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나를 찾아 가는 길

천도법어 / 청화스님

맑은물56 2010. 11. 30. 15:18


 
영가를 위한 천도법어 모음 (청화 큰스님)

 

청화 큰스님의 영가를 위한 천도법어 모음

 

 

정중선원 천도법어

 

영가여! οοο 영가여!

지금 우리 중생들의 눈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영가들은 분명히 지금 이 자리에 오셔서 천도薦度 법어를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생명은 신비로운 것이어서 더러는 모양이 있고 모양이 없고 합니다. 인연 따라서 과거세에 지은 그런 업의 힘으로 해서 한동안 사람 같은 몸을 받았다 해도 인연이 다하면 사람 같은 모양은 사라집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생명자체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모양이 있는 땅기운, 물 기운, 불기운, 바람기운, 또는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그런 기운들이 모여서 하나의 모양을 만들고 거기에 인연이 다하면 반드시 그때는 죽음도 있고 이별도 있고 또는 아프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천지우주라 하는 것도 역시 달이 있고 지구가 있고 해가 있고 이렇게 한다고 생각 할 때는 이것도 형체가 이루어졌다가 또는 그런 모양이 변화가 됐다가 또는 그 모양이 파괴가 됐다가 다시 모양이 텅텅 비어버리는 것입니다.

 

 텅텅 빈 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생명자체는 조금도 손실이 없습니다. 생명자체는 불생불멸 不生不滅이라. 생명자체는 본래 낳지 않고 또는 모양이 바꿔진다 하더라도 죽음도 없고 소멸도 없습니다. 오늘 천도를 받으시는 영가들이시여! 금생今生에 인연 따라서 사람으로 태어나셨다가 인연이 다해서 다시 저승길로 가신 것입니다.

 

저승길은 어두운 세계입니다. 사람도 어두운 밤길을 갈 때에는 등불이 없거나 안내인들이 없으면 헤매기도 하고 굉장히 괴로운 것입니다. 죽음 길도 그와 똑같아서 한 번 죽어서 갈 길을 모르면 굉장히 괴로운 것입니다. 십 년도 머무르는 것이고 때로는 백년도 머무르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은 복아 많으셔서 좋은 후손들을 두셔서 어두운 길을 밝히는 참다운 등불, 참다운 지혜를 오늘 들으시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사람이라 하는 것은 금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과거 전생에는 사람보다 못 한 개나 소나 돼지 같은 그런 축생畜生으로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그 보다 더 못해서 과거 전생에 어느 생에는 지옥이라 하는 지독한 그런 고생만 연속되는 세계에도 태어났다가 다시 죽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은 어떠한 누구나가 다 그런 지옥 같은 생도 받았고 또는 사람이외에 동물 같은 생도 받았고 또는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귀신같은 그런 생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과거 전생에 닦은바가 있어서 생각도 좋은 생각을 하고 말도 좋은 말을 하고 행동도 바른 행동을 취해서 사람 될 만치 착한 그런 성품 때문에 금생今生에 사람 몸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와 같이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또는 헤어지는 것입니다. 또는 이별도 있는 것이니까 사람도 별로 좋은 데는 아닌 것입니다. 사람보다 더 좋은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사람만이 만물의 영장이다. 인간이 제일 좋다.’ 합니다만 사실 인간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닌 것입니다. 죽음이 있고 또는 이별이 있고 슬픔이 있고 또는 병도 있고 이렇게 생각할 때에 하나의 고해苦海란 말입니다.

 

우선 그때그때 쾌락적인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모두가 다 고의 원인으로 해서 이루어져서 잠시간 허망한 찰나에 불과합니다.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은 사람으로 계시다가 지금 어두운길을 헤매시는 가운데 이와 같이 좋은 후손들을 만나서 정말로 참다운 행복한 나라, 헤어짐도 없고 병도 없고 죽음도 없는 그런 나라로 가시는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사람보다 좋은 천상세계가 있습니다. 천상세계 중생들의 몸은 사람 같은 그런 몸이 아닙니다. 사람 몸은 아프기도 하고 또는 배가 고프면 물질적인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만 천상세계는 그런 것을 먹지 않더라도 살 수 있는 세계입니다. 천상세계는 몸도 이렇게 냄새가 나고 때가 묻고 하는 그런 몸이 아닌 것입니다. 천상세계의 몸은 광명신光明身이라, 빛으로 몸이 되어 있습니다.

 

 빛으로 몸이 되어 있거니 때 묻지 않고 또는 이러한 물질적인 껍데기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천상세계가 한 군데 두 군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선량한지, 얼마나 바로 살았는가 하는 그런 행위 따라서 천상도 28층이라, 스물여덟 층의 천상단계가 있습니다. 업장業障이 무거운 사람들은 저 아래층에 가 있는 것이고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업장이 가벼운 만치 거기에 비례해서 보다 높은 천상에 있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그러나 천상이 최상의 세계는 아닙니다. 비록 천상일지라도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아서 몇 천 년, 몇 만 년을 산다고 합니다. 업장 가벼운 중생이 태어나면 가벼운 중생들일수로 더 오래 사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천상은 팔만 겁이라 하는 오랜 세월을 삽니다만 이것도 역시 인연이 다하면 죽음이 도래합니다. 따라서 이런 천상세계도 역시 사실은 죽고 살고 헤어지고 하는 것을 면치 못 하는 중생세계입니다.

 

이렇게 뱅뱅 돌아서 천상으로 갔다가 다시 복이 다하면 인간으로 뚝 떨어졌다가 또 지옥으로 갔다가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 중생은 정말 답답하기도 하고 개미 쳇바퀴 돌듯이 참담한 존재입니다.그러나 우리가 가는 길이 이러한 고생바다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나 사람이나 천상이나 지옥이나 아귀餓鬼나 그런 세계만 뱅뱅 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이런 세계를 벗어나서 영원히 행복스러운, 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병도 없고 헤어짐도 없는 세계인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이러한 영생해탈, 영생행복의 길을 가르쳐주고 계신데 다만 중생들이 게을러서 가고 안 가고 합니다. 극락세계는 중생들에게 좋은 일 하라고 방편方便으로 한 말씀이 아닙니다. 극락세계는 분명히 존재하는 영원의 세계입니다. 사람세계나 또는 축생의 세계나 천상세계나 이러한 것은 하나의 흘러가는 과정적인 세계에 불과합니다만 극락세계는 흘러가는 세계가 아닙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그런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 세계를 성인成人들은 분명히 본 것이고 우리 중생들은 번뇌에 가리어서 못 보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는 번뇌만 거두시면 바로 극락세계에 가시는 것입니다. 지금 가리고 있는 번뇌가 무엇인가? 가시는 길에 번뇌는, 사람으로 계실 때 쓰시던 칠팔십 년 동안 자기 평생에 무척이나 아끼던 몸입니다. 어느 누구나 사람이면 자기 몸이 제일 소중합니다. 몇 십 년 동안 그 몸을 아껴왔으나 죽은 뒤에 몸뚱아리는 화장을 하면 재가 되는 것이고, 땅에 파묻으면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만 번뇌를 못 벗어나고 지혜가 밝지 못한 그런 중생들은 죽은 뒤에도 평소에 쓰던 몸에 대해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이 쓰시던 그 몸은 이미 영가들의 몸이 아닙니다. 영가들의 몸은 화장 하면 재가 되고 파묻으면 흙이 되고 마는 그러한 것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가들이 쓰시던 마음은 몸과 더불어서 죽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은 영생하는 참다운 생명입니다. 몸은 뜬구름 같고 거품 같이 한 동안 인연 따라서 모아졌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마는 존재입니다. 광야에다 집을 지을 때 나무요, 흙이요 이것저것 다 모아서 집을 올리면 하나의 집이 되겠지요.

 

그러나 나중에 집을 헐고 집을 파괴해버리면 집은 흔적도 없습니다. 나무나 흙이나 그런 것으로 밖에는 안 남아 있습니다. 그와 똑같이 사람 몸뚱아리도 산소요, 수소요, 탄소요, 질소요 그런 원소의 기운이 업장業障기운 따라서 하나의 형상을 나툰다 하더라도 생명자체의 인연이 다해 생명의 힘이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 떠나가면 몸뚱아리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영가들이시여! 자기 몸에 대한 애착, 자기 목숨에 대한 애착 때문에 자기 갈 길을 바로 못 가는 것입니다.영가들이시여! 자기 몸에 대한 애착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번뇌는 자기 권속에 대한 애착, 자기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요, 자기 남편이요 이러한 자기가 금생今生에 인연 따라서 사람세상의 인연 따라서 만난 그런 권속, 자기 친구 그러한 인연들 때문에 잘 못 가는 것입니다.

 

또는 자기가 돌아간 뒤에 자기 아들을 생각하고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으면 그런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살아있는 자기 권속들이 행복하면 좋은데 그 반대로 돌아가신 분들이 자꾸 뒤돌아보고 남은 분들을 생각하면 생각한 만치 남아있는 분들한테는 해가 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깊이 생각하십시오. 자기가 쓴 자기 세간, 자기 집, 자기 논밭, 자기 금붙이 같은 것은 허물어지는 몸뚱아리가 있을 때 필요한 것이지 몸뚱아리가 한 번 떠나버리면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자기가 쓰던 세간 때문에 자꾸만 뒤돌아보고 또 애착이나 미련을 갖습니다. 이것도 역시 무서운 번뇌가 되어서 여러분이 갈 길을 못 가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던 자기 몸도 흙이 되고 재가 되고 마는 허망한 것이거니 아들이나 딸이나 역시 한 동안 만난 허망한 인연에 불과합니다. 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집도 허망한 것에 불과합니다. 허무한 것에 불과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간에서 쓰던 버릇 때문에 내 것이요, 내 권속이요 하는 마음 때문에 바로 못 가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그러한 것은 가치가 없고 거품이요, 메아리인 것이고 실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가들이 가실 곳은 오직 생사를 초월하고 행복만 있는, 또는 영원히 아프지 않고, 영원히 이별도 없고, 영원히 살 수 있고, 또는 모든 안락을 다 얻을 수가 있고, 또는 지혜를 다 얻을 수가 있는 곳은 극락세계뿐입니다. 지금 지옥에 사는 중생이나 또는 축생畜生으로 있는 중생이나 사람중생이나 또는 천상중생이나 결국 모두가 다 극락세계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의 근본고향은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다시 이루어지고, 허물어지고하는 그런 과정에서 어쩌다가 우리는 극락세계에서 생각을 한 번 잘못해서 뚝 떨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어떠한 존재나 본 고향은 모두가 다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다시 바꿔서 말하면 부처님 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모든 것이, 거기에 사는 존재나 또는 그 환경이나 모두가 다 조금도 흠축이 없는 그런 청정미묘한, 불변한 광명光明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기에 극락세계를 다시 바꿔서 말하면 광명정토光明淨土라고 합니다.

 

영가여! 천지우주는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금 번뇌에 때 묻은 영가의 몸이라던가, 살아있는 인간의 몸이라던가, 추한 것, 좋은 것. 나쁜 것, 그런 것 모두가 청정미묘한 극락세계의 광명으로 된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번뇌에 가리어서 자기를 소중히 하는 그런 이기심, 그것 때문에 가리어서 탐욕심을 내고 또는 무엇을 얻지 못하면 성을 내고 자기 기분이 안 내키면 분노를 하고 하는 어리석은 마음들 때문에 우리가 천지우주의 그러한 행복스러운 본질을 못 보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우주의 본질이라 하는 것은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시고 또는 예수나 공자나 그 뒤에 달마스님이나 그런 위대한 도인들이 다 말씀하신 그대로 우주란 것은 어떠한 것도 모두가 다 본 바탕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광명세계입니다. 광명세계, 이것은 영원히 변치가 않습니다. 다만 중생이 탐욕심 또는 분노하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이러한 마음에 가리어서 그런 광명세계를 잘 못 보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가 그 극락세계, 광명정토光明淨土에 가시기 위해서는 광명정토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다른 곳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광명정토는 우리들 고향이다. 내가 영원히 쉴 고향이다.’ 이와 같이 생각을 하십시오.

 

그리고 광명정토의 이름인 동시에 일체중생의 본마음이 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우리 고향인 광명세계를 마음으로 생각하십시오. 과거에 쓰던 자기 몸, 자기 권속, 자기 세간이 모두가 다 한 동안 인연 따라서 쓰던 허망한 것에 불과합니다.

 

영가들이시여! 영원한 세계, 극락세계는 나무나 또는 땅이나 모두가 다 광명으로 이루어져있는 행복스러운 세계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헤어지지 않는 세계입니다. 극락세계의 참 이름은 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이고, 또는 일체중생의 참 이름도 역시 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이고 지장보살이고 문수보살입니다. 극락세계의 대명사, 극락세계의 모두를 합한 이름이 아미타불입니다.

 

영가들이시여! 극락세계를 생각하시고, 또는 극락세계의 참 이름인 아미타불을 일념으로 외우신다고 생각할 때는 영가들은 한 생각 가운데 그냥 극락세계에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유가족, 친지들이시여! 지금 어두운 길을 빠져나가신 영가를 위한 가장 좋은 공덕은 이와 같이 재를 모셔 부처님 법문으로 해서 극락세계의 길을 가시도록 천도해드리고 안내해 드리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가 다 극락세계에 가는 가르침입니다. ‘나’라는 것에 집착을 내지 말고, ‘나’라는 것에 이기심을 내지 말고, ‘나’라는 이 몸뚱아리 때문에 한 동안 살다 허물어지고 마는 거품 같은 몸뚱아리 때문에 집착을 내지 말고, 탐욕심을 부리지 말고 또는 어떠한 경우도 우리가 기분이 나쁘다 그래서 또는 얻는 것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기분이 상해서 성내는 마음, 그러한 마음을 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몸은 더욱 더 굳어지고 오염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더욱 더 오염되고 몸도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업장業障, 우리의 죄가 더욱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본래 고향인 극락세계에서, 아미타불 그 자리에서 더욱 더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한 번 성내면 성낸 만치, 한 번 탐욕심을 부리면 부린 만치, 나쁜 걸 생각하는 그런 마음을 내면 낸 만치, 우리 마음도 어두워지고 몸도 어두워집니다.

 

성자의 말씀은 조금도 거짓말이 없습니다. 석가나 예수나 공자나 노자나 그런 분들이 무슨 필요로 거짓말을 했겠습니까. 살아있는 자기 행복을 위해서나 오늘 재를 받으시는 영가를 위해서나 부처님을 생각하고, 극락세계를 생각하고 한 생각도 생각을 놓치지 말으시고서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생각하시는 것이 돌아가신 어버이를 위해서 가장 지극한 최상의 효심인 것입니다.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극락세계를 생각하시고 아미타불을 생각하시고 한 생각에 최상의 행복, 우리가 필경 돌아가야 할 고향자리로 왕생하시길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1990년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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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 천도법어

 

 

부처님 말씀 중에 ‘영겁회귀永劫回歸’라는 귀중한 금언金言이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이나 또는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나 영겁회귀라 하는 소중한 금언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어느 것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두가 다 순간 찰나찰나 변화무상해서 종단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 종단에는 다 하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 하나의 자리가 무엇인가?’ 하나의 자리가 바로 대총상법문대총상법문 자리입니다. 그럼 대총상법문이란 것은 어떠한 것인가? 대총상법문이란 것은 바로 우리의 자성自性, 우리 인간의 본성 자리이자 우주의 본성 자리가 대총상법문 자리입니다. 마명馬鳴대사의『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심진여心眞如시대총상법문체是大總相法門體하라 ‘심진여心眞如’라, ‘마음 심자 ‘참 진자 ‘같을 여자 우리 마음 바탕인 진여, 이것이 바로 모든 만법의 기본적인 본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법을 말할 때 어떤 때는 그때그때 법의 줄거리를 그냥 잊어버리고서 법의 상대유한적인 상을 많이 말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마음이 더욱 더 혼란스럽단 말입니다. 그래서 꼭 본체를 안 여읜다는,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부처님 법을 말해야 됩니다.

 

지금 우리는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보가 너무 적으면 장사도 잘못 하고 공부도 암중모색하는 그런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현대는 아시는 바와 같이 정보의 홍수시대 아닙니까. 정보의 홍수시대에 우리가 정보를 적당히 처리를 못 하면 우리 마음이 항상 산란스럽고 혼란스러워서 스트레스를 도저히 해소시킬 길이 없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서구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200년 동안이나 산업사화가 계속 되어서 물질생활은 상당히 편리하고 풍요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정보의 홍수라 하는 우리가 바라지 않는 것이 이루어져 있단 말입니다.

 

우리 부처님 가르침도 정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처님 가르침은 모든 정보를 적당히 소통시키고 정화를 시키는 소중한 역할을 합니다. 부처님 법 같은 법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 우주에 홍수같이 밀려 내려오는 그런 정보를 정화시킬 수가 없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세간적인 가르침들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대유한적인 복잡한 가르침입니다. 하나의 상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본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본체를 여의지 않는단 말입니다. 본체를 여의지 않는 이것이 아까 제가 허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총상법문입니다. 이른바 진여의 불성이 바로 본체란 말입니다. 『육조단경六祖』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아소설법我所說法불리자성不離自性’ ‘내가 지금 설한 법문은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니 불’자, ‘떠날 리자, ‘스스로 자자, ‘성품 성자, 자성을 떠난 것은 상대적인 말씀이란 말입니다. 상대적인 말이란 것은 우리를 더욱 좁게 만듭니다.

 

‘자성’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우리가 자성에 대해서 특히 명심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자성’이란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육조혜능 스님께서는 『육조단경』에서 ‘자성’이라는 말씀을 백 번도 더 했습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자성’이라는 말씀을 더러 많이 들으십니다. ‘자성’이라는 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바로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란 말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동물들도 모두가 본래 성품자리는 자성입니다. 자성을 또 다른 말로 하면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자, ‘불성’이라는 말이나 ‘스스로 자’자 ‘성품 성’자, ‘자성自性’이라는 말이나 똑 같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의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무명無明 가운데, 무명의 그 중요한 근원이 무엇인가? 우리 중생이 무지하기 때문에 사물의 본래면목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것이나 저것을 자꾸 분할을 시킨다 말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일원적인 진리인데 우리 중생들은 일원적인 진리를 미처 깨닫지 못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둘로 나누어 보고 셋으로 나누어서 보고 이와 같이 구분하고 분할한단 말입니다. 제가 허두에 ‘영겁회귀’라는 말씀을 했습니다만, 우리 인간은 본래로 자성이라 하는 청정미묘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본래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어디로 갈 것인가? 다른 데로 가지 않고서 바로 자성으로 돌아갑니다. 자성에서 왔다 자성으로 돌아갑니다. 현대기계문명이라든가 그런 상대적인 가르침과 우리 부처님 가르침과의 차이는 그 모든 존재를 하나의 진리로 보는 그런 원만 무결한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이고, 이렇게 저렇게 구분해서 보는 가르침은 과학이라든가 다른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인간 존재가 미처 깨닫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어느 누구나 자성은 본래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때그때 시대에 따라서 예지叡智가 발동합니다. 예란 ‘슬기로울 예자 ‘지혜 지’자 예지란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한테나 미처 계발은 못 되었다 하더라도 예지는 항상 조금도 흠결이 없이 갖추어있습니다.

 

사실은 예수 같은 분도 부처님 가르침같이 원대한 말씀을 못 했다 하더라도 좋은 말씀은 많이 했습니다. 복음 성서에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구하라, 그러면 무엇이든 그대에게 갖추어지리라.” 이런 것도 우리 불교에서 “자성을 깨달으면, 본래면목을 깨달으면 모두가 다 부처가 된다.”는 말씀이나 흡사한 말씀입니다. 다만 부처님 가르침같이 철저하지 못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사람과 사귄다 하더라도 ‘사람과 화해하는 것이 우주에 맞고 불교에 맞는 도리가 아닌가.’ 생각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것과, ‘우리가 본래로 저 사람이나 나나 모두가 다 똑같은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하고서 이웃과 사귀는 것과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주위에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한 이웃이 있다고 합시다. 이웃을 볼 때에 마음이 내키지 않으니까 그냥 보통 생각에서는 아무리 친하게 사귀려고 해도 사귀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논리적으로 ‘저 사람도 부처님 가르침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와 똑같은 진여불성을, 그 본래자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은 다 뿌리가 똑같단 말입니다. ‘생명의 뿌리가 똑같다.’ 고 생각할 때는 저 사람한테 함부로 하면 생명의 뿌리가 똑같기 때문에 나한테도 그냥 해가 온단 말입니다. 그 반대로 저 사람한테 우리가 용납을 하고 관대하다고 생각할 때는 나한테도 그냥 그대로 복덕이 돌아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이라 하면 달마스님께서 ‘문자를 배격하고서 오직 마음만 깨닫는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정통 가르침을 받드신 조사님들은 절대로 하나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법이 본래로 원융무애하고 또는 한결같은 자성을 떠나지 않는, 진여불성을 떠나지 않는 그런 법이기 때문에 달마스님께서 말씀하신 법문도 여러 가지 법문이 많이 있으나 보통『소실육문少室六門 』에서 여섯 문으로 말씀하신 것이 있어요.

 

그런 가운데 후대 사람들이 여러 가지 고증을 받아가지고서 ‘『소실육문』 가운데서 두 가지는 달마스님이 했으나 네 가지는 달마스님 법문이 아니다.’ 이렇게도 말씀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달마스님의 두 가지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이 있는가 하면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을 때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종교를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종교란 것은 우리 마음을 평온히 하고 모든 사람끼리 서로 화해하고 더불어서 영원한, 자성 청정한 진리로 나아가는 것인데,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인데,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이 마음이 편안치 않으면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믿는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 마음이 편안한 안심법문이 중요한가.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흔히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깊이 느끼시고 명심해서 그렇게 말하는 분들은 많지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정말로 바로 부처입니다. 부처를 떠나서 우리 마음을 논할 수가 없고 우리 마음밖에 부처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바로 본래 부처입니다. 나 같이 별스럽지 않은 그런 마음이 어떻게 부처라고 할 것인가.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 범부중생이 생각하는 그런 정도의 마음이 아닙니다.

 

 『육조단경』에서도 또 말씀했습니다만, 우리 마음, 바로 이것이 우리 자성인데, 우리 자성 가운데 우리 마음의 본체가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가 바로 법신불法身佛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에 본래로 포함되어 있는 모든 불성 지혜공덕이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입니다. 그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모양을 나투고 또는 변화하는 그러한 차원에서는 천백억화신불千百億化입니다. 즉, 우리 마음 가운데에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의 삼신이 원만히 들어있습니다.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드리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우주와 더불어서 둘이 아닌, 우주생명과 더불어서 둘이 아닌, 법신이 온전히 다 갖추어 있단 말입니다. 또는 그 가운데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영생하는 생명과 또는 다시없는 행복스러운 극락의 행복과 또는 신통자재하는 대아大我라, 이른바 삼명육통明六通을 다 갖출 수가 있고 만덕을 갖춘 것이 우리 마음과 관계되어 있단 말입니다. 또는 우리 마음의 본체는 번뇌가 조금도 없습니다. 우리는 본래청정이란 말입니다.

 

‘때가 끼었다, 때가 안 끼었다.’ 그런 것은 우리 중생이 봐서 그런 것이지 우리 마음은 모양이 없어서 사실은 때가 낄래야 낄 수가 없습니다. 도둑질을 많이 해서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만한 그런 죄를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사실은 오염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잘못 생각해서 자승자박이라, 스스로 자기 어리석음에 묶여서 분노가 되고 내가 나쁜 놈이다 하는 것이지,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아까 말씀 드린바와 같이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성, 공간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염시킬래야 시킬 수가 없단 말입니다.

 

 금생에 잘못 살아서 한도 끝도 없이 오랫동안 지옥고를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조금도 오염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은 청정한 그대로입니다.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 가운데는 부처님의 청정법신이 그대로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이라 그 자리는 지혜, 행복, 자비, 능력이 다 들어있습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분은 대천재라 불렸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될 것인가?’ 이렇게 조금도 의심을 갖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슈바이처 같은 분은 아프리카밀림의 성자이지 않습니까. 의사인 동시에 철학자요, 신학자요, 대음악가라고 합니다. ‘그런 천재는 잘나고 나는 대체로 무엇인가?’ 이렇게 비교를 해 볼 때는 한심스럽겠지요. 그러나 아인슈타인이나 슈바이처나 또는 성인이라고 하는 간디나 우리나 마음자리는 똑 같습니다. 조금도 흠절이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마음자리나, 예수 마음이나, 달마스님 마음이나 마음의 본바탕은 똑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할 일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영겁회귀永劫回歸라. 우리는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다시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부처가 되어버리면 또 어떨 것인가? 불교의 우주관에서는 중생의 공업력共業力 따라서 텅텅 빈 그런 공겁空劫으로 부터서 다시 우주가 이루어집니다. 이른바 성겁成劫이라, 성겁이 되면 그때는 여러 가지 동물이나 식물이나 존재가 의지해서 산다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주겁住劫이라, 그럼 차근차근 찌꺼기가 생깁니다.

 

 물질이란 것은 오랫동안 되다보면 불가역에너지라, 이른바 다시 활용할 수 없는 에너지로 화한단 말입니다. 그 에너지가 찌꺼기가 자꾸만 쌓이면 나중에는 그것이 산화되어서 불이 난단 말입니다. 괴겁壞劫이라, 우주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다 파괴가 됩니다. 파괴가 된 뒤에 물질은 허공무물虛空無物이라,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의 심식心識은 남아 있습니다. 무색계 중생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그 무색계 중생이 텅텅 빈 공겁세계에서 아직은 중생이니까 ‘좋다, 싫다.’ 하는 그런 마음이 있겠지요. ‘좋다, 싫다,’ 하는 그런 마음, 그런 에너지가 상호작용 되어가지고서 다시 우주를 형성합니다. 그럼 다시 텅텅 빈 공겁에서 우주가 성겁이 되고 그럼 또 중생이 살고 또 다시 파괴되고 텅텅 빈 우주가 되겠지요. 이와 같이 우리도 역시 영겁회귀 합니다. 우주 존재가 바로 텅텅 비어버린 다음 다시 이루어지고 다시 모든 존재가 살고 파괴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역시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꼭 부처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가 되어가는 하나의 나그네 길에 있습니다.

 

불자님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정보의 홍수 가운데서 부처님 가르침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스러운지를 모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것저것 알기는 많이 알지만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인간이 할 일이 뭐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다행히 부처님 가르침을 알기에 부처님 가르침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 모든 것이 다 허망虛妄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다 환상이나 같단 말입니다. 있다는 것이 사실은 있지가 않은 것이란 말입니다. 분명히 느끼시기 바랍니다. 어째서 있지 않은 것인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사실은 있지 않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제법공 도리를 몇 십번, 몇 백번 들으셨겠지요. 오온개공五蘊皆空 이라, 오온개공도 물질이라는 것은 다 비었다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도 변하지 않고서 변화무상한 즉, 다시 어려운 말로 하면 공간성, 시간성이 없단 말입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공간성이 있고 시간성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나 인연생의 법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은 시간성, 공간성이 본래로 없는 것입니다.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여! ‘생본무생生本無生이라, 우리가 태어났다 하더라도 본래는 태어남도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한데, 본래로 우리 생명의 본바탕인 것이기 때문에 거품 같은 모양으로 해서 이런 사대색신四大色身이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이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변화무상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멸본무멸滅本無滅이라, 이 육신六身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다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자체는 영원히 존재합니다. 불생불멸하는 생명의 존재는 과거 ‧ 현재 ‧ 미래를 통해서 영원히 존재합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자체가 바로 법신불法身佛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자체를 인격화 시킬 때 아미타불이요, 약사여래불이요, 관세음보살인 것입니다. 불생불멸한 영원한 생명이니까 무생물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아미타불이란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이라, 영원한 생명이란 뜻입니다.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아미타불에 갖추어져 있는 모든 공덕이 끝도 갓도 없이 많다는 말입니다. 또 광명무량光明無量이라, 진리의 광명이란 것이 한도 끝도 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단순한 철학이 아닙니다. 내가 생명이거니 내 생명의 본고향 자리가 바로 법신불입니다. 바로 영원한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 자리는 바로 우주생명이란 말입니다. ‘부처님은 우주생명이니까 훨씬 크고 내 마음자리는 아주 왜소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시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물질 같으면 비교가 되겠지만 물질이 아닌 순수생명은 비교가 안 됩니다. 하나 가운데 일체가 다 들어가고 일체 가운데 하나가 다 들어가고 모두가 다 연결되어 있어서 오직 하나의 진리입니다.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은 참 복덕이 많습니다. 해인사 주지스님은 아주 덕이 높으신 스님이시고 염불도 아주 잘 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침에 와서 보니까 주지스님 염불소리가 도량에 쩌렁쩌렁 울려서 저도 그냥 환희심이 났습니다. 영가들도 춤을 추면서 극락세계에 가게 될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는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것이니까 ‘영혼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품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존재가 허망虛妄 무상無常하지만 이와 같이 존재의 뜻이, 영혼이 우리 중생의 제한된 육안肉眼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천안天眼이라든가 불안佛眼이라든가 법안法眼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인간 모양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생명인데 그 생명이 갈 곳을 잘 모르면 이른바 중음中陰에 오랫동안 헤매는 것이고 갈 곳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냥 천상이나 극락세계에 혼연히 올라가는 것입니다. 극락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것만 따지는 사람들은 우리 중생들한테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권유하는 권선징악의 방편이지 극락이 어디 있을 것인가? 천상도 마찬가지 아닌가? 천상도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우리 인간도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하면 다 무상이라, 꿈같은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다 그대로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따라서 천상도 천상세계도 다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란 것은 생명자체가 본래의 생명에 안주하는 자기고향에 돌아가는 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극락세계 중생들은 극락세계에 태어난 분들은 모두가 다 광명의 몸입니다.

 

‘극락이 있는가, 없는가?’ 그런 것을 근원적으로 따지는 사람들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열심히 보시면 부처님께서 어떻게 극락세계를 말씀하셨는가에 대해서 확실한 믿음이 생길 줄로 믿습니다.

 

극락은 분명히 우리가 생명의 본고향에 돌아가는 곳입니다. 진여불성의 자리에 돌아가는 그러한 성자의 영혼이 안주하는 곳이 극락입니다. 이른바 영생의 고향이나 똑같습니다. 우리가 극락에서 쉬다가 다시 중생세계로 돌아온다고 할 적에 중생들이 불쌍해서 그 자리에서 원력을 세워서 중생계로 태어나기도 하고 천상에 내려오기도 하고 지옥도 가고 그런 것입니다. 진여불성이 되어 온갖 인간고뇌가 없고 오직 행복으로 존재하는 그런 세계가 극락세계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감회에 불과한 그런 허무의 자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광명을 몸으로 하고 우주를 몸으로 한, 그런 자리는 물질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순수생명자리이기 때문에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오늘 인연 따라서 모이신 모든 불자들이여! 저 밖에 계시는 분들께는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부처님 법이 얼마나 수승하면 아직도 싸늘한 날씨인데 추운 곳에 앉아 계신다고 생각할 때 송구스럽고 한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부처님 법은 대총상법문이라, 모든 법을 다 포섭해 있습니다. 과학이나 무엇이나 부처님 법안에는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과학 자체가 전문 과학이 되어서 우리가 여러모로 편리를 많이 봅니다만 차곡차곡 가면 갈수록 우리 부처님 법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의 본바탕, 이것은 다 허무한 것이란 말입니다. 물질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상 자체는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대물리학이 증명합니다. 어떻게 증명하는가? 하이덴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라, 이것은 그 어느 존재 어느 미세한 물체에 있어서도 그 위치와 운동을 동시에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측정이 안 되니까 불확정성의 원리라, 물질이 가장 미세하게 되면 사실은 증명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전자나 양자나 그런 것도 항상 그대로 고요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변화무상하단 말입니다. 상호작용이 되어서 ‘이것이 되었다, 저것이 되었다’ 합니다. 금방금방 그러한 소립자는 그대그때 사라지게 됩니다.

 

역시 현대과학 자체가 ‘물질이란 것도 비어있구나, 본래 허망하구나,’ 하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겁니다. 부처님 법의 제법공諸法空 자리를 증명하고 있는 겁니다. 다만 현대 과학이 물질이란 것은 공이 아닌 생명 그 자리, 생명 본래 자리, 진여불성 자리라는 것을 알 턱이 없습니다. 어째서 모르는 것인가 하면 물질이 아니니까 측정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마음이 바로 부처님 자체입니다. 우리 마음이 일체가 바로 청정법신이요, 모든 지혜, 자비, 공덕, 행복 이런 모든 것을 갖춘 즉 말하자면 원만보신입니다. 모든 행동과 모든 작용과 모든 모양 이런 것이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입니다. 이 삼신三身이 우리한테 온전히 다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삼신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안 될 수가 없다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가 되려는 것입니다. ‘일체중생一體中生 개유불성皆有佛性, 일체중생一體中生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모두가 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본래 불성이기 때문에 꼭 반드시 단정적으로 부처가 되어간단 말입니다.

 

영가들이여! 그 어두운 중음세계에 헤매지 마시고 부처님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아서 영원히 극락세계에서 안주하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많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2001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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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천진암 천도법어

 

 

제법 추운 날씨에 밖에 계시게 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 세상 살다보면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생활을 본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복잡다단한 생활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뭐라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사生死문제,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대체로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인가?’ 하는 삶의 정의 문제 또는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죽음 문제, ‘죽어서 가는 곳은 대체로 어떤 곳인가?’ ‘죽은 뒤엔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교는 생사대사生死大事라, 석가모니가 나오신 것이나 또는 다른 도인이 나오신 것이나 모두가 다 생사대사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오셨단 말입니다. 오늘은 3년 지장기도 회향일입니다. ‘생사대사라 하는 인간의 큰 문제와 지장기도를 하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런 것에 관해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활을 대체로 구분해보면 어두운 생활과 밝은 생활이 있습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사는 세계는 역시 어두운 세계와 밝은 세계가 있습니다. 어두운 세계는 다시 바꿔서 말하면 ‘유명계幽冥界 ’라 ‘그윽할 유자’, 어두울 명자‘ 어두운 세계가 있단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밝은 세계가 있습니다.

 

어두운 세계는 어떤 곳인가 하면 우리 중생이 자기 인생이나 또는 모든 존재의 참다운 본성을 모른다 말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모릅니다. 그래서 ‘나 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주는 무엇인가?’ 그런 원인을 모른다 말입니다. 원인을 모르고 산다고 생각할 때는 말도 바르게, 이치에 맞게, 도리에 맞게 못할 것이고 행동도 또 바른 행동이 나오기가 어렵겠죠. 그러한 자기 인생이나 또는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 근본 도리를 모르는 세계는 어두운 세계, 유명세계입니다.

 

그에 반해서 밝은 세계는 한문 투로 말하면 광명세계光明世界가 되겠지요. 지장보살님은 어두운 세계를 구제하는 이른바 유명교주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한 지장보살님을 오늘 청해서 여기에 인연 깊은 영혼들뿐만 아니라, 법계法界라 하는 것은 온 우주를 말하는 것인데 법계의 모든 유주무주有住無住영혼들을 천도하는 법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이 그렇게 헤매서 어두운 세계에서 헤어나지 못 하는 것은 우리 중생이 인간의 본래 생명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 자기를 모른단 말입니다. 참 자기라 하는 본래면목을 조금 어려운 불교말로 하면 그때는 천진불天眞佛이라, 천진자성天眞自性이란 말을 씁니다. 영가 현각스님이라, 그 분은 6조 혜능스님한테서 법을 받은 위대한 스님입니다. 영가 현각스님이 지은 증도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 가운데서 ‘법신각료法身覺了 무일물無一物’이라, 법신法身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면 그때는 ‘무일물’이라, 물질이라는 것은 없단 말입니다. ‘물질이란 것은 없다.’ 는 그 말이 굉장히 엄청난 말씀입니다.

 

자기 몸뚱이가 분명히 있고 또는 산하대지에 산천초목이 있는 것인데 어째서 ‘물질이 없다.’ 하는 것인가? 물질은 분명히 있는데 잘 닦아서 본래면목을 훤히 아는 그런 깨달은 분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본래 물질이 없단 말입니다. ‘법신각료 무일물’이라, 법신을 깨달아 놓고 보면 그때는 물질은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다. 없는 그 자리가 그냥 없는 허망한 자리가 아니라, ‘본원자성천진불本源自性天眞佛’이라, 사람이나 일체존재의 모든 그런 끄트머리의 본 성품은 천진불天眞佛이라, 조금도 꾸밈이 없는 자연스러운 모든 공덕을 갖춘 부처란 말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장보살님은 그러한 어두운 세계에서 헤매는 중생을 구제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도 자기의 본래면목을 못 깨달았으면 어두운 세계입니다. 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생사윤회 하는 갔다왔다하는 육도六道중에 저 밑은 지옥 아닙니까. 가장 컴컴한 세계, 가장 번뇌가 무거운 세계가 지옥 아닙니까. 좀 나아지면 그때는 아귀라, 아귀는 귀신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천도하는 그러한 존재들은 보통 다 아귀계입니다.

 

어두운 세계에는 그런 중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어두운 세계 아귀계라, 조금 덜 어두우면 축생계라, 그 다음에는 아수라세계, 아수라세계는 싸움을 좋아한단 말입니다. 지금 같이 서로 분열하고 서로 투쟁하고 이런 때는 아수라세계가 굉장히 극성을 부린단 말입니다. 아수라세계의 그런 기운이 범람하니까 이와 같이 싸우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광명세계로 나아가면 그때는 인간계라, 그 다음은 하늘세계, 하늘세계라 하는 것은 우리 불교적인 의미에서 풀이하면 하늘이라는 뜻은 바로 광명이란 뜻입니다. 빛난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중생의 번뇌가 좀 엷어져서 어둠이 별로 없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 더 나아가면 그때는 성문聖聞의 세계로 우주의 본성을 그때는 안단 말입니다. 알았지만 아직은 온전히 다 알지는 못했단 말입니다. 더 올라가면 연각緣覺세계, 더 올라가면 보살菩薩세계라, 가장 끄트머리 광명자체가 되어버리는 생명이나 부처님한테 의지하는 환경이나 모두가 다 광명정토光明淨土라, 광명세계가 되어버리는 그 자리가 부처란 말입니다.

 

이러한 광명자체가 되어버리는 생명자체의 본래면목자리,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천진한 꾸밈도 없고 번뇌의 때가 조금도 안 묻은 그대로의 본래세계가 부처님세계란 말입니다. 부처님세계는 바로 극락세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중생은 그러한 본래면목자리인, 본래천진부처자리인 그런 불성을 모르기 때문에 그때는 어두운세계가 나온단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성자가 되어서 훤히 알아버리면 사실은 지장기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지장천도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자체가 성자가 못되어 놓으면 아직은 어두운 세계에 있기 때문에 지장천도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어두운 세계라 하더라도 우리 중생의 분상에서 중생이 잘 못 봐서 어두운 것이고, 깨달은 부처님 분상에서 생각할 때는 어두운 세계도 사실은 어두움이 깔려있지 않습니다.

 

현대는 그렁저렁 살 때가 아닙니다. 상당히 복잡한 때라서 우리가 먼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어두운 세계는 그냥 어두움만 깔려있어서 조금도 광명이 없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어두운 세계에 주눅들어가지고서 밝은 지혜가 없는 것이니까 어둡게 보는 것이지, 비록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가장 못되고 어두운 지옥이 있고 또는 아귀가 있고, 축생이 있고, 아수라가 있고 또는 그렁저렁 하는 인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버릇이 되어가지고서 미처 광명세계를 몰라 그렇지 정말로 광명세계가 되어버리면 부처님뿐입니다.

 

성자의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도 훤히 빛나고, 아귀도 훤히 빛나고, 축생계도 훤히 빛나고, 싸움 좋아하는 아수라세계도 싸우는 그대로 훤히 빛나있고, 인간도 훤히 빛납니다. 그런 도리를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의 물이 기온이 낮아 얼어서 얼음이 된다 말입니다. 얼음이 되고, 기온이 높아져 녹아서 물이 되고, 다시 열을 가해서 수증기가 되고 말입니다. 다시 구름이 되어 올라가서 물방울이 되고, 이렇게 가지가지로 모양은 변한다 하더라도 물이라 하는 산소와 수소가 합해서 된 성분은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그와 똑같이 천지만유의 근본성품이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만이 실상實相이고 실존이기 때문에 우주의 본바탕인, 실상인 부처님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지옥도 되고 또는 아귀도 되고, 축생도 되고 이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부처라는 그 자리는 조금도 변질이 없단 말입니다.

 

하나의 수분이 물이 되고, 수증기가 되고 또는 얼음이 된다 하더라도 수분 자체는 조금도 변질이 없듯이 인생이나 우주의 본래면목인 부처자리, 부처님이라는 성품,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그때는 불성, 부처님 자리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다만 중생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나쁜 버릇을 붙인단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텅텅 비어서 불성만 있는, 다시 말하자면 물질은 조금도 없이 광명만 존재하는 광명정토, 그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다시 광명 그 자체에는 불성으로서 무한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다시 이것이 오랜 시간이 경과 되면 다시 우주가 형성 됩니다. 형성이 되면 또 그 자리에서 중생이 나오는 것입니다. 중생이 나오면, 그 중생들이 그냥 제한이 없이 나온다면 모르지만 제한을 받는단 말입니다. 제한을 받으면 우리는 제한을 받은지라 본래 불성자리를 그때는 제대로 못 봅니다.

 

사람으로 생겨나버리면 그때는 사람으로 제한되어 버리니까 가장 시초야 부처님이지만 이렇게 저렇게 순환과정에서 우주가 텅 빈 광명자리에서 성겁成劫이 되고, 형체가 이루어지고 또는 중생이 살고 그런 가운데서 여러 가지로 영향을 받아서 각 중생이 여러 가지 차이가 생긴단 말입니다. 그래 놓으면 자기 본래면목 자리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한데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옥이요 또는 아귀요, 축생이요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태어나서 한 번 버릇되어 놓으면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또는 성자 같은 분들이 안 나오시면 우리가 절대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나면 인간만치 좋은 곳에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하고 그렇게 하다가 다시 죽어지면 또 인간으로 된단 말입니다. 또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우리가 본래 선근이 깊지 못해 가지고서 나쁜 일을 많이 한단 말입니다. 아주 표독스럽단 말입니다.

 

표독스러우면 표독스러운 그런 업장에 묻혀서 그때는 지옥으로 간단 말입니다. 다른 것에 비례해서 욕심을 많이 부린단 말입니다. 욕심이 지독하게 강하면 그때는 다른 데로 못가고 욕심이라는 그것에 구속당해서 아귀로 간단 말입니다. 또 사리분별을 못해 놓은 그런 어리석은 사슬에 걸려서, 그것에 꽁꽁 묶여서 그때는 축생으로 간단 말입니다. 싸움 좋아하고 투쟁을 잘해 놓으면 그때는 거기에 구속당해서 아수라가 된단 말입니다.

 

사람이 된 것은 그래도 오계五戒라, 다섯 가지 계율은 지켰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인간의 늪에서, 어두운 세계에서 헤어나야 하겠는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의 본래면목은 부처자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가 못 되면 그때는 천만년도 헤매는 것입니다. 천만년도 뱅뱅 쳇바퀴 돌듯이 헤맨단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그런 자리에서 헤어날 것인가.

 

헤어나기 위한, 즉 말하자면 위대한 성인 가운데서 한 분이 지장보살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부처님이라 하면 지장보살님도 계시지만 관세음보살 또 무슨 보살 그런 여러 가지 부처님이나 보살님들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관세음보살님은 어떤 분이고 지장보살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는 의심을 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분들은 지장보살님을 외우면 좋은 분들은 ‘지장보살님이 최고다.’ 이렇게 해서 관세음보살님을 몇 십 년 동안 하신 분한테도 ‘그것 말고 지장보살님 외우십시오.’ 이렇게 하는 분도 있단 말입니다.

 

또는 인연이 관음보살님과 깊은 분들은 관음보살님으로 해서 가피加被도 입고, 그런 분한테 ‘지장보살님은 별것 아닙니다. 관세음보살님을 외우십시오.’ 이렇게도 할 수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불교가 참 저급한 종교가 되고 맙니다. 그뿐만 아니라 문수보살, 보현보살 같은 보살님 이름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 현대적인 불교인들은 마땅히 그런 면에서 회통이라, 이런 보살 저런 보살, 이런 부처님 저런 부처님 명호가 많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통일 원리로 해서 회통시키는 그런 지혜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 대상은 내내야 부처님 아닙니까. 부처님인데 ‘부처님을 어째서 이렇게 저렇게 많이 부르는 것인가?’ ‘부처님이 따로따로 지장보살님 몸 또는 문수보살님 몸이 따로 있어 중생을 구제하는 것인가?’ 이래저래 의심을 많이 품습니다. 상당히 불교를 공부 한 분도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편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오신 보람으로 모든 보살님, 부처님을 다 통틀어서 모아서 하나로 회통시키는 바른 이해가 꼭 필요합니다.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이른바 우주나 인생의 본래면목인 동시에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바른 생활을 하려고 애씁니다만 바르게 못 사는 것은 우리 인간의 본 실상을 모른단 말입니다. ‘잘 생기고 못 생기고 잘나고 못나고 남녀가 모두 있지 않은가. 마음이야 보이지 않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갖는 무명無明 가운데 가장 못된 무명입니다. 이른바 인간관, ‘인간이 무엇인가?’ 이걸 잘 모른단 말입니다. 이걸 모르니까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 우리 인생의 바른 의미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인간은 물질이 아닙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이 꽁꽁 얼어서 얼음이 된다 하더라도 얼음 그 자체가 실상이 아니라 얼음의 그 실상은 역시 물이듯이 우리 인간도 우리가 번뇌업장 따라서 이런 몸뚱이를 지녔다 하더라도 인간은 절대로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이것은 다 불성이란 말입니다. 머리카락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불성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불성입니다.

 

인간의 몸뚱이를 분석해 놓으면 내내야 미세한 하나의 원자란 말입니다. 원자 또는 가장 미세한 것은 텅텅 비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제일 미세한 원자라고도 할 수 없는 하나의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모든 존재, 산이나 냇이나 모든 존재를 다 분석한 가장 미세한 물질이 내내야 소립자나 원자 아닙니까. 그런 것은 텅텅 비어있는 물질이 아닌 무엇인가의 하나의 파동, 진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 중생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그것이 무엇인가? 우주의 순수한 생명 그것이 즉 말하자면 아까 말씀드린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님의 성품이란 말입니다. 불성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런 부처님의 불성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고 진동해서 양성자가 되고 전자도 되고 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 몸뚱이가 대체로 무엇인가? 우리 중생의 제한된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남자고 여자고 잘나고 못나고 하더라도 내내야 분석해 놓으면 그때는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란 말입니다. 더 분석하면 그때는 원자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원자가 무엇인가해서 더 분석해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의 그야말로 참 광명만 되어버리고 말입니다. 가장 미세한 것은 그야말로 참 광파光波라 또는 광립자라 하나의 광명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광명자체는 무엇인가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나 성인들은 훤히 보는 것입니다. 성자는 번뇌가 없기 때문에 훤히 우주의 본바탕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견성見性이라, ‘볼 견'자, '성품 성’자 말입니다. 불성을 보기 때문에 견성이란 말입니다. 불성은 무엇인가? 불성은 물질이 아닌 시간이나 공간성이 없는 천지우주의 근본성품을 말합니다. 그런 불성을 본단 말입니다. 불성을 못 보면 그때는 범부인 것이고, 불성을 보면 성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천지우주는 그와 같이 모두가 다 사실은 불성뿐이란 말입니다.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까 제가 허두에서 몇 말씀하다 말았습니다만 ‘법신각료法身覺了 무일물無一物’이라, 법신은 우주의 본래모양, 본래실상이 법신인데 법신을 깨달아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무일물이라, 물질은 그때는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다.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우리가 많이 씁니다. 그러나 ‘어째서 모두가 마음뿐인가?’ 이렇게 깊이 생각을 잘 못한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의 정신뿐, 순수한 생명뿐입니다. 물질은 없단 말입니다. 다만 순수 생명이 이렇게 저렇게 진동함으로 해서 상이 보인단 말입니다. 상이 보이니까 중생은 그 상만 봅니다. 법성法性은 못 보고 그 상만 봅니다.

 

불교라는 것은 모두가 상을 떠나서 본성으로 가는 것입니다. 본래성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어두운 세계가 없단 말입니다. 그때는 유명세계, 어두운 세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본 성품이 불성이기 때문에 항상 훤히 빛나 있단 말입니다.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고, 영원히 시공을 떠나서 빛나있는 그런 영생의 생명입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 자리는 조금도 변동 없는 또는 끝도 갓도 없이 충만해있는 하나의 부처님 생명뿐이기 때문에 또는 그런 불성으로 부터서 일체의 것이 나오기 때문에 잘나고 못나고 또는 재주가 있고 없고 모두가 다 불성 가운데 있는 기운입니다. 자비나 지혜나 모두가 다 불성 가운데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불성은 영원히 존재하고 또 거기에 들어있는 성품공덕은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그런 공덕들을 한 말로, 한 개념으로 표현을 못합니다.

 

따라서 어두운 세계를 다스리는 그런 부처님 공덕으로 해서 표현할 때는 지장보살인 것이고 또는 자비로운 쪽으로 표현 할 때는 관세음보살이고 또는 지혜로운 면으로 말할 때는 문수보살이고 약이나 또는 의술로 해서 중생을 다스리는 면에서는 약사여래입니다. 그리고 한 번에 다 몰아서 말할 때는 이른바 총대명사라,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내내야 우주의 근본생명은 하나의 생명인데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공덕 따라서 그때그때 이름이 붙는단 말입니다. 이렇게 알아서 회통을 딱 시켜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가령 지장보살님을 우리가 외운다 하더라도 관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또는 아미타불이나 거기에 포함되어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여기에 촛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광명이 이렇게 있습니다만 이 촛불 빛이나 저 촛불 빛이나 서로 상충이 안 됩니다. 촛불이 이 법당 안에 몇 십 개가 있다 하더라도 조금도 촛불의 광명과 밝음에 대해서 다툼이 없단 말입니다. 불꽃은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같이 다 하나가 되어서 혼연일체가 되어서 그때는 하나의 밝음만 있을 뿐인 것이지, 이 촛불 빛 저 촛불 빛 따로따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천지우주에는 천만번 부처님의 이름을 우리가 외운다 하더라도 부처님이 그때그때 따로따로 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까 제가 말씀 드린바와 같이 원융무애한 부처님인데 그때그때 공덕 따라서 이름이 붙는 것이고 또는 부처님 지혜라는 것은 하늘의 별도 되고 또는 그야말로 태양도 되고 또는 달도 되고 또는 산천초목이 되고 인간이 되고 각 중생이 그 자리에서 나왔으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그런 신통지혜가 한도 끝도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하면 그냥 일시에 천개 만개 부처님 광명이 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부처님의 모양이 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차원에서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융무애한 하나의 불성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이 바른 이해를 한 후 공부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천도를 받는 유주무주의 영가들이여!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이시여!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또는 수라나 인간이나 천상이나, 천상도 아직은 번뇌를 다 끊은 세계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세계만이 참다운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결국 부처님의 세계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일체중생一體中개유불성皆有佛性이요 일체중생一體中生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모든 중생은 다 본래생명이 부처거니 마땅히 부처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게으름 부리고 나쁜 짓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종당에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고생고생하고 뱅뱅 돌다가 되겠지요.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우리사회나 모두가 다 혼란스러운 것은 참다운 자기 본성을 모르는데서 온단 말입니다. 본 성품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본 성품은 바로 밝은 것이고 또는 일체 공덕을 갖춘 그런 것이 본 성품이기 때문에 나쁜 말을 할 수 없고 나쁜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런 어두운 세계를 떠나서 광명세계로 갈 수 있을 것인가?

 

어둡다는 것은 다른 것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광명세계뿐인데 다만 우리가 지혜가 없어서 그렇게 못 본단 말입니다. 어두워서 못 봅니다. 따라서 그런 어리석음은 벌써 어두운 것이고, 어리석기 때문에 그때는 내내야 ‘나’를 고집한단 말입니다.

 

바른 지혜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가 원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몸뚱이를 우리가 한계를 세워서 ‘내 몸뚱이 내 몸이요 내 손이요’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잘못 보니까 ‘나’라고 한계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리석어서 ‘나’ 라는 한계를 세운 다음에 나한테 좋게 하면 그때는 욕심을 낸단 말입니다. 이 몸뚱이에 조금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싶고, 이 몸뚱이에 보다 더 옷도 좋게 입고 싶단 말입니다. ‘나’ 라는 관념이 생겨버리면 그때는 나한테 대해서 좋게 하고 싶단 말입니다. 그것이 욕심입니다.

 

그 다음에는 나한테 해로운 것, 내 몸뚱이에 대해서 욕을 한다거나 할 때에 진심瞋心이라, 싫어하는 마음이 있단 말입니다. ‘나’ 라는 생각이 벌써 이와 같이 어두운 생각입니다. 욕심을 내면 낸 만치 더욱더 어두워집니다. 이런 것이 모이고 쌓여서 그때는 더 집착하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옥이란 말입니다. 탐심과 진심과 어리석은 마음이 투영되어서 가장 컴컴한 세계가 지옥세계 아닙니까.

 

인간이란 그 보다는 좀 나아서 오계五戒를 지켰기 때문에 인간으로 온 것입니다. 살생을 않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도둑질도 별로 않고, 음란한 짓도 않고 말입니다. 거짓말도 도둑질도 않고 술 같은 것도 맑은 정신으로 덜 먹고 말입니다. 오계는 제법 지킨단 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가 그래도 인간이 되었단 말입니다. 인간이 되었다 하더라도 인간 그 자리에서 참다운 밝은 등불이 없으면 참다운 지혜가 없으면 그때는 다시 인간으로 되는 것이고 또는 잘 못살면 그때는 지옥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밝은 지혜란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너무 옹색한 생각으로 버릇되어 버렸기 때문에 ‘나’ 라는 관념을 버리기가 어렵지요. 무아無我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기가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분명히 내가 있는데 왜 없다고 하는 것인가? 역시 그러한 것은 견성이라, ‘근본성품 자리, 나의 근본도 불성이요, 너의 근본도 불성이요 천지우주가 불성뿐이다.’ 이렇게 딱 되어버린 뒤에는 분명히 무아가 되겠지요. 그러나 못 본 사람들은 아무리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안 보이니까 ‘무아’라 또는 ‘원래 소유가 없어야한다.’ 이런 말을 해도 실감이 잘 안 온다 말입니다. 그러나 안 온다 하더라도 우리가 진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저 밖에 있는 대밭 너머에 차가 몇 대가 있다고 합시다. 그 차를 본 사람은 ‘차가 있다’고 한단 말입니다. ‘대밭 저쪽에 차가 몇 대가 서 있습니다.’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차가 안 보이는 사람은 ‘차가 없다’고 하겠지요. ‘차가 없다’고 부인 하겠지만 분명히 그 차를 자기 눈으로 보고 와서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우리가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와 똑 같이 부처님께서나 각 도인들은 그런 인생과 우주의 본래성품을 훤히 보신 분이란 말입니다. 보신 분들의 말을 우리가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성인의 말씀을 안 따르면 그때는 고생이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인생고해人生苦海라, 생노병사의 고 또는 기타 가지가지 고생을 안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렁저렁 삼독심三毒心으로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때는 우리가 부처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보다 심각한 인생의 그런 고통의 구렁으로 안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개인이나 사회나 가정이나 우리를 어두운 길로 이끌어가는 못된 어리석음 또는 탐욕심 또는 성내는 불끈한 마음 그런 마음을 우리가 떠나지 않고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나의 본 생명도 부처요, 너의 본 생명도 부처요 천지우주가 다 본래로 부처라고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이요, 우리 중생이 바로 못 봐서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나쁜 것이 있고 좋은 것이 있다.’ 이렇게 우리가 지혜로 해서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야말로 참다운 화합이나 또는 참다운 행복의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 은혜를 『화엄경』에 십종대은十種大恩이라고 풀이 하고 있습니다. 십종대은 가운데서 어떤 은혜가 있는가 하면 ‘은승창렬은隱勝彰劣恩’이라, ‘숨을 은’자, ‘수승할 승’자 말입니다. 창렬이라 ‘나타날 창’자 ‘용렬할 렬’자 말입니다. 좋은 점을 감추고서 나쁜 점을 보이는 은혜란 말입니다. 도둑놈이나 그런 나쁜 사람들은 겉의 상은 비록 나쁘게 보인다 하더라도, 본래는 부처기 때문에 부처의 자리에서는 김가라는 부처, 박가라는 부처, 부처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근본은 똑같단 말입니다.

 

하나의 바닷물에서 천파만파 파도가 나온다 하더라도 똑같은 바닷물이듯이, 부처 가운데서 일체만유의 중생이 나온다 하더라도 같은 부처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눈앞에서 나쁜 짓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상뿐인 것이지 본래가 나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모든 만덕을 갖춘 부처님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상으로 그와 같이 나쁘게 우리한테 보인단 말입니다.

 

불교가 불교인 점은 무엇인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가 불교인 점은 인생과 우주의 본바탕을 안단 말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아는 것이 불교란 말입니다.

 

불교의 참다운 신앙은 자기가 지금 안 보인다 하더라도, ‘나나 너나 천지우주의 모든 생명의 본바탕은 부처님이다. 모든 공덕을 갖춘 부처님이다.’ 이렇게 믿는 그것이 불교의 신앙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믿는다고 생각할 때에 믿음이 확실하면 ‘신만성불信滿成佛’이라, 믿을 신자, 가득할 만滿자, 믿음만 확실하면 그때는 성불하는 것입니다. 참선도 않고 또는 염불도 않더라도 말입니다. 정말로 온전히 믿으면 그때는 성불한단 말입니다. 본래 부처거니 성불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잘나고 못나고 지금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꿈을 깨면 그때는 다 같은 부처가 되어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버릇이 많기 때문에 금생에 길들여진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하고 잘못 말한 버릇, 과거 전생에 우리가 붙인 버릇 그런 버릇 때문에 그렇게 온전히 다 믿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보통 불교 공부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성을 훤히 보는 분이 아니고서는 항상 회의심에 가리는 것입니다. ‘정말로 불성이 있을 것인가?’ ‘정말로 불성이 빛날 것인가?’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믿음을 자꾸만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장보살님도 한번 부르고 두 번 부르고 그렇게 부르면 부르는 만치 그때는 우리 마음이 정화되어 온단 말입니다. ‘명호부사의名號不思義’라 부처님 이름은 모두가 다 부사의한 힘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모두가 다 우리 삼독심을 녹이는 힘이 있단 말입니다.

 

이 자리에도 염주를 헤아리시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만, 모두가 다 한번 헤아리면 한번 헤아리는 대로 업장이 녹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이 먼저 딱 믿고서 화두를 드는 사람들은 화두를 들고, 염불을 좋아 하는 사람들은 염불을 하고 또는 주문을 외우는 사람들은 주문을 외우는 그런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도 지켰다 말았다, 했다 말았다 하면 큰 공덕이 없단 말입니다. 여기 천진암 스님네가 3년 동안 지장보살을 모시듯이, 염불도 기도하려면 부단염불不斷念佛이라, ‘아니 불’자 ‘끈을 단’자 말입니다. 간단이 없이 해야 합니다.

 

어두운 세계에서 헤매는 영가들이시여! 우리는 좋아서 고기를 먹습니다만 고기에는 축생의 탐욕심이 들어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고기를 먹으면 그때는 업장 많은 축생의 세포가 우리한테 들어오니 좋을 턱이 있습니까. 고기를 적게 먹어 보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말썽 많은 고기를 수입할 필요가 있습니까.

 

오늘 천도를 받는 모든 영가들이시여! 사람이 낳을 때는 생유生有요, 사는 것은 본유本有요, 죽을 때는 사유死有요, 죽어서 가는 데는 중유中有입니다. 그 중유에서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아직 갈 곳을 못가고 헤매는 그런 영가들이여! 축생 영가들이여! 우주에 있는 모든 영가들이여! 바로 생각 한다고 할 때는 그대들의 본 모습도 역시 천진불天眞佛이거니, 부처님의 위없는 법문을 믿고서, 바로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온전히 믿음만 가지면 그 자리에서 바로 그대들이 앉은 그 자리가 바로 훤히 빛나는 광명으로 빛나는 연꽃 연화대蓮花臺로 화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여! 그대들의 마음을 돌이켜서 본래는 나와 남이 없고 천지우주가 천차만별로 삼천대천세계가 구분되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원융무애한 부처님뿐이거니, 지장보살을 외우나 관세음보살을 외우나 참다운 염불이라 하는 것은 그 자리를 안 놓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그냥 부처님한테 우리가 기원 드려서 도를 찾는다.’ 그것은 방편에 불과한 것이고 참다운 것은 천지우주가 부처님이거니, 우리 중생은 너무나 버릇이 많아놔서 그냥 잊어버린단 말입니다. 그 자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외우는 것입니다.

 

우리 사부대중이시여! 영가들이시여!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은 모두가 다 우리가 본래면목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 운문스님의 똥 마른 막대기라, 소중한 부처님을 똥 마른 막대기라, 달마스님께서 온 뜻은 우리한테 모두가 다 어두운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헤치고서 성불하게 만들기 위해서 왔단 말입니다. 그런 성불하게 만드는 부처님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을 묻는데 똥 마른 막대기라 이렇게 대답했단 말입니다. 똥 마른 막대기나 다른 모두가 다 바로 보면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원통한 것은 그와 같이 우리가 어두워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리석은 마음 또는 탐욕심 내는 마음 또는 성내는 마음 이런 마음이 컴컴하니까 이런 것에 가리어서 못 본단 말입니다. 우리 원수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남한테만 탓을 합니다. 물론 정치를 하는 분들은 제도도 바르게 하고 해야 하겠지만 기본적인 원수는 자기한테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본래면목, 천지우주가 부처님인데 부처님을 바로 못 보는 어리석은 마음 또는 어리석음을 더욱 깊게 하는 탐욕심, 더욱 깊게 하는 성내는 마음, 이것이 자기 원수입니다. 남을 탓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남을 탓하지 않고 자기한테 있는 어리석음, 탐욕심, 성내는 마음, 그 마음만을 우리가 정화시키고 나간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인간사는 그냥 즉시에 그야말로 광명정토, 영원히 화락한 세계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부대중 또는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내가 비록 못났다 하더라도 나의 본래면목, 우주존재의 본래면목은 천진불天眞佛이라 했습니다. 마땅히 천진불이란 그 말을 꼭 외우셔야 합니다. 천진불이라, 우리 본래면목이 천진불입니다. 아무리 미운자라도 천진불입니다. 천진불임을 믿고서 천진불이 못되게 하는 원수인 어리석은 마음 또는 탐욕심 또는 성내는 마음, 이 마음을 제거해서 영생의 공부에서 염불도 그야말로 부단염불을 간단치 않게 하시기 바랍니다.

 

화두를 든다고 하더라도 그지없이 염념불멸念念不滅해서 생각생각에 딴 생각이 못 끼게끔, 그렇게 하염없이 한다고 생각할 때는 이렇게 말씀하면 ‘아! 그대 같은 스님들은 할 수가 있지만 우리 재가불자는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재가불자님도 충분히 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아내나 자기 남편이나 자기 아들이나 또는 못된 놈이나 말입니다. 지금 먹는 음식이나 바로 보면 모두가 다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아내를 봐도, 아들을 봐도 부처님 말입니다. 다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다시 인연 따라서 아내의 도리, 남편의 도리, 아버지의 도리들이 따로 있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근본 생각만은 ‘다 부처님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공부해서 꼭 금생에 성불하시기를 바라마지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지장보살!

나무관세음보살!

                                                                                                  1989년 10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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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평화 민족화해 지리산 위령제 천도법어

 

 

우주에는 오직 하나의 진리가 있습니다. 자연도 우리 인생도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그 하나의 진리 이른바 불이법문不二法聞이라, 하나의 진리를 깨달은 분이 이른바 성인입니다. 따라서 석가모니나 공자나 노자나 예수나 마호메트나 그런 성인들은 하나의 진리를 깨달은 분들입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인데 하나의 생명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중생이고 범부凡夫인 것입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개인적인 불행이라든가 또는 민족사의 그런 비극이라든가 모두가 다른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의 생명을 모르는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민족사의 수난 가운데서 그때그때 그 억울하게 산화하신 영혼들, 그러한 영령들의 품은 한은 영령들 개인적인 한인 동시에 우리 민족의 한인 것이고 또는 우리 민족 자체의 무명無明의 소생인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그 무지 때문에 업을 짓는 개인적인 죄업이 있고 또 공통적으로 우리 인간 자체가 다 같이 짓는 그런 공업共業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래가 진리가 둘이 아닌 것인데 둘이라고 생각하고 셋이라고 생각하고 ‘불교만이 옳다’, 또는 ‘기독교만이 옳다’, 또는 ‘노자만이 옳다’ 이러한 가치관의 혼란 가운데서는 필연적으로 현대사회의 비극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위신력 또는 부처님의 위신력에 따라서 이 자리에 나와 계시는 지리산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우리 민족사의 불행과 더불어서 사망하신 영령들이 이 자리에 분명히 계시는 것입니다.

 

영령들이여! 깊이 명심하시고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영령들이나 우리 인간이나 모든 생명존재가 그 과정 중에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대로 사람이라 하는 그런 과정에 있는 것이고 또는 영령들은 영령대로 삶의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영령들이시여!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영령들이 지금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인가? 모든 존재의 본 고향은 천당이고 바로 극락極樂인 것입니다. 표현만 다른 것이지 절대로 둘이 아닌 것입니다.

 

영령들이시여! 천당이나 극락이라 하는 것은 영생의 자리입니다. 어느 누구나가 그 인생의 나그네 길에서 또는 영원히 그런 저승에서 헤매다가 필경 돌아가야 할 근본 고향이 바로 천당이고 극락인 것입니다.

 

영령들이시여! 특히 명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영령들이 그러한 여러 가지 업, 또는 공업共業으로 해서 설사 한이 있다 하더라도 한, 이것은 사실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이나 우리 인간이 그때그때 사실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보면 모두가 다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 몸이라 하는 것도 역시 고유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역시 각 원소가 합해서 잠시간 모양을 낸 것이지 실존적으로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언제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이 시간 스쳐지나가는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영령들이여! 제 명명대로 못 살다간 그런 한을 절대로 품어서는 안 됩니다. 한을 품는다는 것은 결국 무지에서 옵니다. 자기 몸뚱이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닌 것이고 잠시간 인연 따라서 할애된 하나의 허망한 존재에 불과한 것인데 그런 것에 우리가 한을 품고 집착하고 애착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산이나 물이나 공기나 모두가 따로따로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산도 내 생명과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물도 내 생명과 더불어서 둘이 아닙니다. 우주생명, 우주의 순수한 에너지가 물에 가 있으면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용왕이라 하는 것이고 산에 가 있으면 산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우주의 하나의 생명이 우주의 기가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서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우주의 기가 땅에 가 있으면 지장보살이라 하는 것이고 태양에 가 있으면 관세음보살이라 하는 것이고 별에 가 있으면 묘견보살이라 하는 것이지 따로따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사상, 무슨 주의, 무슨 이데올로기 같은 허상이 아니라 둘이 아닌 불이법문不二法聞 입니다. 진리가 절대로 둘이 아닌, 하나의 법문이란 말입니다.

 

영령들이시여! 모든 한을 없애시고 영령들이 돌아갈 고향인 천당이나 극락세계로 가셔야 영령들이 영생의 행복을 보장 받을 수가 있는 것이고 또는 영령들이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서 봉사 하는 것도 영령들이 그 저승이라 하는 방황하는 그런 미혹된 세계를 벗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정성에 사무친 추도사를 해주시고 또는 열화와 같은 기도로 영령들이 보다 빨리 저승길에서 헤매지 않고서 극락세계나 천상에 가도록 까지 기원해 주셨습니다. 대단히 축복스러운 일입니다.

 

                                                                                                         2001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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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원암 천도법어

 

 

이 세상에서 가장 부사의不思義하고 알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은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우리 인간 존재가 실존적으로 있다고 생각할 때 마음도 실재합니다. 그와 똑같이 부처님이라는 우리가 숭앙하는 신앙대상도 역시 지금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생각을 하는 분들은 ‘우리 마음도 허망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실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실존적으로 분명히 있다고 생각할 때 부처님도 분명히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과 부처님은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똑같은 생명의 실상實相입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 최상의 그런 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마음의 본체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가장 비열하고 가장 위선적인 그것도 역시 우리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잘 쓰면 부처요, 마음 잘 못쓰면 바로 지옥이요, 축생畜生이고, 또는 아수라阿修羅인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을 지금 제대로 공부하고 계십니까? 저는 법회 때마다 가끔 인용을 합니다만 그 마하트마간디 같은 성인成人이 기독교를 평할 때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천을 싫어한다. 왜 그런가 하면 그네들이 예수를 따르지 않으니까 싫어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점은 우리 불교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가 부처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 것인가? 부처님을 제대로 닮고 있는 것인가? 칠순이 될 때까지 부처님을 의지해서 한 50년 세월동안 지내온 저 같은 사람 역시 ‘부처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 것인가? 부처님을 닮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참괴무참慙愧無慙합니다. 과거를 생각해 보면 조금씩 애는 썼지만 온전히 부처님을 닮아 보지를 못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궁무진 합니다. 우선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의 구분을 여러분들이 분명히 아셔서 소승적인 차원을 떠나서 대승적인 차원으로 우리 마음을 열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소승이고 어떠한 것이 대승인가? 여러 가지 복잡한 교리체계가 있지만 우선 간단히 한 말씀으로 하면 소승은 부처님을 석가모니부처님으로 한정 짓지만 대승은 석가모니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과거나 현재, 미래 언제나 실존적으로 계시는 부처님을 말합니다. 이른바 법신法身부처님입니다. 소승의 가르침은 법신부처님이란 말이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우리 마음과 부처님은 온전히 한 몫, 한 생명입니다. 내 마음 이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시간성이나 공간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성이나 공간성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마음은 내 몸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끝도 갓도 없는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생명의 존재입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도 자비를 좀 베풀고 남한테 봉사도 좀 하고 자기 가족은 훨씬 더 사랑하고, 자기 이웃에게는 우리가 더 관심을 두고 이런 정도로 연다는 것은 참다운 것은 못됩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이른바 무아無我라, 내가 없다는 소식을 알아야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어째서 내가 없는 것인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은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으면서도 분명히 있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내 소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닮아야 합니다. 그래야 부처님의 공덕功德, 무한 공덕이 우리한테도 미치는 것이지 부처님을 닮지 않고서 부처님 공덕이 우리한테 올 수가 없습니다. 법신부처님, 석가모니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영생불멸하게 나지 않고 죽지 않는 그런 참다운 부처님, 이 부처님은 그냥 영생불멸하는 그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가운데는 만공덕장滿功德藏이라, 헤아릴 수 없는 무수무량의 공덕이 온전히 거기에 다 갖추어 있습니다. 법신부처님이 바로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도 역시 그와 같이 한없는 그런 공덕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만 믿으면 그런 마음 공덕功德을 다 실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마태복음서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가 자기 제자들한테 하는 말씀인데 “그대들이 겨자씨만한 신앙심이 있다고 하면 앞에 보이는 산을 보고 저쪽으로 옮겨가라고 하면 틀림없이 옮겨가는 도다.” 이랬단 말입니다. 불자님들 실감이 안 나시지요. 아무리 공부를 한 성자라 하더라도 산을 어떻게 움직일 수가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거짓말을 할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법신法身부처님, 불성佛性이라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우리마음이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몸뚱이라 하는 것은 우리마음의 그런 업식業識 따라서 잠시간 인연으로 합해진 것입니다. 물질이 아닌 시간성, 공간성이 없는 업식이라 하는 것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인 세포가 우리 몸이기 때문에 이것도 사실은 참말로 있다고 보기는 힘든 것입니다. 부처님을 믿는데 부처님의 실상實相을 알고 믿어야 우리에게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공덕이 온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실상이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믿고 있는 신앙의 대상을 너무나 소홀히 생각합니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100% 믿어야 하는 것인데 그 신앙대상의 공덕이 제한된다거나 또는 인격이 온전하지 못하면 참다운 신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허망虛妄무상無常한 것이 자기생명, 자기 몸뚱이를 다 바친다 하더라도 조금도 회한이 없다 할 정도로 신앙이 되어야 온전한 신앙이 될 것인데, 신앙대상에 대한 그런 공덕을 믿지 못하면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많은 영가들을 천도薦度 합니다만, 우리가 잘못하면 부처님 법을 닦는 것을 뒤로 미루고 영가천도에만 매달리는 폐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가들이 모양이 안 보인다 해서 없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마음이 모양이 없으면서 존재하듯이 영혼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죽어지면 죽어있는 생이라, 이른바 쉬운 말로 하면 저승입니다. 저승에서 헤매는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바로 살았으면 지은대로 극락極樂도 가고 또는 십선업十善業을 닦았으면 천상도 가고 또는 오계五戒를 잘 닦았으면 인간으로 다시 인도환생도 되고 하는 것입니다. 오계마저도 제대로 못 닦았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자기가 지은대로 분명히 지옥도 가는 것이고 축생畜生도 되는 것이고 또는 아귀餓鬼라 하는 그런 귀신도 되는 것입니다.

 

현상적인 눈에 보이는 그런 세계만 긍정하는 현대인들은 ‘영가를 천도薦度한다.’ 라고 하면 자칫하면 미신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이것은 미신이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시아귀施餓鬼라, ‘베풀 시施’자 아귀는 음식을 구하지만 미처 얻지 못한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귀 귀신세계인데, 구하기는 구하지만 얻지를 못하는 그런 고통이 굉장히 크지 않습니까. 이른바 구부득고求不得苦라, 그 구부득고가 우리 중생세계에도 있지만 특히 아귀세계는 더욱 더 치성한 것입니다. 먹고는 싶지만 사람처럼 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귀 목구멍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음식을 넘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애써 구하지만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자기 후손들이나 또는 불자님들이 음식을 차려놓고 바치지만 가까스로 냄새만 맡지 먹을 수가 없습니다. 냄새, 그것 역시 부처님법문이 들어가야 이른바 법식法食이라, 비로소 냄새를 맡을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귀의 음식이 됩니다.

 

우리 불자님들이시여!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전쟁에서 죽은 그런 영가들, 또는 돼지 영가, 소 영가, 닭 영가 또는 뱀들의 영가 말입니다. 그런 영가들이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연계 천변지이天變地異라, 폭풍우가 일어나고 그런 몹쓸 병이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도 영가들하고 관계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다 있겠지만 우주의 그런 부조화스런 기류 또는 모든 곤충이나 이른바 병균들도 역시 영가들하고 아주 상당히 깊은 관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영가니까 우리 주변에서 그러한 것이 더 번식이 되더라도 알 길이 없단 말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부처님 법문을 깊이 들으시고 중음계中陰界라 하는 그런 세계를 떠나셔야 합니다. 영가들도 우리 사람의 마음과 똑같이 영가들의 마음도 바로 불심佛心입니다. 또는 개나 소나 그런 영가들의 마음도 역시 불심입니다. 우주만유가 불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도리가 불교 술어로 하면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또는 법성연기法性緣起라,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란 말입니다. 불심佛心이라 하는 그 한도 끝도 없는 생명의 실체가, 모든 공덕을 갖춘 생명의 실체가 그때그때 자기의 갖추어진 인연 따라서 태양이 되고, 달이 되고, 해가 되고, 인간이 되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란 것은 깊이 들어가 보면 모두가 다 부처님뿐입니다. 부처님 아니고는 아무 것도 없는 이른바 화엄사상의 화장세계華藏世界라, 화장세계란 특별히 빛나는 어느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사는 이렇게 모순으로 차 있고 이렇게 위기일발의 무섭고 어려운 세계 역시 화장세계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의 때 묻은 눈으로 봐서 제대로 볼 수가 없을 뿐입니다.

 

우리는 복을 짓지 않고 복을 받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복만 지으면, 원인만 지으면 그때는 ‘복불가피福不可彼’라, 복은 피할 수 없이 우리에게 오고야 맙니다. 그런데 우리 행동이 그 반대의 행동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고불가피苦不可彼’라, 인생고를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것이 인생고를 초래하는 원인인 것인가? 어떠한 것이 우리의 참다운 행복과 아울러서 영생의 행복을 우리한테 보장하는 그런 원인이 될 것인가?’ 이런 것을 아는 것이 불교입니다.

 

우리불자님들 우리 눈에 마음이 안 보여도 분명히 있고 부처님이 안 보여도 부처님이 우주에 충만히 계시듯이 부처님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계가 있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나 우리 몸에나 또는 공기에나 물에나 어디에나 다 들어 계십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안목이 밝다고 생각할 때는 흙을 보나, 물을 보나, 사물을 보나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입니다. 우리 중생의 업에 가리어서 인간 정도의 업을 짓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한계 있게 본단 말입니다. 우리가 ‘밉다’고 해서 꼭 실존적으로 미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좋다’고 해서 꼭 좋은 것도 아닙니다. 영원적인 차원, 그 불성佛性의 차원에서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인데 불성차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성자만이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같은 물도 사람이 볼 때는 먹는 물 아닙니까. 거기에 사는 고기가 본 다고 할 때는 고기가 사는 집이란 말입니다. 천상사람들이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청정한 유리보배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보실 것인가? 청정한 부처님 안목, 번뇌를 떠나 버린 실상實相을 실상대로 볼 수 있는 부처님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든 존재, 물이나 산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그런 세계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시여!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극락세계만이 실제 존재하는 실존적인 세계입니다. 또는 그 세계는 이 우주가 형성되기 전에도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세계는 물질적인 한계가 있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때는 사람의 생사에도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이루어지고 또는 중생이 살고 파괴가 되고 또는 텅텅 비어버리는 공겁空劫이 되고 이런 것에도 극락세계라는 참다운 세계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낳지 않고 죽지 않는 것입니다.

 

 이른바 무생無生의 세계입니다. 낳지 않는 세계란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새삼스럽게 낳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또 그때는 없어질 필요도 없단 말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짤막한데도 그런 도리가 다 들어있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원래 진리란 것은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 하지도 않고 덜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염될 것도 없고 오염을 받을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일체의 가르침을 다 포함해 있습니다. 우리가 금생今生에 부처님 가르침을 믿었다는 것은 얼마나 전생前生에 복을 많이 지었던가 스스로 우리가 반조를 안 할 수가 없을 정도로 행복스러운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지금 겪고 있는 이 경제 한파 또는 세계적인 위기상황 또는 무서운 이데올로기 싸움 말입니다. 이러한 것도 모두가 다 우리 인간존재가 바로 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바른 가치관, 인생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꾸어서 말하면 철학의 부재, 철학의 빈곤이라, 현대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과학만능시대이고 과학으로 해서 우리의 생활이 편리하고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라 하는 것은 형체가 있는 한계, 상대적인 경계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물질의 근본 본체를 아는 것은 종교뿐입니다. 종교도 부처님 가르침 같은, 아주 궁극적으로 다른 성인들은 부처님처럼 진리당체를 궁극적으로 다 밝히지는 못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하나부터 백까지 모두를 다 훤히 밝게 가르친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그 중음계中陰界라 하는 어두운 세계를 떠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과거 생에 잘못 살아서 원인을 지어서 지금 옥고를 받고 있습니다. 욕심이 너무 많아서 욕심 때문에 아귀餓鬼라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철학도 못 배우고 과학도 못 배우고 참다운 진리를 못 배웠기 때문에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축생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또는 투쟁을 좋아하고 걸핏하면 진심瞋心을 많이 내고 그러한 생활을 한 분들은 틀림없이 아수라阿修羅 세계에서 싸움으로 자기 생명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계시든지 간에 그러한 모든 생명의 근본은 부처님입니다. 지옥도 근본은 부처님이요, 아귀도 근본은 부처님이요, 또는 축생畜生도 근본은 부처님이요, 싸움 좋아하는 아수라세계도 근본은 다 부처님입니다. 사람을 살해하고 사형선고를 받아서 곧 사형집행이 될 그런 사람들 역시 똑같이 다 본래성품은 부처님입니다. 이런 것을 본래로 다 안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사회의 부조화는 순식간에 다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관심론觀心論』에서, 『관심론』은 그 전에는 달마達磨스님께서 지으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요즈음은 신수神秀스님의 저작이라 하기도합니다. 달마스님의 말씀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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