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정수일 역주 / 학고재
혜초와 함께하는 2만 km의 구법대장정,
한국 최초의 문명대탐험전을 읽는다.
1908년 2월 25일 프랑스 동양학자 폴 펠리오가 실크로드의 요충지인 중국 둔황 막고굴에 도착했다.
중앙아시아조사단을 구성하여 중국 신장위구르지역의 카슈가르에 들어온 지 1년 5개월 만이다.
어느날 막고굴 16굴을 청소하던 중 우연히 17굴 석실을 발견했는데 그안엔 13m가 넘는 많은양의 고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각종 불경등의 고문서를 수장하고 있다고 해서 이 17굴을 장경동이라 부른다.
이 장경동을 조사 하던중, 펠리오는 앞 뒤 일부가 떨어져 나간 필사본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동양학 지식과 한자와 중국어 실력을 겸비한 그는 ‘왕오천축국전’을 한눈에 알아본다.
( 사진출처 - 동아일보)
펠리오에 의해 둔황의 막고굴에서 세상으로 나온 혜초의『왕오천축국전』은 마르코 폴로의『동방견문록』, 오도리크의『동유기』,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와 함께 세계 4대 여행기로 손 꼽는데, 혜초(704~787년)의『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여행기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혜초는 719년(신라 성덕왕 18년)무렵 열여섯 살 때 당나라에 들어간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밀접히 하면서 불승이나 유학생들의 입당을 적극 권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는 신라인들의 입당 구법이나 유학의 성행하고 있었다. 입당 후 광주에서 인도의 밀교승 금강지와 제자인 불공을 만나 금강지를 사사하였다.
723년엔 광주를 떠나 스승이 건너온 바닷길을 거꾸로 잡고 인도로 가서 약 4년 동안 인도와 서역의 여러 지방을 여행하고 727년 11월, 안서도호부 소재지인 구자(현 신강 위구르 자치구의 쿠차)를 거쳐 장안에 돌아왔다.
733년부터 8년 동안 장안에서 스승 금강지와 밀교 경전인『대교왕경』를 연구하다가 740년에는 금강지의 가르침 속에 이 경전의 필수와 한역작업을 시작한다. 다음해 741년 중추에 금강지가 입적하자 작업을 일시 중단하고 금강지의 유언에 따라 『대교왕경』의 산스크리트어 원문은 인도로 보내졌다. 혜초는 773년엔 불공으로부터 강의를 받다가, 불공이 입적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6대 제장 중 한명이 된다. 그리고 불공의 장례에 대해 황제가 베풀어준 하사와 부조에 감사하고, 또 스승이 세웠던 사원을 존속시켜줄 것을 청원하는 표문을 썼다.
혜초는 대종(代宗)때는 가뭄이 심하자 「하옥녀담기우표」를 지어 올리기도 했다. 780년 4월 15일 오대산 건원보리사에 들어가 5월 5일까지 앞의 밀교경전을 재록하다 그해 이곳에서 입적하였다.
천축은 고대 중국인들이 인도를 부르던 명칭인데, 동 서 남 북과 중앙으로 나누면 다섯천축국이 된다.
1300여 년 전인 723년에 당나라를 유학하고 돌아온 신라 승려 혜초는 중국 광저우를 출발해 뱃길로 인도에 도착한다.
동천국에서 불교 성지를 참배하고 중천축과 남천축, 서천축과 북천축을 순례했다. 그리고 서역으로 넘어가 대식국의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파미를 고원을 넘고 둔황을 지나는 대장정 끝에 727년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돌아왔다.
4년에 걸친 대장정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직접 기록한 여행기가 『왕오천축국전』이다.
여타의 여행기에서 읽을 수 있는 목적지까지의 소요시간과 주요도시와 왕성의 규모, 통치상황, 대외관계, 기후와 지형, 특산물과 음식, 의상과 풍습, 언어에 대한 기록은 전후 다른 여행기에서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종교, 특히 불교성지들에 대한 기록과 성행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수행자 혜초의 구도심과 깊은 신심을 느낄 수 있다. 여타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마케다국(마가다)에는 대승과 소승이 함께 행해지고 있다. 급기야 마하보리사에 도착하고 나니 내 본래의 소원에 맞는지라 무척 기뻤다. 내 이러한 뜻을 대충 오언시로 엮어 본다.
(본문 145쪽)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 않는데
어찌 녹야원이 그리 멀다 하리오.
가파른 길 험하다고만 근심할 뿐
업연(業緣)의 바람 몰아쳐도 개의 찮네.
여덟 탑을 친견(親見)하기란 실로 어려운데.
오랜 세월을 겪어 어지러이 타버렸으니
어찌 뵈려는 소원 이루어지겠는가.
하지만 바로 이 아침 내 눈으로 보았노라.
이것은 당초 여행의 목적이었던 불교의 성지에 이르자 크게 감격하여 남긴 오언시이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왕오천축국전』하면 대표적으로 꼽는 오언시다. 중천축국에서 석달을 걸려서 내려간 남천국, 즉 남인도 지역 여행길에서 불쑥 치민 향수를 읊은 것이다. 현존본에 오언시가 다섯 편이나 실려 있다는데, 위의 두 개 오언시로도 혜초의 서정성을 느낄 수 있다.
그대는 서족 이역이 멀다고 원망하고
나는 동쪽 길이 멀다고 탄식하노라.
길은 험하고 눈 쌓인 산마루 아스라한데
험한 골짜기엔 도적떼가 길을 트누나.
새도 날다가 가파른 산에 짐짓 놀라고
사람은 기우뚱한 다리 건너기 어렵네.
평생 눈물을 훔쳐본 적 없는 나건만
오늘만은 하염없는 눈물 뿌리는구나.
추위와 더위, 생소한 문화는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각국의 기후와 언어, 음식, 불교의 형태를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겨울 어느 날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추위를 눈을 보며 소회하기도 했다.
차디찬 눈이 얼음까지 끌어 모으고
찬바람 땅이 갈라져라 매섭게 부는구나.
망망대해는 얼어붙어 단(檀)을 깔아놓은듯
강물은 제멋대로 벼랑을 갉아먹는구나.
용문(龍門)엔 폭포수마저 얼어 끊기고
우물 테두리는 도사린 뱀처럼 얼었구나.
불을 벗삼아 층층 오르며 노래한다마는
과연 저 파밀(播密) 고원을 넘을 수 있을런지.
여행기는 법현(의 『불국기』)과 같은 문학적 풍모를 느낄수도 없고, 현장(의 『대당서역기』)과 같은 정확하고 세밀한 서술도 없다. 그의 문체는 평면적이며 군더더기가 없다.
그날 그날 지난 일에 대한 일기적 기록과 짧은 단상이 전부이지만, 오히려 소박한 산사의 일상과 닮은 모습에 몸과 마음이 정화됨을 느끼게 된다.
40개국의 여행기록을 번역, 원문, 주석을 통해 풀이한 이 책은 혜초, 정수일 역주자 그리고 독자의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서역기행을 맛볼수 있는 기회를 준다.
원문의 간단하고 단조로움에 역주자의 방대하고 풍부한 양의 역사와 지리, 사회와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까지 더해져 읽는 내내 또 한편의 『왕오천축국전』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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