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문화 산책

홍성 성지

맑은물56 2011. 2. 25. 15:11

홍성 성지


I. 홍성 지역의 천주교와 순교사


  <홍성 지역의 천주교 전래와 초기 순교자>

  지금의 홍성(옛 홍주) 지역에 천주교의 복음이 전파된 것은 1784년 겨울 서울 수표교 인근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되어서였다. 초기 순교자들인 홍주 응정리(현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 출신의 원시장(베드로)과 사촌 원시보(야고보), 홍주의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과 황일광(黃日光, 시몬) 등의 순교 행적에서 볼 때, 홍주 지역도 1780~1790년대에 이미 예산. 당진. 보령. 면천. 덕산. 청양 지역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한 신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홍주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순교자를 탄생시키게 된다.


<표 1> 박해 초기의 홍주 순교자 일람(1791~1801년) : 8명

 

성  명

세례명

출생지

거주지

순교 형식

순교일

나이

신분

원시장

베드로

홍주 응정리

홍주

옥중 동사

1792년 12월 17일

(양력 1793년 1월 28일)

61

양인

프란치스코

면천 여름이

면천

옥중 교수

(혹 장사)

1798년 12월 16일

(양력 1799년 1월 21일)

 

비장

프란치스코의 동료 2명

미상

박취득

(朴取得)

라우렌시오

홍주

홍주

옥중 교수

1799년  2월 29일

    (양력 4월 3일)

약30

 

황일광

(黃日光)

시몬(혹 알렉시오)

홍주

경상

양근

참수

1801년 12월 27일

(양력 1802년 1월 30일)

45

백정

바오로

덕산 줄울

 

미상

1801년

 

 

토마스

면천 올구지

 

미상

1801년

 

 

       * 김귀동(金貴同) : 홍주(혹 전라도 고산이나 충청도 청양) 출신, 1801년 12월 27일 홍주(혹 고산․청양) 참수 순교


  홍주 지역의 첫 순교자는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로 체포되어 이듬해에 순교한 원시장(베드로)이다. 다음으로 1797년의 정사박해(丁巳迫害) 때는 면천 여름이(현 당진군 면천면 대티리) 출신으로 감사의 비장을 지낸 방(方) 프란치스코와 2명의 동료, 그리고 박취득(라우렌시오)이 홍주에서 순교하였다. 이어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는 홍주의 백정 출신 황일광(시몬)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며, 윤 바오로와 한 토마스도 이때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초기 박해(1791~1801년) 때 홍주에서 순교한 신자는 모두 8명(1801년 순교자 김귀동을 포함하면 9명)이 된다. 이 중에서 원시장,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황일광 등 4명은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 재판이 진행 중에 있다.


  <천주교의 확산과 순교자수의 증가>

  홍주를 포함하여 내포 지역의 신자들은 일찍부터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 신유박해와 1815년의 을해박해, 1827년의 정해박해 때에는 다른 지역에서 순교하는 홍주 출신 신자들이 탄생하게 된다.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도 홍주 다락골(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출신으로 경기도 안양의 수리산으로 이주해 신앙 생활을 하다가 순교하였다.

  1812년에서 1839년 사이에는 홍주에서 순교한 신자들도 있었다. 홍주 배올(현 홍성군 홍북면 봉신리의 ‘배울’인 듯) 출신의 이여삼(바오로)이 그 첫 번째 순교자였다. 이어 1837년에는 홍주에서 김윤우(시몬)가 순교하였고,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에는 덕산 청정이(현 예산군 삽교읍의 ‘창정리’인 듯) 출신 유 바오로가 홍주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또 홍주 다락골 출신 최대종(요셉)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홍주에서 옥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표 2> 박해 중기의 홍주 순교자 일람(1812~1839년) : 4명

 

성  명

세례명

출생지

거주지

순교 형식

순교일

나이

신분

이여삼

바오로

홍주 배울

홍주

금산

장사(옥사)

1812년 12월경

약43

양인

김윤우

시몬

미상

 

미상

1837년

 

 

바오로

홍주 청정이

홍주

옥사

1839년 7월

 

 

최대종

요셉

홍주 다래골

홍주

옥사

1840년 5월 5일

    (양력 6월 4일)

51

양반


  홍주에서 많은 순교자가 탄생한 것은 1866년에 시작되어 18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였다. 『치명일기』, 『병인치명사적』,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등 교회 순교록(殉敎錄)에 나타나는 병인박해의 홍주 순교자를 종합해 보면, 다음의 <표 3>에서 보는 것과 같이 총 115명에 이른다.


<표 3> 병인박해 때의 연도별 홍주 순교자(교회 순교록)

 

연  도

1866년

1867년

1868년

1869년

연도 미상

합 계

순교자

51명

19명

27명

2명

16명

115명


  지금까지 교회 순교록에 나타나는 홍주 순교자 115명 중에서 관변 기록에 그 이름이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관변 자료인 『공충도사학죄인성책』(公忠道邪學罪人成冊 : 규장각 및 절두산순교기념관 소장 자료)에서 순교록의 순교자와 일치하는 경우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성책에는 다음과 같이 1868년 4월(음)부터 7월까지 충청도 각지에서 체포되어 홍주에서 처형된 신자 102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교회 순교록과 일치하는 중복 순교자는 17명이 된다.


<표 4> 『공충도사학죄인성책』의 홍주 순교자

 

순교 월

1868년 4월

1868년 5월

1868년 6월

1868년 7월

합 계

순교자

27명

46명

27명

2명

102명


  병인박해 순교자로 확인되는 홍주 순교자수는 교회 순교록에 나오는 115명과 관변 기록에 나오는 102명을 합쳐 모두 217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 중에서 중복 순교자로 추정되는 17명을 제외한다면, 그 수는 200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 병인박해의 홍주 순교자 200명을 연도별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5> 병인박해 때의 연도별 홍주 순교자(종합)

 

연  도

1866년

1867년

1868년

1896년

연도 미상

순교자

49명

19명

115명

2명

15명

200명


  <박해시대의 홍주 순교자 총수>

  박해 초기의 홍주 순교자는 8명이고, 중기의 홍주 순교자는 4명이었다. 그러다가 병인박해 때에 와서는 순교자수가 200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즉, 박해시대(1792~1869년) 홍주에서 순교한 것으로 확인되는 천주교 신자수는 다음과 같이 모두 212명에 달한다.


<표 6> 박해시대의 홍주 순교자 총수

 

박해 구분

순교자수

비  고

초기 순교자(1791~1801년)

8명

1801년 순교자 김귀동을 포함하면 9명

중기 순교자(1812~1839년)

4명

 

병인박해 순교자(1866년 이후)

200명

무명 순교자 11명 포함. 중복 순교자는 17명

합계 : 212명


  홍주 순교자 212명 중에서 무명 순교자 11명을 제외한 201명 순교자를 성별로 구분해 보면, 남자 순교자가 120명, 여자 순교자가 81명이다. 남자 순교자수가 월등히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관변 기록인 『공충도사학죄인성책』(102명)만을 보면, 남자 순교자가 47명, 여자 순교자가 55명으로 오히려 여자 순교자가 더 많다. 따라서 교회 순교록에는 실제보다 남자 순교자가 더 많이 수록되었던 것 같다.



  II. 홍성 순교자의 순교 형식과 순교 터


  <순교 형식>

  홍주 순교자의 순교 형식은 관변 기록이 아니라 교회 순교록(총 127명)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순교록을 보면, 홍주 순교자 중에서 교수형이 100명, 옥사(早死 즉 徑斃)가 13명, 생매장이 4명, 참수가 2명(다만, 1868년의 참수 순교자 유 마르타는 교수형이 참수형으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미상이 8명으로 나타난다. 특히 1868년 5월에 생매장으로 순교한 4명(최법상 베드로, 김조이 루치아, 김조이 마리아, 원 아나타시아)은 모두 홍주 원머리(현 당진군 신평면 한정리)에 거주하던 친척간이었다.


<표 7> 박해시대 홍주 순교자의 순교 형식(순교록)

 

      순교 형식

박해

교 수

옥 사

생매장

참수

미상

교수

추정

소계

옥사

추정

소계

초기.중기 박해

2명

 

2명

4명

 

4명

 

1명

5명

12명

병인박해

80명

18명

98명

8명

1명

9명

4명

1명

3명

115명

합 계

82명

16명

100명

12명

1명

13명

4명

2명

8명

127명


  교수형은 옥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교회 순교록에 보면, 교수형은 구멍이 있는 큰 돌(일명 형구돌)이나 옥벽에 뚫은 구멍, 혹은 널판 구멍에 줄을 넣고 순교자의 목을 얽어맨 다음 옥졸들이 반대편에서 줄을 당기는 방법으로 행해졌다. 1866년 11~12월 서산 강당리 출신의 김선양(요셉) 등 17명의 교우가 이러한 방법으로 순교하였다. 옥졸들은 이들 중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한 구덩이에 묻었다.


  참소(斬所)에 나아가 널판 앞에 당도하니, 그 가운데 구멍내고 줄을 넣어 1인을 밖에 서고, 1인은 안에 서서 줄로 목을 걸어주며 금장(禁將)이 소리 크게 하며 ‘당기라’ 할 때, 성호 긋고 예수․마리아 소리 한 번밖에 못하고 죽으니라. 죽은 후에 그 시체는 17인을 모두 한 광중에 묻으니라. ……옥졸이 청령(聽令)하고 금장 소리 높이 하며 죄인 하나씩 내어 널판 앞에 세우고, 옥졸 중 하나는 밖에 서서 줄을 잡고, 하나는 안에 서서 줄로 목을 걸어 당길 때 최 마리아의 말이……그러한 후 목을 걸어 죽이니라.


  초기 박해 때의 순교자들은 각자의 거주지에서 체포되어 온 뒤, 홍주 진영(鎭營, 즉 충청도 前營)의 동헌 혹은 목사의 동헌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3~4개월에서 8~9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처형되었다. 원시장,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등이 이러한 행형 절차에 따라 사형 판결을 받았다. 황일광만이 형조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홍주로 압송되어 참수형을 받았다. 이여삼 등 중기에 순교한 순교자들도 초기의 행형 절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선참후계령(先斬後啓令)이 내려진 후의 병인 순교자들은 문초와 형벌 기간, 혹은 옥중 생활이 크게 단축되었다.


  <신앙 증거 터와 순교 터>

  홍주 관아로 끌려온 순교자들은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처럼 그들이 처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장소는 홍주 진영(즉 충청도 前營)의 동헌(즉 景士堂) 앞과 목사의 동헌(즉 近民堂) 앞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중에서 근민당은 현존하는 안회당(安懷堂, 사적 231호)이 아니라 그 남서쪽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또 전영장의 동헌인 경사당은 지금의 동문(즉 朝陽門) 서쪽에 위치한 한국통신 건물 자리(일제 강점기 때의 홍성 우편국 사무실)로 추정되고 있다.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이곳에 있던 영장의 동헌 앞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옥으로 끌려가 오랫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스스로의 신앙을 다짐하였다. 이 홍주 옥터는 지금의 검찰청 및 법원 자리(1871년의 홍주목 지도 참조)에 비정되고 있다. 아울러 홍주의 저자거리(즉 구장터, 지금의 홍성군청 앞)는 순교자들이 관아로 끌려갈 때, 혹은 처형되기 전에 조리돌림을 당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곳도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한 곳으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실제로 홍주 옥터는 신앙의 증거 터이기도 하면서 최대의 순교 터도 된다. 교회 순교록에 나오는 127명 중에서 교수형 100명, 옥사 13명 등 113명이 이곳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1801년의 황일광과 1868년의 유 마르타(교수형의 가능성도 있음)가 참수형을 받은 장소는 지금의 홍성읍 북문교 옆(북문교 서쪽)의 월계천변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옛 홍주성 북문 밖 20m 지점인데, 월계천이 북문교와 만나는 곳으로 일반적인 처형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1868년 5월 최법상(베드로) 등 4명이 순교한 생매장 터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옥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이 성밖으로 끌려나와 안장된 묘역도 이 생매장 터와 거의 같았을 것이다.



  III. ‘하느님의 종’ 홍성 순교자 약전


  홍성 순교자 중에서 박해 초기에 순교한 4명의 순교자는 2002년 9월 교황청 시성성의 교령에 의해 ‘시복 시성을 추진함에 아무런 장애가 없음’을 인정받은 ‘하느님의 종’이 되었다. 1792년(양력 1793년)의 순교자 원시장(베드로), 1798년(양력 1799년)의 순교자 방 프란치스코, 1799년의 순교자 박취득(라우렌시오), 1801년(양력 1802년)의 순교자 황일광(시몬) 등이 그들이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이들 4명의 순교자와 함께 모두 124위의 시복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1. 홍주 최초의 순교자 원시장 베드로

 

  ◈  입교와 신앙 생활

  원시장(베드로)은 충청도 홍주 ‘윽전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응정리’)에 있는 부유한 양민(良民) 집안에 태어났다. ‘시장’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그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없지만, 성격이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들었다고 전한다.

  1788년 혹은 1789년 무렵, 그는 나이 55세가 넘어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내포 평야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응전리까지 도달하게 된 것이다. 사촌 형인 원시보(야고보)와 함께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를 듣게 된 원시장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이것이 바로 진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즉시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직 세례는 받지 못하였다.

  예비 신자가 된 순간부터 원시장은 천주교 교리를 양약(良藥)으로 생각하였고, 진작에 그 약을 먹지 못한 지난날의 헛된 세월을 한탄하였다. 그리고는 이 진리를 좀더 올바르게 깨우치고 실천하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에 그는 어느 날 갑자기 가족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는 집을 떠났다.

  “나는 50년 이상을 무익하게 살아 왔다. 내가 돌아오면 내가 떠난 까닭을 알게 될 것이다. 아무 걱정말고, 특히 나를 기다리지 마라.”

  이후로 가족과 친지들은 1년 이상이나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년이 지난 어느 날 원시장이 다시 나타나자, 그의 친척과 친구들은 그에게 달려가 무수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지난 50여 년 동안 나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소. 그러나 지금은 수천 년 동안 목숨을 보전하게 해 주는 약을 가지고 있소. 그것을 내일 설명해 주리다.”

  과연 그 이튿날 원시장은 모든 친척들을 모아 놓고 이 세상의 시초와 마지막, 만물을 창조하고 보존하시는 하느님의 존재, 원죄(原罪)와 강생(降生), 하느님의 계명, 천당과 지옥 등, 지난 1년 동안 스스로 깨우친 교리를 그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였다.

  “자, 이것이 착한 뜻을 가진 사람 누구나 영원히 사는 방법이오. 여러분은 모두 내 말을 내 유언으로 알고 나처럼 천주교를 신봉하시오.”

  은총이 그의 말과 함께 모든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들은 모두 그 날부터 ‘인류의 대왕이며 공동의 아버지이신 분을 섬기기 시작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모든 말보다도 원시장에게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힘을 준 것은 그의 착한 모범이었고, 그가 스스로 거두었던 승리였다. 이제 그는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정복하였으며, 일상 생활에서 변하지 않는 온화함을 보여 주었다. 주변 사람들은 특히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재산을 나누어주고, 올바른 지식으로 비신자들을 권면하는 열성에 감탄하였다. 그는 비신자 30가구 이상을 입교시켰으며, 그의 열심은 비신자들 앞에서까지 항상 천주교의 규칙을 지킬 정도로 대단하였다.


   신해박해로 인한 체포와 옥중 영세

  당시 홍주 일대에는 이미 천주교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관가에서도 항상 이 지역을 주시하고 있었다. 특히 원시장(베드로)과 사촌인 원시보(야고보)는 열심한 신자로 인근에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던 중 1791년의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홍주 목사는 지체하지 않고 포졸들을 풀었으며, 그들은 먼저 원시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때 원시보는 친구들로부터 포졸들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들의 권유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므로 윽전리에 당도한 포졸들은 사촌인 원시장을 붙잡고 ‘당신 사촌(원시보 야고보)이 어디로 갔는지 빨리 대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죽기가 무서워서 숨었소. 그가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오.”

  “우리는 목사의 명령을 받고 천주교인인 그를 잡으러 왔소. 그러나 그가 여기 없으니 대신 당신을 잡아가겠소.”

  “좋소.”

  원시장(베드로)은 이렇게 대답하고는 홍주 관아로 끌려갔다. 그러자 그곳 영장(營將)이 다시 그에게 물었다.

  “당신 사촌이 어디로 갔소.”

  “난 모르오.”

  “당신 사촌이 천주교를 믿는다는데 당신도 믿소.”

  “나도 천주교를 신봉하오.”

  “다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천주를 배반하시오. 나는 사또(즉 홍주 목사)에게 그 모든 소문이 순전히 무함이었다고 보고하겠소. 그러면 당신은 곧 풀려날 것이오.”

  “나는 천주를 배반할 수 없소.”

  결국 그는 어떤 옥에 갇혔고, 오랫동안 계속 배교하라는 독촉을 받았다. 그러나 원시장(베드로)이 여전히 배교를 거절하자, 화가 난 홍주 영장은 그를 목사 앞으로 끌고 갔다. 이때 홍주 목사는 또다시 같은 질문을 하면서 배교하도록 강요하였다.

  “네가 천주교를 따른다는 말이 정말이냐.”

  “정말입니다.”

  “천주를 배반하고 공범자들을 고발하고, 다시는 천주교를 따르지 않겠다고 말하라. 그러면 너를 즉시 놓아주도록 하겠다.”

  “천주를 배반하다니, 절대로 안 됩니다. 저는 또 천주교인들을 밀고할 수도 없습니다.”

  “너는 공범자들을 고발하고, 네 집에 있는 책들을 신고하기도 원치 않는단 말이냐.”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목사는 이제 화가 잔뜩 나서 형리들에게 주리를 틀라고 명하고, 이어 치도곤(治盜棍) 70도를 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원시장은 모든 것을 참을성 있게 견디어내면서 하느님과 부모님께 대한 사람의 본분을 설명하고, 덧붙여 비신자들이 행하는 미신 행위의 허망함과 참된 도리에 대해 설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런 다음 그는 다시 옥으로 끌려갔다.

  얼마가 지난 뒤 목사와 영장은 다시 원시장을 끌고 오도록 한 다음 예전과 같이 질문하였으나,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는 다시 주리를 틀리고 이전보다도 더 혹독하게 치도곤을 맞았다. 이제 그의 살점은 너덜거리고, 두 어깨뼈는 부러졌으며, 등뼈는 으스러져 허옇게 드러났다. 이렇게 참혹한 상태로 그는 옥으로 다시 끌려갔다.

  이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원시장의 얼굴은 만족과 기쁨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옥졸과 아전과 포졸들에게 교리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에는 한 교우가 그를 보기 위해 옥으로 찾아왔는데, 이때 원시장은 그로부터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예비 신자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 끊임없는 형벌과 신앙 고백

  사실 홍주 목사는 여러 개월이 지나면서 모든 것을 단념하였다. 누구든지 형벌 앞에서는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인데, 원시장(베드로)만은 오히려 믿음이 강해져 신앙을 고수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믿음은 형벌을 집행하는 형리들과 옥졸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모든 관리들에게 두려움을 줄 정도였다.

  목사는 그 동안 공주에 있는 충청 감사에게 사실을 보고하였고, 1792년 말에는 감사로부터 원시장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목사 앞에서 있은 세 번째 문초 때에는 어마어마한 형벌 도구들이 준비되었으며, 이 굳은 증거자에게 겁을 주려는 속셈에서 그 주변에 수많은 포졸들까지 세워 놓았다. 목사는 다시 한 번 그에게 말하였다.

  “네 목숨을 구해 주려는 마음에서, 그리고 네 마음을 좋은 길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썼다. 그러나 네가 아무 말도 듣지 아니하고 죽기를 고집스럽게 원하므로 나는 감사에게 보고를 하였다. 그랬더니 너를 쳐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배교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것을 알라.”

  “그것은 제가 가장 열절하게 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형리들은 그의 결박을 옥죄면서 무서운 고문을 하기 시작하였다. 고문이 하루 종일 계속되었지만, 원시장은 이를 용감하게 견디었다. 이제 그의 몸은 하도 으스러져서 수족조차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고문이 끝났을 때는 옥졸들이 그를 둘러 업고서야 겨우 감옥으로 데려갈 수 있었고, 손으로 음식을 입에 넣어 주었지만 이조차 삼키지를 못할 정도가 되었다.

  마침내 홍주 목사는 인근 수령들을 불러다 그의 마음을 돌이켜 보려고 마지막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혈육의 정에 호소해 보기로 하였다. 그를 끊임없이 찾고 있는 자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 앞으로 끌려나가 자녀들 이야기를 전해들은 원시장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자녀들 이야기를 들으니 제 마음이 크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는데, 어찌 그분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목사와 수령들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들은 형리들을 시켜 사형수에게 관례로 주는 음식을 주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죽임으로써 이 사건을 마무리지으려고 하였다. 형리들은 전보다 더 미친 듯이 매질을 시작하였으나, 그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포졸과 형리들이 기진맥진하여 서로 말하였다.

  “이놈의 죄인은 매를 맞는 것을 느끼지 못하니 어떻게 끝장을 내면 좋겠소.”

  원시장은 어렴풋이 그들의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매를 맞는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여기에 오셔서 저를 직접 굳세게 해 주십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는 미친 듯이 소리치면서 더 세게 매질을 하도록 하였다.

  “저놈은 틀림없이 귀신을 부리는 놈이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목사는 매질로만은 그를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를 결박한 뒤 물을 부은 다음 추운 밤중에 내 놓아 얼려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이내 원시장의 몸은 굵은 밧줄에 묶여졌고, 온 몸에는 물이 뿌려졌다.

  밤이 되자 그가 덮어쓴 물은 얼음으로 변하여 온 몸이 얼음 투성이가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만을 생각하였다.

  “나를 위하여 온 몸에 매를 맞고, 내 구원을 위하여 가시관을 쓰신 예수여,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내 몸이 얼음으로 덮여 있는 것을 보십시오.”

  그런 다음 원시장(베드로)은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하느님께 목숨을 바쳤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것은 닭이 두 번째로 홰를 칠 무렵이었으니, 때는 임자년(1792년) 12월 17일(양력 1793년 1월 28일)로, 그의 나이 61세였다. 충청도 땅에서 탄생한 첫 번째 순교자의 모습은 바로 이러하였다. 그러나 그의 용감한 순교는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충청도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어 더 많은 순교자의 피가 그 위에 물들여질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2. 정사박해의 순교자 방 프란치스코


  충청도의 정사박해

  신해박해가 끝난 지도 여러 해가 지난 정조 21년 정사년(1797년). 충청도 남부 지역에 사는 천주교 신자들은 뜻하지 않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천주교를 증오하는 공주의 충청 감사 한용화(韓用和)가 도내의 모든 수령들에게 천주교인들을 체포하도록 명한 것이다.

  비록 조정에서 1795년 이래로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종적을 찾기 위해 비밀리에 군사들을 풀어놓은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정조 임금은 물론 천주교로 인해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던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 정승 때문에 공식적인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1797년 윤6월 한용화가 충청 감사로 부임하자마자 얼마 안되어 사사로이 박해를 일으킨 것이었다. 이후 정사박해는 그의 후임으로 부임한 이태영(李泰永)과 김이영(金履永)에게로 이어졌고, 특히 무오․기미년(1798~1799년)에 심하였다.

  당시 박해자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은 배교자 조화진(趙和鎭)이었다. 김여삼(金汝三)과 함께 초기 박해의 밀고자로 유명한 그는 정사박해가 일어나자 지필묵을 파는 필공이나 행상을 칭하고는 교우들이 사는 집을 염탐하고 다녔으며, 신자들이 체포될 때는 함께 체포되어 들어갔다가 석방되어 나오곤 하였다. 교우들은 그 밀고자가 찾아와서는 십자 성호를 그으며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곤 하였으므로 의심 없이 교회 사정을 말해 주었고, 또 다른 교우들을 일러주기까지 하였다. 조화진은 그 후 1801년에 옥에 갇혔다가 그 안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이 교묘한 밀고자와 충청 감사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일어난 정사박해 과정에서 100명이 넘는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록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 순교자는 기껏해야 얼마 되지 않는다. 그 나머지는 한국 천주교회가 1세기 동안의 박해를 겪으면서 수없이 탄생시켜야만 하였던 ‘무명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가 있다. 하느님만이 그때 당신의 영광을 위해 고통을 당한 이들의 이름을 아실 뿐이다.


  ◈ 방 프란치스코의 순교

  방(方) 프란치스코는 면천 ‘여름이’(현 충남 당진군 면천면 대티리) 고을 태생으로 감사의 비장(裨將)을 지냈다. 그러다가 고향 인근에 전해진 복음에 대해 듣고 나서는 누구보다 빨리 이를 받아들였다.

  방 프란치스코는 천주교에 정식으로 입교하자 박취득(라우렌시오), 원시보(야고보) 등과 함께 자주 만나 교리를 연구하였으며, 이내 비상한 열심으로 교우들 중에 뛰어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듣는 동안 자주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순교하기를 열망하였다.

  1798년 홍주에서 잡힌 그는 6개월 동안 매우 많은 형벌을 당해야만 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도 전해지지는 않는다. 다만, 전승에 따르면 그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은 교우 두 명이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식사를 받고는 눈물을 흘렸는데, 방 프란치스코는 오히려 기쁨에 빛나는 얼굴로 천주와 동정 마리아께 감사를 드리고 나서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것도 천주의 은혜이지만, 사또가 이렇게 후한 대우를 해 주는 것도 섭리의 은혜인데, 어째서 당신들은 슬퍼하고 풀이 죽어 있소. 그것은 마귀의 유혹이오. 만일 우리가 천당을 얻을 이렇게도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 또 어떤 기회를 기대할 수 있겠소.”

  이때 천주께서는 그의 권고와 격려에 효력을 부여해 주셨다. 그의 두 동료는 자기들의 나약함을 뉘우쳤고, 오래지 않아 그의 마음에 있는 거룩한 기쁨을 같이 하였다. 그들 셋은 함께 홍주 읍내에서 순교하였는데, 방 프란치스코가 이때 매를 맞아 죽었는지 목이 졸려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순교일은 1798년 12월 16일(양력 1799년 1월 21일)로 전해진다.


  3. 박해자에게 항변한 박취득 라우렌시오


  용기 있는 자의 항변

  한국 천주교회의 못자리로 불리는 충청도 내포 지역에서는 어느 곳보다도 많은 유명․무명의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그 중에서도 관찰사가 주재하던 공주, 영장이 주재하던 홍주와 해미 등은 그들의 단골 순교 터였으니, 1792년 12월 17일 원시장(베드로)이 홍주에서 옥사한 이래 1870년대까지 이들 세 곳은 오랫동안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여지게 되었다. 저 유명한 홍주의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도 그중 한 사람이다.

  박취득은 지금 당진군에 속하는 홍주의 면천(沔川) 땅에서 태어나 일찍이 그 지방에 전파된 복음의 진리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이후 그는 서울로 올라가 지황(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웃에 복음을 전하였다. 다만 그의 가족에 대하여는 모친과 형 박일득(朴一得), 아내와 아들 한 명 있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지황은 서울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나 교회 밀사로 활약하다가 1795년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한 바로 그 사람이다.

  1791년의 신해박해 당시 내포 지역에서는 수많은 배교자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은밀한 계획으로 이렇게 많은 배교를 허락하셨지만, 당신 이름의 원수들이 완전한 승리를 자랑할 수 있게 되기를 원치는 않으셨다. 박취득을 통해 보여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충절의 본보기가 조선의 어린 교회를 위로해 준 것이다.

  당시 면천 고을에서도 대단히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박취득은 교우들이 여러 달째 갇혀 있는 것을 보고는 자주 그들을 옥으로 찾아가 보고 위로하는 용기를 가졌다. 하루는 옥중에 있는 교우들이 아침밥을 먹고 있을 때, 그가 갑자기 나타나 관문을 두드리고 과감히 들어가 면천 군수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무죄한 사람들을 사납게 매질하고 여러 달 동안 옥에 가둔다는 것은 무서운 죄가 아닙니까.”

  이에 군수는 화가 나서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당시 천주교 사건으로 옥에 갇혀 있던 박일득의 동생으로 홍주 사람이라는 대답이었다. 박취득은 즉시 체포되었고, 그의 목에는 무거운 칼이 씌워졌다. 형리들이 그를 혹독하게 매질하였으나, 그는 마음이 흔들리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목소리가 커질 뿐이었다.

  “이 나무 칼이 너무 가벼우니 쇠로 된 것을 씌워 주시오.”

  군수의 입장은 매우 난처하였다. 박취득이 대단히 인심을 얻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온 읍내 주민이 동요하는 데다가 불평까지 나왔기 때문이다. 군수는 감히 그를 단죄하지 못하고 멀리 보냄으로써 귀찮은 존재를 물리쳐 버리려고 하였다. 그 결과 박취득은 해미와 홍주 관아로 보내졌고, 홍주에서는 잔인한 매질을 당하였으나 그의 용기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옥에 갇힌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무렵에 조정에서 석방하라는 명령을 내려보냈으므로 순교의 영광을 얻을 수는 없었다.


   ◈ 정사박해로 다시 체포된 증거자

  1795년 신앙의 스승인 지황(사바)이 체포되어 순교하였지만, 박취득(라우렌시오)에게는 그 화가 미치지 않았다. 그는 원시보(야고보), 정산필(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등 열심한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실천해 나갔고, 한편으로는 복음 전파에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2년 뒤 정사박해가 충청도를 휩쓸면서 그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다시 박해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들은 박취득은 다른 곳으로 가서 숨어버렸다. 이제 그는 그만큼 겸손해져서 자기 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이 대신 잡혀가자, 모친의 자수 권고를 듣고는 이 권고가 하느님의 뜻인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에 그는 하늘의 도움을 기대하면서 8월 19일 자진하여 면천 관아로 갔다.

  면천 군수 앞으로 가자 관장은 그가 전날 피신한 것을 꾸짖었다. 이에 박취득은 “저는 관장의 체포령을 받기 전에 피신했었는데, 제 아들이 대신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모친의 권유를 받아 이렇게 왔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이때부터 군수의 문초가 시작되었다.

  “너는 어찌하여 국왕과 그의 관장들이 금하는 나쁜 도를 따르느냐.”

  “저는 나쁜 도리를 따르지 않고, 다만 만물을 창조하신 천주를 숭배하라고 가르치는 참 종교의 몇 가지 계명을 지킬 뿐입니다. 저는 그 천주를 공경하고, 다음에는 임금님과 관장들과 제 부모와 다른 어른들을 공경하며, 제 친구들과 은인들과 형제를,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너는 네 부모와 국왕과 관장들을 무시하고, 남들의 아내를 범하고, 재산을 쓸데없는 데 낭비하며,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지 않는데, 어째서 그렇게 모든 인륜을 어기느냐.”

  “제가 가르침을 받은 제4계에는 부모와 어른과 임금님과 관장을 공경하고,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인륜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우리가 드리는 음식을 잡수러 오지 못하시므로 음식을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도리는 헛된 일을 물리치는 대신 실제로 참된 것만을 지키도록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들은 모든 규칙과 예의를 갖추어 죽은 이들을 장사지냅니다. 제6계에서는 일체의 의설을 금하고, 제9계에서는 남의 아내를 원하는 것조차 금합니다. 얼마 안 되는 제 재산은 헐벗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쓰는 것이니, 재산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군수는 그에게 칼을 씌우라고 명하고 다시 힐문하였다.

  “누구에게서 배웠으며, 네 책은 누가 베꼈고, 네 공범자들은 누구냐.”

  “저는 서울에 살던 지황(사바)에게서 배웠는데, 그는 천주교 때문에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책도 그이에게서 받은 것이니 저도 죽어 마땅합니다.”

  “네가 무슨 죄를 범했느냐.”

  “저는 십계를 완전하게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관장은 그를 옥으로 데려가라고 명하였다. 옥리들은 그에게서 돈을 좀 뜯어내려고 두 발에 쇠고랑을 채우고 기와 조각 위에 눕게 한 뒤 갖은 학대를 가하였다. 그러나 박취득은 정의를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을 뿐 돈은 줄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말 때문에 그는 옥졸들로부터 무수히 매를 맞게 되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초는 형벌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때 박취득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 공로, 부활과 승천, 재림에 대하여 몇 마디 덧붙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 문초 때에는 이렇게 교리를 설명하였다.

  “임금님은 육체의 임자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만이 영혼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죽은 뒤의 상과 벌을 정해 놓으셨고, 아무도 그것을 면하지는 못합니다. 죽어야 한다면 그것이 제게 무슨 대수입니까. 인생이란 사라져 버리는 이슬과 같은 것이 아닙니까. 인생은 나그네길[逆旅]이고, 죽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本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곱 달 후에 신관(新官)이 부임하자 네 번째로 문초가 있게 되었다. 새 군수는 전임 군수 때에 있었던 일에 대해 보고를 받고는 배교하고 살아나가라고 회유하였다. 그러나 증거자는 여전히 “죽음은 이 세상의 모든 불행 중에 가장 큰 것이니, 살기를 원하고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은 모든 이에게 공통된 감정입니다. 그러나 천주는 사람들의 첫째 아버지이시고 만물의 최고 주재자이시므로 죽을지라도 그분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새 군수는 이때 ‘저 놈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혹독히 매질을 시켰다. 그러나 이 어려운 사건을 맡기가 귀찮아진 데다가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려고 하였으며, 이에 감사에게 보고를 한 뒤 허락을 얻어 홍주 진영으로 증거자를 이송하도록 하였다.


  ◈  기적을 보인 순교자

  홍주 진영에서 박취득(라우렌시오)는 면천에서와 같은 우스꽝스런 질문에 똑같은 답변을 하였고, 갖가지 형벌을 굽히지 않는 인내심으로 대하였다. 두 번째 문초를 당하게 되자, 그는 천당과 지옥에 관한 천주교 교리를 더 힘있게 설명하였다.

  “사또께서 오늘 당장 저를 죽이려 하고, 또 우리 교(敎)를 헛된 미신으로 몰아가시려 하니, 저는 잠자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마칠 때 모든 나라가 없어진 다음에는 양반과 상민, 임금과 백성의 구별이 없이 모든 연령층의 모든 사람이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천주 성자 앞에 모일 것이고, 그분은 과거와 당시의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착한 사람들은 주 예수와 그의 성인들과 함께 천당에 올라가서, 이 세상의 모든 영광과 모든 즐거움보다 천만 배나 더 큰 행복을 누릴 것이고, 악한 사람들은 발 밑의 땅이 꺼지며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에 잠겨 이 세상의 괴로움 보다 천만 배나 더 심한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그 때에는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늦고 소용이 없을 것이며, 각자는 자기의 행실에 따라 응보를 받을 것입니다. 사또께서 저를 죽이기를 원하시니, 이제는 제 몸을 뒤집어 놓고 목을 쳐서 당장에 죽여 주십시오.”

  여섯 번째 문초 때에 홍주 영장은 주변 사람들이 모드 들으라는 듯이 이렇게 외쳤다.

  “이 악한 도리를 쫓는 저 흉악한 놈들 때문에 나라 안에 기근과 가뭄이 심하여 온 백성이 굶어죽게 되었다. 너희들이 모여서 종교 행사를 하는 곳을 대고, 두목들의 이름을 실토하라. 그놈들이 산중에 모여 있다는데 모든 것을 사실대로 자백하라.”

  “저희들은 두목이 없으며, 교우들이 산중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실입니다. 사또께서 그것을 아시면 왜 물어보십니까.”

  영장은 화가 나서 ‘증거자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죽도록 매를 치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 박취득은 다시 옥으로 끌려갔다. 그런 다음 영장은 감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명을 내려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서양 사람들의 도는 더럽고 악하고 흉측하다. 그러니 그놈의 다리를 치되, 열네 번을 때려도 항복하지 않거든 아주 죽여 버리도록 하라”는 답변을 내려보냈다.

  감사의 답변을 들은 홍주 영장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진영(鎭營) 안에 모든 형구를 갖추어 놓도록 한 뒤 박취득을 끌어내다 갖은 형벌을 다하였다. 여러 달 동안 그는 여드레 혹은 열흘에 한 번씩은 영장 앞에 끌려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게다가 형리들은 상처 입은 몸을 옷을 벗긴 채 진흙 속에 버려 두고 밤새껏 추위와 비바람으로 고통을 받게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 무렵에 박취득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모친에게 써 보낼 수 있었다.


  “불효 자식 라우렌시오는 옥중에서 어머니께 제 심정을 알려 드립니다. 저는 항상 천주를 지성으로 섬기고 부모께 효성을 다하며 형제와 화목하고, 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 천주의 명을 지키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저는 천주께 죄를 범하고 부모와 형제에게 제 모든 본문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삼구(三仇 : 마귀, 새속, 육신)를 이기지 못한 저의 죄는 수없이 많습니다. 어머니, 제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삼촌과 형과 형수는 제가 더 잘 대접해 드리지 못한 것을 용서하시고, 제 죄를 사하여 주시고, 제 영혼을 구해 주시도록 천주께 기구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천주께서는 당신들의 모든 죄도 사해 주실 것입니다. 봄과 가을은 흐르는 물과 같이 지나가고, 세월은 부시로 치는 돌에서 튀어나오는 불똥과 같아서 길지 못합니다. 특히 조심하여 천주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십시오. 제가 옥에 갇힌 지 두 달쯤 되엇을 때, 어떻게 해야 천주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지 궁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잠결에 ‘십자가를 따르라’고 말하는 예수의 십자가가 얼핏 보였습니다. 이 발현은 약간 흐리기는 하였지만 결코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1799년 2월 25일에 그는 또 이렇게 써 보냈다.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이 천주의 명령을 따르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니 불안합니다. 천주의 명을 잘 따르시면 저 자신도 기쁘겠습니다.”


  그러는 동안 박취득이 얻게 될 승리의 시각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 마지막 편지를 쓴 지 이틀 후의 문초에서 그는 다시 곤장 50대를 맞았고, 그의 몸은 더없이 참혹하게 되었다. 그는 곤장이나 몽둥이로 도합 1천 4백 대 이상이나 맞았고, 8일 동안을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하였다. 옥졸은 이제 그가 죽은 줄 알고 그를 옥으로 업어다 놓은 다음 옷을 벗긴 뒤에 등을 찬물로 씻고 나서 밖에 내던져 버렸다.

  그러나 박취득은 죽지 않았었다. 밤 사이에 교우들이 몰래 그에게로 가서 약간의 음식을 먹였는데, 옥졸은 막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튿날 2월 28일에 그는 다시 영장 앞으로 끌려나가 매질을 당하였다. 영장과 형리들은 물론 구경꾼들도 그가 살아있는 것을 보고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당시 옥중에 있던 천주교인 11명이 보았는데, 의식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는 그를 옥으로 옮겨놓자, 몇 시간 후에 스스로 일어나 칼을 벗고 감방으로 들어가 누웠다고 한다. 그리고는 옥졸을 불러 말하기를 “나는 굶겨도 죽지 않고 맞아도 죽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목을 매면 죽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튿날 옥졸이 잠이 든 사이에 교우들이 박취득에게 다가가자, 그는 조용히 일어나 그들과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제 그의 모든 상처는 기적적으로 나아서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잠깐동안 나가야만 하였는데, 옥졸이 잠에서 깨어 이 광경을 보고는 요술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쫓아가 새끼줄로 목을 졸라 죽였다. 이때가 기미년(1799년) 2월 29일(양력 4월 3일) 오전 11시로, 그의 나이 약 30세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종은 이렇게 하여 순교하였다. 지난 18개월 동안 그는 순교의 여정에서 하루도 고문을 당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그의 발자국은 매번 피어린 자취로 남았다. 인간의 육체가 그렇게 오랫동안 형벌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지혜와 자비에 알맞는 동기로 어떤 위대한 본보기를 보여 주고자 하셨다. 이후 박취득(라우렌시오)이 흘린 피는 글자 그대로 교우들의 씨가 되어 고향 인근의 신앙 공동체를 지탱해 주게 되었다.


  4. 천민 출신 순교자 황일광 시몬


  ◈  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내포 지방의 홍주에서 탄생한 황일광(黃日光, 시몬)은 백정(白丁)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다른 기록에는 그가 양민 출신이었다고도 한다. 어느 신분이었건 간에 그는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에 아주 어렵게 생활하면서 모든 사람의 멸시를 받아가며 지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그에게 이러한 생활을 보상해 주기 위해 놀랄 만한 지능과 예민한 정신과 열렬한 마음과 매우 명랑하고 솔직한 성격을 주셨다.

  1792년 무렵, 황일광은 우연히 홍산(鴻山) 땅으로 이주하여 신앙 생활을 하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천주교 신앙을 접하자마자 그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천주교를 더 자유롭게 신봉하기 위하여 동생 황차돌(黃次乭)과 함께 고향을 떠나 멀리 경상도 땅으로 가서 살았다.

  경상도에서는 비신자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교우들과 연락하기가 쉬웠다. 교우들은 그의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것 때문에 그를 나무라기는 고사하고 애덕(愛德)으로 감싸주었다. 양반 집에서까지도 그는 다른 교우들과 똑같이 집안에 받아들여졌고, 이 때문에 그는 농담조로 이렇게 이야기하곤 하였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 고향 홍주로 이송되어 참수를 당하다

  1800년 2월 황일광(시몬)은 경기도 광주 땅 분원(分院)에 있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 회장의 집 이웃으로 이주해 살면서 황사영(알렉시오), 김한빈(베드로) 등 여러 교우들과 친밀하게 교류하였다. 그의 열심은 날로 더해져서 모든 이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 후 정약종이 서울로 이주하자, 황일광도 아우와 함께 1800년 10월에 서울 정동의 주막집 행랑채로 이주한 뒤 땔나무를 해다 팔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힘이 자라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또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만나 ‘시몬’(혹은 알렉시오)이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고, 교우들과 함께 마사에 참여하는 기쁨도 얻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황일광은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조금도 겁을 내지 않고, 그를 데리고 가던 자들에게 명랑한 어조로 말하였다.

  “나리들께서 저를 남원(南原) 고을에서 살기 좋은 옥천(沃川) 고을로 옮겨주니, 이 큰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남원’은 ‘나무’를, 옥천의 ‘옥’은 ‘감옥’을 의미한다. 그는 이처럼 감옥으로 끌려가게 된 것을 기뻐하여 남원과 옥천 두 고을을 빗대어 ‘자신이 나무를 하러 가는 대신 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이후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다. 그는 관원들이 물어보는 모든 것에 대하여 고상하게, 그리고 거룩하고 자유롭게 대답하였다. 관리들은 그렇게도 낮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 그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배교의 대가로 주겠다고 하는 목숨을 거부하는 데 화가 나서, 더 무서운 고문을 가하게 하였다. 그러나 황일광은 모든 것을 굳건하게 참아 받을 뿐 아니라, 아주 하늘에서 느끼는 것 같은 기쁨으로 외쳤다.

  황일광은 형관의 추상같은 호령에도 굴하지 않고 천주교를 ‘성스러운 학문’[聖學]이라고 부르면서 마지막으로 “만 번 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겠으니,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외쳤다. 그 결과 그는 다리 하나가 부러져 으스러지도록 잔인하게 매질을 당해야만 하였다.

  1801년 12월 26일, 그는 이경도(가롤로), 정광수(바르나바) 등 15명의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았다. 아울러 형조에서는 그에게 해읍정법(該邑正法 : 죄인이 태어나거나 살았던 곳으로 보내 참수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도록 하라는 판결)을 명하였으며, 이에 따라 그는 고향인 홍주로 보내어 사형 집행을 당하게 하였다. 그는 걸을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들것에 실려 가면서도 타고난 명랑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아내와 아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그를 도우려고 따라왔으나, 그들이 있음으로 인하여 어떤 유혹을 당할 것이 두려워서 절대로 그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황일광(시몬)은 홍주에 도착한 12월 27일(양력 1802년 1월 30일), 참수 터로 끌려나가 즉시 처형되었으니, 이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신분상의 비천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감격적으로 신앙을 증거한 황일광(시몬)의 희한한 덕행은 그 후 교우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게 되었으며, 훗날까지도 그의 행적은 가장 훌륭한 증거자들 중의 하나로 듣는 이들의 경의와 감탄을 자아내곤 하였다. 반면에 조선의 비신자 양반들은 이러한 신분의 사람이 교회의 영광이 된다는 말을 듣고는 경멸하는 태도로 웃었다고 한다.


  “순교자의 용덕을 모르는 것은 이방인들의 어리석음.”


  하느님의 섭리는 언제나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 된다. 그러나 순교자들에게는 무한한 용기와 희망이다.


 

성지 사진 보기

조양문(동문)

    홍성 전영장의 동헌인 경사당은 지금의 동문(즉 朝陽門) 서쪽에 위치한 한국통신 건물 자리(일제 강점기 때의 홍성 우편국 사무실)로 추정되고 있다.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이곳에 있던 영장의 동헌 앞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

 

홍주아문

홍주아문 앞 공원내 표지판

홍성군청앞의 버드나무

   지금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이 앞으로 홍주성 남서쪽(구 홍성세무서 방향)으로부터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 곁에 자라던 수백년된 버드나무가 서 있다.

이 버드나무에  우리의 순교자들이 고문을 받기 위해 묶여 대기하고 있었으리라고 추측한다.

 

안 회 당

    천주교박해 초기와 중기 즉 병인박해 이전까지의 시기에 천주교신자들은 홍주목사의 동헌으로 끌려와서 처음으로 하느님을 증언하였다. 홍주에서 기록으로 밝혀진 순교자 212분중 12분이 박해 초기와 중기에 돌아가신 것으로 파악되고 있고 이분들이 문초를 받던 곳인 이곳 안회당이 있기전 동헌으로 쓰이던 근민당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870년(고종 7년) 즉 병인박해 이후에 홍주목사 한응필에 의해 새로지어진 건물이다.

 

옛 홍주목사 동헌(안회당) 안내표지판

홍주목사의 동헌 앞  새로 세워진순교비( 앞면 )

 

 

홍주목사의 동헌 앞 순교비 (뒷면)

여하정

안회당과 여하정

홍주성벽

 

홍주 감옥 입구(구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

순교터( 홍주 감옥 ) 성지 안내판과 순교비 앞모습

순교비 뒷모습

구 검찰청내 옥 순교터 안내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옥으로 끌려가 오랫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스스로의 신앙을 다짐하였다. 이 홍주 옥터는 지금의 검찰청 및 법원 자리(1871년의 홍주목 지도 참조)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홍주 옥터는 신앙의 증거 터이기도 하면서 최대의 순교 터도 된다. 교회 순교록에 나오는 127명 중에서 교수형 100명, 옥사 13명 등 113명이 이곳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기 때문이다.

신앙증거터(홍주 진영장의 동헌) 안내판과 순교비

    옛 홍주진영(조양문앞 한국통신 모퉁이) 안내표지판

        홍주 관아로 끌려온 순교자들은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처럼 그들이 처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장소는 홍주 진영(즉 충청도 前營)의 동헌(즉 景士堂) 앞과 목사의 동헌(즉 近民堂) 앞이었음이 분명하다. 전영장의 동헌인 경사당은 지금의 동문(즉 朝陽門) 서쪽에 위치한 한국통신 건물 자리(일제 강점기 때의 홍성 우편국 사무실)로 추정되고 있다.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이곳에 있던 영장의 동헌 앞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

신앙증거 터 (옛저자거리) 순교비

 

 옛 저자거리(한국통신옆 주차장) 안내표지판

     저자거리(즉 구장터, 지금의 홍성군청 옆 주차장)는 순교자들이 관아로 끌려갈 때, 혹은 처형되기 전에 조리돌림을 당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곳도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한 곳으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홍주성 항공사진

북문교(유 마르타가 참수형 받은 곳으로 추정됨)

       1801년의 황일광과 1868년의 유 마르타(교수형의 가능성도 있음)가 참수형을 받은 장소는 지금의 홍성읍 북문교 옆(북문교 서쪽)의 월계천변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옛 홍주성 북문 밖 20m 지점인데, 월계천이 북문교와 만나는 곳으로 일반적인 처형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참 수 터

참수터 안내표지판옆에 새로 세워진 순교비

참수 순교터 순교비 앞모습

참수순교 터 뒷모습

 

생매장터에서 참수순교 터 가는 길

생매장 터

    1868년 5월에 생매장으로 순교한 4명(최법상 베드로, 김조이 루치아, 김조이 마리아, 원 아나타시아)은 모두 홍주 원머리에 거주하던 친척 사이로, 『공충도사학죄인성책』에 따르면 포교 김만성에 의해 체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들과 함께 덕산의 박봉학, 신창의 박복손과 김조이, 홍주의 이조이, 면천의 이경삼등 5명도 포교 김만성에게 체포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렇다면 이들 또한 생매장으로 순교했을 가능성이 있다(생매장 순교자 최대 9명). 이 형벌은 천주교 박해사에서도 대표적인 남형(濫刑)에 속한다.

 

홍주성지 순교비와 생매장터

    2008년 3월 15일 홍주성지 최초로 세워진 순교비 제막미사가 있었습니다.

   주변에 소나무가 몇그루 심겨져서 성지의 모습이 새로와 보입니다.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던 생매장터 안내표지판은 대형트럭에 들이 받았는지 찌그러지고 주변에는 동네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로 갖은 수난을 당하더니 이번 순교비 제막미사를 기해 새로 제작하여 이곳으로 옮겨 세웠습니다.  그 곁에 이름모를 은인들의 도움으로 순교비(이곳 외에도 성지 5곳에 세워짐)가 세워져 이제 조금이나마 이곳에서 순교하신 분들께 대한 미안함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많은 교우분들이 이곳을 찾아 이곳에서 처절하게 아프게 지켜냈던 우리의 순교자들의 신앙을 마음속에 새기고 가셨으면하는 바램입니다.

 

그 외 사진들

남연군의 묘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말살정책은1868년 4월(음)에 일어난 독일상인 오페르트(Oppert) 남연군 묘 도굴사건으로 인해 더욱 굳어져 갔다. 오페르트는 덕산에 있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그 유해를 미끼로 조선의 개국을 요구하려 했으나 도굴중 발각되어 실패로 끝났다. 그 결과 주춤했던 박해는 다시 가열되어 이 기간동안 처형된 순교자만도 8,000~2만여명으로 추정되며, 그나마 살아남은 신도들은 집과 재산을 잃고 초근목피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 기간동안 조선천주교회는 근거를 잃고 처참하게 무너졌다.

남연군의 묘 비문

남은들 상여를 보관하던 누각

현재는 상여를 박물관으로 옮기고 비어있다.

실제 남은들 상여는 박물관으로 보내고 남연군 묘 옆에 누각을 짓고 그 안에 모형으로 재현한 모습이다.

대원군 척화비

       홍성 하고개를 넘어 구항면 오봉리에 위치한 척화비로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화해를 하자는 것이다. 화해를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음과 같으니, 우리들의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라는 내용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지금은 도로와 많이 떨어진 좁은 길가에 세워져 있지만 자동차가 없던 옛적에는 서산방향으로 가는 큰 길로 사람들의 통행이 많았던 길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