말나는 능의(能依)가 되고 아뢰야는 소의(所依)가 된다. 8개식(八個識)의 심(心)과 심소법(心所法)은 모두 소의(所依)가 있으니 소의(所依)에는 3종(三種)이 있다.


① 종자의(種子依) : 인연의(因緣依)라고도 한다. 모든 법은 반드시 자류(自類)의 종자에 의지해야 생기(生起)할 수 있으니 이것을 인(因)이라 하고 그밖에 환경조건을 연(緣)이라 하는 바 이를 종자의(種子依)라 한다.
② 증상의(增上依) : 구유의(俱有依)라고도 한다. 증상이란 그 효과를 증가하게 하고 촉진시키는 뜻으로 수행으로 그 능력을 무한히 증장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구유(俱有)란 상호 인과가 되고 서로 의지한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안식(眼識)이 안근(眼根)을 의지하고 안근이 안식을 의지함을 뜻한다. 만약에 그 하나가 결핍되면 쌍방 모두가 작용할 수 없게 된다.
③ 무등간연의(無等間緣依) : 개도의(開導依)라고도 한다. 전념(前念)과 후념(後念)이 서로 같아서 등이라 하고 상속(相續)하여 부단(不斷)하므로 무간이라 한다. 이는 전념이 후념의 소의(所依)가 됨을 말한 것으로 생각이란 전념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곧 지난 과거의 관념에 의해 생기(生起)함을 뜻한다. 만약에 심(心)과 심소(心所)의 법이 서로 이어지지 않고 틈이 생긴다면 생각이 재생(再生)할 수 없고 전현(轉現)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개도(開導)란 전념이 후념을 개도한다는 뜻이니 과거의 잘못을 귀감삼아서 미래를 향상시킬 수 있음을 뜻한다.


제7식이 8식 중의 종자와 현행(現行)을 의지하여 작용이 일어나는데 종자를 의지하면 인연의(因緣依)라 하고 현행(現行)을 의지하면 구유의(俱有依)라 한다.
송문(頌文) 가운데 의피전(依彼轉)이라 한 전(轉)의 뜻은 7식이 8식의 종자와 현행 2법(二法)을 의지하여 전생전기(轉生轉起)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7식은 8식에 의해서 마음작용을 일으키고 6근에 의해서 그 공능(功能)을 발휘한다. 7식은 8식을 의지하고 8식은 7식을 의지하여 상호 존재하므로 구유의(俱有依)라 한다.


이렇듯 7식의 성상(性相)이 사량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사량(思量)하는가. 사량이란 연려(緣慮) 관찰(觀察) 분별(分別) 집취(執取)의 뜻이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작용하는 한계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오직 수행을 통해서 깨달아야만 가능하다.


사량의 의미를 인도의 옛 유식가(唯識家)들의 설명을 참조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① 7식은 8식의 심왕(心王) 자체를 연려(緣慮)하고 집착하여 아(我)라고 여기고 8식의 심소(心所)를 집착하여 아소(我所)로 여긴다.
② 8식의 견분(見分)을 집착하여 아(我)로 여기고 8식의 상분(相分)을 집착하여 아소(我所)로 여긴다.
③ 8식의 현행(現行) 곧 과숙과보(果熟果報)를 연려(緣慮)하고 집착하여 아(我)로 여기고 8식 중의 종자를 연려집착하여 아소(我所)로 여긴다.


이상의 설(說)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모두가 8식을 의지해서 작용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8식이 심왕(心王) 또는 심체(心體)가 분명하고 6근(六根)이 마음작용의 선봉이 분명한 데 반해 7식의 작용이 그 중간의 역할로서 미묘한 듯하지만 아탐(我貪) 아애(我愛)하고 분별사량하는 주체로서 수행자가 반드시 타파해야 할 관문임에는 여지가 없다.


제 6 송

四煩惱常具 謂我痴我見 (사번뇌상구 위아치아견)
幷我慢我愛 及與觸等俱 (병아만아애 급여촉등구)

제7식은 4번뇌(四煩惱)를 항상 갖추고 있으니 말하자면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이며 그리고 이밖에 촉(觸) 등과 상응하여 함께 한다.

< 해 설 >
이 송(頌)은 말나식(末那識)과 상응하는 4번뇌(四煩惱)와 심소(心所)를 설명하고 있다.
4번뇌(四煩惱) : 4번뇌는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 등으로 자성(自性)을 장애하여 성불(成佛)을 막고 환(幻)을 집착하여 업(業)을 일으키고 생멸(生滅)의 고통을 탐닉하여 스스로 고뇌를 자초하는 요인이 곧 4번뇌이다.


아치(我痴) : 아치는 어리석음을 뜻하는 말로서 우치(憂痴)·무지(無知)·무명(無明) 등을 통칭한 뜻이다. 삼독(三毒)으로 지칭하는 탐·진·치(貪瞋痴)가 곧 4번뇌에서 표출되었으며 탐진치의 치(痴)와 4번뇌의 아치가 모든 중생이 끊어야할 무명이며 무명의 식(識)은 연기(緣起)의 주체가 된다.
무명이란 잘못 인식하곤 착각하는 것으로서 어리석음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치(痴)의 어리석음이란 나(我)를 집착함으로써 생기하는 소견을 말한 것으로 안으로 몽매무지(汕?無知)하고 밖으로 일체법을 판단하지 못하여 진심(瞋心)과 만심(慢心)을 일으켜 해탈(解脫)할 수 없게 하므로 아치는 모든 번뇌 가운데 근본이 된다.


이와 같이 아치는 무지·무명(無知無明)의 뜻이 있고 무명(無明)에는 공무명(共無明)과 불공무명(不共無明)의 두 가지 뜻이 있다.

공무명(共無明)은 탐·치·만·의(貪痴慢疑) 등 모든 번뇌가 공존(共存)한다는 뜻이 있고 또한 모든 번뇌가 상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상응무명(相應無明)이라고도 한다. 무명이란 본시 번뇌와 더불어 존재하므로 공(共) 또는 상응(相應)이란 전제를 붙인 것이다.

불공무명은 독행(獨行)과 항행(恒行)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독행은 단독으로 일어나는 무명으로 여기에 또한 두 가지 형태가 있으니 (1)은 분(忿)·에(喪) 등 수번뇌(隨煩惱)와 상응하는 것과 (2)는 분·에 등 수번뇌와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독행무명은 홀로 일어나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일어남을 말한다.
둘째 항행(恒行)은 제7식(第七識)이 항상 집아(執我)하는 무명으로서 이는 외경(外境)과는 무관하다.

아견(我見) : 아견은 아집(我執)이다. 이는 범부중생(凡夫衆生)이 몸[肉身]과 마음[精神]을 집착하여 아(我)라고 여기는 것이다.


사실상 일체만법(一切萬法)은 실제로 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에 의하여 연(緣)이 구족되면 만물이 생(生)하고 연이 다하면 만법이 멸(滅)하여 찰나(刹那)에 생멸(生滅)하므로 존재(存在)가 허환(虛幻)하다. 그러나 중생은 인연소생의 참 이치를 알지 못하고 일체만법이 허환임을 인식하지 못하여 실아(實我)가 없는 데서 아(我)를 망집(妄執)하므로 이를 아견(我見)이라 한다.


아만(我慢) : 아만이란 오만하고 교만해서 남을 경시하고 스스로를 지고(至高)하다고 여기며 자신이 위대한 위인으로 생각되어 세상의 모든 허물이 나에게는 없고 모두 다른 사람들이 업을 짓고 죄를 지어 혼탁한 사회를 조장한다고 생각하므로 모두가 나와 같지 않고 나만이 분명하고 바르다는 생각을 한다.
이를 아만이라 하고 이러한 아만은 아집으로부터 나와서 오만해지므로 교만 또는 아만이라 한다. 만심(慢心)은 스스로 높고 위대하여 겸하(謙下)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으로부터 존경받을 수가 없고 위대해질 수도 없다. 교만과 아만은 교만하고 오만하기 때문에 인심을 상실하고 스스로를 낮추어 정진(精進)하지 못하므로 자신을 상실하게 된다.


아애(我愛) : 아애는 아탐(我貪)이다. 중생이 탐애(貪愛)하기 때문에 경계를 분별하여 마음에 드는 바를 탐하고 싫어하는 바를 싫어하여 시비(是非)를 일으키고 탐애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바를 즐거워하고 싫어하는 바에서 진심을 일으키고 탐애하기 때문에 경계에 집착하여 미혹(迷惑)을 자초(自招)한다.
이렇듯 제7식은 영원히 사량(思量)하고 집아(執我)하므로 항상 4번뇌와 더불어 함께 상응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치, 아견, 아만, 아애 등 4번뇌는 윤회의 근본이며 업의 종자라 할 수 있어서 수행자는 반드시 이를 극복하여야 하고 4번뇌를 극복하는 것이 곧 해탈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촉(觸) : 촉등구(觸等俱)라 한 촉은 오변행심소(五 行心所)의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 중의 촉(觸)이다. 여기에서 촉등이라 한 것은 7식(七識)의 모든 식(識)을 총괄한 말이다. 7식의 심소는 4번뇌를 위시하여 5변행심소·8대수번뇌(八大隨煩惱)·5별경심소(吳別境心所) 중의 혜(慧) 등이다. 이 18심소(十八心所)가 모두 7식과 상응하여 작용하므로 촉등구라 하였다. 그러나 7식은 4번뇌가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집착의 고통이 있는 것이다.


8식(八識)은 심(心)의 체(體)로서 함장식(含藏識)이 되고 종자식(種子識)이 되어 5변행의 심처(心處)일 뿐 작용을 하지 않는 반면 6식(六識)은 전5식(前五識)으로 더불어 살피고 사량하고 분별하는 작용을 하지만 7식은 8식과 6식의 중간의 식으로서 6식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집착하고 8식의 공능(功能)을 집착한다.


이렇듯이 7식은 4번뇌로 성상(性相)을 삼으면서도 8식의 심소인 5변행과 8대수번뇌와 5별경심소 중의 혜(慧)를 상응하여 작용하므로 8식과 7식과 6식의 3식이 함께 공존하면서 심식의 작용을 생기한다.
따라서 7식은 스스로 심식의 주체가 아니고 경계를 식별하는 식도 아니면서도 심식의 작용을 주도한다. 특히 5별경심소 중 혜는 예지력, 잠재능력과 같은 특별한 능력의 혜로서 6식에서 현전(現前)의 경계를 이해하고 추구하며 선택하는 혜와는 다르다.


이상에서 7식의 근본심소(根本心所)인 4번뇌와 5별경심소 중 혜를 설명했고, 촉(觸) 등의 5변행심소는 이미 제3송에서 자세히 해설했으므로 이제 8대수번뇌를 살펴보고자 한다.
8대 수번뇌는 불신(不信)·해태(懈怠)·방일(放逸)·혼침( 沈)·도거(悼擧)·실념(失念)·부정지(不定知)·산란(散亂) 등이다.


① 불신(不信) : 불신은 마음이 맑고 깨끗하지 못하여 삼보(三寶)에 대한 신앙심이 없고 진리를 믿지 않으므로 허환을 집착하여 성현(聖賢)의 실덕(實德)을 장애하여 정신(淨信)을 상실함을 말한다.
② 해태(懈怠) : 해태는 게으름을 뜻하지만 여기에서는 악(惡)을 끊고 선(善)을 닦는 일에 진력(盡力)을 다하지 않아서 정진(精進)을 게을리 함을 뜻한다.
③ 방일(放逸) : 방일은 염(染)을 막지 않고 정(淨)을 수습(修習)하지 않아 제멋대로 방종하여 선근(善根)을 닦지 않음을 뜻한다.
④ 혼침( 沈) : 혼침은 마음이 경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사물을 변별하지 못하고 마음이 경안(輕安)하지 못하므로 정관(正觀)을 상실하여 바른 수행을 장애함을 뜻한다.
⑤ 도거(悼擧) : 도거는 마음이 경계에 대하여 고요하지 못하여 버려서 뛰어 넘지 못하고 멈춰 쉬지 못함을 뜻한다.
⑥ 실념(失念) : 실념은 과거에 경험했던 경계를 기억하지 못하여 정념(正念)을 장애함을 뜻한다.
⑦ 부정지(不正知) : 부정지는 면전에 나타난 경계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일으켜 바른 견해를 훼범하여 정지(正知)를 장애함을 뜻한다.
⑧ 산란(散亂) : 산란은 경계에 대하여 마음이 흔들려서 안정을 상실하므로 정정(正定)을 장애함을 뜻한다.

 

이렇듯 4번뇌를 바탕으로 하여 허환을 집착하고 8대수번뇌를 일으켜 정(正)을 상실한 7식은 번뇌와 집착을 종사(從事)하므로 5별경심소 중 혜가 비록 잠재력과 예지력을 발휘할 수 있고 삼성(三性)에 모두 통하지만 출세간(出世間)의 무루지(無漏知)는 아니다.
뿐만 아니라 5변행심소 역시 8식에서는 무위(無爲)로 작용하여 무한대의 공능이 있으나 7식에서는 번뇌와 집착이 근본이 되므로 변행은 하지만 통달하지 못함이 있다. 18심소로 더불어 상응하는 7식은 수행자가 극복해야 하는 가장 큰 관문 중의 관문이다.

제 7 송

有覆無記攝 隨所生所繫
阿羅漢滅定 出世道無有

제7 말나식(第七末那識)은 유부무기(有覆無記)에 속하며 생(生)하는 곳에 따라 얽매인다. 수행하여 아라한(阿羅漢)과 멸진정(滅盡定)에 든 자와 출세도(出世道)를 성취한 자에게서 없어진다.

< 해 설 >
제7 말나식(第七末那識)은 그 성(性)이 유부무기(有覆無記)에 속하며 삼계구지(三界九地) 어느 곳에든 생(生)하는 데에 따라 물들고 얽매이지만 아라한과(阿羅漢果)와 멸진정(滅盡定)에 든 자와 출세도(出世道)를 성취한 자에게서 비로소 물들고 얽매임이 없어진다. 유부무기는 별도로 설명하겠지만 물들지 않고 선악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마치 꿈 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탐착하지 않고 보복하지 않는 일단의 뜻이다.


가령 꿈 속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이를 생시에 추궁하지 않고 꿈 속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이 이를 생시에 보복하지 않는 등의 심소(心所)가 바로 제7 말나식의 유부무기의 성품이다.
그러나 말나식(末那識)은 비록 선악의 업을 직접 지을 수 없어서 무기(無記)에 해당되지만 염오(染汚)의 장애 때문에 아(我)를 집착하므로 탐진치의 근본이 되는 4근본번뇌(四根本煩惱)와 8대수번뇌(八大隨煩惱)를 동반하여 상응한다. 4근본번뇌와 상응하여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탐진치가 있고 탐진치가 있기 때문에 아상(我相)을 비롯한 4상(四相)이 있어 망집(妄執)을 일으켜 6식(六識)에 영향을 끼쳐서 줄줄이 업을 짓게 하고 8식(八識)에 영향을 끼쳐 무명(無明)의 종자로 생사를 반복하게 한다.
따라서 말나식의 심소인 4번뇌와 8대수번뇌를 극복하여 제지(除止)하는 것이 수행자의 가장 큰 과제라 하겠다.


유부(有覆) : 유부는 업에 의해 물든다는 뜻으로서 유염(有染)이라 하고 물들어 집착하는 의미로 유장부(有障覆)라고도 한다. 제7말나 그 자체는 선·악의 업을 짓지 않으므로 악성(惡性)에 속하지 않으나 유염(有染) 유장부의 장애에 가려져서 아(我)를 집착하게 되고 아를 집착하기 때문에 4근본번뇌와 8대수번뇌를 일으킨다.


말나식의 본질은 항상 작용을 하되 상황에 따라 변화하면서 무명(無明)을 일으키고 무명의 작용은 제6 의식(第六意識)과 전5식(前五識) 곧 5관(五觀)에 영향을 끼친다. 5관과 제6 의식이 말나의 무명으로 인해 작용을 하기 때문에 오직 자신의 이익[我貪]만을 탐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탐하기 때문에 악업을 짓게 되고 악업을 짓기 때문에 염오식(染汚識) 또는 염오의(染汚意)라고도 한다.


무기(無記) : 말나식이 비록 염오가 있어서 번뇌를 일으키는 자리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성질이 있을 뿐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러한 말나식은 번뇌를 일으켜 악념(惡念)을 행하지 않으므로 선악의 마음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선악의 마음을 기억해서 작용하지 않으므로 무기(無記)라 한다.


소생소계(所生所繫) : 태어나는 곳에 따라 얽매인다고 한 이 송(頌)의 뜻은 말나식 스스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에 생(生)하는 곳에 따라 3계(三界) 내에서 8식(八識) 중의 이숙과(異熟果)를 의지하여 생하므로 소생(所生)이라 한다. 또한 유정중생(有情衆生)이 천도(天道)에서 태어나게 되면 천도에 계속(繫屬)되고 축생에 태어나면 축생도(畜生道)에 계속(繫屬)되므로 이를 소계(所繫)라 한다. 이 염오식(染汚識)은 인간세계 뿐만 아니라 천상·축생·아귀·수라·지옥 등 육도(六途)에서 모두 사량분별하고 집아(執我)하므로 말나식의 성능(性能)이 종자에 미치는 영향과 5관(五觀) 의식(意識)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함을 알 수 있다.


아라한(阿羅漢) : 아라한은 3승(三乘)이 수행하여 네 단계의 과[四果]를 성취하는데 제일 마지막 단계의 과(果)를 말한다. 아라한은 아공관(我空觀)을 닦아 본래 내가 없음을 깨달아 진의(眞義)를 증득(證得)했기 때문에 아집의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는 삼승무학(三乘無學)의 과위(果位)를 아라한이라 한다.


이 과위(果位)에서 아집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멸정(滅定)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멸정(滅定)은 멸진정(滅盡定) 또는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도 하는바 이는 이 정(定)에 들게 되면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수·상(受想)의 심소(心所)를 멸(滅)하여 몸과 마음이 고요하여 적정(寂靜)하므로 아집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현행(現行)은 멸했으나 종자(種子)는 아직 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라한의 과위에서는 4번뇌 등의 아집을 복단(伏斷)했을 뿐이며 멸한 것이 아니므로 언제라도 처(處)와 관계없이 다시 탐애(貪愛) 등의 번뇌를 일으킨다.


이 송문(頌文)의 핵심요지(核心要旨)는 제7 말나식 가운데 4번뇌 등의 심소를 제지하고 복단하는 데 있다. 진여자성(眞如自性)의 청정한 본체(本體)는 추호도 염오의 식(識)이 없으나 말나(末那)에는 잠재력과 예지력이 있다. 이는 모두 염오(染汚) 혹(惑) 집(執) 등으로 심찰사량(審察思量)함으로써 발현되기 때문에 유위법(有爲法)에 해당된다.


유위법은 허망하여 실(實)이 아니므로 끊어야 하는데 마음은 끊어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억눌러서 제지한다는 뜻으로 복단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복단 그 자체도 완전한 것이 아니므로 멸정에 이르는 수행을 겸하여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이루어야 비로소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
평등성지란 제7말나식의 심소인 4번뇌 등 온갖 번뇌가 소멸하여 아가 공(空)해짐으로써 텅빈 마음으로 일체 만법을 수용하고 상응함을 말한다. 아(我)가 없어서 일체 만법과 더불어 하나가 되면 비로소 모든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어 진정한 해탈의 경지가 된다.


멸정(滅定) : 멸정은 아라한과(阿羅漢果)의 자리에서 증득한 경지이다. 3승(三乘) 수행자가 이미 번뇌를 복단했으나 멸하지 못한 것을 알면 반드시 이를 멸하고자 할 것이요, 번뇌를 멸하고자 할진대 반드시 멸진(滅盡)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멸진이란 번뇌가 멸하여 멸한 흔적까지 없음을 말한다. 이 정(定)에 들었을 때 수(受)·상(想) 2종(二種)의 심소를 멸하여 받아들여 수용(受容)하는 것과 분별하는 감각이 끊어지고 몸과 마음이 적정하게 되어 아집을 버릴 수 있다. 아라한과 멸정의 위(位)에서는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복단하는 것이지 번뇌의 종자까지 끊어진 것은 아니다. 수행자가 수행으로써 번뇌를 끊고 다시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분발하여 정진하는 것을 가행정진(加行精進)이라 한다.


출세도(出世道) : 출세도는 세간의 명리(名利)를 초월하여 진제(眞諦)만을 추구하는 도(道)로서 불도(佛道)를 수행함을 말한다.
출세도를 닦아 불도를 수행함에 가장 근본적인 수행법은 육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자리를 닦아 마음으로 하여금 일체만법에 물들지 않고 얽매이지 않게 하는 것이 그 요체라 하겠다. 마음을 닦는 데는 반드시 아견을 끊어 제해야 하고 마음을 끊어 제(除)하려 하면 아뢰야식을 연(緣)하여 일어나는 아견과 법아견(法我見)을 끊어 제해야 한다.

 

다시 말해 본래 내가 없는 아공관을 닦고, 일체법이 본래 없는 법공관(法空觀)을 닦아야 한다. 말나식을 수행하는 것은 이미 10지(十地)에 이르러야 가능하고 처음 환희지(歡喜地)에서부터 제8부동지(第八不動地)에 이르는 동안 아·법(我法)의 집착이 끊어지고 제10지(第十地)에 이르러 불과(佛果)를 증득하게 되면 이를 구경위(究竟位)라 한다. 초지(初地)에서는 6식의 분별2집(分別二執)을 끊어 묘관찰지(妙觀察智)를 이루고 제8지(第八地)에서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이루게 되지만 7식은 집착하게 할 뿐 직접 현행하지 않기 때문에 6식을 의지해서 아공(我空) 법공(法空)의 2공관(二空觀)을 닦아야 분별집착이 끊어져서 평등성지를 이루게 된다.


무유(無有) : 무유의 두 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량(思量) 분별집착 등의 번뇌가 소멸하여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 것으로 이는 아라한 멸진정 출세도를 성취한 경지를 설명한 송구(頌句)이다. 수행자가 마음을 닦음에 7식의 분별 집착을 끊음으로써 8식의 인(因)이 청정하고 6식의 현행하는 경계가 청정해진다. 제7말나식은 8식의 소연(所緣)이 되고 6식의 소의근(所依根)이 되어 아·법(我法)을 집착하므로 이를 극복하는 것이 수행상 가장 큰 관문이라 하겠다.

제 8 송

次第三能變 差別有六種
了境爲性相 善不善俱非

다음 제3능변(第三能變)은 차별(差別)해서 아는 것이 6종(六種)이 있으니 경계(境界)를 분별하여 아는 것으로 성상(性相)을 삼으며 선(善)과 불선(不善)과 비선비불선(非善非不善)인 무기성(無記性)을 갖추고 있다.

< 해 설 >
먼저 제1식(第一識)과 제2식(第二識), 제3식(第三識)을 여기에서는 제1능변(第一能變), 제2능변(第二能變), 제3능변(第三能變)이라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식(識)을 능변이라 하는 것은 변화의 주체가 곧 마음임을 뜻하고 마음이 능동적으로 변화를 주도할 수 있으므로 능변(能變)이라 한 것이다.
지금까지 아뢰야식[第一能變]과 말나식[第二能變]의 성상(性相)과 공능(功能)에 대해 설명하였고 여기 제8송에서는 제3능변(第三能變) 곧 6식(六識)의 성상을 밝힌다.


3능변(三能變) : 아뢰야식을 제1능변이라 하고 말나식을 제2능변이라 하고 육근(六根)을 제3능변이라 하므로 여기에서 제3능변은 육근의식(六根意識)을 말한다.


차별유6종(差別有六種) : 차별은 분별하는 뜻이기보다는 각각이라는 뜻으로 쓰여졌다. 각각 6종(六種)이 있다는 것은 6근(六根), 6진(六塵), 6식(六識)을 뜻한다.
6식(六識)은 6근(六根), 6진(六塵), 6식(六識)이 단독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서로 의지하여 작용을 한다. 말하자면 6근은 6진을 의하여 6식의 작용을 일으킴을 말한다. 식(識)을 능변이라 하는 것은 주체적으로 변화를 주도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제8식을 이숙능변(異熟能變)이라 하고 제7식을 사량[思量能變]이라 하며 제6식을 요별능변(了別能變)이라 하여 이를 3능변이라 한다.


요경위성상(了境爲性相) : 요경(了境)은 경계를 요별(了別)한다는 뜻이다. 6종의 특징은 한결같이 외경(外境)을 요별함에 있다. 따라서 경계를 요별하는 능변식(能變識)이라 한다.
6식은 경계를 요별하는 것이 그들의 성상(性相)이며 행상(行相)이다. 그러므로 위성상(爲性相)이라 하였다. 성(性)은 체성(體性) 또는 자성(自性)을 말하고 상(相)은 행상(行相) 또는 작용을 말한다.
범부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 등 5관(五觀), 6식을 각기 별도로 쓰기 때문에 눈이 없으면 볼 수가 없고 귀가 없으면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성자(聖者)는 6근을 자유로이 호용(互用)할 수 있어서 눈이 없어도 보고 귀가 없어도 들을 수 있으며 6근 중 하나만으로도 6근을 모두 쓸 수 있는 것이다.


선불선구비(善不善俱非) : 6종식(六種識)은 어떤 성(性)에 속하여 통하는가 하면 선(善)에도 통하고 불선(不善)에도 통하며 비선비악(非善非惡)에도 통한다. 이미 3성(三性)을 설명했듯이 인간에게는 선과 불선과 비선비악의 구성이 있다. 이 6종식이 3성에 통한다는 것은 선을 일으킬 수도 있고 악을 일으킬 수도 있으며 비선비악 곧 무기(無記)를 일으켜 작용할 수도 있음을 뜻한다.
선을 일으키면 선과 상응(相應)하고 악을 일으키면 악과 상응하며 비선비악을 일으키면 비선비악의 무기(無記)와 상응하게 됨을 말한다. 비선비악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는 뜻이니 담담하게 부동(不動)하고 물들지 아니하여 관념적 전제가 없이 상응함을 말한다.


이와 같이 6종식은 외경(外境)을 상응하여 분별하는 역할로써 성상을 삼는다.


제 9 송

此心所遍行 別境善煩惱
隨煩惱不足 皆三受相應

이 6종식(六種識)의 심소(心所)는 5변행(五遍行), 5별경(五別境), 11선(十一善), 6근본번뇌(六根本煩惱), 20수번뇌(二十隨煩惱), 4부정(四不定) 등이다.
이 6종식의 심소(心所)는 모두 고(苦), 낙(樂), 사(捨) 등 삼수(三受)와 상응한다.

< 해 설 >
이 송문(頌文)은 요경능변식(了境能變識) 곧 6종심식(六種心識)과 상응하는 심소(心所)를 설명한 송(頌)이다.


차심소(此心所) : 이 송문(頌文) 첫 구의 차(此)는 요별능변식을 가리킨 말로서 6종식을 의미한다. 능변하는 마음이 8개의 식(識)이기 때문에 이를 8식(八識)이라 하고 8식 모두를 심왕(心王)이라 칭한다. 식을 심왕이라 하는 것은 마음의 주작용(主作用)의 체(體)로서 경계를 주도적으로 요별하기 때문이다.
식이 경계를 섭(攝)한 후에는 탐(貪)·애(愛)·뇌(惱)·원(怨) 등의 정서를 일으키므로 이를 심소유법(心所有法)이라 하며 약칭하여 심소라고도 한다. 마음이 작용하는 심소는 모두 51개인데 이 51개 심소는 모두 6식과 상응하고 이 가운데 34심소(三十四心所)는 전5식(前五識)과 상응하며 18심소(十八心所)는 말나식과 상응하여 8식은 5변행심소와 상응할 뿐이다.


이와 같이 8식이 5변행심소와 상응하되 무부무기(無覆無記)로 하기 때문에 경계에 물들지 않고 고·락(苦樂)에 부동하지만 7식(七識)은 유부무기(有覆無記)로 상응하기 때문에 경계에 물들지만 고·락에는 부동하다. 그러나 6식은 고(苦)·낙(樂)·사(捨) 3수(三受)로 상응하기 때문에 경계에 따라 고와 락을 받기도 하고 담담히 부동하기도 한다. 따라서 6식이 경계에 가장 민감하므로 이를 억제하여 선·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가령 6식이 깨끗한 마음을 일으킬 때에는 11선심소(十一善心所)와 상응하여 깨끗한 마음이 일어나고 악념(惡念)을 일으킬 때에는 6근본번뇌와 20수번뇌와 상응하여 악념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선악이 일어나지 않는 8식의 마음으로 경계를 수용하게 훈련하는 것이 수행이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선악(善惡)의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밝히고자 유식(唯識)이 성립된 것이다.
6식이 상응하는 심소인 51심소(五十一心所)는 변행심소(遍行心所) 5와 별경심소(別境心所) 5와 선심소(善心所) 11과 번뇌심소(煩惱心所) 6과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20과 부정심소(不定心所) 4 등이니 이 모든 심소가 6식으로 더불어 상응하여 고(苦)·낙(樂)·사(捨)의 감정을 일으킨다.


3수(三受) : 송문(頌文)의 끝에 개3수상응(皆三受相應)이라 한 것은 6식이 외경과 마주쳐 감각을 일으킬 때 고·낙·사 3수와 상응하여 작용함을 말한 것이다. 말하자면 순경계(順境界)와 마주칠 때에는 즐거운 마음을 생기(生起)하므로 이를 낙수(樂受)라 하고 역경계(逆境界)와 마주칠 때에는 괴로운 마음을 생기하므로 이를 고수(苦受)라 하고 비순비역(非順非逆)의 경계와 마주칠 때에는 즐거움과 고통이 없는 담담한 마음을 생기하므로 이를 불고불락(不苦不樂)인 사수(捨受)라 한다.


이와 같이 6종식은 고와 낙과 사의 3수로 상응한다. 그러나 7식과 8식은 오직 사수와 상응하므로 고와 낙이 없으며 고와 낙이 없으므로 잠재의식에 속한다.


제 10 송

初遍行觸等 次別境謂欲
勝解念定慧 所緣事不同

먼저 제6의식인 3능변(三能變)과 상응하는 것은 변행심소(遍行心所)인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 등이요. 다음은 별경오심소(別境五心所) 즉 욕(欲)·승해(勝解)·념(念)·정(定)·혜(慧)니 이 다섯 심소(心所)는 반연하는 일(事)이 부동(不同)하다.

< 해 설 >
앞에서의 제8송에서 3능변식인 6종식(六種識)의 성상(性相)을 이미 설명하였고 제9송에서 심소법(心所法)을 총괄하여 설명하였고 지금 이 송(頌)과 이하의 4송(四頌)에서는 상응하는 심소의 명칭을 설명하고 있다.

변행(遍行) : 5변행심소(五遍行心所)를 말한 것으로 촉(觸)·작의(作意)·수(受)·상(想)·사(思)이다. 촉(觸)은 6근(六根), 6경(六境), 6식(六識)의 3법(三法)이 화합하여 감각을 일으켜 분별함을 말하고, 작의(作意)는 반응(反應)의 뜻이니 곧 근·경·연(根·境·緣)이 3화(三和)를 이루어 분별하고 반응을 일으켜 변역(變易)함을 말하고, 수(受)는 수용(受容)의 뜻이니 순경(順境)과 역경(逆境) 비순비역(非順非逆)의 경계를 수용한다는 의미이다. 좋은 경계[順境界]에 대해서는 즐거움(受樂)을 일으키고 나쁜 경계[逆境界]에 대해서는 증오를 일으키며 비순비역, 곧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경계에 대해서는 담담함을 일으킨다. 상(想)은 면전(面前)의 경계를 헤아려서 각종 이름을 붙여 개념을 존재하게 함을 말하고 사(思)는 마음으로 하여금 동념(動念) 작위(作爲)를 조작(造作)하게 하는 성질로서 행동 이전의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별경(別境) : 별경이란 5별경심소(五別境心所)를 말한 것으로 욕(欲)·승해(勝解)·념(念)·정(定)·혜(慧)를 말한다. 이 다섯 심소(五個心所)는 반연하는 사물(事物)이 부동(不同)하기 때문에 별경(別境)이라 한다. 5별경심소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욕(欲) : 욕은 희망하고 원구(願求)하는 마음이니 선·악 2종이 있다. 선(善)은 선을 행(行)하고자 하는 마음이니 수도하여 성불하고자 하는 마음, 충신 효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 보시하여 남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 등이며, 악(惡)은 명리(名利)를 구하는 마음, 성색(聲色)에 빠지거나 음(淫)·도(盜) 등을 행하는 마음 등이다.


승해(勝解) : 승해는 인간관계에 의해 유혹되거나 환경에 의해 흔들리지 않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바른 인식과 바른 사고방식이니 곧 정지견(正知見)과 정신(正信)의 의미이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이러한 승해심(勝解心)이 있으나 욕(欲)의 악심소(惡心所)에 의해 묻히게 된다.

념(念) : 념은 과거의 경계에 대해서 분명하게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않음을 의미한 말이다. 생각하고 사고하는 것은 상(想)이나 사(思)를 쓰고 기억해서 잊어버리지 않을 때는 념을 쓴다. 념은 곧 염기(念記)의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정(定) : 정은 일종의 지관(止觀)으로 하나의 일에 몰입함을 뜻한다. 또 정(定)은 능관(能觀)의 마음을 어떤 한 곳에 집중하는 것으로 선정삼매(禪定三昧) 염불삼매(念佛三昧)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능관의 념이기 때문에 유주(有住)에 해당되고 무주(無住)는 아니다. 여기서 유주(有住)라 함은 머무름이 있다는 뜻이니 곧 초탈이 아니라는 말이다.

혜(慧) : 혜는 현전(現前)의 경계에 대하여 이해하고 추구하며 선택하는 것으로 남이 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간택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소연사부동(所緣事不同) : 소연사(所緣事)는 5변행(五遍行) 5별경(五別境)의 심소가 반연하는 일이요, 부동(不同)은 이 심소가 각기 개별적인 경계를 반연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부동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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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불선원  |  글쓴이 : 念佛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