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헤거 스님
제 11 송
善謂信慙愧 無貪第三根
勤安不放逸 行捨及不害
6종심소(六種心所) 가운데 선(善)이란 이른바 신(信)·참(慙)·괴(愧)와 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痴) 등 3선근(三善根)과 근(勤)·안(安)·불방일(不放逸)·행사(行捨) 그리고 불해(不害)이다.
< 해 설 >
이 송(頌)은 제3능변식(第三能變識) 곧 제6식(第六識)과 상응하는 선심소(善心所)의 열한 가지를 설명한 구(句)이다. 이 송문에서 선(善)이라고 하는 개념이 확실히 정립되었다 할 수 있다.
신(信) : 신앙심(信仰心) 또는 신념(信念)이다. 바른 신(信)에 3종(三種)이 있다.
① 신실유(信實有) : 실유(實有)란 환유(幻有)가 아닌 제법실성(諸法實性)을 말한다.
이러한 실성(實性)을 믿는 것을 신실유라 한다.
② 신유덕(信有德) : 불보살(佛菩薩) 등 세간에 덕있는 성현(聖賢)을 믿는 것이다.
③ 신유능(信有能) : 세간 출세간의 재능(才能)·기예(技藝) 및 각종 학문을 닦음으로써
자신을 성취하고 세상에 이익을 끼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이상의 3종(三種)이 신(信)이 되어 정진한다면 마음이 안정되고 도업(道業)이 증진되므로 11선(十一善) 가운데 신(信)이 으뜸이 된다.
참(慙) : 선(善)을 숭상하고 악(惡)을 스스로 수치로 여겨서 죄악을 짓지 않음을 말한다.
괴(愧) : 죄악에 대한 수치심이니 감히 죄업을 짓지 않음을 말한다.
무탐(無貪) : 사물을 수용함에 스스로 지족(知足)할 줄 알아서 일체 탐착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무진(無瞋) : 성내지 않는 마음이니 설사 재해(災害)를 당해도 인내로써 수용하며 어떠한 역경계(逆境界)에 대하여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서 성내고 한탄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무치(無痴) : 사리(事理)를 명백히 요달(了達)하여 어리석은 마음이 없음을 말한다. 어리석음이 곧 무명(無明)이니 무치는 무명이 끊어짐을 말한다.
이상의 탐·진·치(貪·瞋·痴)를 삼독(三毒)이라 하고 3독의 마음이 없으면 3선근(三善根)이라 하며 이는 일체 선법(善法)이 되기 때문이다.
근(勤) : 근(勤)은 정진(精進)의 뜻이니 선(善)을 닦고 악(惡)을 끊는 데 전념하여 물러섬이 없어 반드시 선법을 성취하고 악법을 단절함을 말한다.
안(安) : 안(安)은 경안(經安)의 줄임 말로서 어떤 일에 몰두하여 부지불각(不知不覺)에 몸과 마음이 경쾌하고 안락함을 말한다.
불방일(不放逸) : 방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방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규범을 지키고 정진(精進)에 전념함을 말한다.
행사(行捨) : 행사는 집착을 끊는다는 뜻으로 괴로움이나 즐거움에 동요되지 않고 방하(放下)하는 것과 허둥대지 않고 적정(寂靜)에 주(住)하는 것이 있으니 이를 사(捨)라 한다. 단순히 사(捨)할 뿐 아니라 사로써 행(行)하기 때문에 행사라 한다.
불해(不害) : 모든 유정(有情)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지 않고 오로지 발고여락(拔苦與樂) 즉 고통을 덜어주고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므로 불해(不害)라 한다.
제 12 송
煩惱謂貪瞋 痴慢疑惡見
隨煩惱謂念 恨覆惱嫉?
6종심소(六種心所) 중 근본번뇌(根本煩惱)에는 탐(貪)·진(瞋)·치(痴)·만(慢)·의(疑)·악견(惡見)이 있으며 수번뇌(隨煩惱)에는 분(忿)·한(恨)·부(覆)·뇌(惱) ·질(嫉)·간(?)이 있으며.
< 해 설 >
제3능변식(第三能變識)은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과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에 이어 세 번째의 능변식(能變識)으로 전6식을 말한다. 6식(六識)은 모두 경계를 요별(了別)하므로 요별능변식(了別能變識) 또는 요경능변식(了境能變識)이라 한다. 그 성질이 일정하지가 않아서 때로는 선(善)이 되고 때로는 악(惡)이 된다. 탐(貪)·진(瞋)·치(痴) 등 51심소(五十一心所)는 모두 제6식(第六識)과 상응하고 그 중에 34심소(三十四心所)만 전5식(前五識)과 상응한다.
번뇌(煩惱) : 번뇌는 근본번뇌를 말한다. 모든 번뇌가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므로 근본번뇌라 한다. 이는 인간의 심성을 가장 악하게 하는 심소(心所)이다.
탐(貪) : 탐(貪)은 탐욕이다. 세상에 처신(處身)함에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르고 적은 것은 싫어하고 많은 것을 좋아하며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추구하는 등 끝없는 욕구(欲求)를 말한다.
진(瞋) : 진(瞋)은 진노(瞋怒)를 말하는 것으로 자기의 감정?맞으면 즐거워 하지만 감정을 거슬리면 진노가 생기(生起)하여 성내는 마음을 진(瞋)이라 한다. 한생각 진심(瞋心)을 일으키면 만 가지의 업(業)을 지어 장애를 스스로 만들게 되므로 인욕(忍辱)을 닦아 성내는 마음을 없애야 한다.
치(痴) : 어리석은 마음이니 곧 무명(無明)을 일컫는 말이? 지혜롭지 못하며 사리(事理)가 분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깨끗하지 못한 것에 물들어 필경에는 악도(惡道)에 떨어지므로 이를 치(痴)라 한다.
만(慢) : 만(慢)은 다른 사람을 경시(輕視)하고 자신을 과시하는 것을 말한다. 만심(慢心)·자만심(自慢心)·교만심(嬌慢心) 등으로 타인에게 모욕적인 언행을 삼가지 않는 만심은 무아(無我)의 이치를 깨달아 아집(我執)을 끊어야 스스로 만심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의(疑) : 의(疑)는 남을 믿지 않는 병이지만 이보다 더 큰 병은 출세간도(出世間道)의 진리(眞理)를 믿지 않는 것이다. 11선(十一善) 중 신(信)이 도(道)의 근원이라면 의(疑)는 장도(障道)의 으뜸이 된다. 진리를 믿지 않으므로 수행할 수가 없고 남을 믿지 않으므로 남으로부터 신뢰가 없고 인과응보마저 믿지 않으므로 악을 더욱 가중시켜 마침내 자신을 파멸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반드시 불신(不信)을 깨트리고 신(信)으로써 출발해야 한다.
이상 탐·진·치·만·의를 5둔사(五鈍使)라 하는 바 이는 미사지혹(迷事之惑)에 관계되므로 사혹(思惑)이라 하고 미사지혹이란 잘못된 생각으로 일(事)을 미혹(迷惑)케 한다는 뜻으로 그 악심소(惡心所) 곧 모든 번뇌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사혹(思惑)이라 한다. 5둔사(五鈍使)의 사(使)는 치달린다는 뜻으로 탐·진·치·만·의의 번뇌가 정(精)·추(序)를 가리지 못하고 치달려 6도(六道)를 윤회하여 모든 고통을 받게 함을 말하고 둔(鈍)이란 그 성(性)이 우둔하여 끊기가 쉽지 않음을 말한다.
악견(惡見) : 6번뇌(六煩惱) 중 탐·진·치·만·의의 5종(五種)을 5둔사 또는 사혹이라 하고 여섯 번째의 악견은 5리사(五利使)라 하는데 이치를 어둡게 하는 혹(惑)이라는 뜻으로 미리지혹(迷理之惑)이라 하고 이를 견혹(見惑)이라 한다. 또 악견에 5종(五種)의 견(見)을 함유하고 있으므로 이를 5견이라 한다. 이 5견은 진리성(眞理性)을 미혹하여 일어나며 그 혹성(惑性)이 예리한 까닭에 리사(利使)라 한다. 5견은 다음과 같다.
① 신견(身見) : 아견(我見)과 아소견(我所見)이다. 모든 중생은 오온화합생(五蘊和合生)이어서 마침내 환멸(幻滅)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내 몸[我身]이 실제 존재한다고 여겨 탐진치 등 번뇌를 일으킴을 아견(我見)이라 하고 의식주(衣食住) 등을 소유함에 본래 정해진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소유로 집착하는 것을 아소견이라 한다. 아견과 아소견을 통칭하여 신견이라 한다.
② 변견(邊見) : 어떤 수행자가 아견으로 사후의 세계를 추측하여 죽음 자체로 모든 것은 끝나고 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을 단견(斷見)이라 하고 또 어떤 수행자가 사후에도 영원불멸하여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여기는 것은 상견(常見)이라 하는데 이러한 생각을 공견(空見)·유견(有見) 또는 단견(斷見) 상견(常見)이라 하고 이는 모두 양변(兩邊)이 되어 중도(中道)가 아니기 때문에 변견이라 한다.
③ 사견(邪見) : 잘못된 생각, 삿된 생각이다. 사견 중에 가장 극심한 사견은 인과(因果)를 믿지 않는 것이다. 인과를 믿지 않으므로 악행(惡行)을 자행하고 선근(善根)을 저해하여 자신을 해치고 남에게까지 피해를 주기 때문에 사견의 피해는 언설로 다하기 어렵다.
④ 견취견(見取見) : 자기의 견해는 옳고 다른 사람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을 견취견(見取見)이라 한다.
⑤ 계금취견(戒禁取見) : 계율에 집착하는 견해로서 예를 들면 인도 사람들이 소[牛]를 본받으면 생천(生天)할 수 있다고 믿고 중국 사람들이 채소를 먹으면 득도(得道)할 수 있다고 믿는 것으로 계율만을 고집하는 것을 말한다.
이상의 탐·진·치·만·의·악견을 6종의 근본번뇌라 한다. 근본번뇌 가운데 악견으로 말미암아 발하는 신견(身見)·변견(邊見)·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금취견(戒禁取見)의 5견(五見)을 사혹(思惑) 또는 수혹(修惑)이라 하고 이는 생활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심리적 병태이다. 5견을 반복하면 10종이 되어 끊임없는 번뇌를 벗어버릴 수 없게 된다. 5견을 반복해서 뒤에 일어나는 5견을 견혹(見惑) 또는 이혹(理惑)이라 하고 이는 견해(見解) 가운데서 발생하는 심리적 상태이다.
이상 10종의 번뇌는 제8식에는 전혀 없고 제7식에는 탐·치·만·악견은 있고 의(疑)는 없으며 제6식에는 전부 존재하고 전5식에는 탐·진·치 3종이 작용을 한다.
수번뇌(隨煩惱) : 번뇌에는 근본번뇌와 지말번뇌로 나누어지는데 근본번뇌는 이미 설명하였고 지말번뇌는 모두 근본번뇌를 따라서 생하고 모두 20종이 된다.
20종의 수번뇌는 다시 10종의 소수번뇌(小隨煩惱)·2종의 중수번뇌(中隨煩惱)·8종의 대수번뇌(大隨煩惱)로 분류된다. 본송(本頌)에서는 10종의 소수번뇌 중 6종만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① 분(忿) : 역경계에 대하여 분개하고 분노심을 발하여 업을 짓는다.
② 한(恨) : 분한 마음이 계속되어 원한의 독(毒)을 내는 것이다.
③ 부(覆) : 은폐의 뜻으로 자기의 업을 은폐시키는 것이다.
④ 뇌(惱) : 분한(忿恨)을 계속하여 포악해지는 것이다.
⑤ 질(嫉) : 질투심으로 남을 음해하고 중상 모략함을 말한다.
⑥ 간(?) : 인색한 마음이니 남에게 도움 주는 일을 않는 것이다.
제 13 송
?諂與害 無慙無愧
悼擧與昏沈 不信幷懈怠
8송(八頌)에서부터 계속 이어지는 제6의식의 심소로서 속이는 마음(?), 아첨하는 마음(諂), 피해를 끼치는 마음(害), 교만한 마음( ),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無慙), 염치없는 마음(無愧), 산란한 마음(悼擧), 멍한 마음(昏沈), 믿음이 없는 마음(不信), 게으른 마음(懈怠) 등과.
< 해 설 >
본 송문에서도 역시 제8송에서부터 설명하고자 하는 제3능변식(第三能變識) 곧 제6의식이 작용하는 마음자리를 설명하고 있다. 제6의식은 5관(五觀) 곧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으로 더불어 한 조(一組)를 이루어 나 이외의 경계(境界)를 분별하는 것으로 성상(性相)을 삼고 선(善), 악(惡), 무기(無記)의 심성(心性)으로 작용을 표출한다는 사실은 이미 이해되었으리라 보고 여기에서는 지말번뇌(支末煩惱)에 해당하는 20수번뇌(二十隨煩惱)의 작용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지말번뇌란 근본번뇌(根本煩惱)가 아닌 지엽적인 번뇌라는 뜻으로 미미한 번뇌인 듯 싶지만 끊어 버리기에는 그리 쉽지 않은 번뇌이다.
광(?)의 뜻은 속이는 마음, 미혹한 마음, 가식적인 마음, 이율배반적인 마음이며 이러한 망녕된 마음으로서 남을 이간하고 위선으로써 남에게 군림하고자 하며 폭력으로써 남의 것을 갈취하고자 하는 심소(心所)이다.
첨(諂)의 뜻은 첨곡(諂曲)이니 힘 있는 사람에게 아첨하고 받드는 것을 첨(諂)이라 하고 마음이 왜곡되어 정직하지 못함을 곡(曲)이라 한다. 아첨과 왜곡은 자신뿐 아니라 남까지 망치게 하는 소인배의 심소(心所)이다.
해(害)의 뜻은 남에게 이익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손해(損害)를 입히고 피해를 주는 악(惡)의 심소로서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마음자리이다.
교( )의 뜻은 교만한 마음이니 자신을 과시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을 말한다. 교만은 신분이 상승할수록 생기는 마음으로 사람이 교만한 마음이 생기는 순간 더 이상 상승할 수 없게 되어 인간의 한계를 짐작할 수 있게 되는 마음자리이다.
무참(無慙)의 뜻은 수치심이 없고 현선(賢善)을 숭상하지 않으며 거리낌없이 죄업(罪業)을 짓는 것을 말한다.
무괴(無愧)의 뜻은 염치없는 마음이니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참회할 줄 모르는 마음이다.
도거(悼擧)의 뜻은 산란한 마음이니 안으로 마음을 쉬지 못하고 들떠 있어서 불안정하고, 바깥 경계에 쉽게 자극을 받아 허덕이는 마음이다.
혼침(昏沈)의 뜻은 마음이 미혹하고 양명하지 못해 마치 잠결에 행동하는 것처럼 의욕이 없이 진로의 향방이 불분명한 마음이다.
불신(不信)의 뜻은 실상(實相)을 믿지 않고 덕(德)을 믿지 않고 능(能)을 믿지 않는 마음으로 이는 정법(正法)을 믿지 않으므로 타인(他人)은 물론 자신마저도 믿지 못하는 마음이다.
해태(懈怠)의 뜻은 향상(向上)에 뜻이 없어서 악(惡)을 끊고 선(善)을 행하는 일에 진력(盡力)을 다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상의 심소들은 지말번뇌로서 제6의식 속에 끊임없이 일어나서 도업(道業)을 장애하고 인격을 장애하므로 누구라도 반드시 극복해야 할 심소이다.
제 14 송
放逸及失念 散亂不正知
不定謂悔眠 尋伺二各二
이 송문(頌文)에는 20수번뇌 중 끝으로 4가지 심소(心所)와 4부정심소(四不定心所)를 밝힌 송구(頌句)이다.
20수번뇌 중 16가지 심소는 이미 전송(前頌)에서 밝혔고 나머지 4종심소는 상2구(上二句)의 방일(放逸)과 실념(失念)·산란(散亂)과 부정지(不正知) 등이다.
하2구(下二句)는 4부정지(四不定知)를 밝힌 송(頌)으로 4부정지는 회(悔)·면(眠)과 심(尋), 사(伺) 등이니 이 이류(二類)는 각자 선·악 2성(二性)에 통한다.
< 해 설 >
이 송문(頌文)에서는 20수번뇌 중 4종번뇌를 밝히고 4부정심을 밝혔다. 이 4종(四種)의 수번뇌(隨煩惱) 역시 선업을 장애하고 정진을 게을리 하여 마음을 미혹하게 하는 심소이다.
수행이란 선의 마음을 일으키고 악의 마음 곧 번뇌를 극복하는 것이다. 대(大)·소(小)의 번뇌가 비록 6식(六識)의 심소라 하지만 6식의 심소를 극복하지 않고 달리 수행하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번뇌를 극복하고자 하는 발심이 우선해야 하고 번뇌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먼저 심소를 규명해야만 한다.
방일(放逸)의 뜻은 밖으로 경계를 탐착하여 염(染)을 막지 않고, 정(淨)을 소홀히 하여 방종한 마음이니 사람을 방탕하게 하여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게 하는 심소이다.
실념(失念)의 뜻은 과거에 익힌 경계를 기억하지 못하여 연결력이 상실된 마음으로 건망증에 해당된다. 이 심소는 도업(道業)을 성취하고자 발심은 하지만 바로 망각하는 습성 때문에 정념(正念)을 장애하여 성취할 수 없게 하는 마음자리이다.
산란(散亂)의 뜻은 바깥 경계에 끌려 정념(正念)을 상실하고 유탕(流蕩)한 마음을 일으키는 심소로서 안정감이 없어서 일에 몰두하지 못하게 하므로 도업을 성취할 수 없게 하는 마음자리이다.
부정지(不正知)의 뜻은 바깥 경계에 대해서 그릇된 견해를 일으켜 곡해(曲解)함으로써 정지(正知)를 장애하고 도업을 이루지 못할 뿐 아니라 의식이 치우쳐 바른 길을 상실하게 하는 심소이다.
이상에서 밝힌 것은 12송(十二頌)에서부터 말한 20수번뇌(二十隨煩惱)의 심소이다. 이미 설명했듯이 수번뇌는 지말적인 번뇌에 해당되지만 끊어 버리기 쉽지 않으며 극복하기가 간단치 않아서 수행자의 수행 관문이라 하겠다. 끝으로 4부정심소(四不定心所)를 밝혀 번뇌의 미세함까지 끊어 본래 청정한 마음자리를 회복하고자 한 것이 본송(本頌)의 의미이다.
부정(不定)의 심소는 4종(四種)이 있으니 회(悔)·면(眠)·심(尋)·사(伺) 등이다. 본송(本頌) 끝구에 2각2(二各二)라 한 것은 회면(悔眠)을 1류(一類)로 생각하고 심사(尋伺)를 1류(一類)로 보아 2류(二類)가 되고 류(類)마다 각각 선악(善惡)이 있다는 뜻이다. 회면(悔眠)의 뜻은 뉘우치고(悔) 수면(眠)을 취하는 선(善)의 측면과 후회(悔)하고 침체(眠)되는 악(惡)의 측면이 있어 각각 선악에 통하고, 심사(尋伺)는 심(尋)은 심구(尋求)의 뜻으로 찾아내는 것을 말하고 사(伺)는 사찰(伺察)의 뜻으로 살펴보는 것을 말한다.
심사(尋伺)도 역시 선·악(善惡)에 통하므로 회면(悔眠)과 심사(尋伺) 두 가지 류(類)는 혹은 선(善)이 되고 혹은 악(惡)이 되기도 함을 원문(原文) 끝에 2각2(二各二)로 밝힌 것이다.
수행은 모름지기 적은 것을 돌이켜 큰 데로 돌아가고 중생을 돌이켜 성불의 길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송문(本頌文)에서 밝힌 것은 작은 번뇌를 돌이켜 청정법해(淸淨法海)에 들게 하기 위한 것이니 수행자는 번뇌의 심소를 규명하여 극복하고 열반적정(涅槃寂靜)의 묘도(妙道)에 드는 길을 스스로 돌파해야 할 것이다.
제 15 송
依止根本識 五識隨緣現
惑俱惑不俱 如濤波依水
사량분별(思量分別)하는 마음인 전5식(前五識)은 모두 제8근본식(阿賴耶識)을 의지하여 반연을 따라 작용이 일어난다. 전5식(前五識)이 작용할 때는 눈과 귀 등 여러 식(識)이 함께 작용하기도 하고 일식(一識)씩 단독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전5식이 근본식(根本識)을 의지하여 마음을 일으키는 정형(情形)은 마치 파도가 물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과 같다.
< 해 설 >
지난 14송(十四頌)까지는 유식의 심소(心所)를 밝혔고 본 15송(十五頌)에서는 유식의 작용이 일어나는 상태를 설명한다. 마음에는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 작용하는 5관(五觀) 곧 전5식(前五識)과, 사량분별하고 기억하고 선별할 수 있는 제6 의식과 예지력과 잠재력 그리고 사량하여 탐착하는 제7 말나식과 근본의식인 제8 아뢰야식 등의 심소가 있다.
이러한 심소가 작용하는 정황을 설명하고 마음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하는 것이 이 송문(頌文)의 핵심이다. 따라서 본 송문에서는 전5식은 무엇을 의지하며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밝히고 있다. 전5식이 무엇을 의지하는가에 대해서 본문 제1구에 의지근본식(依止根本識)이라 하여 근본식을 의지한다고 한 것은 전5식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식을 의지해서 존재함을 말한 것이다
.
근본식이란 제8 아뢰야식으로 모든 식(識)의 바탕이 되기 때문에 근본식이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5식수연현(五識隨緣現)이라 하여 5식이 근본식을 의지하되 연(緣)을 따라 현기(現起)하여 작용한다고 한 것이 그 설명이다. 연(緣)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① 공연(空緣) : 공간 또는 거리이다.
② 명연(明緣) : 빛이니 밝음을 말한 것이다.
③ 근연(根緣) : 정색근(淨色根)이니 6근(六根)을 말함.
④ 경연(境緣) : 면전의 경계로 6진(六塵)을 말함.
⑤ 작의연(作意緣) : 5변행심소(五遍行心所) 중의 작의(作意)로서 모든 심(心)에 상응하여 일어난다.
⑥ 분별의연(分別依緣) : 제6식을 말한다.
⑦ 염정의연(染淨依緣) : 제7식이다. 아집(我執)이 강하게 일어날 때를 염(染)이라 하고 가볍게 일어날 때를 정(淨)이라 한다.
⑧ 근본의연(根本依緣) : 제8식이다. 모든 식(識)은 8식을 의지해서 일어난다.
⑨ 종자의연(種子依緣) : 각각의 식(識)이 스스로 의지하는 창고이며 모든 식(識)이 나오는 자리이니 종자를 의미한다.
이상의 아홉 가지 연(緣)을 9연(九緣)이라 한다. 안식(眼識)을 일으킬 때는 위의 9연이 모두 있어야 하고 이식(耳識)은 안식(眼識)과 비슷하나 어둠 속에서도 들을 수 있으므로 명연(明緣)을 제외한 8연(八緣)으로 듣는 작용을 할 수 있다. 비(鼻)·설(舌)·신(身) 3식(三識)은 명연(明緣)은 물론 거리도 필요 없으므로 공(空)·명(明) 2연(二緣)이 없는 7연(七緣)으로도 식(識)을 발할 수 있다. 이와 같이 5식은 근본식을 의지하고 외부연에 의해서 심식(心識)을 일으킨다.
혹구혹불구(惑俱惑不俱) : 구(俱)는 함께의 뜻으로 전5식(前五識) 중에 양식(兩識) 또는 3∼4개의 식(識)이 동시에 작용하는 것을 구(俱)라 하고 오직 하나하나의 식이 단독으로 작용하는 것을 불구(不俱)라 한다.
가령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동시에 하면 2구(二俱)가 되고 보고 듣고 냄새 맡는 것을 동시에 하면 3구(三俱)가 되고 맛보는 것까지 동시에 하면 4구(四俱)가 되고 5식(五識)이 동시에 작용을 해서 식(識)을 발하면 5구(五俱)가 된다. 여기에 의식(意識)과 잠재력(潛在力)과 무의식적 감각 등이 동시에 작용을 하면 9식 모두가 동시에 작용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수행자는 모름지기 동시에 여러 식(識)이 작용하는 것을 꺼려야 한다. 오직 9식이 한 경계에 몰입해야 삼매(三昧)에 들 수 있고 삼매에서만이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5식의 작용은 근본식을 의지하여 작용하므로 근본식이 존재하지 않으면 전5식 또한 작용하지 못한다.
여도파의수(如濤波依水) : 파도가 물을 의지하여 일어난다고 한 것은 5식의 마음이 근본식을 의지하여 작용한다는 뜻을 비유한 말이다. 파도는 파랑(波浪)이니 전5식이요, 물은 제8식이다. 물에서 파도가 일어나려면 반드시 바람이라는 연(緣)이 있어야만 가능하듯이 근본식에서 파도와 같은 전5식이 작용하려고 한다면 9연이라고 하는 바람의 연을 만나서 작용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한 마음의 작용도 단독으로 일어날 수 없듯이 세상의 만법이 모두 인연의 소생(所生)임을 깨달아야 한다.
제 16 송
意識常現起 除生無想天
及無心二定 睡眠與悶絶
제6의식은 항상 현기(現起)하지만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날 때와 무상(無想)과 무심(無心) 2정(二定)에 들 때 그리고 잠잘 때와 민절(悶絶)했을 때는 현기하지 않는다.
< 해 설 >
이 송(頌)은 제6의식이 현기하여 작용하는 상황을 설명한 송(頌)이다. 전5식은 근본식을 의지하고 경계가 있어야만 작용하지만 제6의식은 외경(外境)과 상관없이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일거일동(一擧一動)에 쉬지 않고 작용을 한다. 단 무상천에 태어날 때와 무상(無想)·무심(無心) 두 정(定)에 들었을 때와 잠잘 때와 기절했을 때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
무상천에 태어날 때와 무상·무심(無想·無心) 두 정(定)에 들었을 때는 모두 공덕과 수행에 의해서 작용하지 않으므로 무심(無心)의 경계라 할 것이요, 잠잘 때와 기절했을 때는 무기(無記)의 경계라 할 수 있다.
무상천(無想天) : 색계(色界)의 4선9천(四禪九天) 중 제4천(第四天)에 해당되며 삼계28천 중 제19천이다. 이 천상에 태어나는 것은 무상정(無想定)을 닦은 자가 사후(死後)에 태어나는 곳이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심상(心想)을 일으켜 윤회하게 되므로 구경지(究竟地)가 아니다.
무상정(無想定) : 무상천에 태어나기를 희망하여 일체의 심상(心想)이 멸한 정(定)이다. 무상천에 태어나거나 무상정(無想定)에 든 두 경지는 모두 몸을 안화(安和)하게 할 수 있으므로 정(定)이라 하며, 여기에 이른 자는 이것이 열반(涅槃)이라고 믿어 진멸(盡滅)할 분이 없으므로 외도 또는 범부가 닦는 정(定)이라 한다.
무심(無心) : 이는 멸진정(滅盡定) 또는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 한다. 탐욕(貪慾)과 분별이 모든 업(業)의 근본임을 알아 그것을 멸(滅)하고자 하여 제6식을 압재한 정(定)으로서 성자(聖者)가 닦는 수행법이다. 이 정에는 6식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무심이라 한다.
수면(睡眠) : 깊이 잠이 들었을 때는 6식이 완전히 정지(停止)한다.
민절(悶絶) : 혼미한 상태로 인사불성(人事不省)을 의미한다.
수면과 민절로 인해서 6식이 정지되는 것은 잠시여서 잠이 깨거나 혼절에서 깨어나면 다시 6식이 작용을 하게 된다.
6식의 분별은 무한하고 맑고 깨끗한 청정심(淸淨心)을 장애하므로 이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제 17 송
是諸識轉變 分別所分別
由此彼皆無 故一切唯識
이 모든 식(識)이 전변(轉變)하기 때문에 분별(分別)과 분별할 것[所分別]이 있다. 차(此)인 주관과 피(彼)인 객관이 모두 존재하지 않으므로 일체가 유식(唯識)인 것이다.
< 해 설 >
모든 식(識)은 8개의 식이며 8개의 식이 전변해서 나타나는 것은 아(我)·법(法)·종종상(種種相)이다. 종종상(種種相)은 일체만법이니 일체만법은 실(實)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식(識)에 의해서 존재한다. 만법이 비록 얽혀서 무한하지만 모두 식(識)이 전변해서 존재하고, 식(識)이 전변해서 만법을 존재하게 하지만 모두 연생(緣生)에 불과한 것이다. 법계(法界)는 실로 식(識)의 전변(轉變)으로 연생(緣生), 연멸(緣滅)하므로 무자성(無自性)이라 하고 환유(幻有)라 하는 것이다.
시제식전변(是諸識轉變) : 전변(轉變)이란 선전후변(先轉後變)의 뜻으로 주관의 식을 전(轉)하여 객관의 경(境)을 이루어 일체만법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니 이렇게 하는 주체가 유식이요, 유식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전변에는 3종의 뜻이 있다.
① 변현의(變現義) : 식의 전(轉)을 인하여 현상세계가 변(變)하고 현상세계가 변(變)함을 인하여 만법이 드러남(現)을 말한다. 즉 유식의 체(體)로부터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의 2분(二分)이 변출(變出)되는 것이니 견분(見分)은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주체로서 능분(能分)이라 할 수 있어서 이는 유정(有情)에 속하고, 상분(相分)은 객관으로서 산하대지(山河大地) 등이니 소분(所分)이라 할 수 있어서 이는 무정(無情)에 속한다.
② 변이의(變異義) : 변(變)은 만법이 생기(生起)하는 뜻이요, 이(異)는 만법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不同)는 뜻이니 모두가 오직 식에 의해서 견(見)·상(相) 2분(二分)이 다르게 나타남을 말한다. 즉 식체(識體)는 본래 부동하지만 견(見)·상(相) 2분(二分)은 식에 의해서 변이(變異)하므로 변이라 하며 견분(見分)은 능(能)이 되고 상분(相分)은 소(所)가 되어 능소(能所)가 모두 식에 의해 변현(變現)하지만 작용이 각각 다르므로 변이라 한 것이다.
③ 개변의(改變義) : 식체(識體) 자체가 변하여 아(我)·법(法) 2상(二相)이 되고 견(見)·상(相) 2분(二分)이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어린아이와 어른의 식이 다르고 중생과 보살의 식이 다름을 말한 것으로 중생이 수행을 통하여 대보살의 식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분별소분별(分別所分別) : 분별은 식(識)이며 능(能)이며 주관이며 능전변(能轉變)으로서 능동적이고, 소분별(所分別)은 경(境)이며 소(所)이며 객관이며 전변된 견(見)·상(相) 2분으로서 피동적이다.
차피(此彼) : 차(此)는 능전변(能轉變)인 모든 식(識)을 말하고 또 식(識)의 체(體)를 말한다. 피(彼)는 소전변(所轉變)인 아(我)·법(法)을 말한 것으로 일체 만법이다.
모든 식(識)이 실체가 없으므로 일체 아(我)·법(法)이 없고, 따라서 피차(彼此)가 모두 없으므로 차피개무(此彼皆無)라 하였다. 또 세간의 모든 법(法)은 유위(有爲)·무위(無爲)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유위(有爲)·무위(無爲) 역시 본래 존재하지 않으므로 차피(此彼)라고 하는 능(能)·소(所)와 주관과 객관이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일체유식(一切唯識) : 피차(彼此)의 모든 법(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세·출세법(出世法)도 존재하지 않으며 삼라만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체만법은 모두 식(識)이 변현(變現)한 것이며 식(識)이 반연하는 대상이므로 식(識)을 떠나서는 어떠한 것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일체유식(一切唯識)이라 했다.
제 18 송
由一切種識 如是如是變
以展轉力故 彼彼分別生
일체종식(一切種識)이 여러 형태로 변함으로 말미암아 전전(展轉)하는 힘[力]이 작용되기 때문에 갖가지 분별이 생기(生起)하는 것이다.
< 해 설 >
선(善)과 악(惡)은 어디에서 나오며 목전(目前)에 전개(展開)되는 일체 만법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제8아뢰야식에 잠장(潛藏)되어 있는 종자식(種子識)이 변하여 힘을 발휘하므로 만법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종자식(種子識)이 전변(轉變)하는 것은 모두가 업(業)에 의해서 가능하므로 수행자는 모름지기 업(業)을 맑히고 원력(願力)을 키우고자 발심(發心)하는 것이다.
일체종식(一切種識) : 일체종식(一切種識)은 아뢰야식의 다른 이름이며 그 안에 선·악 및 세간·출세간의 무량한 종자를 함장(含藏)하고 있기 때문에 일체종식(一切種識)이라 한 것이다.
종자(種子)는 습기(習氣)를 말한 것으로 일체 중생이 선·악의 업을 지을 때 그 습기(習氣)가 8식에 훈습되어 선·악의 종자가 그 안에 심어져 일단의 훈습시간을 경과한 후에 성숙된 것을 말한다. 습기(習氣)가 성숙된 후에는 그 안에서 외연(外緣)이 모여들 때를 기다렸다가 비로소 발아(發芽)하여 역량(力量)을 발휘하여 현행(現行)한다.
종자(種子)는 이숙(異熟)이라 하기도 하는데 종자는 선·악의 인(因)에 함장(含藏)되고 선·악의 인(因)에 의해서 과보가 다르기 때문에 이숙(異熟)이라 한 것이다. 이숙(異熟)에는 인(因)이 변이(變異)하여 과(果)가 되어 성숙되는 변이숙(變異熟)과 인(因)이 무기(無記) 또는 대지(大智)로 바뀌어 성숙되는 이류숙(異類熟)과 인(因)이 1·2생(一·二生) 또는 몇천 생을 지나 과(果)를 받는 이시숙(異時熟) 등 세 가지가 있다. 그러므로 제8식을 이숙능변(異熟能變)이라 하는 것이다.
여시여시변(如是如是變) : 제8아뢰야식은 일체종식(一切種識) 안에 함장되어 있는 무량무수한 경계를 변출(變出)할 수 있으므로 송문(頌文)에 '유일체종식(由一切種識) 여시여시변(如是如是變)'이라 한 것이다. 여시(如是)를 반복하여 여시여시변(如是如是變)이라 한 것은 제법종자(諸法種子)가 많고 그 변화의 순서가 무한하여 시시각각으로 변화함을 표현한 뜻이다.
전전력(展轉力) : 종자(種子)의 능력이 8식의 심(心)과 심소법(心所法)을 생기(生起)한 다음에 현행(現行)하고 다시 현행(現行)이 8식의 과(果)를 일으켜 아뢰야식에 훈습하여 각종의 새로운 종자를 이루는 힘을 전전력(展轉力)이라 한다. 이처럼 종자는 현행을 생(生)하고 현행은 다시 훈습하여 각각의 유(類)를 이루어 전전부단(展轉不斷)하므로 분별도 또한 이에 따라 부단(不斷)한다. 전전(展轉)은 전전(轉轉)의 뜻으로 전후(前後)를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피피분별(彼彼分別) : 피피(彼彼)는 중다(衆多)의 뜻으로 가지가지의 의미로 쓰인다. 아뢰야식은 수없이 많은 능변(能變)의 힘이 있어 변화를 주도하고 변화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무한한 전전력(展轉力)으로써 힘이 무궁하여 법계의 아(我)·법(法)을 가려낼 수 있다. 따라서 이 송(頌)은 고저장단(高低長短)과 시비선악(是非善惡)을 가려서 중생성불(衆生成佛)의 길을 제시하고 아뢰야식의 종자에 전전력(展轉力)으로써 천지(天地)의 주제(主帝)가 됨을 밝힌 송문(頌文)이다.
제 19 송
由諸業習氣 二取習氣俱
前異熟旣盡 復生餘異熟
모든 업(業)의 습기(習氣)와 능(能)과 소(所) 2취(二取)의 습기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서 '생사윤회가 존재하고' 전이숙(前異熟)이 이미 다하면 다시 다른 이숙(異熟)이 생기(生起)하는 것이다.
< 해 설 >
제업습기(諸業習氣)란 업(業)을 지을 수 있는 습기로서 모르는 사이에 업을 짓는 습관적 기운이다. 이러한 습기에는 스스로 짓는 능(能)과 상대적으로 따라서 짓는 소(所)의 기운이 항상 구비되어 있다. 이로 인하여 생사(生死)가 있고 전후(前後)의 업식(業識)이 반복해서 생멸(生滅)하므로 윤회가 있게 된다.
제업(諸業)은 선·악·무기(善·惡·無記) 등의 업과 신·구·의(身·口·意)의 업과 유루업(有漏業)과 무루업(無漏業)을 총칭하여 제업(諸業)이라 하고 습기(習氣)는 업의 기(氣)가 아뢰야의 장식(藏識)을 훈습하여 같은 업의 공능(功能)을 남기는데 이러한 공능(功能)을 습기(習氣)라 한다. 습기가 장식(藏識) 중에 머무르면 종자라 하고, 그 종자가 성숙하면 이숙과(異熟果)를 초래하게 되어 이를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한다.
제업습기(諸業習氣)를 크게 유루업(有漏業)과 무루업(無漏業)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그 중에 유루업의 습기는 선·악·무기 어느 것을 막론하고 모두 생사의 인(因)이 된다.
2취(二取)는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이다. 취(取)는 취착(取着)의 뜻으로 탐착(貪着)으로 이해하면 된다. 능취(能取)는 일체의 심(心)과 심소(心所)의 체(體)이며 소취(所取)는 취(取)할 대상이니 이를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이라 한다. 여기에서 견분(見分)을 취하는 것은 아집(我執)이라 하고 상분(相分)을 취하는 것은 법집(法執)이라 한다.
2취(二取)는 모두 견분(見分)을 집착하여 실아(實我)로 여기고 상분(相分)을 집착하여 실법(實法)으로 여기는 것이 확고하여 집착하는 마음이 흩어지지 않아 시간이 오래되면 일종의 습기가 된다. 생사윤회는 모든 습기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모든 습기에는 3종이 있다.
첫째는 명언습기(名言習氣)니 이에 명칭(名稱)과 언설(言說)로 어떤 의미를 표시하는 언(言)·어(語)·장구(章句)·부호(符號) 등을 표의명언(表意名言)이라 하고 경계를 요별하기 위해 묘술형언(描述形言)한 것은 현경명언(顯境名言)이라 하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둘째는 아집습기(我執習氣)니 아(我)란 본래 존재함이 없으나 집착하므로 존재하는 것이다. 아집(我執)에는 구생아집(俱生我執)과 분별아집(分別我執)이 있다. 구생아집(俱生我執)은 본능적이고 선천적인 것을 말하고 분별아집(分別我執)은 분별에 의해 일어나거나 학습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으로 습염적(習染的)이고 후천적이다. 이 두 가지의 아집은 6·7식에 모두 존재하고 그 근원은 7식 중 4번뇌로부터 온 것이다. 따라서 말나식은 아집의 근본이며 아집은 생사의 근본이다.
셋째는 유지습기(有支習氣)니 유지(有支)는 12유지며 12인연이다. 3계(三界)를 3유(三有)라 하는 것은 인(因)이 있고 과(果)가 있고 생사가 있기 때문이다. 유지습기는 업습기(業習氣)와 이숙습기(異熟習氣)로서 3계(三界)에서 과(果)를 받게 하는 업종자(業種子)를 불러 일으켜 감득(感得)한다. 여기에 2종이 있으니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 선업(善業)과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악업(惡業)이 그것이다.
본 송문(頌文)의 제업식(諸業識)은 곧 생사윤회의 근원이며 생사윤회의 주체이며 만법의 주처(主處)이다. 마음의 주처(主處)와 소처(所處), 그리고 그 작용을 아는 것이 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제 20 송
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此遍計所執 自性無所有
갖가지 계산하는 마음으로 갖가지 사물을 계산하나니 이 계산하는 마음과 계산해서 집착하는 사물의 자성(自性)은 본시 있는 곳이 없다.
< 해 설 >
제20송부터 24송까지는 3성(三性)·3무성(三無性)의 도리를 설명하고 있다.
3성(三性)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타기성(依他起性)·원성실성(圓成實性)이며 일체법이 3성을 떠나지 않지만 이 3성은 본래 무성(無性)이다. 본 송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해설한 송이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은 두루 계교하여 집착한다는 뜻으로 변계(遍計)는 마음으로 우주만물(宇宙萬物)에 대하여 갖가지로 주변계탁(周遍計度)한다는 뜻으로 주변계탁(周遍計度)은 두루 계산하여 헤아린다는 말이다.
소집(所執)은 두루 계산하고 계탁하여 변계(遍計)한 후에 가상해서 인연화합(因緣和合)에 의해 생기(生起)된 사물(事物)을 사량분별(思量分別)한 후에 그 명(名)을 집착하거나 그 상(相)을 집착하여 그것들이 유(有)이다, 무(無)이다, 또는 색(色)이다, 심(心)이다, 내지는 실아(實我)이다, 실법(實法)이다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계량(計量)하여 집착하는 견해(見解)는 실법(實法)이 아니고 오직 환상(幻像)일 뿐이기 때문에 이를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이라 이름한 것이다.
피피(彼彼) 두 자의 뜻은 변계(遍計)하는 심념(心念)이 매우 많아 일체만법(一切萬法)에 대하여 두루 계량(計量)함을 형용한 것이다.
변계종종물(遍計種種物)이라고 한 제2구의 뜻은 갖가지 사물을 변계(遍計)한다는 뜻으로 마치 바닷물을 잔으로 계량한다면 끝내 계산할 수 없듯이 사물을 계산만 할 뿐 바로 볼 수 없음을 변계종종물(遍計種種物)이라 한다.
따라서 목전(目前)의 경물(景物)을 잘못 판단하여 인(因)이 아닌데 인(因)이라 하고, 과(果)가 아닌데 과(果)라 하고, 시(是)를 비(非)라 하고 비(非)를 시(是)라 하거나, 화(禍)를 복(福)으로 여기고 복(福)을 화(禍)로 여기거나, 충신(忠臣)과 간신(奸臣)을 잘못 가리는 등 본래의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함을 변계소집(遍計所執)이라 한다.
변계소집(遍計所執)이라고 한 3구의 뜻은 변계(遍計)에는 능변계(能遍計)와 소변계(所遍計)가 있으니 능변계(能遍計)는 마음으로 바깥 사물을 대하는 것으로 주관(主觀)에 속하고, 소변계(所遍計)는 모든 사물을 말한 것으로 객관(客觀)에 속한다. 이 양방의 능·소(能·所)가 대대(對待)함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이에 소집(所執)이 더해지면 변계소집(遍計所執)이 되어 순수하게 대대(對待)하지 못한다.
계탁(計度)한 것이 사실과 부합되지 않을 때 이를 집(執)이라 하는데 계집(計執)이란 노끈을 뱀으로 잘못 집착하여 고집하는 것을 말한다. 실상(實相)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면 노끈이 본래 노끈이 아니고 뱀이 본래 뱀이 아니다. 따라서 노끈을 노끈으로 보고 뱀을 뱀으로 본다 해도 이는 실상법(實相法)이 아니므로 변계소집(遍計所執)이 되거늘 하물며 노끈을 뱀으로 잘못 집착하는 우(愚)를 범하랴.
본 송 말구(末句)에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라 한 것은 제8식과 전5식은 능·소(能·所)의 변계(遍計)가 없어서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라 한 것이다. 자성(自性)이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능·소(能·所)가 없고 능·소(能·所)가 없기 때문에 변계(遍計)가 없고 변계(遍計)가 없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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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무불선원 | 글쓴이 : 念佛 원글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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