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해설: 혜거 스님
제 21 송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의타(依他)해서 생기는 자성(自性)은 허망 분별하는 반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고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저 의타기(依他起)해서 생긴 성품(性品)이 계산해서 집착[遍計所執]하는 마음[性]을 여의면 자연히 드러난다.
< 해 설 >
본 송(頌)으로부터 24송까지는 3성(三性)과 3무성(三無性)을 설명한 것이다. 3성(三性)은 계산해서 집착하는 마음[遍計所執性], 경계(境界)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依他起性], 원만하고 실다운 마음[圓成實性]이다.
모든 중생은 3성(三性)으로 마음이 일어나지만 3성은 본래 무성(無性)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일어나려면 경계가 있어야 하고 경계가 있어도 6근(六根)이 부합되어야 한다. 6근(六根)과 경계가 부합되어서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을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한다. 타(他: 경계)를 의해서 일어난 마음이 계산해서 집착하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 되고 집착해서 계산하지 않으면 원성실성(圓成實性)이 된다.
의타기(依他起)하지 않으면 본래 마음이 없고 본래 마음이 없으면 변계소집(遍計所執)의 마음도 원성실(圓成實)의 마음도 없는 것이다. 이를 3무성(三無性)이라 한다. 중생은 3성(三性)으로 마음을 쓰기 때문에 계산해서 집착[遍計所執]하고 보살은 3성이 있으나 계산해서 집착하지 않으므로 원성실(圓成實)의 마음을 쓰고 불지(佛地)에 이르면 3무성(三無性)이 되어 비로소 마음에 자재해탈을 얻게 된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의 의(依)는 의지, 의탁의 뜻이며 제법(諸法)은 타(他)를 의지하여 생(生)하므로 의타기(依他起)라 한다. 불이 스스로 타오를 수 없고 산천초목이 자생(自生)할 수 없고 인간 또는 일체 만법이 자생할 수 없어서 의인탁연(依因托緣)하여 인연(因緣)이 구족(俱足)되면 생기(生起)하는 까닭에 의타기(依他起)라 한다.
분별연소생(分別緣所生)이라 한 제2구의 뜻은 먼저 분별은 차별하는 분별이 아니고 구별, 선별의 뜻이다. 연(緣)은 기성(起性)의 연(緣)이니 타(他)에 해당된다. 일체 제법(一切諸法)은 색(色)·심(心)의 2류(二類)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색법(色法)은 드러나 있는 일체 만법이기 때문에 이를 상분(相分)이라 하며 분별할 바[所分別]인 모든 사물을 지칭하여 이를 색법(色法)이라 한다. 이러한 색법은 모두 인연법에 의해 생기(生起)하며 자생(自生)하지 못하고 연생(緣生)이기 때문에 의타기(依他起)인 것이다.
심법(心法)은 분별이 주체이기 때문에 견분(見分)이라 한다. 능분별(能分別)인 인식(認識)이 연생법(緣生法)에 의해 생기므로 안으로는 견분종자(見分種子)를 의탁하고 밖으로는 5근(五根)·5경(五境) 등의 연(緣)을 따라 식(識)이 작용된다. 이렇듯 연생(緣生)이기 때문에 심법(心法)도 또한 의타기(依他起)이며 무자성(無自性)이다.
제3구의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원만(圓滿), 성취(成就), 진실(眞實)의 의미로서 불성(佛性), 법성(法性), 진여(眞如), 법신(法身) 등이 구족히 모두 원성실성(圓成實性)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법성, 진여, 법신 등이 곧 원성실성이며 원성실성이 곧 법성, 진여, 법신 등이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의타기성(依他起性)에서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면 원성실성(圓成實性)이고 분별을 일으키면 변계소집(遍計所執)이 된다. 법상(法相)은 유한(有限)하나 법성(法性)은 무한(無限)하며 법상(法相) 허가(虛假)이나 법성(法性)은 진실(眞實)하다. 따라서 제법의 법성(法性)은 부동불변(不動不變)하고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며 담연(湛然) 상주(常住)하고 원만시방(圓滿十方)하므로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이라 이름한다.
3구의 원성실어피(圓成實於彼)의 피(彼)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을 말한 것으로 원성실성은 의타기 중에서 발로되는 바 의타기에서 변계소집성을 여의어야 하므로 상원리전성(常遠離前性)이라 했다.
제 22 송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그러므로 이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의타기성(依他起性)으로 더불어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이 마치 저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 등의 성질(性質)과 같아서 이러한 원성실성(圓成實性)에 의타기성(依他起性)을 보지 않음이 없지 않다.
< 해 설 >
전 송(頌)에서는 의타기성(依他起性)에서 변계소집(遍計所執)을 멀리 여의면 원성실(圓成實)이 된다 하였고 본 송(頌)에서는 원성실이 의타기와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지도 않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의식(意識)은 5근(五根)과 5진(五塵)이 부합(符合)하여 생기(生起)하는 데 왜 의타기(依他起)라 하는가 의문할 수 있으나 심식(心識)에서는 외경(外境)인 5진과 내경(內境)인 5근 모두가 진아(眞我)가 아니고 타물(他物)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경과 내경이 부합하여 생긴 마음은 당초부터 진아(眞我)의 심(心)이 아니거늘 사량(思量)하고 분별하고 집착하는 것이 중생의 마음이기 때문에 이러한 변계소집을 깨달아 멀리 여의면 본래 청정한 원성실(圓成實)의 마음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제1구의 고(故)는 21송을 이어 본 송을 시작하기 때문에 소이(所以)의 뜻이다. 또 차여의타(此與依他)라고 한 차(此)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지칭한 것이다.
제2구에서 제1구의 원성실(圓成實)과 의타기(依他起)로 더불어라고 한 송을 계승하여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한 것은 원성실(圓成實)과 의타기(依他起)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는 말로서, 원성실(圓成實)과 의타기(依他起)가 같은 것은 원성실(圓成實)은 성(性)이 되고 의타기(依他起)는 상(相)이 되므로 상(相)은 성(性)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성(性)이 없으면 상(相)이 성립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만법은 원성실(圓成實)을 떠나서 따로 의타기(依他起)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의타기(依他起)의 법은 모두 원성실(圓成實)을 바탕으로 하여 나오기 때문에 같다고 한 것이다. 다르다고 한 것은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의타기성(依他起性)이 아니며 의타기성(依他起性)도 또한 원성실성(圓成實性)이 아니다. 원성실성은 영원하고 불변하고 불멸하여 항상하지만 의타기성(依他起性)은 연생(緣生)이므로 무상(無常)하고 변멸(變滅)하여 원성실성과는 같을 수가 없다.
그러나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고 한 것은 의타기법(依他起法) 중에 원성(圓性)의 진실성(眞實性)이 확실히 존재하고 원성실의 진공(眞空) 중에 역시 묘유(妙有)를 함유(含有)하여 만법을 생(生)할 수 있으므로 같다 하였고, 한편 원성실은 연기법(緣起法)이 아니고 생멸무상(生滅無常)이 아니므로 연기법에 의해서 존재하고 연기법이기 때문에 생멸하여 무상한 의타기와는 같지가 않아서 다르다고 한 것이다.
제3구에서 무상등성(無常等性)이라 한 것은 제법무아(諸法無我)·제행무상(諸行無常)·유루개고(有漏皆苦)·연기성공(緣起性空) 등 소승(小乘) 4법인(四法印)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4법인을 수행하여 의타기에 의해 생기(生起)한 모든 법이 무아(無我)임을 깨닫고 무상(無常)임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4법인(四法印) 등을 수행하여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성취하고 원성실의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자리에서 저 의타기성의 무상(無常)을 깨닫지 않은 자가 없으므로 말구(末句)에서 원성실에서 의타기를 보지 않는 이가 없지 않다고 하였다.
비불견(非不見)의 견(見)은 증견(證見)의 뜻으로 깨달음을 의미하고 원성실에서 의타기를 깨닫는다는 것은 곧 의타기를 멀리 여윈다는 뜻이다.
제 23 송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곧 이 3성(三性 : 遍計所執性, 依他起性, 圓成實性)에 의지하여 상(相), 생(生), 승의(勝義)라고 하는 3무성(三無性)이 성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밀의(密意)로 설(說) 하시기를 일체법이 무성(無性)이라 하신 것이다.
< 해 설 >
이 송(頌)은 본래 자성(自性)이 없음을 확고히 드러낸 송(頌)이다. 중생이 나[我]라고 여기는 심식(心識)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인데 이 3성(三性)의 시작이 경계를 의지하여 생기(生起)하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기 때문에 마음이란 경계가 없으면 일어나지 않으므로 본송(本頌)에 3무성(三無性)이라 하여 본무자성(本無自性)임을 밝힌 것이다.
이는 마치 부싯돌이 부딪쳐야 불이 일어나듯 마음도 경계에 의해 일어나므로 3성(三性)의 마음이 본래 없다 한 것이다. 경계에 의해 마음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아 경계에 부동(不動)하고 계탁분별(計度分別)하지 않으면 원성실성(圓成實性)이 되어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이루거니와 본래 없는 마음이 경계에 의해 일어난 것을 집착하여 내 마음이라 하고 사량(思量)하고 헤아리면 이것이 곧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 되어 윤회(輪廻)의 씨가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3무성(三無性)이라면 마음은 왜 존재하는가. 그 근원을 규명해 보면 부싯돌이 부딪치지 않으면 불이 존재하지 않지만 부싯돌이 부딪치므로 불이 일어나듯 마음은 본래 나고 멸함이 없으나 인연에 의해 생(生)하고 인연에 의해 멸(滅)하므로 연생연멸(緣生緣滅)인 것이다. 자성(自性)에 생멸(生滅)이 없는 것을 본무자성(本無自性)이라 하고 연생연멸(緣生緣滅)하는 마음을 집착하고 계산하는 마음을 변계소집성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와 같이 3성(三性)의 소이연(所以然)이 연(緣)이요, 연(緣)은 실(實)이 아니므로 3무성임을 깨달음으로써 마음의 집착을 끊을 수 있고 경계에 부동할 수 있는 것이다.
3구(三句)의 밀의(密意)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으니 하나는 부처님의 설법이 의미가 깊어 참된 뜻이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밀의(密意)라 하고 둘째는 부처님의 뜻이 심히 깊어서 입지(入地)하지 못한 수행자가 헤아려 알 수 없기 때문에 밀의(密意)라 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밀의로 설하셨다고 한 것은 경계에 의해 마음이 생기(生起)하고, 생기한 마음을 계산하여 집착하고, 생기한 마음을 계산하여 집착하지 않는 3성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마음의 실(實)인 줄로 착각하여 집착하는 범부중생(凡夫衆生)을 위하여 3성이 모두 무자성(無自性)임을 설(說)하시어 일체만법의 성상(性相)이 모두 공(空)임을 드러내 주셨기 때문이다.
이는 3성을 세워 마음의 생처(生處)를 설(說)하시고 3무성을 세워 3성에 대한 집착을 파(破)해 주신 것이니 이것이 곧 밀의(密意)에 해당된다 하겠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 마음의 주처(住處)를 3성으로써 밝히시고 범부가 곡해(曲解)하여 제법의 자성이 실제로 있다고 집착할까 염려하셔서 3성의 자리가 본래 무성(無性)임을 설하시어 제법의 성상(性相)이 모두 공(空)임을 드러내 주신 것이다. 무성의 자리는 집착할래야 집착할 것이 없고 집착을 파(破)할래야 파할 것이 없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자리인 것이다.
제 24 송
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처음은 일체 모든 상(相)이 무성(無性)인 상무성(相無性)이요, 다음은 자연성(自然性)이 무성(無性)인 무자연성(無自然性)이요, 최후는 이전에 집착한 아(我)와 법(法)을 멀리 여읜 실성(實性) 곧 승의무성(勝義無性)이다.
< 해 설 >
3성(三性)에 의해 3무성(三無性)임을 이미 전송(前頌)에서 설명했고 본송(本頌)에서는 3무성의 구체적인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의식이란 밖에서 주입되어 존재하게 되는 바 이를 계탁(計度)하면 변계소집(遍計所執)이 되고 계탁하지 않으면 원성실(圓成實)이 되는 것은 3성이 본래 무성이기 때문이다.
1구(一句)의 상무성(相無性)의 뜻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에 대하여 변계소집성 자체가 상무성(相無性)임을 드러낸 구(句)이다. 변계소집성이 왜 상무성인가?
변계소집이란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가령 어두운 밤에 노끈을 보고 뱀이라고 잘못 여기는 것과 같이 생사(生死)가 본래 없는데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한다고 집착하고 보리열반(菩提涅槃)이 법계(法界)에 충만하지만 그 실(實)을 보지 못하고 보리열반을 따로 찾는 것 등이 모두 변계소집이다. 그러므로 변계소집성을 상무성이라 한 것이다.
제2구(第二句)의 무자연성(無自然性)은 생무성(生無性)의 뜻으로 의타기(依他起)의 마음이란 무자연성(無自然性)이며 생무성임을 밝힌 구(句)이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의 뜻은 만법은 자생(自生)하지 못하고 다른 갖가지 반연을 의지해서 생기(生起)하므로 비로소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의타기(依他起)라 한다. 따라서 의타기의 성(性)은 인연에 의한 것이므로 인연생(因緣生)이 되는 것이다.
무자연성(無自然性)의 자연은 천연(天然)의 뜻으로 모든 법은 천연생(天然生)이 아니라 인연생(因緣生)이므로 연(緣)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생(生)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법이 연생(緣生)이기 때문에 의타기(依他起)가 되고 의타기에 자성이 없으므로 무자연성 또는 생무성이라 하는 것이다.
끝으로 3·4구(三·四句)에 이전에 집착한 바 아법(我法)을 멀리 여읜 성(性)이란 승의무성(勝義無性)을 말한 것으로 승의무성이란 원성실(圓成實)이 무성임을 밝힌 송(頌)이다. 원성실은 의타기로 생기한 마음을 계탁(計度)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므로 찰나생멸(刹那生滅)의 이치에서 불변부동(不變不動)하고 무생무멸(無生無滅)의 성(性)이기 때문에 제1의제(第一義諦)에 속하며 이를 승의제(勝義諦)라 한다. 승의제란 본래 공(空)하여 무소유이므로 유와 무를 초월하고 그러면서도 세속제(世俗諦)를 수순(隋順)하므로 승의(勝義)라 하는 것이고 굳이 말하자면 무자성(無自性)의 성(性)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구(三句)의 후유원리전(後由遠離前)이라 한 이 구(句)에서 후(後)라고 한 자(字)는 원성실성을 말한다. 그것은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의 다음이라는 뜻이 되고 전(前) 자(字)는 다음 구(句)의 소집아법성(所執我法性)의 전(前)이라는 뜻이 된다.
이 구(句)의 뜻은 변계소집하여 아상(我相)과 법상(法相)에 집착하던 마음을 멀리 여읜 것이 원성실이며 원성실이 곧 제1의제(第一義諦)이며 승의(勝義)인 것을 이해해야 되는 구(句)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모름지기 연생무성(緣生無性)임을 깨달아 의타(依他)하여 생기(生起)한 제법(諸法)이 가(假)인 줄 알아서 망령되이 변계소집한 아(我)·법상(法相)을 멀리 여의고 진공묘유(眞空妙有)인 승의무성(勝義無性)의 실지(實地)를 인식하여 원성실의 진성(眞性)을 구명(究明)하는 것으로 본분(本分)을 삼아야 한다.
제 25 송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常如其性故 卽唯誠實性
이것을 모든 법의 승의(勝義)라 하며 또한 진여(眞如)라고도 한다. 항상 모든 법의 실성(圓性實性) 그대로이기 때문에 이것이 곧 유식(有識)의 실성(實性)인 것이다.
< 해 설 >
이 송(頌)은 전 송에서 말한 상무성(相無性)·무자연성(無自然性)·아(我)·법(法)을 멀리 여읜 승의무성(勝義無性)을 이어서 유식의 실성(實性)을 밝힌 것이다. 유식의 실성(實性)을 승의(勝義)라 하는 것은 만법이 생주이멸(生住異滅)을 면할 수 없지만 오직 유식실성(唯識實性) 곧 진여법성(眞如法性)만이 영원하기 때문에 승의(勝義)라 하는 것이다. 승의란 세간세속(世間世俗)의 어떠한 이치보다 깊고 오묘한 이치를 말한다. 이러한 승의(勝義)는 네 가지의 뜻이 있다.
세간승의(世間勝義) : 5온(五蘊)의 이치·6근(六根) 6경(六境)의 이치를 가르친 12처(十二處)·6근(六根) 6경(六境)과 6식(六識)의 이치를 가르친 18계(十八界) 등의 법(法)을 말한 것으로 초발심(初發心) 수행자가 반드시 닦아야 하는 요체(要諦)이지만 모두 세간법(世間法)에 속하므로 이를 세간승의(世間勝義)라 한다.
도리승의(道理勝義) : 고·집·멸·도(苦集滅道) 4성제(四聖諦)의 이치를 말한 것으로 도리(道理)를 수도(修道)하는 승의(勝義)이므로 이를 도리승의(道理勝義)라 한다.
증득승의(證得勝義) : 이는 이공진여(二空眞如)를 말한 것으로 수행자가 아·법(我·法) 이공관(二空觀)을 닦아 아·법(我·法)에서 벗어나는 진여(眞如)를 증득(證得)하게 되는데 그 의(義)가 수승하므로 증득승의(證得勝義)라 한다.
승의승의(勝義勝義) : 이는 일진법계(一眞法界)의 이치를 말한 것으로 승의(勝義) 중의 승의라는 뜻이다. 말을 여의고 상(相)을 끊었으므로 성자(聖者)가 안으로 증득(證得)하는 경계이다.
이 수행의 경지는 앞에서의 3종승의(三種勝義)보다 수승하므로 승의를 반복하여 승의승의(勝義勝義)라 한 것이다. 세 번째의 증득승의(證得勝義)는 아·법(我·法) 2공관(二空觀)을 닦아 진여(眞如)의 경지(境地)를 증득(證得)하므로 수승하기는 하지만 아직 닦고 증득해야 할 바가 남아 있기 때문에 승의승의와는 같지 않다. 승의승의의 참뜻은 더 이상 닦고 증득해야 할 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수행경지(修行境地) 가운데 최상이라 하겠다. 송(頌)에서 제법승의(諸法勝義)라 한 것은 바로 이 승의승의를 말한다.
제2구에 즉시진여(卽是眞如)라고 한 진여(眞如)에 진(眞)은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뜻하고 여(如)는 여상(如常)의 뜻으로 바꿀 수 없는 불변(不變)을 말한다. 이러한 뜻을 합하면 진실여상(眞實如常)이 되고 진실여상이란 항상 모든 법의 본성(本性)과 같으므로 부증불감(不增不減)의 묘처(妙處)이다.
제3구에 상여기성(常如其性)이라 한 기성(其性)은 제법의 본성 또는 법성(法性)이다. 이는 곧 제법의 승의는 담연항적(湛然恒寂)하여 법성(法性)과 상응(相應)한다는 것을 뜻한다.
제4구의 유식의 실성(實性)이란 변계(遍計)와 의타(依他) 두 성(性)은 모두 실성(實性)이 아니며 오직 원성(圓性)만이 제법의 실성임을 말한 것이다. 본송(本頌)에서 승의(勝義)·진여(眞如)·유식실성(唯識實性)으로 표기한 것은 모두 한가지 같은 뜻이다.
이전의 24송까지는 유식의 상(相)을 밝혔고 본송(本頌)에서는 유식의 성(性)을 밝힌 것이다. 성(性)은 상(相)이 의지하는 내적 본체(內的本體)요 상(相)은 성(性)에 의해 현출(顯出)되는 외적 작용(外的作用)이다.
송문(頌文)의 제1송으로부터 24송까지는 유식의 상(相)을 밝혔고 본 25송에서는 유식의 성(性)을 밝히고 다음 26송으로부터 제30송까지는 유식의 위(位)를 밝혀 수증(修證)의 경계를 설명하여 수행자로 하여금 먼저 이치를 깨닫고 이치에 부합한 실천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 이 유식30송이다.
제 26 송
乃至未起識 求住唯識性
於二取隨眠 猶未能伏滅
또한 순결택식(順決擇識)을 일으키지 않고 유식의 실성(實性)에 주(住)하고자 한다면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인 2취(二取)의 수면(隨眠)에서 아직 능히 복멸(伏滅)되지 않는다.
< 해 설 >
전 송(頌)에서 이미 유식(唯識)의 실성(實性)을 알고 유식(唯識)을 닦아 유식의 진의성(眞義性)에 주(住)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2취수면(二取隨眠)을 극복해야 한다. 만약 2취수면(二取隨眠)을 극복하지 못하고 유식(唯識)의 실성(實性)에 주(住)하고자 한다면 마치 잠자면서 꿈을 마음대로 할 수 없듯이 유식(唯識)의 실성(實性)에 주(住)하는 것이 불가(不可)하다.
이 송(頌)의 요지는 유식의 실성(實性)에 주(住)하고자 하는 발심 수행자가 극복해야할 바를 가리킨 송구(頌句)로서 5위(五位)의 수행계차(修行階次) 중 자량위(資量位)에 해당된다.
제1구의 미기식(未起識)은 분별2집(分別二執)을 끊어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음을 뜻한 말로서 이미 유식(唯識)의 실성(實性)을 알고 분별망식(分別妄識)을 복단(伏斷)하는 계위(階位)가 되므로 수행할 수 있는 자량(資量)을 갖추었음을 뜻한다.
제2구의 구주유식성(求住唯識性)의 뜻은 유식(唯識)의 실성(實性)에 주(住)하기를 희구(希求)한다는 뜻으로 유식(唯識)의 실성(實性)에 안주(安住)하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유식(唯識)의 실성(實性)이란 원성실성(圓成實性)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변계(遍計)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경계에 집착하여 변계(遍計)하지 않는 원성실성(圓成實性)에 안주(安住)하고자 하여 분별2집(分別二執)의 식(識)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곧 수행이다. 그러나 이렇게 발심한 수행자가 반드시 2취수면(二取隨眠)을 극복해야 하지만 아직 여기에서는 능히 복멸(伏滅)되지 않았음을 밝힘으로써 2취수면을 극복해야 함을 계시(啓示)한 것이다.
제3구의 2취수면은 아(我)와 법(法) 곧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인 2취수면이라는 뜻이다. 수면(隨眠)이란 번뇌의 다른 이름이니 번뇌가 늘 중생을 따라다니므로 수(隨)라 하고 그 작용이 아득하여 마치 잠자는 상태와 비슷하므로 면(眠)이라 한다. 또 이를 번뇌종자라고도 하는 바 온갖 번뇌의 종자는 항상 중생을 따라다니며 제8식 중에 면복(眠伏)해 있으므로 수면(隨眠)이라 한다.
제4구의 미능복멸(未能伏滅)에서 복(伏)은 복단(伏斷)이 뜻이고 멸(滅)은 단멸(斷滅)의 뜻이다. 수행자가 분별2집(分別二執)은 이미 복단(伏斷)하였으나 아직 번뇌종자를 단멸(斷滅)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이 수행위(修行位)를 수행 5위(五位) 중 첫 번째인 자량위(資量位)라 한 것은 자량이란 준비한다는 뜻으로 먼 길을 떠나려면 반드시 풍족한 자재(資財)와 양식(糧食)을 준비해야 하듯이 불도(佛道)를 닦아 구경열반지(究竟涅槃地)에 이르고자 한다면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송(頌)은 불과(佛果)를 이루고자 하는 자량(資糧)이 곧 분별심과 번뇌종자를 끊음에 있다는 것을 일러준 송(頌)이다.
제 27 송
現前立少物 謂是唯識性
以有所得故 非實住唯識
현전(現前)의 경계에 어떤 소견[少物]을 세워 이것을 유식성(唯識性)이라고 여기면 이는 이미 소득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유식에 정주(定住)함이 아니다.
< 해 설 >
전 송(頌)에서 이미 수행자가 발심하여 결택식(決擇識)을 일으켜 유식성(唯識性)에 주(住)하고자 희구함을 자량위(資糧位)라 했으며 이 송(頌)에서는 발심을 더욱 분발하여 증진수행(增進修行)할 것을 설명하여 이를 가행위(加行位)라 한다.
보살이 무엇을 어떻게 수행하여 가행정진(加行精進)할 것인가를 안다면 이미 수행의 바른 길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보살은 수행의 도상(途上)에서 4심사관(四尋思觀)이라는 관법(灌法)을 닦아 소취(所取)인 경계(境界)가 공(空)함을 깨닫고 거듭 4여실지(四如實智)를 닦아 능취(能取 : 마음경계)와 소취(所取)가 모두 공(空)함을 깨닫는다.
이렇듯 4심사관(四尋思觀)을 닦아 4여실지(四如實智)를 증득(證得)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4선근(四善根)의 위(位)를 체험하게 되는데 4선근(四善根)이란 난위(暖位)·정위(頂位)·인위(忍位)·세제일위(世第一位) 등이다.
이와 같이 수행자가 4심사관(四尋思觀)과 4여실지(四如實智)를 닦아 향상된 도[見道]로 취향(趣向)해 감으로써 4선근(四善根)을 체험하면서 점차 무루지(無漏智)를 증득(證得)하는 것이다.
먼저 4심사관(四尋思觀)을 말하자면 제법의 명(名)·사(事)·자성(自性)·차별(差別)에 대하여 심사관찰(尋思觀察)함을 말한 것으로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
명심사관(名尋思觀) :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모든 중생(衆生)·축생(畜生)·사물(事物)은 모두 명칭이 있으나 명칭은 본래 가립(假立)된 것일 뿐 사물의 본체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은 이미 지실(知悉)하는 바이다. 가령 책을 책이라 하지 않고 다른 이름을 붙였으면 다른 이름이 되듯이 모든 명칭은 가립(假立)했을 뿐 실(實)이 아니다.
그러나 중생은 항상 명(名)으로 인하여 집착을 일으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생기고 서로 다투고 모함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오직 가명(假名)일 뿐 실(實)이 아닌 명(名)에 대해서 응당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필경 공(空)임을 깨달아 명상(名相)에 동하지 않고 실(實)에 주하는 것이 명(名)을 심사관찰(尋思觀察)하는 명심사관(名尋思觀)이다.
사심사관(事尋思觀) : 사(事)는 작사(作事)의 뜻으로 일체 사물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5온(五蘊)·12처(十二處)·산(山)·하천(河川)·사람·짐승·집 ·가구·결혼·상례(喪禮)·농업(農業)·공업(工業) 등이 모두가 사(事)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물이나 형식 등은 모두 인연에 의해 생(生)하고 유식에 의해서 발현(發現)되므로 인연과 식(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자성(自性)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찰나에 변멸(變滅)하므로 당체가 곧 공(空)이며, 존재하는 것 같으나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이 허망하게 변현(變現)된 사(事)에 대하여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그 외형적 가상(假相)에 미혹되지 않음을 사심사관(事尋思觀)이라 한다.
자성심사관(自性尋思觀) : 자성(自性)이란 매1법(每一法)과 1신상(一身上)의 자체성(自體性)이며 독립성(獨立性)이다. 각각의 법(法)과 개체(個體)마다 그 독립성이 존재한다면 이 독립성은 다른 법[他法]의 자성과는 공통되지 않는다. 반면에 각각의 법에 모두 보편성이 존재한다면 이 보편성은 서로 같아서 타법(他法)의 자성(自性)과 공통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성은 본래로 무소유이며 필경공(畢竟空)이므로 오로지 허망한 분별만이 있을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제법의 자성이 허공과 같음을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허환의 집착을 여의는 것을 자성심사관(自性尋思觀)이라 한다.
차별심사관(差別尋思觀) : 차별이란 명(名)과 사(事) 갖가지 차별상(差別相)을 말한다. 명(名)의 차별(差別)에는 음(音)과 의(義)가 있고, 사(事)의 차별(差別)에는 대소(大小)·방원(方圓)·고저(高低)·선악(善惡)·유루(有漏)·무루(無漏) 등이 있으며, 또한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부동(不同)함과 무량(無量)한 차별(差別)을 함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살이 수행할 때 제법(諸法)의 차별상(差別相)에 대하여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차별상(差別相)의 실상을 깨닫는 것을 차별심사관(差別尋思觀)이라 한다.
이상에서 4심사관(四尋思觀)을 닦아서 얻어지는 지혜를 4여실지(四如實智)라 하는 바 여실(如實)이란 실성(實性)과 같다는 뜻으로 제법(諸法)의 실성(實性), 곧 진여(眞如)를 말한다.
모든 법(法)을 심사관찰(尋思觀察)하여 지혜를 얻고 지혜가 생기면 모든 법의 명(名)·사(事)·자성(自性)·차별(差別)이 실로 진여실성(眞如實性)과 같아 공(空)이며 무소유임을 깨닫고 모든 분별을 여의므로 근(根)·진(塵)·의 경계가 아니요, 오직 유식실성(唯識實性)일 뿐이다.
4심사관(四尋思觀)을 닦음으로써 4여실지(四如實智)를 얻고 4여실지(四如實智)를 얻음으로써 유식실성(唯識實性)을 깨달을 수 있다. 따라서 4관(四觀)·4지(四智)는 유식(唯識)을 수행하는 기본방편이다.
수행자가 열심히 심사(尋思)하지만 아직 결택(決擇)되지 않았을 때를 관(觀)이라 하며 이러한 과정을 인위(因位)라 하고 관(觀)에 의해 지(智)가 생(生)하고 일체법을 결정적으로 요해(了解)하여 성공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이것을 과위(果位)라 한다.
4심사관(四尋思觀)을 닦아 명(名)·사(事)·자성(自性)·차별(差別)이 모두 유식(唯識)에 의해 생긴 것이며 방편으로 이름 붙여졌기 때문에 식(識)을 떠나서는 일체법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지혜를 무상지(無上智)라 하며 무상지는 모든 법의 실성(實性)과 조금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여실지(如實智)라 한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4심사관(四尋思觀)을 닦아 4여실지(四如實智)를 얻어서 일체 허망분별심을 여의는 것으로 불도(佛道)의 본분(本分)을 삼는다.
4심사관(四尋思觀)과 4여실지(四如實智)를 수행함에 반드시 위차(位次)가 있으니 이를 4선근(四善根)이라 한다. 4선근은 난위(暖位)·정위(頂位)·인위(忍位)·세제일위(世第一位)이다. 이 4위(四位) 중에서 난위(暖位)와 정위(頂位)는 4심사관을 닦아 일체만법의 경계인 소취(所取)가 공(空)임을 관(觀)하고 인위(忍位)와 세제일위(世第一位)는 4여실지를 닦아 능취(能取)와 소취(所取)가 모두 공(空)임을 관(觀)하는 것이다. 4선근을 약설(略說)하면 다음과 같다.
난위(暖位) : 이 위(位)는 '성유식'에서 명득정(明得定)에 의해 하품(下品) 심사관을 닦아 소취(所取)가 없음을 난위(暖位)라 한다고 했다. 여기에서 명(名)·사(事)·자성(自性)·차별(差別) 네 가지가 모두 분별식에 의해 잠시 있다가 없어지고 마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 위(位)는 광명난법(光明暖法)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난위(暖位)라 한다.
정위(頂位) : 이 위(位)는 '성유식'에서 명득정(明得定)에 의해 상품(上品) 심사관을 닦아 소취(所取)가 없음을 정위(頂位)라 한다고 했다. 관(觀)이 더욱 깊어져서 광명이 증장되고 지혜가 향상됨을 말한다. 이 위(位)는 명상(明相)의 광염(光炎)이 더욱 치성하기 때문에 정위(頂位)라 한다.
인위(忍位) : 이 위(位)는 '성유식'에서 인순정(印順定)에 의해 하품여실지(下品如實智)를 닦아 소취(所取)가 없는 곳에 정념(定念)을 이루고 능취(能取)가 없는 가운데 또한 정념(定念)을 즐기므로 인위(印位)라 한다 하였다. 이 위는 정념(定念)을 이루고 즐기므로 아직 인력(忍力)이 더 필요하므로 인위(忍位)라 한다.
세제일위(世第一位) : 이 위(位)는 '성유식'에서 무간정(無間定)에 의해 상품여실지(上品如實智)를 닦아 능취(能取)와 소취(所取)가 공(空)임을 깨달아 세제일위(世第一位)라 한다 하였다.
이 위는 견도위(見道位)에 이르러 중간에 끊어짐이 없으므로 무간정(無間定)을 이루었고 이를 세제일위(世第一位)라 한다. 이미 상품여실지를 발하여 능취와 소취가 모두 공(空)임을 인지(印持)했으나 세간법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세제일(世第一)위라 한다.
송(頌)에 입소물(立少物)이라 한 것은 소견(所見)을 말한다. 마음은 원래 언설·심연(心然)·형상(形相)을 여의었기 때문에 소물(少物)을 세워 유식성이라 여긴다면 유식실성(唯識實性)일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제 28 송
若時於所緣 智都無所得
爾時住唯識 離二取相故
만약에 소연경(所緣境)을 대할 때 무분별지(無分別智)로 (인식하여) 도무지 얻을 바가 없으면 그 때 비로소 진여(眞如)를 증득(證得)하여 유식의 진승의성(眞勝義性)에 주(住)하게 되리니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두 분별상(分別相)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 해 설 >
이 송(頌)은 수행자가 발심하여 자량위(資量位)를 거쳐서 가행위(加行位)에서 더욱 증진되고 이 위(位)에서 통달(通達)의 경지에 이르게 됨을 밝혔기 때문에 이 위(位)를 통달위(通達位) 또는 견도위(見道位)라고 한다.
통달위(通達位)는 자량위(資量位)를 거쳐 가행위(加行位)에 이르러서도 일체이치(一切理致)에 대한 소지장(所知障)이 있어서 유식성(唯識性)을 요달하지 못하고 진여경계(眞如境界)를 증득하지 못하지만 가행위(加行位)의 마지막 경지인 세제일위(世第一位)에 이르러 망념의 구름이 걷혀 본래 존재하는 달을 볼 수 있으므로 통달위(通達位)라 한다.
통달(通達)이란 소지장(所知障)이 없어지고 2공(二空)에 의해 현현(顯現)된 진여(眞如) 즉 보리실성(菩提實性)을 요해(了解)한다는 뜻이다. 이 위(位)를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하는 것은 요해(了解)가 곧 견(見)이며 실성(實性)이 곧 도(道)이기 때문이다.
제2구의 지도무소득(智都無所得)은 지(智)는 무분별지(無分別智)를 말한 것이니 능(能)·소(所)·2취(二取)가 공(空)임을 관해서 2공진여(二空眞如)를 실증(實證)하여 심(心)과 경(境)을 모두 여의면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 곧 무분별지(無分別智)요, 또는 근본지(根本智)라고도 한다. 근본지를 성취하면 모든 경계(所緣境)에 무소득(無所得)일뿐 아니라 능관(能觀)의 지(智)도 무소득이므로 지도무소득(智都無所得)이라 한다.
제4구의 이2취상고(離二取相故)는 마음[心]과 경계[境]가 모두 공하면 지(智)는 오직 직관적 작용일 뿐이다. 이러한 무분별지(無分別智)는 만류(萬類) 중에 차별(差別)을 여의므로 이를 진리(眞理)라 하고 이 경지에서 유식성(唯識性)에 주(住)하게 된다. 능(能)·소(所) 2취(二取)의 상(相)을 여의면 만법은 모두 진여(眞如)이고 평등(平等)이며 이 평등진여가 곧 유식의 실성(實性)이다.
수행자가 도(道)를 닦는 과정에서 자량위(資量位)·가행위(加行位)·통달위(通達位)를 경과하게 되는데 이 위(位)가 곧 3현위(三賢位)이다. 이 위(位)는 유식의 실성(實性) 곧 진여법성(眞如法性)이기 때문에 능과 소의 2취 분별상(分別相)을 여읜 그 자리이다.
제 29 송
無得不思議 是出世間智
捨二粗重故 便證得轉依
무분별지(無分別智)는 무득(無得)이며 부사의(不思議)이며 출세간(出世間)의 지(智)이다.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이라는 두 가지의 조중(粗重)한 종자를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보리(菩提)·열반(涅槃)이라는 두 가지 전의과(轉依果)를 증득할 수 있다.
< 해 설 >
이미 28송에서 언급한 자량(資量)·가행(加行)·통달(通達)의 각 위(位)는 아직 수도(修道)의 준비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송(頌)에 이르러 비로소 진정한 수도과정에 입문(入門)하게 되므로 이 위(位)를 수습위(修習位)라 한다.
수행자가 유식성(唯識性)을 깨달으면 이미 전도지견(顚倒知見)에 속한 번뇌를 깨끗이 소제할 수 있다. 전도지견(顚倒知見)은 10사(十使) 번뇌를 말한 것으로 앞에서 말한 3현위(三賢位)를 거쳐 이미 10사(十使) 번뇌 가운데 5리사(五利使)는 여의었으나 아직 5둔사(五鈍使)가 남아 있는 것을 본송(本頌)의 수습위(修習位)에서 이를 멸진(滅盡)하게 된다.
10사(十使) 번뇌의 5리사(五利使)와 5둔사(五鈍使)는 이미 12송(十二頌)에서 밝혔으므로 여기서는 대략 정리하고자 한다.
5리사(五利使)는 6번뇌(六煩惱) 곧 탐(貪)·진(瞋)·치(痴)·만(慢)·의(疑)·악견(惡見) 중 맨 끝의 악견(惡見)에 속하는 번뇌로서 이치를 미혹하므로 견혹(見惑)이라고도 하는 번뇌이다. 이렇듯 잘못된 견해에 5종(五種)이 있어서 5리사라 한다.
① 신견(身見) : 아견(我見)이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이 환(幻)인 줄 알지 못하고 아(我)가 실유(實有)한다고 여기는 견(見)이다.
② 변견(邊見) : 인간이 한번 죽으면 모두 멸하여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 것으로 이를 단견(斷見)이라 한다.
③ 사견(邪見) : 인과를 믿지 않고 모두를 운명에 맡겨서 방종, 방만한 생각을 하는 것을 말한다.
④ 견취견(見取見) : 자신의 견해만을 고집하는 것을 말한다.
⑤ 계금취견(戒禁取見) : 잘못된 계율이나 법을 집착하는 견해이다.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 견해가 너무 강해서 이를 악견(惡見)이라 하는데 수행자가 먼저 악견(惡見)을 여의고 견도통달(見道通達)의 위(位)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본송(本頌) 수습위(修習位)에서는 앞에서 이미 악견(惡見)을 여의었으므로 탐(貪)·진(瞋)·치(痴)·만(慢)·의(疑)의 5둔사(五鈍使)는 사상(事上)의 구염(垢染)에 속하므로 끊기가 매우 어려워서 크게 닦아 수습해야 하는 수습위(修習位)에서 멸진(滅盡)할 수 있고 이를 멸진해야 비로소 성불의 문(門)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1구(一句)에서 무득부사의(無得不思議)라 한 것은 번뇌장(煩惱障)을 끊어서 대열반을 증득하고 소지장(所知障)을 끊어서 대보리를 증득하기 위해서는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수습해야 한다. 이 지(智)는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를 멀리 여의었으므로 무득(無得)이라 하며 그 묘용(妙用)을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부사의(不思議)라 한다.
2구(二句)의 시출세간지(是出世間智)는 무분별지(無分別智)는 18계에 주(住)함이 없고 견문각지(見聞覺知)를 떠났기 때문에 세간지(世間智)가 아니다. 또 능취(能取)와 소취(所取) 수면(隨眠)이 세간의 근본인데 이를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출세간지(出世間智)라 한다. 이 근본지(根本智)는 지(智)의 체(體)가 무루(無漏)이기 때문에 진여(眞如)를 증득한다. 이 송구(頌句)에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체무득(體無得)이요, 둘째는 용부사의(用不思議)이며, 셋째는 성출세간(性出世間)이다.
3구(三句)에서 조중(粗重)이라 한 뜻은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종자 즉 2취습기(二取習氣)를 말한 것이다. 이것은 분단생사(分段生死)와 변이생사(變異生死)의 근본으로 세(細)도 아니고 경(輕)도 아니므로 거칠고 무겁다는 뜻으로 조중(粗重)이라 한 것이다.
4구(四句) 맨 끝에 전의(轉依)라는 뜻은 전(轉)은 굴린다는 글자인데 여기에 굴려서 버린다는 뜻과 굴려서 얻는다는 두 가지 뜻이 있어 이를 전사(轉捨)·전득(轉得)이라 하고 의(依)는 소의(所依)의 뜻으로 곧 제8식의 소의처(所依處)를 말한다. 종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제8식은 그 안에 번뇌와 소지 2종의 종자를 저장하고 있으며 또한 보리와 열반의 종자도 저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제8식을 의지하여 번뇌와 소지 2장(二障)의 종자를 버리고[轉捨] 열반과 보리의 종자를 얻으므로[轉得] 두 가지 조중(粗重)을 버리고 보리 열반의 두 가지 전의과(轉依果)를 증득함을 말한다. 이상 2조중(二粗重)을 버리고 2전의(二轉依)를 증득하여 불과(佛果)를 이루기 위하여는 10바라밀을 닦아 10지(十地)에 이르러야 한다.
제 30 송
此卽無漏界 不思議善常
安樂解脫身 大牟尼名法
이것이 곧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의 경계이며 부사의(不思議)이며 선(善)이며 영원(常)함이며 안락(安樂)이며 해탈신(解脫身)이며 대모니(大牟尼)이며 법신(法身)이라 한다.
< 해 설 >
이 송(頌)은 유식 30송의 마지막 송(頌)으로서 구경위(究竟位)에 해당되는 송(頌)이다. 구경(究竟)은 최종의 자리를 말한 것으로 지극(至極)이라는 뜻이며 수행자가 지극(至極)에 이르면 이것을 성불이라 한다. 그러므로 구경위(究竟位)는 수행자의 최고경지 곧 불위(佛位)를 의미한다.
첫 구의 차(此)의 뜻은 29송에서 언급한 2전의과(二轉依果)로서 번뇌(煩惱)와 소지(所知) 2장(二障)의 종자를 끊어 버리고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의 종자를 전득(轉得)한다는 뜻을 이어서 차자(此字)를 써서 이것이 곧 무루계 등등이라 하였다.
무루계(無漏界)는 누(漏)의 뜻이 번뇌(煩惱)이므로 무루(無漏)는 무번뇌(無煩惱)이다. 또 누(漏)는 누수(漏水) 누락(漏落)의 뜻이며 무루(無漏)는 누수(漏水) 없는 마음이 삼계육진(三界六塵)에 누락(漏落)되지 않음을 뜻한다. 어떠한 마음이 그러냐 하면 번뇌(煩惱)와 소지(所知)의 두 장애(障碍)를 멀리 여의고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을 증득(證得)한 이 사람이 그러하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보리·열반을 성취한 이 사람의 세계는 누(漏) 없는 무루(無漏)의 세계이며, 헤아릴 수 없어서 부사의(不思議)하며, 지고지선(至高至善)한 선(善)이며, 영원불멸(永遠不滅)하는 상(常)이며, 오로지 고통이 없어서 안락(安樂)이라 하며 탐진치(貪嗔痴)에 얽매임이 없어서 해탈신(解脫身)이라 하며 어떠한 경지에서도 부동(不動)하므로 대모니(大牟尼)라 하며, 심지어는 항구불멸(恒久不滅)의 뜻으로 법(法)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수행자가 이르러야 할 목적지이며 모든 불보살의 한결같은 경지이다.
무루계(無漏界)라고 한 계(界)는 장(藏)의 뜻으로 그 안에 무변하고 희유한 대공덕이 존재(存在)하기 때문이며 또한 인(因)의 뜻이 있어서 세간법과 출세간의 모든 법(法)이 이로부터 나오고 잘못된 것을 버리고 선(善)을 행할 수 있는 묘(妙)가 이 속에 있으므로 계(界)를 법계(法界)라고도 하는 것이다.
2구(二句)의 부사의선상(不思議善常)은 역시 보리·열반을 전득(轉得)한 사람의 세계를 무루계(無漏界)라 하므로 무루계(無漏界)를 성취한 사람의 궁량이 무궁하여 부사의(不思議)하고 선(善)하고 영원(常)함을 말한 것이다.
부사의(不思議)란 심연상(心緣相)을 여읜 것을 불가의(不可議)라 하므로 심연(心緣)의 상(相)과 언설(言說)의 상(相)을 모두 여읜 것을 뜻한다. 선(善)이란 순수하여 때묻지 않은 법성(法性)이 모든 과오(過惡)를 여읜 것을 말하고 상(相)이란 영원한 법성(法性)이 변하지 않고 멸하지 않음을 말한다. 따라서 이 구(句)의 뜻은 보리·열반을 성취하고 무루계(無漏界)를 성취한 사람의 마음이 부사의(不思議)하고 선(善)하고 영원(常)함을 말한 것이다.
3구(三句)에서 말한 안락해탈신(安樂解脫身)이란 청정법계(淸淨法界)는 고통을 초래하는 번뇌가 없으므로 안락(安樂)이라 하고 모든 장애(障碍)와 속박을 멀리 여의었으므로 해탈신(解脫身)이라 한 것이다.
4구(四句)의 대모니명법(大牟尼名法)이란 모니(牟尼)는 적묵(寂默)의 뜻으로 언설동작(言說動作)과 심연분별(心緣分別)을 여읜 것을 말하고 법(法)이란 법신(法身) 또는 법성신(法性身)을 말한 것으로 이를 안락해탈신(安樂解脫身) 또는 대모니신(大牟尼身)이라 한다.
법신(法身)은 무상(無相)이지만 무상(無相)이라 말할 수도 없어서 거두어들이면 물러나서 은밀히 숨고 풀어놓으면 묘용(妙用)이 무궁하여 헤아릴 수도 없다. 이러한 것을 체용불이(體用不二)라 하는데 법신의 체(體)는 무상(無相)이요, 그 용(用)은 무불상(無不相)이기 때문이다.
법신(法身)은 3종류로 나눌 수 있다.
①은 자성신(自性身)이니 모든 부처님의 진정(眞淨)한 법계(法界)를 말한 것으로 모든 상(相)을 떠난 적멸(寂滅)의 자리이며 일체법(一切法)이 평등(平等)한 실성(實性)의 자리이며 체(體)가 무량(無量)한 공덕(功德)을 갖춘 자리이다.
②는 수용신(受用身)이니 수용신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만약에 3아승지겁 동안 수행하여 복(福)을 짓고 혜(慧)를 닦아서 즐거움이 충만한 법락(法樂)을 향수(享受)하면 이를 자수용신(自受用身)이라 하고, 만약에 순수한 극락세계인 정토(淨土)에 안주(安住)하면서 10지(十地)에 들어 수행하는 보살을 위하여 대신통력을 발현(發現)하고 정법(正法)을 설하여 보살의 의심을 풀어주면 이를 타수용신(他受用身)이라 한다.
③은 응화신(應化身)이니 응화신(應化身)은 모든 부처님께서 중생계(衆生界)에 응(應)하여 중생을 교화하시는 것을 뜻한 것으로서 모든 부처님께서 자비와 지혜의 마음으로 천상세계와 인간세계 내지는 귀신의 세계와 축생의 세계까지도 유(類)에 따라 화신(化身)하지 않는 곳이 없음을 말한다. 또한 처하는 곳이 정토(淨土)이든 예토(穢土)이든 간에 아직 10지(十地)에 들지 못한 이승범부(二乘凡夫)를 위하여 때와 곳에 따라 설법하여 이익과 즐거움을 주고 해탈(解脫)을 얻게 하는 모두가 응화(應化)에 속한다.
이와 같이 3종(三種)을 갖춘 법신(法身)을 성취하고자 발심한 이는 이전의과(二轉依果)를 명심하여 능장(能障)·소장(所障)의 번뇌 곧 안에서 일어나는 번뇌와 밖으로부터 오는 번뇌를 전사(轉捨)하여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을 전득(轉得)하는 수행을 끝없이 반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전사(轉捨)·전득(轉得)의 뜻을 쉽게 이해하자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악을 버리고 참마음을 가꾸는 것이 곧 전사(轉捨)·전득(轉得)이니 이를 수행하는 것은 10바라밀(十波羅蜜)을 닦아 10지(十地)에 드는 것을 말한다.
유식 30송의 대강을 요약하면 상(相)·성(性)·위(位)를 밝히고 체계화한 것이 1송에서부터 24송까지는 유식의 상(相)을 밝혔고 25송에서는 유식의 성(性)을 밝혔고 26송에서 30송까지는 유식의 위(位)를 밝혔다.
유식의 상(相)이란 우주 만유의 현상과 식(識)의 심소(心所)를 말한 것으로 5변행심소(五偏行心所) 등 55심소(五十五心所)와 심소대상인 만법(萬法)을 뜻한다.
그리고 유식의 성(性)이란 모든 법의 으뜸인 진여(眞如)의 실성(實性)·계탁(界度)하고 집착하지 않는 모든 법의 법성(法性)·담담하고 항상 고요한 유식의 실성(實性)인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말한다.
유식의 위(位)란 수행자의 수행 계위(階位)를 말한 것으로서 수행자가 자량(資糧)으로 지녀야 할 10주(十住) 10행(十行) 10회향(十廻向)의 30위를 닦아 준비하는 자량위(資糧位)와 4선근(四善根)을 닦는 가행위(加行位)와 2공무아(二空無我)의 도리를 닦는 통달위(通達位)와 10지(十地)를 닦아 10성(十聖)의 지(地)에 이르는 수습위(修習位)와 3혹(三惑)이 모두 끊어지고 대각(大覺)이 원만하여 자각각타(自覺覺他)의 공이 이루어진 구경위(究竟位) 등을 뜻한다.
이 모두가 전사(轉捨)·전득(轉得)의 과정을 설명한 것이니 오직 마음이란 상(相)이 없고 실(實)도 없지만 닦아 깨달음으로써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이루어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나 변하고 멸함이 없는 대열반(大涅槃)에 들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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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무불선원 | 글쓴이 : 念佛 원글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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