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원통불교(圓通佛敎) 회통불교(會通佛敎) 이것은 부처님의 본뜻인 것입니다. 불교가 천파만파로 구분했다 하더라도 결국은 본체(本體)는 하나입니다. 하나로 뭉치기 위해서는 우선 공부하는 분들이 공부하는 자기 취향 따라서 어떻게 하던지 간에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옴마니 반메흠'을 부르든지 간에 우리 근본 본체자리 근본 성품자리 이 자리에 마음을 둬야 합니다.
그리해 보면 이 자리에 마음을 두기 쉬운 것이고, 부처님 외우는 것이 보통 하기가 제일 쉽습니다. 부처님 법문은 난행문(亂行門) 이행문(易行門)이라!
어려운 문과 쉬운 문이 있습니다만 가장 쉽고도 공덕이 많은 문은 해보면 역시 부처님을 -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 이미지(image)가 떠오르듯이 - 부처님도 부처님 이름을 부르면, 부처님은 체(體)구나, 근본(根本)이구나, 이와 같이 그런 영상(映像)이 떠오른단 말입니다. 따라서 어려운 것은 어려운 대로 해서 또 개성이 맞는 분이 한다 하더라도 쉬우면서 공덕(功德)이 많은 쉬울 이(易)자, 행할 행(行)자, 문문(門)자 이행문(易行門). 어려울 난(難)자, 난행문(難行門)이라. 난행문은 한가하고 그런 사람들이 특수하니 할망정 한가하지 않는 우리 재가(在家) 불자님 들은 쉬우면서 공덕이 많은 문 즉, 말하면 이행문으로 공부할 때 역시 부처님 이름을 외이는 염불(念佛)이 제일 쉽습니다.
우리 마음이 불성(佛性)만 안 여의면 그때는 바로 염불(念佛)이 참선(參禪)이 됩니다. 참선은 이것은 부처님 마음이요, 또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참선(參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이요, 계행(戒行) 이것은 부처님의 행동(行動) 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행(行)이 계행(戒行)이고, 부처님의 말이 부처님의 경전(經典)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이 참선이기 때문에, 마음이 불심(佛心)만 안 여의면 우리가 염불(念佛)을 하나 주문(呪文)을 하나 화두(話頭)를 하나 모두가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원통불교(圓通佛敎)라 하는, 나아가서는 그야말로 참 원통종교(圓通宗敎)라 하는, 우리 대(代)에는 못 본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人間)은 그런 역사적(歷史的) 필연(必然)으로 해서 꼭 하나의 종교(宗敎)가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내야 다 불성(佛性)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뿌리치고 돌아온 고향(故鄕)도 역시 불성(佛性)인 것이고 돌아갈 고향(故鄕)도 역시 불성(佛性)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무수한 보살(菩薩)들은 우리가 성불(成佛)하기를 지금 고대하고 기다리고 있고 우리가 성불하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각 성인(聖人)들은 물론 기독교(基督敎)의 목사(牧師), 천주교(天主敎)의 신부(神父) 또는 불교(佛敎)의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또는 마호메트의 여러 성직자(聖職者), 이들 모든 성직자는 모두가 다 각도는 좀 다르다 하더라도 내내야 모두가 성불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바삐 조금도 치우침 없이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오직 불성(佛性)임을, 불성 이것은 청정광명(淸淨光明)이라, 우리 중생(衆生)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도인은 분명히 보는 청정광명인 것입니다. 청정광명인 그런 생명(生命)이 불성(佛性)인 것입니다. 어떠한 원소(元素)에나 어디에나 다 있는 그런 청정광명(淸淨光明) 생명(生命) 이것은 불성(佛性)인 것입니다. 불성(佛性) 이것은 영생(永生) 합니다. 따라서 염불(念佛)을 하고 또는 참선(參禪)을 하고 화두(話頭)를 외이고 한다 하더라도, 이름만 외워도 좋습니다만 기왕이면 그와 같이 모든 생명(生命)의 뿌리는 다 불성(佛性)이구나, 이와 같이 믿고서 불성의 그런 [생명(生命)의 광명(光明)]을 우리가 상상(想像)하면서 하면 훨씬 더 공덕이 많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업장(業障)이 정화(淨化)됨에 따라서 불성광명(佛性光明)이 자기한테 걸은 걸음 접근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불성광명이 우리에게 접근이 된다고 할 때는 그때는 마치 아사세왕이 자기 아버지인 부왕(父王)을 죽이고, 자기 어머니를 유해하고 나라를 빼앗아서 그만 온몸에 부스럼이 생겨서 별별스러운 좋은 약으로 치료를 했지만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흠모 추구하고 자기가 조금 정화(淨化)가 돼서 부처님의 그런 광명(光明)을 딱 그때는 봤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무량광명(無量光明)을 보는 순간 자기의 그런 몸에 있는 불치(不治)의 부스럼이 낫아 버렸단 말입니다.
기도(祈禱) 모신 분들은 그러한 영험담(靈驗談)을 그런 영험스런 경험을 많이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한테 있는 불성기운(佛性氣運)은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아는(知) 것도 한도 끝도 없고 지혜(智慧)도 한도 끝도 없습니다. 제가 항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무수한 정보(情報), 무수한 가능성(可能性)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록 지금 부자(富者)라 하더라도 권력(權力)이 높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부처님의 지혜로 볼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갈 길을 몰라서 헤매는 비렁뱅이나 같은 것입니다.
오직 부처님 길을 가는 것만이 그 길만이 인간(人間)의 허무(虛無)한 무상(無常)을 초월(超越)하고 영생(永生)의 행복(幸福)을 무한의 가능(可能)을 계발(啓發)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생활(現實生活)이 제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우리는 분명히 지향(志向)해 갈 우리가 돌아갈 고향(故鄕)을 우리는 압니다. 불교(佛敎)를 모를 때는 고향(故鄕) 길을 모르는 나그네 같지만, 이제 우리는 고향(故鄕) 길을 압니다.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먼저 청정(淸淨)한 계율(戒律)을 지키고, 철저한 계행(戒行)을 지켜야만 이, 계행은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불성(佛性)에 따르는 행동(行動)이기 때문에 계행(戒行) 지켜야만 불성(佛性)에 접근이 됩니다. 계행(戒行)을 지키면서 참선(參禪) 염불(念佛)을 해서 꼭 금생(今生)에 모든 번뇌(煩惱)를 녹이고서 금생에 훨훨 벗어버리는 아까 제가 말씀 드린 무극허무신(無極虛無身)이라!
몸이 있더라도 우리 몸뚱이가 하늘에 있는가? 어디에가 있는가? 내 마음이 한번 이 몸 이대로 하늘로 올라가라하면 하늘로 올라가 버릴 수 있는 그렇게 행복스러운 그렇게 참답게 깨닫는 분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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