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문화 산책

[스크랩] 홍주 순교성지, 홍성성당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맑은물56 2011. 2. 25. 15:13

홍성 성당

 

홍성 시내에 위치해 있으며 홍주성지를 순례하려면 성당의 순례 담당자의 도움을 받으면 좋다. 홍주성지는 시내 이곳 저곳에

흩어져있기 때문에 순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본인이 순례할 때에는 홍보분과위원장이 친절히 안내해주었다. 

 

홍성성당 전면

 

홍주순교성지 소개물, 성지를 잘 소개해 주고있다. 

 

홍주읍성 지도  

 

홍주 진영(현 한국통신 건물 자리)   


홍주 진영(즉 충청도 전영前營)의 동헌(경사당)은 지금의 동문(즉 朝陽門) 서쪽에 위치한 한국통신 건물 자리로 추정되고 있다.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이곳에 있던 영장의 동헌 앞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

 

홍주 진영(현 한국통신 건물 자리)      (출처- http://px1004.hihome.com/) 

 

홍주 진영(현 한국통신, KT 건물 자리) 전면

 

홍주 진영(현 한국통신, KT 건물 자리) 뒷면, 옛 저자거리이기도 하다.

 

홍주 읍성 조양문             

 

홍성읍 시가지를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조양문인데 홍주성을 드나들던 동서남북 4개 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동문이 바로 조양문이다. 당시 홍주군이 관할하던 넓은 지역에서 붙잡혀 온 교우들은 이 문을 통해 홍주성 안으로 들어갔고 멀쩡하게 걸어 들어갔던 그들은 시체가 되어 성벽 밖으로 던져졌던 것이다.

 

홍주 읍성 조양문   

 

홍주 옥터 (구 홍성 법원 및 검찰청 자리)


구 홍성 법원 및 검찰청 자리는 조선시대 홍주 옥이 있던 곳이다. 천주교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1791-1869) 홍주로 끌려온 천주교 신자들은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이곳 옥에 수감되어 꿋꿋하게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실제로 홍주 옥터는 신앙의 증거 터이기도 하면서 최대의 순교 터도 된다. 교회 순교록에 나오는 127명 중에서 교수형 100명, 옥사 13명 등 113명이 이곳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기 때문이다. 현재 시복이 추진되는 원시장(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라우렌시오), 등 세 분과 중기 박해때의 이여삼(바오로), 최대종(요셉), 병인박해 때의 김선양(요셉) 부부 순교자 등이 바로 그 분들이다. 2005년 가을 검찰청과 법원이 이전하여 이제는 구 검찰청 및 법원 자리가 되었다.

 

홍주 옥터 (구 홍성 법원 및 검찰청 자리)

 

홍주 옥터 (구 홍성 법원 및 검찰청 자리)

 

홍주 옥터 (구 홍성 법원 및 검찰청 자리)

 

홍주 옥터 (구 홍성 법원 및 검찰청 자리)

 

홍주 아문 (현 홍성군청)

 

조양문의 왼편으로 골목을 조금 돌아가면 군청이 나오는데 그 입구에 서 있는 것이 홍주 아문(洪州衙門)으로 여기에는 대원군이 친필로 쓴 현관이 붙어 있다. 홍주 아문을 돌아 청사 안으로 들어서면 그 안이 바로 순교의 생생한 숨결이 배어 있는 장소이다. 청사 안뜰에 무심하게 서있는 고목들은 당시 순교자들이 처분만을 기다리며 오랏줄로 꽁꽁 묶여 있던 기둥들이었고 바닥에 깔린 흙 위에는 선조들의 피와 고통이 서려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지역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고 숨을 거둔 선조들이 누구누구이며 얼마나 많은 지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관할 지역의 규모와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많은 순교자가 배출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홍성군 내의 문서에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부분들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아 이에 대한 조사와 정리가 시급하다.

 

홍주 아문 

 

홍주 아문 

 

홍주 아문 

 

홍주 아문 

 

홍주 아문 

 

현재 동헌 안회당, 홍주아문을 지나 안쪽에 보존되어있다. 

 

현재 동헌 안회당 

 

현재 동헌 안회당        

 

중앙에서 목사와 별로로 부임한 홍주 진영의 영장은 홍주를 비록하여 그 주변에 있는 17개의 군과 현의 군사권을 관할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홍주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순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동문 쪽에 있는 전영 아문이 바로 영장이 집무하던 곳이다. 천주교 신자들은 대부분 영장이 취조하였다. 특별한 경우에만 목사가 신자들을 불러서 신문하였다. 따라서 안회당 앞과 전영 동헌 앞이 모두 성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이 끌려와 매를 맞으며 신앙을 증거했던 전영 동헌 앞이 성지로서 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겠다. 전영 동헌이 있던 자리는 옛 홍성우편국 사무실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 한국 통신공사 건물이 세워져 있는 자리라고 한다. 요컨대 감옥이 있었던 현 검찰청 자리, 북문 건너편의 사형장 터와 그 인근의 가매장 및 생매장 터,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을 신문하고 때려 죽였던 진영 동헌 터인 옛 홍성 우편국 사무실 자리와 안회당 앞마당 등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중요한 성지(聖趾)가 된다고 하겠다.

 

현재 동헌 안회당 

 

안회당 뒷면, 여하정 쪽에서

 

옛 동헌 근민당 자리 (현 안회당 서남쪽)


이곳은 조선 시대 때 홍주 목사(정3품)의 동헌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본래의 동헌(즉 근민당)은 현존하는 동헌(즉 안회당, 사적 231호)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박해 시대 때, 목사의 동헌 앞에서는 특히 전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을 받은 지도층 신자들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의 순교 선조들은 끊임없이 가해지는 곤장과 주뢰형을 신앙으로 극복하였다. 박해자들은 갖은 유혹으로 배교를 이끌어 내려했고, 남은 가족들을 들먹이면서 육정에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때 '하느님의 종' 원시장(베드로) 같은 분은 "하느님께서 저를 부르시고 계시니, 제가 어찌 그 분의 음성에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유혹을 뿌리쳤다.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순교의 용덕이었다. 홍주 관아로 끌려온 순교자들은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 굳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처럼 그들이 처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장소는 홍주 진영(즉 충청도 前營)의 동헌(즉 景士堂) 앞과 목사의 동헌(즉 近民堂) 앞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중에서 근민당은 현존하는 안회당(安懷堂, 사적 231호)이 아니라 그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옛 동헌 근민당 자리 (현 안회당 서남쪽)

 

옛 동헌 신앙증거터             (출처- http://px1004.hihome.com/) 

 

옛 동헌 신앙증거터 뒷면  

 

여하정, 안회당 뒤뜰에 있으며 역대 홍주목사들이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여하정

 

홍주아문 (군청) 내 홍성 오관리 느티나무

 

홍성 오관리 느티나무 

 

군청 앞 고목

 

청사 안뜰에 무심하게 서있는 고목들은 당시 순교자들이 처분만을 기다리며 오랏줄로 꽁꽁 묶여 있던 기둥들이었고 바닥에 깔린 흙 위에는 선조들의 피와 고통이 서려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지역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고 숨을 거둔 선조들이 누구누구이며 얼마나 많은 지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관할 지역의 규모와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많은 순교자가 배출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홍성군 내의 문서에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부분들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아 이에 대한 조사와 정리가 시급하다.   

 

군청 앞 고목

 

홍주 저자거리(홍성군청 앞 주차장)


홍주의 저자거리(즉 구 장터)는 관아로 끌려갈 때, 처형되기 전 조리돌림을 당했던 곳이다. 지금의 홍성군청 앞이 구 장터

저자거리이다. 따라서 이곳도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한 곳으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홍주 저자거리

 

홍주 저자거리(홍성군청 앞 주차장)

 

홍주 저자거리(홍성군청 앞 주차장), 앞쪽의 건물은 홍주진영이었던 KT 건물 뒷쪽이다. 

 

북문교 옆 참수터              (출처- http://px1004.hihome.com/) 


홍성읍 북문교 옆(북문교 서쪽)의 월계천변. 1801년의 황일광과 1868년의 유 마르타(교수형의 가능성도 있음)가 참수형을 받은 장소는 지금의 홍성읍 북문교 옆(북문교 서쪽)의 월계천변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옛 홍주성 북문 밖 20m 지점인데, 월계천이 북문교와 만나는 곳으로 일반적인 처형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1868년 5월 최법상(베드로) 등 4명이 순교한 생매장 터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옥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이 성밖으로 끌려나와 안장된 묘역도 이 생매장 터와 거의 같았을 것이다.

 

북문교 참수터     

 

홍주 지방에 박해가 시작된 것은 기록상으로는 1791년 신해박해 때부터이다. 당시 홍주에 살고 있던 박취득 라우렌시오가 면천 감옥에 많은 신자들이 갇혀 있는 것을 보고 신자들을 격려하고, 무고하게 감옥에 가둔 것을 관자에게 항의하다가 체포되어 고문당한 후 해미 진영으로 이송되어 순교했다. 이곳에서는 또한 주문모 신부를 도와 교회의 기반을 튼튼히 구축하는데 기여한 강완숙 골롬바도 잡혀왔다가 풀려났다. 기록상으로 홍주 지방에서 처음 순교한 사람은 1793년 원시장 베드로이다. 홍주 원정리에 사는 원 베드로는 이곳 관아에서 모진 혹형을 받고 성 밖에 버려져 얼어 죽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80여 년간 잡혀온 수많은 교우들이 처형되어 죽어갔던 순교의 현장이다. 1861년 홍주 지방은 성모 성탄 구역으로 지정되어 성 다블루 안 주교가 담당했고, 1866년과 그 후 2년 동안 이곳에서 많은 교우들이 잡혀 순교했는데, 치명일기에만도 80여 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잘 보존된 동문인 조양문으로 끌려 들어온 많은 교우들은 관청뜰 안에 있는 나무에 묶여 있다가 동헌으로 끌려가 심한 문초를 받아 죽기도 했고, 옥에서 굶어 죽기도 했다. 이렇게 죽은 시체는 성 밖으로 내다 버렸다. 그외에도 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한꺼번에 구덩이에 묻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홍주를 기억하는 한국 순교성인으로는 황새바위에서 자신의 팔을 물어뜯으며 신앙을 증거하신 홍주거더리의 성 손자선(토마스)이 있다.

 

북문교 참수터     

 

북문교 참수터     

 

북문교 항공사진  

생 매장지 터

 

생 매장지 터

 

생 매장지 터

 

생 매장지 터 

 

홍주순교성지비 제막식          (출처- http://px1004.hihome.com)


천주교홍성성당은 2008.3.15일 오전 홍성읍 홍주의사총 건너편 홍성천과 월계천이 만나는 광장에서 약 700 여명의 천주교 신자와 기관 단체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순교자 현양 미사 및 홍주순교성지비 제막식을 가졌다. 홍성군이 3000 만 원의 예산을 지원해 이날 제막된 순교비는 가로 1.2m, 세로 0.8m, 높이 5m 크기로 ‘홍주 순교성지 공원’이 조성될 하천 옆 1983㎡ 부지에 들어섰다. 이곳은 홍주읍성 북문 밖을 흐르는 월계천과 조양문 밖을 흐르는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지점으로 1868년 생매장으로 순교한 최법상(베드로), 김조이(루치아), 김조이(마리아), 원 아나타시아 등을 비롯해 박해시대 홍주읍성 안에서 옥사나 교수형으로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홍주순교성지비

 

홍주순교성지비문

 

홍주성 항공사진              (출처- http://px1004.hihome.com)

 

홍주성 성벽           (출처- http://cafe.daum.net/Coreansanctus)

 

조선 시대에 홍주부를 두어 관찰사가 주재했던 홍성은 관할 구역만 해도 북으로는 평택 이남, 동으로는 경부선 서부 지역, 남으로는 금강 이북의 22개 군에 이르렀다. 홍성은 옛부터 교통, 체신, 행정의 중심지요. 국방의 요새지로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전해지고, 많은 교우들이 있던 곳이었다. 비교적 높은 직계의 수령이 있던 이곳 홍성은 기록상 충청도에서 공주 다음으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홍성읍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홍주 읍성은 전체가 순교 현장이다. 군청, 객사, 동헌 등 구석구석이 처형지로 사용됐던 읍성은 아직도 무심하게 남아 있는 고목들과 함께 당시 교우들이 받았던 엄청난 핍박을 그대로전해 준다

 

홍주성 성벽       (출처- http://px1004.hihome.com)

 

홍성은 예로부터 최영 장군, 만해 한용운 선사, 백야 김좌진 장군과 사육신의 하나인 성삼문 등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에 의분을 참지 못한 의병들이 순국한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홍성의 역사를 찾는 순례자들은 죽음을 무릅쓴 신앙 선조들의 굳건한 신앙과 함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 바친 우국 열사들의 향기를 함께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홍주성은 홍성읍 한복판, 남산 공원에 쌓은 8백 10미터 규모의 성곽으로 축조 연대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없다. 대원군의 친필이 남아 있는 홍주 아문,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과 함께 사적 제 231호로 지정돼 있다 .홍주 읍성 내에는 군청과 함께 감옥 터, 객사, 동헌 등이 있어 교우들을 고문하던 곳으로 쓰였고 때로는 처형지로도 이용됐다.    (글- http://www.paxkorea.co.kr

 

홍주성 성벽   (출처- http://info.catholic.or.kr/)  

 

홍주 읍성 순교역사    (글- http://www.paxkorea.co.kr)  


1791년 진산사건의 여파로 내포 지역에서 박해가 발생하였을 때 홍주에서도 신자들이 박해를 입었다. 이때 성화 집안과 원시장(베드로)이 체포되었는데, 성화 집안은 배교하여 풀려났고, 원시장은 신앙을 증거하다가 끝내 1792년 12월 순교하였다. 1794년에도 홍주에서 새로이 박해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혹심하였는지, 그 범위가 어떠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때 박형화 바오로가 배교하였다. 1797년 윤 6월에 한용화가 충청 감사로 부임하자마자 얼마 안 되어 사사로이 박해를 일으켰는데, 이 정사박해는 그의 후임으로 부임한 이태영과 김이영에게로 이어졌고, 무오.기미년(1798∼1799)에 특히 심하였다. 이 여파로 홍주 고을 응정리에 살던 원 야고보가 덕산 포졸들에게 붙잡혀 형벌을 받은 다음 홍주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거기서 여러 차례 천주교 진리를 설명하였고, 두세 번 무서운 고문을 당한 뒤 다시 덕산으로 환송되었다. 또한 방 프란치스코가 1798년에 홍주에서 잡혀 6개월 동안 매우 많은 형벌을 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동료 2명을 권면하여 셋이 함께 홍주 읍내에서 1798년 12월 16일 순교하였다. 신유박해(1801년)로부터 정해박해(182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김귀동, 윤 바오로, 한 토마스, 황일광(알렉시오), 이여삼(바오로) 등 5명의 신자들이 박해를 받아 홍주에서 순교하였고, 기해박해(1839년)로부터 병오박해(184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유 바오로, 최대종(요셉)등 2명이 박해를 입엄 홍주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진후(비오)가 홍주에서 잡혀 문초와 고문을 당한 뒤 풀려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병인박해(1866∼1878년)때는 김선양(요셉), 김치문(치로), 이화심(안드레아)등 모두 96명이 홍주에서 모진 박해를 받아 순교하였다. 박해기 동안에 홍성에서 순교한 신자는 모두 합해 약 107명에 달한다. 무명 순교자들까지 합치면 홍성에서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의 숫자는 107명보다 훨씬 더 많다. 충청도에서 공주 다음으로 홍성에서 순교자가 많이 나왔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홍성 순교자 107명 가운데 5명은 사형장에서 참수형을 당하였고, 67명은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거나 옥사하였으며, 4명은 생매장을 당하였고, 1명은 매맞아 죽었다. 그 나머지는 어떤 형벌로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 67명이라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해 홍주의 최대 순교지라고 할 수 있는 감옥 터는 현 검찰청이 있는 자리로 1871년에 제작된 [홍주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감옥의 위치와 일치한다. 5명이 참수를 당한 사형장 터는 북문이 있던 자리 건너편이다. 구한말에 많은 동학도들을 붙잡아 처형할 때 홍주 목사가 북문 위에 올라가 그 처형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홍주지도]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현재 군청에서 덕산 가는 길로 가다보면 다리가 하나 나오는데, 이 다리 못 미친 곳에 북문이 있었으므로 이 다리 건너편이 사형장이었다. 이 사형장 근처에는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갖다 버리거나 가매장했던 장소도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또한 4명이 생매장을 당한 장소는 사형장을 지나 좀더 먼 곳에 있었을 것이나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다. 또한 1명이 매맞아 죽은 장소는 진영의 영장이 집무하던 전영 동헌 앞이거나 목사가 집무하던 동헌(안회당) 앞이었을 것이다.



◆ 순교자


◆ 순교자 원시보 야고보 (1730-1799년)


원(元)시보 야고보는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 출신이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해가 지난 1788-1789년경, 즉 그의 나이 60세가 다되어서야 사촌 동생 원시장(베드로)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시보’는 그의 관명(冠名)이다. 본래 성품이 어질고 순하며 정직하고 활달하였던 야고보는, 입교하자마자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며 온갖 덕행을 실천하였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재산을 희사하였고, 금요일마다 금식을 하였으며, 이곳 저곳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점차 인근 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홍주 관장은 포졸들을 보내 즉시 야고보와 사촌 베드로를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야고보는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갖가지 혹형을 받은 뒤 순교하였다. 후에 이 소식을 들은 야고보는 사촌과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795년 무렵, 야고보는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부로부터 첩을  두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성사를 받지 못하자, 집으로 돌아가서는 즉시 첩을 내보냈다. 이로부터 2년 후에는 정사박해가 충청도 전역을 휩쓸게 되었다. 이 와중에서 원시보 야고보도 1798년에 체포되어 덕산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69세였다. 그러나 그는 갖가지 혹형에도 굴하지 않고, “천주를 섬기고 제 영혼을 구하기 위해 천주교를 봉행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홍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덕산으로 끌려와 몹시 두들겨 맞았으며, 형벌로 인해 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1799년 야고보는 감사의 명령에 따라 병영이 있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가 덕산을 떠나는 날 아내와 자식과 친구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을 따라가서는 안되네. 모든 고통을 참아낸다면 기쁨 가운데서 주님과 착하신 동정 마리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네. 그대들이 여기에 있으면 내 마음이 흔들리니 돌아가도록 하게. 이성을 잃고 대사(大事)를 그르칠 수는 없네.” 청주에 도착하자마자 야고보는 관장 앞으로 끌려나가 문초를 당하였다. 관장은 그를 배교를 시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순교의 원의로 가득찬 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덕산에서 이미 두 다리가 부러졌던 야고보에게 다시 온갖 혹형이 가해졌으며, 그는 결국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때가 1799년 4월 17일(음력 3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야고보가 순교한 뒤 그의 육체는 이상한 광채에 둘러싸인 것 같았으며, 이 광경을 목격한 약 50가족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 순교자 원시장 베드로 (1732-1793년)


원(元)시장 베드로는 1732년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해가 지난 1788~1789년경, 즉 60세가 가까워졌을 때 사촌 형 원시보(야고보)와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시장’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어느 날 베드로는 집을 떠나 1년 이상 다른 지방에 가서 생활하면서 교리를 공부하였다. 그 동안 그는 ‘천주교 신앙이 수천 년 동안 목숨을 보전해 주는 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친척과 친구들에게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설명에 힘을 보태 주었고, 친척과 친구들은 마음이 움직여 하느님을 믿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때까지도 그는 세례를 받지 못하였었다. 본래 베드로의 성격은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신앙을 실천해 나가는 동안 성격이 변하여 어떠한 일에서나 온화함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거나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 데 열중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관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관장은 포졸들을 보내 원시장과 원시보를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사촌 야고보는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홍주 관아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내 원시장 베드로는 홍주 관장 앞으로 끌려나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관장의 어떠한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천주를 배반하거나 동료들을 밀고할 수 없으며, 교회 서적이 있는 곳도 말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관장은 화가 나서 형리들에게 주리를 틀게 하고, 치도곤 70대를 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느님과 부모님께 대한 본분과 천주교의 참된 도리를 설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여러 달을 옥에 갇혀 있는 동안 베드로는 자주 끌려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는데, 이러한 와중에서도 포졸과 형리들에게 전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우가 그를 만나러 옥으로 찾아왔고, 이때 베드로는 그로부터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동안 홍주 관장은 감사에게 모든 사실을 보고하였으며, 감사로부터 ‘원시장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관장은 다시 베드로를 옥에서 끌어내 갖은 형벌을 가하였지만, 한결같은 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관장은 마지막으로 혈육의 정에 호소해 보기로 하였다. 베드로를 기다리고 찾는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식들 이야기를 듣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는 제 마음을 크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니, 어찌 그 목소리에 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홍주 관장은 이 사건을 빨리 마무리짓고자 하였다. 그래서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음식을 갖다 주도록 하고는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하도록 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관장은 다른 방법을 생각한 끝에, 그의 몸에 물을 붓고 밖에 내다놓아 얼려 죽이라고 명하였다. 베드로가 덮어쓴 물은 이내 얼음으로 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로지 주님의 수난만을 생각하였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에게 바쳤으니, 그때가 1793년 1월 28일(음력 1792년 12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 순교자 방 프란치스코 ( ? -1799년)


방(方)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면천의 ‘여’ 고을 태생으로 감사의 비장(裨將)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교우들 사이에는 ‘방 비장’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우연히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는 누구보다도 빨리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정산필(베드로) 회장과 박취득(라우렌시오), 원시보(야고보) 등과 자주 만나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였다. 교리를 실천하는 데 비상한 열심을 가졌던 프란치스코는 교우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나게 되었다. 그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들으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으며, 그들과 같이 순교하기를 간절히 열망하였다. 그러던 중 1797년의 정사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프란치스코도 다음해 홍주에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많은 형벌을 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그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은 교우 두 명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받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방 프란치스코는 오히려 기쁨에 빛나는 얼굴로 천주와 동정 마리아께 감사를 드리고 나서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것도 천주의 은혜이지만, 관장이 이렇게 후한 대우를 해 주는 것도 섭리의 은혜인데, 어째서 당신들은 슬퍼하고 풀이 죽어 있소. 그것은 마귀의 유혹이오. 만일 우리가 천당을 얻을 이렇게도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 또 어떤 기회를 기대할 수 있겠소.” 이때 천주께서 방 프란치스코의 권고와 격려에 효력을 부여해 주셨다. 그 결과 그의 두 동료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스스로 뉘우쳤고, 오래지 않아 거룩한 기쁨을 같이 하였다. 그들 셋은 함께 홍주 읍내에서 순교하였는데, 순교일은 1799년 1월 21일(음력 1798년 12월 16일)이었다.


◆ 순교자 김정득 베드로 ( ? -1801년)


‘대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정득(金丁得)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의 대흥 고을에서 탄생하여 친척인 김광옥(안드레아)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이후 그가 신앙 생활에 열심이었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베드로는 안드레아와 함께 교회 서적과 성물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살면서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탓에 포졸들이 쉽게 그들의 종적을 찾아내고 말았다. 이후 베드로는 홍주로, 안드레아는 예산으로 각각 압송되었다. 홍주 관장은 김정득 베드로가 끌려오자마자 그를 배교시키기 엄한 문초와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얼마 후 베드로는 감사의 명에 따라 김광옥 안드레아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서로를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냈으며,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음력 7월 13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여기에는 ‘그들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하여 참수하라’는 명령이 덧붙여졌다. 당시 베드로에게 내려진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국가의 금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사는 폐지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중에 숨어살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의 속여서 유혹하였으며, 형벌과 문초를 가하여도 아주 모질어서 굴복하지 않았다. 그 죄상을 생각해보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예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그 동안의 형벌로 인해 걸음을 뗄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이 주신 용기와 힘으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을 마주잡으며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베드로는 예산에서 얼마를 더가 대흥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읍내로 끌려나가 칼날 아래 목숨을 바쳤으니, 그때가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이었다.


◆ 순교자 박경화 바오로 (1757-1827년)


‘도항’라는 관명(冠名)으로도 잘 알려진 박경화 바오로[朴甫祿]는,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33살 무렵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본래 그는 제법 재산이 있는 데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까지 받는 몸이었다고 한다. 1839년 대구에서 순교한 박사의(안드레아)는 그의 아들이다. 바오로는 입교한 지 얼마 후에 일어난 박해로 체포되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의 배교는 오히려 열심을 배가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더 철저하게 신자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고, 신앙 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산중으로 이주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바오로는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그런 다음 교회 서적을 열심히 읽고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노력하였으며,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자녀들이 열심히 덕행을 닦을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 주었다. 60세가 지나서 바오로는 가족들을 데리고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라는 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1827년의 정해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교우들을 안심시킨 뒤, 경상도 상주의 멍에목으로 이주하였으며, 4월 그믐에 교우들과 함께 주님승천대축일을 지내다가 체포되었다. 상주로 끌려가는 동안 박경화 바오로는 기쁨에 넘쳐 “우리가 오늘 가는 길에 대해 천주께 감사를 드리자.”고 말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었고, 다른 교우들보다 더 많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형벌을 받는 동안에도 그는 “내 육신은 관장에게 맡기지만, 영혼은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소리쳤다. 게다가 옥중에서는 늙은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보다 먼저 교우들을 격려하거나 보살펴 주었다. 상주 관장은 도저히 바오로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대구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이때 그의 자식들도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모두 대구로 끌려갔는데, 그 후 장남 안드레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되었다. 대구 감사는 연 3일 동안 바오로에게 혹형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이 조금도 바뀌지 않자, 사형을 선고한 뒤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2) 이후 언젠가 그는 관장의 명령에 따라 한 승려와 교리에 대해 토론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의 설명에 막힘이 없는 것을 본 관리들이 ‘천주교는 참된 종교’라고 하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바오로는 새로 감사가 부임한 뒤 다시 옥에서 끌려나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노령에다 여러 차례의 형벌로 인해 더 이상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에 그는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알고는 아들과 교우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당부하였다. “이 옥을 복락소(福樂所)로 생각하시오. 밖에 있는 가족들로 인해 분심을 갖지 말고 내 뒤를 따르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오.”그런 다음 바오로는 평온한 기색으로 자신의 영혼을 천주께 드렸으니, 그때가 1827년 11월 15일(음력 9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1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5개월 후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이장하기 위해 발굴하였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모습이 평소같이 평온해 보였다고 한다.


◆ 순교자  박취득 라우렌시오 ( ? -1799년)


충청도 홍주의 면천에서 태어난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는 고향 인근에 전파된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양으로 올라가 지황(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라우렌시오는 고향의 여러 교우들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자주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관장 앞으로 가서 “무죄한 사람들을 사납게 매질하고 여러 달 동안 옥에 가둔다는 것은 무서운 죄가 아닙니까?”라고 항의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해미와 홍주 관아로 이송되어 잔인한 형벌을 당하였지만, 조금도 용기가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옥에 갇힌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조정에서 석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으므로 순교의 영광을 얻지는 못하였다. 라우렌시오는 이때부터 원시보(야고보), 방 프란치스코 등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실천하고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1797년의 정사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되어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지만, 아버지가 대신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면천 관아에 자수하였다. 이윽고 문초가 시작되자, 라우렌시오는 천주교 교리를 하나하나 설명해 나갔다. 화가 난 관장이 그에게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후 그는 다시 몇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받고는 옥에서 여러 달을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새 관장이 부임한 뒤 다시 문초를 받았으나, 한결 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홍주로 압송되었다. 홍주에서도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답변을 하였고, 갖가지 형벌을 인내로 참아냈다. 그러자 홍주 영장은 화가 나서 ‘다리를 부러뜨리고, 죽도록 매를 치라’고 한 뒤 옥에 가두었다. 이어 영장은 감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는데, 그때 감사는 ‘그놈의 다리를 치되, 열네 번을 때려도 항복하지 않거든 아주 죽여 버리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려보냈다. 이후 라우렌시오는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주 영장 앞으로 끌려나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또 옷이 벗겨진 채로 진흙 구덩이에 갇혀 밤새껏 추위와 비바람으로 고통을 받은 적도 있었다. 바로 이 무렵에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옥에 갇힌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천주의 은총을 얻을 수 있는지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잠결에 ‘십자가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이 발현은 약간 희미하기는 하였지만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동안 라우렌시오는 모두 1천 4백 대 이상이나 맞았고, 8일 동안 물 한 방울을 마시지 못한 적도 있었다. 옥졸들은 이제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옷을 벗긴 뒤에 밖에 내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다시 옥으로 끌려 들어가자, “나는 굶겨도 죽지 않고 맞아도 죽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목을 매면 죽을 것이오.”라고 옥졸에게 말하였다. 실제로 이튿날 밤에 교우들이 그에게 다가가서 보니 모든 상처들이 기적적으로 나아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제서야 이를 요술이라고 생각한 옥졸이 새끼줄로 그의 목을 졸라 죽였으니, 이때가 1799년 4월 3일(음력 2월 2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약 30세였다.


◆ 순교자 배관겸 프란치스코 ( ? -1800년)


충청도 당진의 진목(현 충남 당진군 석문면 장항리) 출신인 배(裵)관겸 프란치스코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되어 입교하였다. 관명은 ‘발은’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고향 진목은 충청도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내포 지역 안에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1791년의 신해박해로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신앙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석방되었으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즉시 자신의 죄를 진실히 뉘우치고 다시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서산으로 이주하였다가 얼마 안되어 고향 이웃에 있던 면천의 양제(현 충남 당진군 순성면 양유리)로 돌아와 교우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이룩하였다. 1794년 말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다음해부터 지방의 신앙 공동체를 순방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프란치스코도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1798년에 신부를 모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교우들과 함께 양제 마을 안에 강당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정사박해가 충청도 지역을 휩쓸고 있을 때였다. 실제로 양제의 교우들이 강당을 마련한 그 해 10월 3일, 한 밀고자가 포졸들을 이끌고 양제 마을로 들이닥쳤다. 포졸들은 즉시 배관겸 프란치스코를 체포하여 홍주로 압송하였다. 관장은 그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면서 ‘교우들이 있는 곳을 대고, 천주교 서적을 갖다 바치라’고 강요를 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에 홍주 관장은 화가 나서 사실 그대로를 공주 감사에게 보고하였고, 감사는 프란치스코를 청주 병영(兵營)으로 이송하여 문초하도록 하였다. 청주에 이르러 프란치스코는 원시보(야고보) 등 다른 교우들을 만나 고통을 함께 하였다. 그의 신앙은 여전히 굳건하였으며, 온몸의 살이 헤어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뼈가 드러날 정도가 되어서도 그는 영웅적인 인내로 모든 것을 참아냈다. 그러나 형리들의 매질이 계속되면서 끝내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0년 1월 7일(음력 1799년 12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약 60세였다.


◆ 순교자 이도기 바오로 (1743-1798년) - 청양사람


1743년 충청도 청양에서 태어난 이도기(李道起) 바오로는 고향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본래 그는 글을 알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천주교의 덕행만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후 바오로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모두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데 사용하였다. 또 천주교 신앙 때문에 여러 가지로 위협을 받게 되자 이곳 저곳으로 피해 다니며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2) 그러다가 가족과 함께 청양을 떠나 산 너머에 있는 정산으로 이주한 뒤, 그곳 옹기점에 터전을 잡았다. 1797년, 바오로의 나이 55세가 되었을 때 정사박해가 발생하였다. 그때 이 소식을 들은 인근의 한 비신자가 와서 ‘천주교인들의 두목으로 고발하겠다’고 그를 위협하였다. 이에 겁이 난 그의 아내가 도망할 것을 권하였지만, 그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고, 신입 교우들이 자신의 행동에 걸려 넘어질 것을 염려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그 해 6월 8일, 이도기가 집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한 떼의 포졸들이 나타나 그를 체포하였다. 이내 포졸들은 십자고상과 교회 서적 몇 권을 찾아낸 뒤, 그에게 천주교 신자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하면서 매질을 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산 관아로 끌려간 바오로는 자주 관장 앞으로 끌려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때때로 포졸들은 그를 장터로 끌고 나가 모욕을 주거나 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으며, 배교를 강요하는 관장 앞에서 용감하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곤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도기 바오로는 자주 굶주려야 하였고, 혹독한 추위로 고통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끊임없이 천주를 생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라는 천사의 말씀을 전해 주는 목소리를 듣고는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럭저럭 1797년이 지나고, 1798년 새해가 밝았다. 바오로는 다시 관장 앞으로 끌려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하루는 관장이 벼슬을 주겠다고 회유하자, 그는 “정산 고을을 전부 주신다 해도 천주를 배반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마음이 약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옥으로 찾아오는 아내와 교우들이 물리쳤다. 6월 10일 아침, 포졸들이 와서 사형 집행일이 되었다고 알려 주자, 바오로는 기쁨에 넘쳐 어찌할 줄을 몰라하였다. 이윽고 그는 포졸들에게 이끌려 정산 형장으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주변에 모인 비신자들까지 이 형벌에 가세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배교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성모 마리아여, 당신에게 하례하나이다.”라고 외쳤다. 바오로는 여러 차례 실신하였고,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매를 맞았다. 그리고 버려진 채로 있게 되었다. 이틀 후 저녁 무렵, 관장은 그의 죽음이 궁금하였는지 가서 살펴보고 ‘죽지 않았으면 아주 죽여 버리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포졸들은 이 명령에 따라 그의 몸을 잔인하게 짓이겨버렸다. 이제 바오로의 몸은 더 이상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니, 그때가 1798년 7월 24일(음력 6월 12일)로,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관장의 명에 따라 묻혀졌는데, 7~8일 후 정산에서 조금 떨어져 사는 교우들이 그 시신을 비밀리에 찾아다가 그들의 마을에 안장하였다.


◆ 순교자 정산필 베드로 ( ? -1799년)


충청도 덕산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난 정산필(鄭山弼) 베드로는, 본래 성격이 괄괄하고 힘이 비상하여 모두가 무서워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로는 아주 겸손하고 온순해졌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였다.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베드로는 신부를 찾아가 직접 그로부터 세례를 받는 행복을 누렸다. 또 이후에는 내포 지역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자신이 맡은 직분을 다하였다. 기도와 독서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격려하는 데 전심하였다. 베드로에게는 박취득(라우렌시오), 원시보(야고보), 방 프란치스코 등 절친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왕래하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다가 1797년에 일어난 정사박해 때 각각 자신들이 살던 마을에서 체포되어 모두 순교하였다. 정산필 베드로가 체포된 것은 1798년이나 1799년이었다. 그는 덕산 관아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용감하게 천주의 가르침을 증거하였다. 또 옥에서는 함께 갇힌 동료들을 격려하였으며,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도 전혀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사형 집행일이 되자 베드로는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동료들에게 같이 먹자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천주께서 사람을 위하여 창조하신 음식이니,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먹읍시다. 이제 우리는 천국에 가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오.” 그런 다음 베드로는 형장으로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799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내지 60세였다.


◆ 순교자 황일광 시몬 (1757-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황일광(黃日光) 시몬은 천한 신분 출신으로 어린 시절을 아주 어렵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그에게 이러한 생활을 보상해 주기 위해 놀랄 만한 지능과 열렬한 마음과 매우 명랑하고 솔직한 성격을 주셨다. 1792년 무렵, 시몬은 홍산 땅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에 우연히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천주교 신앙을 접하자마자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더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 동생 황차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멀리 경상도 땅으로 가서 살았다. 교우들은 시몬의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를 애덕으로 감싸주었다. 양반 집에서까지도 그는 모든 교우들과 똑같이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그는 농담조로 이렇게 이야기하곤 하였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1800년 2월 시몬은 경기도 광주의 분원에 살고 있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 회장의 이웃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황사영(알렉시오), 김한빈(베드로) 등 여러 교우들과 자주 교류하였다. 이제 그의 열심은 날로 더해져 모든 이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그 후 아우구스티노 회장이 한양으로 이주하자, 시몬도 아우와 함께 한양 정동으로 이주한 뒤 땔나무를 해다 팔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또 주문모(야고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교우들과 함께 미사에 참여하는 기쁨도 얻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황일광 시몬은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갔다. 이후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굳건하게 참아냈을 뿐만 아니라, 재판관의 추상같은 호령에도 굴하지 않고 천주교를 ‘성스러운 종교’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는 천주교 신앙을 올바른 길로 생각하여 깊이 빠졌습니다. 이제 비록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어찌 배교하여 천주교 신앙을 저버리겠습니까? 빨리 죽기만을 원할 따름입니다.”그 결과 시몬은 다리 하나가 부러져 으스러지도록 잔인하게 매질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조정에서는 이와 동시에 ‘황일광을 고향으로 보내 참수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시몬은 고향인 홍주로 이송되었다. 이때 그는 걸을 수조차 없어 들것에 실려 가면서도 본래의 명랑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또 아내와 아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그를 도우려고 따라오자, 그들로 인해 어떤 유혹을 당할까 두려워 절대로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는 홍주에 도착하는 즉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는데, 이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출처 : 성화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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