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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새벽 종소리] - `수덕여관`의 세 여자와 세 남자 이야기 . . .

맑은물56 2011. 2. 14.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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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의 세 여자와 세 남자 이야기 . . .
 
- BGM 베토벤 '비창'소나타 -
 

 

 

백두대간을 따라 뻗어 내린
태백산맥에서 말을 갈아타고
서해를 향하던 차령산맥이
잠시 쉬어가는 곳에 수덕사가 있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왼쪽에 곧 쓰러질 것 같은
초가집 한 채가 '수덕여관'이다.
 
 
수덕사 원경과 일주문
 
한때는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시인, 화가, 묵객들이 드나들던 여관은
주인도 객도 떠나가고 곰팡이 냄새 나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수덕여관' 현재 모습
 
이제 이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세 여자와 세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세 여자란
김일엽, 나혜석. 박귀옥
(이응로 화백의 본부인)이고,
세남자란
송만공스님, 이응로화백.
김태신(일당스님=김일엽과
일본인 사이에 난 사생아)을 말한다.
 
 
 
첫째 장면
 
수덕사 일주문 옆에 있는 초가집 한채는,
너무나도 유명한 당대에 쌍벽을 이룬
두 폐미니스트 김일엽스님과 나혜석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김일엽과 나헤석(상)
 
수덕사대웅전 석축에 난 이름 모를 두 그루 풀
 (하 : 마치 두여인의 영혼 처럼 어렵게 자라고 있다.)
 
 
두번째 장면
 
한국 최초의 신시 여류시인 김일엽은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의 먼지처럼"
털어 버리고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수덕사 견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 부터
수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자,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김일엽이 오르 내리던 견성암(현재 환희대)가는 길(상)
 
"청춘을 불사르고.."를 집필한 옛 견성암 (하;지금은 헐리고 없다.)
 
견성암자리에 들어선 환희대(상)
 
김일엽의 생활을 지켜보고 보살핍을 받았던
견성암의 작은 불상(하)
 
                                  
 
세번째 장면
 
1934  이혼 후 극도로 쇠약한데다,
어린 딸과 아들이 보고 싶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네번째 장면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지금의 '수덕여관'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일엽이 만류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마지 못해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한다.
 
 
 
다섯번째 장면
 
 
몇 년 전 경성에서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 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된다"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같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여섯번째 장면
 
 
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한 나혜석은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5년동안이나  머무르며
'중 시켜 달라'1인 시위 하면서 버티는
한편 붓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며
찾아 오는 예술인과 소일한다.
 
 
송만공 영정과(상) 나헤석 자화상(하) 
         
 
일곱번째 장면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열네 살 앳된 소년이
수덕사로 김일엽스님을 찾아온다.
 
그 소년은 김일엽이 일본인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이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베개를 해주고 젖 무덤을 만지게 해준다.
 
나혜석 역시 모성애에
주려 있는 세 아이의 엄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은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이
중노릇은 못 할 거라고 생각한다.
  
 
'수덕여관'에 있던 송만공유묵(상)과 그가 세운 관음보살상(하)
 
            
 
여덟번째 장면
 
 
김태신은 이 후에도 어머니 김일엽을 찾을 때마다
'수덕여관'에서 묵는데, 나혜석은 마치 자기자식을 대하듯
팔베개를 해주고 자신의 젖을 만지게 하는 등
모성에 굶주린 일엽의 아이를 보살핀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김태신(후에 일당스님)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치는데,
나혜석과 특별한 교분이 있는 청년화가 이응로도
자주 찾아와 이들과 함께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 실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 . .
 
이러한 연유로 김태신도 후에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 있는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그정도로 유명화가가 된다. 
 
 
수덕여관
 
 
나혜석은 이곳에서 34년부터
43년까지 작품활동을 하며,
자유연애, 이혼고백장 발표,
최린을 상대로한
정조 유린 위자료청구 소송등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아홉번째 장면
 
충남 홍성이 고향이고,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던 청년 이응노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을 만나려 자주 '수덕여관'을 들른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함께
이 산속 외진 곳에서 아예 같이 기숙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누나 같은
스승이자 선배화가일 뿐 애정관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응로에게 파리의 환상을 심어 준다.
 
 
이응로와 김태신(상) 이응로가 새긴 '수덕여관' 간판(하)
 
 
 
 
열번째 장면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 버린 이응노는,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인 다음 부인인
박귀옥에게 운영을 맡기고,  
6.25때에는 피난처로 사용하는 등 . . . 
6년간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열한번째 장면
 
나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는 1958
드디어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 버린다.
 
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옥이 여관을 운영하나
 글자 그대로 소박떼기 청상과부가 되어 버리고 만다.
 
 머물다 미련 없이 떠나 버린  두 사람과는 달리,
 박귀옥여사는 변치 않는 애정과 절개로
이국 땅의 남편을 그리며 수덕여관을 지킨다.
 
 
 
 
열두번째 장면
 
1967년 또다시 김태신
어머니 김일엽 스님을
견성암으로 찾아온다.
 
수덕사 요사채
 
 
일엽스님은 쪽 물감 만드는 일과
선수도 하는 것과의 유사성을 설명하면서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정갈하게 가꾼 쪽풀을
응달에다 말려 단지에 발효시키는데,
동짓달부터 이듬해 5월까지 7백번 손을 써야한다.
699번 정성을 드렸다가도 단 한번 소흘이 하거나
부정을 타면 쪽이 죽어버린다는
지극히 선적인 생명체다.라고 한다. 
 
 
수덕여관 꿀뚝을 감은 담장이 넝쿨(상)
수덕사 백련암뒤 관음바위와 관음보살상(하)
 
발효하기 시작하면 목욕재계하고 
조석으로 저어 줘어야 하는데,
젓는 동안 화엄졍을 암송한다. 
(김일엽이 입적하기 5년전이다.)
              
 

 

열세번째 장면
 
박귀옥여사가  외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이른바 동백림사건으로
1968이화백이 납치되어 형무소에 수감된다.
박귀옥은 한결같은 지극정성으로 이화백의 옥바라지를 한다.
 
이응로가 새긴 수덕여관 뒤 뜰의 문자암각화 바위
 
네번째 장면
 
출옥 후 이화백은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수리면서
그녀 곁에 잠시 동안 머무른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와 떠나 버린
남편을 병구완하는 박귀옥 여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런 부인의 뒷 모습을 바라보던
이 화백은 아마도 그 마음을 추스려
여관 뒤뜰에 있는 너럭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새겼으리라 . . .  
그리고는 이응로 그리다,라는
사인까지 남겨 놓은 뒤
이 그림 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다.
말하고는 파리로 또 훌쩍 떠나버린다.
 
문자암각화 바위(상)과 "수덕여관"각자 안내석(하)
 
열다섯번째 장면
 
박귀옥 할머니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어느덧 팔순을 앞둔 세월까지 남편을 기다려 온다.
그러나 죽기 전에는 꼭 다시 만나 볼 수 있으리라
실낱 같은 희망으로 살아 왔지만,
고암은 1992년 귀국전시를 앞두고 파리에서 눈을 감고 만다.
장례식에도 가 볼 수 없는 박귀옥은 마지막 소원으로
이응로 화백의 유골이라도 돌려 받아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히고 싶어 한다.
그녀는 고암이 파리로 떠날 때
그의 출세 길에 지장이 될까 봐
이혼수속을 허락해 준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
이제 그녀는 고암에 대해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법적으로 남남의 처지였던 것이다.
 
 
 
열여섯번째 장면
 
그녀의 방에는 젊은 시절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과 고암이 남겨준 갈대꽃이 핀 강가에  
홀로 서있는 오리그림이 걸려 있다.
고개를 내밀고 어느 곳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자신의 처지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2001초 수덕여관 주인 박귀옥 여사가
92세를 일기로 돌아가신다.
그리고 이 '수덕여관'도 폐허와 전설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이다.
이제 수덕여관과 수덕사에 얽힌
추억의 인물은 김태신 한 사람만
직지사에 생존해 있다.
 
 
열일곱번째 장면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고,
현재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일당스님 (김태신) . . .
그가 바로 일제시대 한국 최초의 여자유학생이자
당대 최고의 비구니로 칭송 받던 일엽스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공개돼 화제다.
67세에 불가에 귀의하여 80세 노인이 된  
노 스님이 털어 놓는 그리운 나의 어머니,
그리고 파란만장 했던 삶의 이야기 . . . 
 
어머니란 존재는 각박하고 외로운 이승에
내 던져진 영혼의 안식처 입니다.
나의 고독, 나의 절망, 나의 기쁨,
나의 소망은 모두 어머니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로 인해서 갈증을 느꼈으며,
또한 어머니로 인하여 제 삶은 충만 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뿌리치는 옷자락에
엉겨 붙은 눈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일본에서 화가로 더욱 유명한 일당스님은
김천 직지사 중암에 머물고 있는데,
최근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출간하면서,
그가 한국 비구니계의 거두 일엽스님(1896~1971)
아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냈다.
일엽 스님이 입적한지 31년 만의 일이다.
이로써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6사람의 이야기는 끝내고,
수덕여관의 현재 상황을 설명한다.
 
 
 *   *   *   *   *   *   *   *   *   *   *   *   *   *   *
 
 
추억어린 수덕여관에는 잡초만 무성할
  시대를 풍미했던 여인들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 없다.

 

 
폐허가 되고 있는 수덕여관
                                
 
 
쓰레기가 어지러이 널려 있고
곰팡이 냄새만 넘쳐나는 여관방 어디에도
모정에 굶주린 태신에게
가슴을 열고 봉긋한 젖무덤에
소년의 손을 끌어다 얹어 주던
나혜석의 모습은 없다.
 
돌계단을 올라 마당에 들어서니,
이응로 화백이 자연석에 새겨놓은
'수덕여관'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수덕여관'의 용두조각(상) '수덕여관'(하)
 
 
 
초가집을 뒤로하고 고르기를 하며
돌계단을 바라보니, 만공스님으로부터
호되게 꾸지람을 듣고 의기소침하여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계단을 올라오던
70여년 전의 나혜석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만공 종실 큰스님이 김일엽은 불제자로 받아들이고 
나혜석은 "안 된다"라고 했다면
 득도한 스님이 가지고 있는 잣대는 무엇이었을까?
 
만공스님에게 불자의 길을 거절당한 후
몇 년이 지나서 결국 화가도 한 남자의 아내가 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느낀 혜석은 수덕여관을 나와
공주 마곡사에서 수도생활 아닌
수도생활을 하면서 잠시 머물었다고 하니 . . .
만공스님의 잣대를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 
 
그곳 마곡사에서도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나와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니 다가 
안양 양로원을 거쳐  청운 양로원에 기거하던 나혜석은
양로원 생활도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음인지
양로원을 나와 길거리를 헤매다 배고픔과 추위에 쓰러져
서울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눈을 감았다.
 
그때가 1948 12 10이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자리매김한 두 여자의 행로가 이처럼 암울해야만 했을가?
1927년! . . . 그 당시 일반인들은 감히 꿈도 못 꾸는
세계여행을 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그림공부를 하고 돌아와
 서양화를 그리는 최초의 여류화가라는 찬사를 받으며
뭇 남성과 사랑도 했고,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던
 나혜석이 홀로 산사에 있는 친구를 찾아와
 수도여관방에서 친구의 아들에게 
 가슴을 열어준 사연은 무엇일까? 
현재도 적지않은 사람들이 예전의
'수덕여관'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이 여관집은 봄과 가을 수학여행 철에는
초.중.고 학생들로, 여름철에는 송림 속 피서객들로, 
겨울철에는 불자들과 여행객들로 붐볐다.
 
그러나 이제 인적이 끊긴 '수덕여관'은
적막강산 속에 생기를 잃은 채,
허물어져 가고 있다. 반짝거리던 마루에는
먼지와 송화가루가 뒤범벅이 ,
쥐똥과 고양이 발자국이 어지럽고
여객들을 위해 종일 짓는 연기가 끊이지 않던
높다란 굴뚝은 담쟁이 넝쿨만 무성하다.
 
현재 수덕여관은 예산군이 도지정 기념물(103)
해마다 초가지붕을 잇고
일주일에 한번씩 주변을 청소를 하는 등
보살피고 있으나 주인 잃은 표시가 너무도 완연하다.
'수덕여관'의 땅은 수덕사 소유이나,
크게 보아 건물은 수덕사가
더이상 지상권을 행사할 수 없어
당국의 허가만 있다면 '수덕여관 '건물은
매각이 가능한 상태나, 수덕사측은 
"땅에 박힌 자연석과 우물은
경매 대상이 아니라고 본다"고 주장한다.
 
 
 뒤뜰을 돌아보니 고암 이응노가
1967년 동백림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후 심신을 추스르기 위하여
머물렀을 때 자연석 너럭바위에 문자를
추상화 기법으로 암각화한 작품이 뒷마당을 지키고 있다.  
그 바로 옆에는 당시에 식수로 이용했던
우물이 폐수에 썩어가고 있었다.
역시 샘물은 퍼내야 새로운 물이 고이나 보다.   
'수덕여관' 건물은 이 화백의 부인인 박귀옥씨가
2001년 작고하면서 운영이 어려워져
현 건물소유주인 이응로 화백의 장조카인
이씨가 경매 처분하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마당에 있는 이화백의 암각화 2점에 대한
가격 산정을 둘러싼 토지주 수덕사 측과의
의견차로 인해 경매가 무산되면서
지금까지 관리를 하지 않고
방치돼 온 것으로 주민들은 전하고 있다.
 '수덕여관'이 지어진 때는 정확하지 않다.
1939년 무렵 화가 나혜석(18961948 )
이혼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수덕사에서 수행중이던
친구 일엽(18961971)스님을 찾아왔다가
수덕여관에서 눌러앉아 해방 무렵까지
머물렀던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70년 가까이 된 건물로 추정된다.
그간 묻혀왔던 고암의 이름은 꽤 알려져
꼭 여관에 숙박을 하지 않더라도
고암의 암각화를 구경할 수 있게끔
도 지정 문화재로 등록하여 길을 열어둔 것이다

 

말끔히 정리된 수덕사입구의 상가(상)버려진 암각화 바위(하)
 
 
 
수덕사는 상가와 음식점 등이 몰려있는
'수덕여관' 인근에 대한 정비사업을 마쳤으나
'수덕여관'만은 대상에서 제외해놓고 있다.
 
만약 건물이 타지로 이전된다면
이는 고암의 얼을 보존한다는 측면에서
좋지 않을 뿐 아니라, 특히 미술인이 아닌
3자의 손에 넘어갈 경우 사적지로서
빛을 잃게 될 것으로 보인다.
 
 

폐허가 되 버린 수덕여관 뒷뜰의 우물과 너럭바위(상)
 
 
 
(저 우물 물로 세수하고 손발을 씻었고,
 
그 옆 문자암각화가 새겨진 너럭바위에
 
박여사가 차려준 동동주를 곁드린
 
인심 넉넉한 저녘상을 받아놓고서
 
담소를 나누며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 했었는데 . . .
 
이렇게 폐허가 . . . 세월의 무상함을 . . .)
 
 

 

 
 Beethoven - Piano Sonata No. 8
in C minor,Op. 13 'Pathetique' : II~I~III
 

1798년 작곡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소나타는
베토벤 초기의 소나타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간결하면서 아름다운 선율 때문에
지금도 많이 연주 되는 곡이다.

 
비창이란 표제는
베토벤 자신이 붙여 놓은 것으로,
표제처럼 1악장은 장중하고 비장하며,
2악장은 느리면서 서정적인 아다지오로
평화로 이어지다가 3악장에서
깊고 엄숙하게 마무리 지어진다.
 
건반위의 사자,
독일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박하우스,
젊은 시절 그의 연주는 용맹스러운 사자에 비유되었으나,
갈수록 정신세계가 고양된 연주를 들려준다는 평을 받는다.
1959년의 이 녹음은 이미 오래전 부터
각광을 받아온 녹음으로 알려졌다.

            

  I. Grave e Allegro di molto e con brio(06:16)   



  II. Adagio cantabile(04:46)   



  III. Rondo: Allegro(04:28)
 
 
Wilhelm Backhaus   piano

 

첨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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