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역사 이야기

[스크랩] 말갈이 어디메뇨? (돌다리님의 근초고왕 글에 붙여쓰기가 뭤해서...)

맑은물56 2011. 2. 5. 12:08

   ※ 말갈(黑水靺鞨)!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 말갈(靺鞨)의 선대(先代)나 후대(後代) 모두는 조선(朝鮮 : 고대조선 부터 이씨조선 통칭)과 뗄 수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또한 이들 말갈(靺鞨)은 조선(朝鮮)의 한 일원(一員)으로, 한 종족(種族)으로 있었으며, 때로는 복종(服從)하고, 때로는 자립(自立)하기도 했다.

이 중에서도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더더욱 조선(朝鮮 : 통칭)과의 관계가 긴밀하였다.

고구려(高句驪)시절, 당태종의 야욕(野慾)으로 이어진 고구려(高句驪) 정벌(征伐)시엔 십여만(十餘 萬)의 말갈병사(靺鞨兵士)가 고구려(高句驪)군대에 소속(所屬)되어 당 군(唐 軍)에 맞서 용감하게 처절하게 싸웠으며, 그 중 일부 3,300 여명이 포로로 잡혀, 당 태종(唐 太宗)의 명(命)에 의해 산채로 매장(埋葬)되기도 했다.

 

○ 말갈(靺鞨)에 대한 고대사 관점에서 보면 이들 말갈(靺鞨)은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驪). 신라(新羅)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서 함께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러다가 당 측천무후(則 天 武 后) 때 발해(渤海)의 건국과정에 깊이 연관되기 시작한다.

 

○ 이러한 말갈(靺鞨)은 대륙사에서는 서역【西域 : 신강과 그 서쪽과 서북쪽】의 천산산맥(天山山脈) 북쪽과 서북쪽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한다.

당 현종(玄宗)시절의 기록을 보면

말갈(靺鞨)이 살고 있는 곳은 현 “만주(滿洲)”지방으로부터 (만주는 지명이동 되어 현재 동북삼성에 갖다놓았지만) 서쪽으로 10,000 리쯤 떨어져 있는 흑해(黑海). 카스피 해. 아랄 해 주위에 등장한다.

아래로 사서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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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통감 198卷 唐 紀 十 四 / 太 宗 貞 觀 十 九 年 - 〔收 靺 鞨 三 千 三 百 人, 悉 阬 之.(中略). 丁巳,高麗北部耨薩延壽,惠真帥高麗,靺鞨兵十五萬救安市.❳ :

『고려(高句麗) 북부욕살(北部 耨 薩) ‘고연수’와 장수(將帥) ‘고 혜정’이 『말갈 병 십오만(十 五 萬)』 병사들과 함께 안시(安 市)성을 구하기 위해 출동했으나 당 태종 병사들에게 패하여 36,800 명의 병사와 함께 ‘고연수’ 및 ‘고 혜정’이 항복했을 때 “당 태종”은 격분하여 포로로 잡힌 말갈 병 3,300 병에게 구덩이를 파게하고는 그곳에 생매장을 시켰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 또한 고구려(高句驪)와 연합(聯合)하여 신라(新羅)의 북변(北邊)을 침략해 성(城)을 함락했으며, 백제(百濟)를 침략하기도 했다.

 

○ 서력 660년 백제(百濟)가 당군(唐軍)과 응원군(應援軍)이었던 신라(新羅)군에 의해 왕조(王朝)가 무너지고 난 뒤 이 백제(百濟)의 땅은 말갈(靺鞨)과 신라(新羅)에 의해 나누어 차지하였다고 한다.

 

○ 또한 고구려(高句驪)가 멸망된 후, 발해(渤海)왕국시절엔, 발해(渤海)에 복속(服屬)되기도 했다.

 

○ 이후에는 생여진(生女眞)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거란(契丹)과 고려(高麗)에 복속(服屬)되었으나,

점차 발전하여 금(金)나라를 건국시키기에 이르는 종족들이다.

이들은 모두 조선(朝鮮)의 한 종족이며, 조선(朝鮮)의 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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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逸 聖>尼 師 今 : 四 年, 春 二 月, <靺 鞨>入 塞, 燒<長 嶺>五 柵. - 4년 봄 2월,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여, 장령 지방의 다섯 곳의 책을 불태웠다.

 

(2) 六 年. 八月, 靺 鞨 襲 長 嶺, 虜 掠 民 口. 冬 十 月, 又 來, 雷 {雪} 甚 乃 退. - 8월, 말갈이 장령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주민들을 잡아갔다. 겨울 10월, 말갈이 다시 습격해왔으나, 우레가 심하게 울리자 물러갔다.

 

(3) 七年, 春 二 月, 立 柵 長 嶺, 以 防 靺 鞨. - 7년 봄 2월, 장령에 목책을 세워 말갈을 방어하였다.

 

(4) 九 年, 秋 七 月, 召 群 公 議 征 靺 鞨. 伊湌<雄宣>上言: “不可.” 乃 止. - 9년 가을 7월, 왕이 여러 대신들을 불러 말갈을 공격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이찬웅선이 “불가능하다”고 왕에게 말하자 이를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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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1) - (4)번을 보면 ;〔 말갈(靺鞨)이 신라(新羅) 초기 북변(北邊 : 북쪽변경)을 침범하여 “책(柵 : 목채 또는 성채)을 불태웠다.”라는 말은 신라(新羅)의 북쪽엔 구려(高句驪)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말갈(靺鞨)”과 국경(國境)을 맞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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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慈悲>麻立干 : 十 一 年 春, 高 句 麗 與 靺 鞨, 襲 北 邊 悉 直 城. - 11년 봄,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의 실직 성을 습격하였다.

 

(6) <炤 知> 麻立干 : 二 年. 十 一 月, <靺 鞨 侵 北 邊. - 11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7) 三年,三月,高句麗與靺鞨入北邊,取狐鳴等七城,又進軍於彌秩夫.我軍與百濟.加耶援兵,分道禦之.賊敗退,追擊破之泥河西,斬首千餘級. -

 

3년, 3월, 고구려와 말갈이 북쪽 변경에 들어 와서 호명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다시 미질부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는 백제 및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방어하였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자 그들을 니 하(泥 河) 서쪽까지 추격하여 격파하고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8) <太宗武烈王> : 五年,三月,王以何瑟羅地連靺鞨,人不能安,罷京爲州,置都督以鎭之.又以悉直爲北鎭. -

 

3월, 왕이, 하 슬 라(何 瑟 羅)의 땅이 말갈과 연이어 있으므로 백성들이 편안히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경(京)을 폐하여 주(州)로 하고, 도독을 두어 그 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한 실직을 북진(北鎭)으로 만들었다.

 

(9) <文武王> : 十五年聞唐兵與契丹,鞨兵來侵,出九軍,待之.靺鞨入阿達城劫掠,城主素那逆戰死之. 唐兵與契丹,靺鞨兵來,圍七重城,不克.小守儒冬死之.靺鞨又圍赤木城滅之,縣令脫起率百姓,拒之,力竭俱死. -

 

당 군사가 ‘글란(契丹)’과 ‘말갈(靺鞨)’ 군사와 함께 침범한다는 소문을 듣고, 구군(九軍)을 출동시켜 이에 대비하였다. ‘말갈(靺鞨)’이 ‘아달 성’에 들어와 약탈을 시작하자, 성주 ‘소나’가 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거란 및 말갈 군사와 함께 ‘칠중 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소수 ‘유동’이 전사하였다. 말갈이 또 ‘적 목 성’을 포위 공격하자, 현령 ‘탈기’가 백성들을 이끌고 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백성들과 함께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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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5) - (9)번을 보면 ; 고구려(高句驪)와 말갈(靺鞨)의 연합군대(聯合軍隊)가 신라(新羅)의 북변(北邊)을 침략, 침범하는 것을 보면 이때의 말갈(靺鞨)은 이미 고구려(高句驪)에 복속(服屬)되어 고구려(高句驪)의 일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 특히 하 슬 라【何 瑟 羅 : 현 역사해설 - 반도의 강릉(江陵)이라고 함】의 땅이 말갈(靺鞨)과 연이어져(連)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으로 보면, 신라(新羅)의 북변(北邊)인 강릉(江陵)지방에서 말갈(靺鞨)과 대치(對峙)하고 있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기록에 따르면 강원도 강릉(江陵)과 그 이북(以北)지방은 말갈(靺鞨)의 후예(後裔)들이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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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고구려<大 祖 大 王> : ○三 年, 春 二 月, 築 遼 西 十 城, 以 備 漢 兵. -

 

3년 봄 2월, 요서에 10개성을 쌓아서 한 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11) 六 十 二 年, 秋 八 月, 王 巡 守 南 海. 冬 十 月, 至 自 南 海. -

 

가을 8월, 왕이 남해를 순행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남해에서 돌아왔다.

 

(12) <西川王> : 十 一 年, 冬 十 月, 肅愼來侵, 屠 害 邊 民. -

 

11년 겨울 10월, 숙신이 침입하여 변방 백성들을 죽였다.

 

王於是,遣達賈往伐之.達賈出奇掩擊,拔檀盧城,殺酋長,遷六百餘家於扶餘南烏川,降部落六七所,以爲附庸.王大悅,拜,達賈爲安國君,知內外兵馬事,兼統梁貊,肅愼諸部落. -

 

왕은 곧 ‘달 가’를 보내 치게 하였다. ‘달 가’가 뛰어난 계략으로 적을 기습하여 ‘단 로 성’을 빼앗고, 추장을 죽이고, 주민 6백 여 호를 부여 남쪽 ‘오천’으로 옮기고, 6․7개소의 부락을 항복하게 하여 부용으로 삼았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달 가’를 안국 군으로 삼고,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으며, 겸하여 양백․ 숙신 등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13) <長壽王> : 五十六年,春二月,王以靺鞨兵一萬,攻取新羅悉直州城. -

 

56년 봄 2월, 왕이 ‘말갈’의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실직주’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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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10)의 태조대왕 시 이미 요서(遼西)지방을 일부 빼앗아 고구려(高句驪)의 땅이 되었으니 이곳에 성(城)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 위 (11)의 글을 보면 태조대왕께서는 8월에『남해(南海)를 순행하여, 10월에 돌아왔다.』고 하였으니 고구려(高句驪) 땅 어디에 『남해(南海)가 있었는가?』하는 것이다.

 

▶ 위 (12) - (13)의 고구려(高句驪)와 말갈(靺鞨)의 관계를 보면, 이미 고구려(高句驪)에 복속(服屬)되어 고구려(高句驪)의 일원(一員)이 되었다. 숙신(肅愼)이 말갈(靺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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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백제(百濟) / <溫祚王> :〔二年,春正月,王謂群臣曰:靺鞨連我北境,其人勇而多詐,宜繕兵積穀,爲拒守之計. -

 

2년 봄 정월, 왕이 군신들에게 말했다. 말갈이 우리의 북부 국경과 인접하여 있는데, 그 사람들은 용맹스러우면서도 거짓말을 잘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기를 수선하고 식량을 저축하여, 그들을 방어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15) 三年,秋九月,靺鞨侵北境,王帥勁兵,急擊大敗之,賊生還者十一二. -

 

3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왕은 정예군을 이끌고 재빨리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적군 중에 살아 돌아간 자가 열 사람 중에 한 두 명이었다.

 

(16) 八 年, 春 二 月, 靺 鞨 賊 三 千 來 圍 慰 禮 城. -

 

8년 봄 2월, 말갈 군 3천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했다.

 

(17) 十年,冬十月,靺鞨寇北境.王遣兵二百,拒戰於昆彌川上.我軍敗績,依靑木山自保.王親帥精騎一百,出烽峴,救之.賊見之,卽退. -

 

겨울 10월, 말갈이 북부 국경을 침략하였다. 왕이 200명의 군사를 보내 ‘곤 미 천’에서 싸웠다. 그러나 우리 군사가 패하여 ‘청목 산’을 거점으로 자체 수비를 하고 있었다. 왕은 직접 100명의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봉 현’으로 나와 구원하였다. 적들이 이를 보고 즉시 퇴각하였다.

 

(18) 十一年,夏四月,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殺掠一百餘人.秋七月,設禿山,狗川兩柵,以塞樂浪之路. -

 

11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로 하여금 병산의 목책을 습격해서 파괴한 다음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19) 十 八 年, 冬 十 月, 靺 鞨 掩 至, -

 

18년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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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14) - (19)의 글은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百濟) 본기(本紀)에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면, 백제(百濟)의 북방(北方) 변경지방엔 고구려(高句驪)가 아닌 말갈(靺鞨)이 있었다는 결론이다.

 

반도의 경기도(京畿道) 북부로부터 강원도(江原道) 강릉이북지방의 원주민(原住民)은 말갈(靺鞨)의 후예(後裔)라고 한다면............  『반도(半島) 조선(朝鮮)』이란 역사 해설이 얼마나 허황된 말장난인지를 알 수 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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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舊唐書 列傳 百濟 (구당서 백제)

 

〔隆竟不敢還舊國而卒.其孫敬,則天朝襲封帶方郡王,授衛尉卿.其地自此為新羅及渤海靺鞨所分,百濟之種遂絕. :

 

【隆 : 부여 륭을 말한다.】 은 감히 옛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해 죽었다.

측천무후가 그의 손【孫 : 후손】“경(敬)”에게 대방군왕으로 봉하여 잇게 하고, 위 위 경(衛 尉 卿)에 제수하였다. 그 나라의 땅(百濟)은 신라(新羅)와 발해말갈(渤海靺鞨)이 나누었다. 백제의 혈통(부족)은 이로써 끊어졌다.〕

 

(2) 新唐書 列傳 百濟 (신당서 백제)

 

〔仁願等還,隆畏眾攜散,亦歸京師.儀鳳時,進帶方郡王,遣歸籓.是時,新羅強,隆不敢入舊國,寄治高麗死.武後又以其孫敬襲王,而其地已為新羅,渤海靺鞨所分,百濟遂絕. :

 

의봉 시 대방군왕으로 벼슬을 올려, 돌아가려 하였으나, 이때 신라(新羅)는 강하여 “륭(隆)”은 감히 옛 나라로 들어가지 못했다. 고려(高句驪)에 위탁하여 살다가 죽었다. 무후(측천무후)는 다시 그의 손(손자 또는 후손) “경(敬)” 에게 왕(대방군왕)을 잇게 하였다. 이 땅은 이미 신라(新羅), 발해말갈(渤海靺鞨)에 나누어져 백제는 끊어지기에 이르렀다.〕

 

 

○ 백제(百濟)의 땅은 『신라(新羅)와 말갈(靺鞨)에 의해 나누어 졌다(분할되었다).』는 이 기록(記錄)들을 반도사에 대입하자면 어띠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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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치통감 / 卷199 唐 紀 十 五 / 高 宗 / 永 徽 六 年 <655년> : 〔高麗與百濟,靺鞨連兵,侵新羅北境,取三十三城;新羅王春秋遣使求援.二月,乙丑,遣營州都督程名振,左( )中 郎 將 蘇 定 方 發 兵 擊 高 麗. 夏,五月,壬午,名振等渡遼水,高麗見其兵少,開門渡貴端水逆戰,按舊書程名振傳,貴端水當在新城西南. 名振等奮擊,大破之,殺獲千餘人,焚其外郭及村落而還。-

 

고려와 백제, 말갈이 연합한 군대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33 성을 취하였다.

신라왕 김춘추가 파견사를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2월 ‘을 축’ 일에 영주도독 <정 명진>과 좌( )중랑장 ‘소정방’이 파견되어 군사를 일으켜 고려(高句麗)를 쳤다. 여름, 5월, 일오 일에 “정 명진”등이 요수를 건너자 고려(高句麗)에서 이들을 봤으나 병사가 적은 것을 보고, 문을 열자 ❈귀단수를 건너 역전하여 명진 등이 쳐서 빼앗고 천여 인을 사로잡고 죽였다.

외곽과 부락을 불 지르고 돌아왔다.❳

 

○ 이게 또 웃기는 소설 같은 이야기다. 당시 반도엔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삼국(三國)이 있었다고 하면서,

 

1) 新羅 : 경상도. 강원도 및 경기일부지방

2) 百濟 : 전라. 충청. 경기일부지방

3) 高句驪 : 한강이북지방으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고 사학계는 설명하고 있다.

 

4) 이러한 반도(半島) 동남방의 손바닥만 한 신라(新羅) 영토를 향해,

고구려(高句驪) + 말갈(靺鞨) + 백제(百濟)의 삼국연합군(三國 聯合軍)이 진격, 침략하여 신라(新羅) 북변 33개 성(城)을 빼앗았다. 당시 영토의 개념으로 보아 33개 성(城)을 빼앗겼다는 말은 신라(新羅) 영토 대부분을 탈취(奪取) 당했다는 것과 같다.

 

5) 그러나 신라(新羅)는 말짱했고 수년(數年) 후에는 당(唐)을 끌어들여 먼저 백제(百濟)를 쳐 굴복시키고, 또 다시 고구려(高句麗)를 쳐 없애버린다.

도대체 반도(半島) 경상도(慶尙道) 땅이 얼마나 넓고, 인구가 얼마나 있었기로 이러한 전쟁이 가능했을까를 생각하면 반도(半島) 신라(新羅)는 허상(虛像)일 뿐이며, 『반도사관과 식민사관』 논자들의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 또 여기서 『성(城)을 빼앗겼다.』는 말에서 “성(城)”은 어떤 규모의 것을 성(城)이라고 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반도(半島) 땅에 남아있는 성(城)의 유적을 보면, 보(堡) 또는 새(塞) 또는 루(壘) 정도의 보잘 것 없는 것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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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 治 通 鑒 / 唐 紀 十 八 / 高 宗 / 上元 二 年 : 〔 二 年 (乙亥、六 七 五) 二 月, 劉 仁 軌 大 破 新 羅 之 ( ) 於 ※ 七 重 城; 又 使 靺 鞨 浮 海, 略 新 羅 之 南 境, 斬 獲 甚( ). 仁 軌 引 兵 還. ❳ -

 

고종 상원 2년 675년. 2월. 유 인 쾌【당시 雞 林 道 大 總 管 : 이때 신라新羅는 鷄 林 州였다고 한다.】 군(軍)은 칠중 성(七 重 城)에서 신라군을 크게 쳐부수고, 또 명받은(파견사) 말갈(靺鞨)군은 바다로 신라(新羅)의 남쪽 지경을 침략하여 목 베고, 노획한 자가 대단히 많았다. 유 인 쾌는 병사들을 이끌고 귀환했다.>

 

※ 위 기록에 대해서 지리, 지형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말갈은 위 자치통감(資治通鑒)에서 기록하였듯이 그들은 반도(半島) 동북방에서 살지 않았다.

그들은 대륙(大陸)의 서북방 종족(種族)이다.

이들이 바다를 항해하여 신라(新羅)의 남쪽지경을 약탈했다면 반도(半島)의 경상도 남쪽지방을 약탈(掠奪)했다는 결론이 되는데 말갈(靺鞨)은 유목(遊牧)종족이다.

말 타고 활 쏘는 자들이 갑자기 수군(水軍)이 된다? 이는 너무 오-바 하는 것이다.

 

○ 위 글에 나오는 “칠 중 성(七 重 城)”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

 

『칠 중성(七 重 城)을 반도(半島)의 임진강변(南岸)에 있었다. 』고 역사 해설을 하는 한

『고구려(高句驪). 말갈(靺鞨). 백제(百濟). 신라(新羅)』등의 국가는 반도에 존재(存在)할 수 없으며,

칠 중성(七 重 城) 역시 반도(半島) 땅에 존재(存在)할 수 없다.

 

 당시 당(唐) 황제(皇帝)의 명(命)으로 신라 군(新羅 軍)은 백제(百濟) 정벌군에, 고구려(高句驪) 정벌 시에 원군(援軍)으로 모두 참전했으며, 당(唐)의 장수(將帥)들은 백제(百濟)와 그리고 고구려(高句驪)와의 전쟁사는 60-70년이나 되어 “백년전쟁(百年戰爭)사”라고 해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당(唐) 황제 및 신하, 군대를 통솔하는 장수(將帥)들은 누구보다도 백제(百濟)나 고구려(高句驪)의 지형 , 지리와 산천(山川)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아지는 것 당연하다.

 아래 자치통감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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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202卷 唐 紀 十 八 / 高 宗 / 咸 亨 四 年 :

 

〔 閏五月,燕山道總管,右領軍大將軍李謹行大破高麗叛者於瓠蘆河之西,【注 : 胡嶠曰:黑車子之北,有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尤寒,水曰瓠蘆河,夏秋冰厚二尺,秋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余按唐書劉仁軌傳,此瓠蘆河當在高麗南界,新羅七重城之北.】俘獲數千人,餘衆皆奔新羅.時謹行妻劉氏留伐奴城,高麗引靺鞨攻之,劉氏擐甲帥衆守城,久之,上嘉其功,封燕國夫人.謹行靺鞨人突地稽之子也,武力絕人,為衆夷所憚. 〕

 

〔 윤 5월, 연산(燕山)도 총관, 우 령 군 대장군 ‘이근행’이 고려(高句驪)의 반군들과 호 로 하(瓠 蘆 河)서쪽 (瓠 蘆 河 之 西)의 전투에서 대파(大破)하고,【 注 : 호 교(胡 嶠)가 이르기를 ; 호로하는 흑 거 자(黑 車 子)의 북쪽에 있으며, 돌궐(突厥)의 말발굽이 있으며(突厥의 기마가 떠돌던 곳)사람들은 소다리 신체이며, 그 지방은 추위가 한층 더하다. 물을 이르기를 “호 로 하(瓠 蘆 河)”라 한다.(瓠 : 표주박 호. 蘆 : 갈대 로).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 두께가 2척이나 되며, 가을과 겨울엔 얼음이 밑바닥까지 얼어서, 상시 기구에 얼음을 담아 불을 지펴 녹여 마신다. 당서 유인쾌전에 따르면 이 호로하는 고려(高句驪)남쪽지경에 있는데 신라(新羅)의 칠중 성 북쪽이다.】수천인을 사로잡았다.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신라로 달아났다. 이때 이근행의 처 유씨(劉 氏)는 토벌중인 노성(奴 城 : 성 이름, 적의 성 이름?)애서 유숙하고 있었는데, 고려(高句驪) 반군(고구려 부 흥 군 세력)이 말갈(靺鞨)병들을 이끌고 공격하자, 유 씨는 갑옷을 걸치고 장수들을 거느리고 성을 수비하자 얼마 있다가 퇴각하였다.

(上 : 당 고종)이 그 공을 듣고 기뻐하여 “연 국 부 인(燕 國 夫人)”에 봉했다. “이 근행”은 말갈(靺鞨)인 “돌 지 계”의 아들이다. 무력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어서 오랑캐 무리(衆 夷)들을 떨게 하였다.〕

 

○ 다른 내용은 제쳐두고 “호 로 하 (瓠 蘆 河)”에 대하여

 

1) 고구려(高句驪) 남쪽 경계지역(지경)에 있으며,

2) 신라(新羅) 칠 중 성 (七 重 城 : 임진강 남안 적성) 북쪽에 있다.

 

○ 이곳에 있는 “호 로 하 (瓠蘆河)”는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 두께가 2척이나 되며, 가을과 겨울엔 얼음이 밑바닥까지 얼어서, 상시 기구에 얼음을 담아 불을 지펴 녹여 마신다.』 고 한다면 반도(半島) 땅 어디에!!!!!!!!!!!!!!!

 

○ 반도(半島)의 임진강 남, 북안(南, 北岸)지대가 사계절 내내 동토(凍土)의 땅이었어야 마땅한 것이다. 과연 가능한 사실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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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 “호 로 하(瓠蘆河)”에 대한 기록은 또 있다. 곧

 

(1) <新 五 代 史 卷 七 十 二 / 四 夷 附 錄 第 一> <阿 保 機> 편 :

〔云 契 丹 之 先 , 常 役 回 紇 , 後 背 之 走 黑 車 子 , 始 學 作 車 帳 。 又 北 , 牛 蹄 突 厥 , 人 身 牛 足 , 其 地 尤 寒 ,水 曰 瓠 (蘆) 河 , 夏 秋 冰 厚 二 尺 , 春 冬 冰 徹 底 , 常 燒 器 銷 冰 乃 得 飲 〕 :

 

본시 글란(契丹)의 선대(先代)들은 회흘(回紇)에 상시 복속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뒤에 있는 흑 거 자(黑 車 子)로 도망하였다. 또 북쪽에는 돌궐의 牛 蹄이며, 그 땅은 특히 추운 곳이다.

<호 로 하 瓠 (蘆) 河>의 물은 여름과 가을(夏 秋)에도 얼음(冰)이 2 척(尺)이나 얼어 있으며, 가을과 겨울(秋 冬)에는 얼음이 밑바닥까지 얼어붙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상시 불을 지펴 얼음을 녹여 식수를 얻는다. 〕

 

(2) 新 唐 書 卷 108 列 傳 第 33. 劉 仁 軌 傳 <舊 唐 書 同> :

〔咸 亨 五 年 , 為 雞 林 道 大 總 管 , 東 伐 新 羅。 仁 軌 率 兵 絕 瓠 蘆 河 , 攻 大 鎮 七 重 城 , 破 之.〕 :

 

〔함형 5년, 유 인 쾌는 계림도(雞 林 道) 대총관이 되어 동쪽으로 신라(新羅)를 토벌(討伐)하기 위하여 병사들과 “호 로 하(瓠蘆河)”를 막고 대진(大鎭) “칠 중 성‘을 공격하여 파하였다.〕

 

○ 위와 같은 기록(記錄)이 거짓일 수 없는 이유는 당장(唐 將) “유 인 쾌(劉 仁 軌)”가 직접 참전(參戰)하여 “호 로 하(瓠蘆河)”를 끊고(막고), 신라(新羅)의 칠 중 성(七重城)을 공격하여 신라(新羅)군을 격파하였기 때문이다.

신라(新羅) 변경지방의 대진(大 鎭)이었다는 “칠 중성(七重城)”의 유적은 존재하는가?

그곳이 지리, 지형적인 입장에서 대진(大 鎭)을 설치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는가?

 

『연산도 총관 “이 근행”』도 직접 참전하였고, 『계림도 대 총관으로 임명된 “유 인 쾌”』도 호 로 하(瓠蘆河)에 직접 참전(參戰)하였으며, 고구려(高句驪) 반군은 전투를 벌이던 “이근행”에게 패배(敗北)한 후 “호 로 하(瓠蘆河)”를 건너 신라(新羅) 땅으로 도망을 갔다고 했으며, 계림도 대 총관 “유 인 쾌”는 “호 로 하(瓠蘆河)”를 막고, “칠 중성(七重城)”을 공격, 신라군을 대파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글란(契丹 : 거란)의 무리들이 살던 곳이라 “신오대사”는 적고 있다.

 

그러면 ➡➡➡

 

반도(半島) 땅은 말갈(靺鞨)의 땅인가? 거란(契丹)의 땅인가? 아니면 백의민족, 배달민족, 조선민족, 삼한민의 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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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내려 보자.

 

이제 말갈(靺鞨 : 흑수말갈)의 본거지(本據地)를 찾아야 할 때다.

 

(1) 〔資 治 通 鑒 / 唐 紀 2 9 / 玄 宗 / 開 元 十 四 年❳

 

〔 是 歲, 黑 水 靺 鞨 遣 使 入 見;【注 : 黑 水 靺 鞨 在 流 鬼 國 西 南, 女 真 即 其 遺 種 也.】上 以 其 國 為 黑 水 州, 仍 為 置 長 史 以 鎮 之.❳:

〔이때 흑수말갈의 사신이 입조하여 상을 뵈었다. 【흑수말갈은 유괴국의 서남에 있다. 여진은 곧 그 유종이다.】상(현종을 칭)이 그 나라를 “흑수 주(黑水 州)”로 하고, 장사(長史)를 두어 다스리도록 하였다.〕

 

○ 위 글 중에서 흑수말갈은 유귀(流鬼)국 서남(西南)에 있다. 』고 한 것이 핵심(核心)이다.

그렇다면 “유귀(流鬼)”국은 어디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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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전 변방 전 : 北 狄 七 <庫莫奚.契丹.室韋.地豆于.烏落侯.驅度寐.霫.拔悉彌.流鬼.迴紇.骨利幹.結骨.駮馬.鬼國.鹽漠念>

 

    <流 鬼> :〔流 鬼 在 北 海 之 北 , 北 至 夜 叉 國 , 餘 三 面 皆 抵 大 海 ,南 去 莫 設 靺 鞨 船 行 十 五 日. :

 

“유귀(流鬼)”는 “북해(北海)”의 북쪽에 있다. 북쪽으로 ‘야차 국’에 이르고, 3면이 대해(大海)에 막혀있으며, 남쪽으로 막설말갈(靺鞨)이 배로 15일을 간다.❳고 하였는데,

 

위 자치통감에 ➡➡➡유귀(流鬼)”국 서남(西南)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있다.』고 하였으니 결국 북해(北海)의 북쪽에서, 서남(西南)지방에 “흑수말갈(黑水靺鞨)”들이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지형도로 찾아보면 현 ➡➡➡『흑해(黑海). 카스피 해. 아랄 해 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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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新 唐 書 卷 220. 列 傳 145. 東 夷 (高 麗. 百 濟. 新 羅, 日 本. 流 鬼) 중에서 “流 鬼(유괴)”국은 동이(東夷) 곧 <고구려. 백제. 신라. 일본> 편에 함께 분류하여 기록하고 있다.

 

〔 流 鬼 : 去 京 師 萬 五 千 里 , 直 黑 水 靺 鞨 東 北 , 少 海 之 北. :

‘유귀’는 경사(京師)에서 만 오 천리(15,000리) 떨어져 있고, 곧장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동북(東北)’이고, ‘소해(少 海)’의 북쪽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➊ 결과적으로 대륙(大陸)의 역사서 속에 기록된 말갈(靺鞨)의 위치는 북해(北海)의 북쪽지방에 있었던 “유귀(流鬼)”국의 서남(西南)지방에 있었다는 것이다.

 

➋ 또 하나 동이(東夷)의 나라는 북해(北海)를 포함한 그 북쪽에 있었던 “유귀(流鬼)”국 역시 “동이(東夷)”에 속했다.

 

➌  『북해(北海)의 위치는 신강(新疆)의 북쪽지방 현 러시아 땅이다.』이는 수많은 대륙사서와 문인들의 문집(文集)에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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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舊唐書/ 本紀/ 下 : 15년.十一月.癸酉,薛延陀以同羅,僕骨,迴紇,靺鞨,霫之眾度漠,屯于白道川.命營州都督張儉統所部兵壓其東境;兵部尚書李勣為朔方行軍總管,右衛大將軍李大亮為靈州道行軍總管,涼州都督李襲為涼州道行軍總管,分道以禦之. :

 

<‘설 연 타’ 외 ‘동라’, ‘박골’, ‘회흘(回紇)’, ‘말갈(靺鞨’), ‘습(霫)’>등의 무리가 사막(漠)을 건너 백도 천(白 道 川)에 진을 쳤다. 명을 받은 영주도독 “장 검”의 여러 부대를 통솔하여 그들의 동쪽지경을 압박하고, 병부상서 “이 적”이 삭방행군총관과 우위대장군 “이 대량”이 “령 주”(靈 州 : 오원서북방)도 행군총관, 량 주 도독 “이 습 예”가 “량 주 도” 행군총관이 되어 나누어서 길을 나와 방비하였다.❳

 

○ <설연타 및 동라, 박골, 회흘> 등은 천산(天山)의 북방지대에 있었다. 위의 기록은 <설 연 타 외 동라, 박골, 회흘, 말갈, 습>등의 종족들이 무리를 이뤄 백 도 천(白 道 川)에 진을 쳤으며, <이들은 사막(沙漠)을 건너왔다(度 漠)>는 것이다.

 

○ 이들이 사막(沙漠)을 건너 “백도 천”에 배수진을 쳤다면 위의 기록으로 보면 『준 가리 분지의 사막(沙漠)을 건너 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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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은 기록을 보면 ; 당(唐)의 영토(領土)가 현 대륙(大陸)의 중원(中原)지방과는 전혀 관계없는 강역(疆域)이 되며, 그곳은 <티베트 서부지역>과 <인도 북부지방>과 <신강 타림 분지 서남지방> 등지가 당(唐)의 영토(領土)가 된다.

 

▶ 이때 발해(渤海)는 “신강(新疆) 지방의 천산(天山) 남(南), 북(北)로 지역으로부터 동(東)쪽으로 외몽골 일부와 내몽골 지방과 그 동(東)쪽으로 하투(河套)지역을 아우르는 거대한 “북방제국”을 형성하여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이름에 걸 맞는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때 신라는 발해(渤海)의 남쪽지방 즉 현재의 대륙(大陸)지방을 9주(州)로 나누어 통치했던 거대 “신 라 국”을 형성했다.

 

이것은 대륙사서의 기록에서 종족(種族) 및 국가와 국가 간의 변경(邊境)지역과 국가(國家)와 국가(國家) 간의 전쟁(戰爭) 및 국가(國家)와 종족(種族)간의 전쟁(戰爭), 종족과 종족간의 전쟁사등과 함께 지명(地名)의 본시 위치(位置) 등을 통해 찾아낸 것이기 때문에 반도사관. 식민사관. 대륙 조선사 등 또는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와는 전혀 관계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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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의 역사 해설』에서 “靺鞨(말갈)”종족들이 살았던 거점 지는 반도(半島) 동북방지방이 맞는 것인가?

또한 “흑수말갈(黑水靺鞨)”이란 반도 북방의 흑룡강(黑龍江) 주변에서 살았던 자들이 맞는 것인가?

그렇다면 흑룡강(黑龍江)이 흑수(黑水)인가?

 

○ 이러한 사실들은 1900년 대 이후 제국주의자들의 역사왜곡으로 만들어진 산물(産物)이다. 이러한 것을 파악치 못하는 한 “조선사의 진실을 찾는다는 것은 헛구호에 불과할 뿐이며, 허공으로 흩어지는 메아리가 될 뿐이다.”

 

○ 선대(先代) 숙신(肅愼)은, 그 후대(後代)인 읍루(挹婁)로, 말갈(靺鞨)로, 여진(女眞=女直)으로 금(金)나라로, 후금(後金)으로, 청(淸)나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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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정쩡하게 현 만주(滿洲)가 조선(朝鮮)이라고 하는 분들을 위해 가장 오래된 기록 하나를 더 설명키로 한다. 』

 

 

➡➡➡ 말갈(黑水靺鞨)의 선조인 “肅愼(숙진)씨”나라와 그 후예들인 “말갈(靺鞨)”들이 있었던 본래의 땅은,

 

山 海 經 / 海 外 西 經 : 【海 外 自 西 南 陬 至 西 北 陬 者 1 :

 

산해 경 : 해외서경 : 해외서경의 범위(방향)는 서남(西南)모퉁이(陬)로부터 서북(西北) 모퉁이(陬) 까지다.】

 

<注>1 畢 沅 云 : 淮 南 子 墬 形 訓 云 : 自 西 北 至 西 南 方 , 起 修 股 民 肅 慎 民, (中略). :

 

<주> “필 원” 말하기를 ; 회남자 추 형 훈에서 이르기를 ; 『서북(西北)으로부터 서남(西南)방에 이르며, <수고 민. 숙신 민>이 일어났다.』 <股 : 넓적다리고>

 

○ 숙신(肅愼)은 읍루(挹婁)이며, 읍루(挹婁)는 말갈(靺鞨)이며, 말갈(靺鞨)은 여진(女眞)이다. 이 종족은 “동이(東夷)”에 속했으며, 조선(朝鮮)의 한 일원이었다.

 

○ 이런 기록을 보면 산 해 경(山海經)이 낙양(洛陽)을 중심했던,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했던, 또는 곤륜산을 기준했던 간에 중심지역의 서북방(西北 方)이 어느 쪽인가?

 

○ 조선(朝鮮)! 일만 년 왕조(王朝)를 이어온 조선(朝鮮)인들은 동서남북(東西南北)의 방향조차 분간하지 못했던 미개한 종족이었을까? 이건 해답이 될 수 없다.!!!!!!!!!!!!!!!!!!!!!!!!!!!!!!!!!!!!

 

 

                                                      

출처 : 현실참여 문인ㆍ시민 연대
글쓴이 : 대덕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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